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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요 Aug 20. 2017

개와 함께 하는 산장의 하루

캐나다 우프 일기


굳모닝, 그레핀! 아침을 시작하러 산장으로 가는 길.


블루베리 팬 케이크, 파인애플, 체리, 달걀을 아침으로 먹고 커피를 마신다. 깨끗한 타월과 침구를 가지고 여행자가 떠난 객실 2개를 정리한다. 베이글과 크림치즈, 살라미, 방울토마토, 케일 샐러드에 모짜렐라 치즈를 얹어 점심을 먹고 저녁에 디저트로 먹을 당근 케이크를 만든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그림책을 보거나 지난 여행 사진과 일기를 정리한다. 카누 여행을 떠난 게스트가 돌아올 때쯤이면 테이블을 세팅하고 저녁 식사 준비를 돕는다. 저녁 메뉴는 닭가슴살 바비큐와 병아리콩 샐러드, 그린빈, 구운 감자였다. 낮에 만든 당근 케이크 디저트를 함께 나누어 먹는다. 잔은 살면서 삼시 세끼를 이렇게 잘 챙겨 먹은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돈내고 밥을 사먹는 사람이 있기에 가능한 호강이다.



여덟 시가 넘으면 눈을 뜨고 아홉 시쯤에는 여행객이 떠난 자리에 앉아 아침을 먹고 일을 시작한다. 정해진 시간도, 독촉하는 사람도 없지만 나는 최선을 다한다. 할 일은 많지 않은데 시간은 넉넉하고 검사를 받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나를 믿고 맡겼다는 점에서 책임감이 생긴다. 게스트가 앉기만 해도 헝클어질 침대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새하얀 베개의 네 각을 뽀죡하게 세운다. 수도꼭지 얼룩부터 변기까지 꼼꼼하게 닦으며 날카로운 눈으로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도 찾아 줍는다. 객실 정리에서도 배우는 것은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의 털은 항상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발견된다. 라던가, 모두가 앉아서 소변을 본다면 세상은 좀 더 깨끗하고 평화롭지 않을까. 같은 것이다.  



뉴질랜드 과수원의 고된 노동에 익숙해진 내게 객실 두세 개 청소쯤은 우습다. 객실 정리가 끝나면 대부분의 시간을 주방에서 보낸다. 오늘은 캠핑 디저트로 쌀과자를 만들었다. 버터와 커다란 마시멜로우를 잔뜩 녹여 바삭한 쌀 뻥튀기를 섞어 굳히고, 네모로 썰어내면 쌀 과자(여기서는 ‘Rice crispy square’라고 부른다.)는 완성이다. 찐득하고 바삭한 맛이 좋았다. 반면 잔은 비교적 힘든 일을 하고 있다. 캐나다 벌목꾼(Lumberjack)의 대표 복장인 빨간 체크 셔츠를 입은 것이 복선이었을까. 그는 땔감을 만들고 있다. 잔은 엄청난 무게만으로도 존재감을 과시하는 도끼를 내려치며 차곡차곡 땔감을 쌓았다. 잔이 도끼질로 나무을 반토박 낼 때마다 나는 안방마님처럼 뿌듯했다. 내가 주인도 아닌데 참 부질없다.



산장에는 주노와 그레핀, 두 마리의 콜리와 고양이 알피가 함께 살고 있다. 산장의 개는 여행객들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특히 나는 할 말이 없거나, 원어민 대화에 쉬이 끼어들지 못할 때 지나가는 개를 붙잡아 인사를 건네고 친한 척을 한다. 대답하기 곤란하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질문을 하지는 않지만, 흙이 잔뜩 묻은 발로 가슴, 배, 다리를 문지르거나 손발을 핥는 것은 허락해야 한다. 언제나 사람을 반기는 아기 콜리는 사람에게 짜증내는 법을 모르는 것 같다. 반면 알피는 말을 걸 기회를 쉽게 주지도 않고, 가끔은 짜증도 내는 것 같다. 허나 존재만으로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를 ‘킴’이라고 부르지만, 잔은 나를 “씩아”라고 종종 부른다. 그래서 가끔씩은 내 별명이 ‘씩’이고, 한국어에서는 이름 뒤에 ‘-아’ 따위를 붙여서 ‘마이클아’처럼 부른다고 알려준다. '씩'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나는 대충 '씩씩하다'는 뜻이야 라고 얼버무린다. 사실은 촌스러운 내 이름이 싫어서 내 멋대로 지은 별명이다. 오늘도 나를 부르는 잔에게 델핀이 물었다. “너 지금 ‘sugar’라고 부른 거야?” 거참 생각만 해도 쑥스럽다. 한국어로 뱉으면 세상 쑥스러운 말들이 영어를 만나면 상쇄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끔 나는 잔이 영어만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직 영어로 짜증내는 법을 모른다.


우퍼 숙소까지 따라온 귀염둥이. 일 년 후엔 세 배가 되어있겠지.


해가 높이 뜬 어느 날, 요한나가 카누를 빌려주었다. 우리는 씩씩하게 3인용 카누를 들어 호수에 몸을 띄우고 패들을 저었다. 가만히 물 위에 떠서 풍경을 즐기는 것도, 방향을 바꾸느라 패들을 바꿔가며 우왕좌왕 헤매는 것도 모두가 즐거웠다. 소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는 호수에서 잔은 낚시를 했지만 물고기는 응답하지 않았다. 나는 낚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잔을 재촉하는 대신 슬그머니 패들을 저었다. 델핀도 나를 따라 패들을 젓는다. “지금 낚시 그만하라는 거야?” 잔은 순순히 낚시를 접어야 했다. 우리가 한 배를 탔다는 것을 실감했을 것이다.



카누를 타고 산장을 지나가는 길, 인기척을 느낀 주노가 카누를 향해 열심히 짖다가 우리를 알아보았는지 이내 잔디에 배를 깔고 누웠다. 프란시스와 요한나는 해먹에 나란히 누워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일곱 살 주노는 산장 주변의 모든 움직임에 민감하다. 호수를 유유히 떠가는 오리 가족에게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큰 소리로 짖는다. 요한나는 주노가 열심히 짖기 덕분에 곰을 비롯한 다른 야생 동물들이 산장 주변에 출몰하는 일은 드물다고 했다. 하지만 언젠가 한 번은 흑곰이 산장에 나타났다고 하니 아예 안심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 말을 들은 이후로 우거진 숲을 향해 주노가 맹렬히 짖을 때면 덜컥 겁이 난다.



게스트가 없는 어느 날은 간단히 마카로니 치즈와 케일 샐러드를 먹으며 다 같이 영화를 보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가난한 캐나다 청춘들이 즐겨 먹는다는 'Kraft dinner'는 몸엔 나쁘지만 입이 즐거운 맛이었다. 단단한 줄기를 제거하고 부드러운 잎만 뜯어낸 케일 샐러드는 몸에 좋으니 양껏 먹어두기로 한다. 식사를 할 때면 주노가 보내는 은근한 눈빛이 또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 개와 함께 하는 산장의 하루는 무엇보다 웃을 일이 많다. 오늘은 저녁 식사 때는 주노가 유독 내 품을 파고 들고, 팔을 물며 크게 짖기도 했다. 요한나는 주노가 금방 세탁한 옷을 입은 사람에게 가끔 그럴 때가 있다며 최근에 세탁한 옷을 입었냐고 물었다. 방금 속옷을 갈아입고 오긴 했는데, 혹시 알아차린걸까. 이렇게 개와 함께하는 산장의 하루가 끝날 쯤, 고양이의 밤이 시작된다.


너네 매끼마다 소고기 먹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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