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워킹홀리데이
잔이 뉴욕에서 토론토에 도착하는 날, 구글이 알려 준 대로 버스가 멈출 유니온 역까지 마중을 나갔다. 며칠 제대로 잠을 못 자서 몸이 엉망이었지만 오랜만에 내가 좋아하는 원피스를 꺼내 입고, 좋아하는 향수도 뿌렸다. 일 년 반 만에 원피스 입은 나를 보여주는 셈이다. 길을 나서기 전 토큰을 사서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방법을 몇 번이나 검색했지만 만족스러운 답은 없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지하철에 오르기 위해 게이트 입구를 서성이며 주변 사람들을 살피고 나서야 무사히 탑승에 성공했다. 그리고 유니온 역에 내려 바깥세상으로 게이트 문을 밀었을 때, 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강한 거부에 부딪혔다. 이번엔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다.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입구 전용 게이트에서 물러났지만 부끄러움에 몸이 후끈거렸다.
한 시간이 넘게 기다려 어렵게 만난 잔은 나를 보고 얼굴을 찡그리고 내 행색을 나무랐다. 처음 보는 원피스도, 뜨거운 볕 아래 연락이 안 되는 남친을 찾느라 넋이 나간 내 꼴도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열 시간이 넘는 버스 여행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나는 잔의 손 대신 그의 작은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에 올랐다. 돌아가는 길은 처음보다 훨씬 자연스러웠지만 서운한 마음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토론토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숙소가 있는 노스욕의 매력은 한식을 쉽게 먹을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짐을 벗어두고 제일 먼저 30년 전통의 한식당을 찾아 뚝배기 불고기와 김치찌개를 먹었다. 다행히 잔의 지친 몸도 섭섭한 내 마음도 적당히 녹여내는 맛이었다.
며칠 후, 다시 이 식당을 찾는 길에 잔은 내게 무얼 먹을지 물었다. “불뚝, 나는 불뚝을 먹을 거야.” 내친김에 불뚝, 불뚝 노래를 부르는 나를 잔은 ‘뚝불’이라고 정정했다. 어쩐지 어감이 이상했다 싶어 한참을 웃었다. 바보짓을 하고 웃는 것이 오랜만이라 기분이 좋았다. 여러모로 한국 식당은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된다. 반전이라면 식당 메뉴판에 쓰인 ‘불고기 뚝배기 $13.00’과 “불뚝 하나요!”라고 자연스럽게 주문을 받는 이모였다.
토론토 생활은 잠시 접어 두고 버스로 여섯 시간 넘게 떨어진 테마가미(Temagami)라는 곳에서 잔과 우핑을 하기로 했다. 애인과 함께 우핑이라니. 뉴질랜드 과수원 일꾼 시절에 상상만 했던 커플 우핑이었다.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자정이 넘어 출발하는 버스를 예약했다. 버스 티켓만 해도 두 명이서 230달러, 20만 원 정도가 들었으니 방값이라도 아끼고 싶었다. 버스에 오르기 전 한적한 버스 터미널 화장실에 들러 이를 닦을 준비를 마치니 뉴질랜드 떠돌이 캠핑 시절이 떠올랐다. 그래도 대도시 화장실이라 쑥스러워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 뒤이어 오신 아주머니께서 거의 샤워를 하시는 바람에 마음 놓고 세수를 했다. 나는 특히 외국의 화장실에서 장애인에 대한 배려를 느끼는데, 오늘은 휠체어에 앉은 사람의 시선에 맞추어 살짝 앞으로 기울어진 거울과 낮은 세면대를 보고 감탄했다. 이런 점들이 '살기 좋은 나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든다.
자정이 넘어서야 앉은 버스 좌석 옆에는 멀미를 대비한 봉투는 있었지만 안전벨트가 없었다. 토가 나오도록 험한 길을 최소한의 안전 장비 없이 달릴까 봐 걱정했지만 친절한 기사님은 우리를 부드럽게 목적지에 내려 주셨다. 빽빽한 나무와 잔잔한 호수 사이로 오래 이어지는 고속도로 중간, 작고 허름한 주유소가 시골 버스 정류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새벽 일찍 마중을 나온 호스트 Francis의 차를 타고 숙소로 가는 길,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한 질문과 답이 이어졌다. 프란시스는 곰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며 야생 동물 이야기에 목소리가 높아지는 나를 안심을 시켰다. 나중에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
캐나다 첫 우핑 장소는 카누를 비롯한 각종 캠핑 장비를 대여하고, 여행을 안내하며, 숙식을 제공하는 산장이다. 캐나다 우프 웹사이트를 샅샅이 뒤져 찾은 이곳은 카누가 늘어진 매력 있는 산장 사진과 호수와 맞닿은 위치에 반해 가장 먼저 우핑 신청을 한 곳이라 기대가 컸다. 그러나 이곳, ‘Smooth Water’는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멋진 곳이었다. 첫날 나는 간단한 객실 청소와 게스트 식사 준비를 도왔는데, 일은 힘들지 않고 낯선 요리는 흥미로웠다. 적당히 일손을 돕고 나서 잔은 호수에 나가 낚시를 하고, 나는 개와 고양이를 쫓아다녔다. 덕분에 우리는 대도시에서 느끼고 서로에게 뱉었던 짜증이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