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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May 18. 2021

사탄도 울고 갈 인류 최악의 빌런

콩고 자유국을 생지옥으로 만든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

레오폴드 2세


  지도자들의 민간인 학살은 역사 단골 소재다. 21세기 들어서 이런 일들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버마에선 군부 정권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의 수는 이전 시대에 비해 더욱 크다. 산업혁명 이후 인구의 폭발적인 성장에 기인한 부분도 있지만, 이념 간 대립이 20세기에 첨예해진 것도 원인 중 하나다. 당장 우리에게 유명한 학살 사건들 모두 20세기에 일어났다.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스탈린의 대숙청, 마오쩌둥의 문화 대혁명,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모두 20세기다.


  비록 19세기에 벌어진 일이지만, 우리에게 조금 익숙하지 않은 대학살을 한번 다뤄보려고 한다. 위의 예시들이야 너무 유명해서 웬만한 사람들은 역사시간에 한 번쯤 들어 익히 알고 있다. 저 사건들을 옹호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그래도 권력 유지 혹은 이념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 자행된 학살이다. 반면에 이 사건은 철저히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벌였다. 순전히 자신의 재산을 불리기 위한 학살이라는 점에서 더욱 괘씸하다. 인간이라고 칭하기도 아까울 정도로 인류의 오점으로 남아 있는 사람. 콩고 민주 공화국 사람에게 있어 입에 담기도 싫은 최악의 군주. 바로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다.  



    Warning!!  앞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는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끔찍합니다.  


  영국 무역회사 엘더 데스터의 직원 에드먼드 딘 모렐은 콩고 물자 파트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19세기 대부분의 영국인들이 그랬듯이 인종차별주의자 중 한 명이었다. 모렐은 콩고에서 오간 물자를 확인하던 도중 장부가 맞지 않는 것을 보고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다. 누군가 콩고에서의 이익을 가로채고 있다고 느낀 그는 쉽게 범인을 찾을 수 있었는데,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가 범인이었다. 모렐은 레오폴드 2세가 공문서를 위조해 콩고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을 개인 계좌에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모렐은 조사를 이어갔고 그가 콩고 원주민들을 상대로 끔찍한 행위를 저지른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그가 알아낸 콩고의 진실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모렐은 레오폴드 2세의 행동을 보고 충격을 받아 퇴사 후 기자로 전향해 그의 만행을 폭로하는데 앞장선다.

  그의 폭로로 언론에서도 레오폴드 2세의 행동에 주목했다. 결국 영국 영사관 로저 캐즈먼트가 조사에 나선다. 1905년 그는 콩고에 가 모렐이 봤던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다. 캐즈먼트는 레오폴드 2세가 콩고인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학살 장면을 사진으로 남긴 후 영국 외무부에 작성해 보낸다. 캐즈먼트 보고서를 받은 영국은 정식으로 레오폴드 2세를 비난했다. 레오폴드 2세는 영국의 비난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 영국의 발표와 언론의 폭로는 모두 과장된 것이고, 자신의 콩고의 발전만 생각하고 있다고. 그러고는 뒤에서 언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로비를 진행했는데, 그의 이중적인 행동을 알고 있던 레오폴드 2세의 변호사가 미국 허스트에 로비 행위마저 폭로했다.


  도대체 모렐과 캐즈먼트가 본 관경은 무엇이었을까?



  “하루당 고무 채취량을 충당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로, 벨기에인 감독관은 그 남자(은살라)의 딸의 손과 발을 잘라버렸다. 딸아이의 이름은 보알리였고, 그녀는 5살이었다. 그리고선 그 아이를 죽였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그의 아내도 죽였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충분히 잔인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더 확실히 일을 끝마치기 위해... 아이와 엄마의 시신을 먹었다. 그리고서는 은살라에게 토큰을 던져줬는데, 그가 세상 모든 것보다 더욱 사랑했던 그의 딸이 차고 있던, 한때는 살아있었던 그녀의 몸뚱이에서 떼어낸 것이었다. 그의 삶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노예 생활로 인해 반쯤은 이미 파괴되었겠으나, 이 일이 그의 모든 것을 부수어 버렸다. 이 모든 것이 한 남자가 벌인 일이다. 수천 마일이 넘는 곳에 사는 한 남자, 더욱 거머쥘 부 조차도 없는 남자가, 본인의 영달을 위해 이 땅이 자기 것이라 선포하고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자신의 탐욕만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선포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레오폴드는 이 아프리카의 사람들, 어린이들이 같은 인간이며 형제자매라는, 유럽 왕족을 빚어 만든 하느님이 이 아프리카인들도 같은 손으로 빚어 만들었다는,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Judy Pollard Smith(2014), 《Don’t Call Me Lady: The Journey of Lady Alice Seeley Harris》中 발췌 번역.



  이 전기는 영국 선교사 앨리스 실리 해리스가 작성했다. 그녀는 레오폴드 2세의 악행을 소개하는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이 이야기는 은살라라는 남자가 레오폴드 2세의 악행으로 어떻게 가정이 파괴되었는지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녀는 콩고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 콩고 자유국에서 벌어지는 참사를 낱낱이 고발했다. 그녀의 폭로에 뒤이어 당대 가장 유명했던 소설가 마크 트웨인과 아서 코난 도일 역시 레오폴드 2세를 비난했다.



콩고로 접근하는 레오폴드 2세



  오랜 시간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은 벨기에는 1831년이 되어서야 레오폴드 1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독립한다. 레오폴드 1세는 외교술을 통해 신생 국가 벨기에 왕국을 안정시켰다. 당장 힘이 없었기에 영국,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국력을 서서히 키워나갔다.

  1865년 12월 10일 레오폴드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레오폴드 2세가 즉위한다. 그는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은 벨기에를 더욱 강하게 만들고 싶었다. 다른 유럽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 벨기에도 식민지를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직위 후 동생 필리프 왕자에게 “국가는 반드시 강해야 하고, 식민지 확장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편지를 보냈으며, 왕자 시절 상원의원 활동을 할 때에도 지속적으로 식민지 확장을 주장했다.


  반면 벨기에 국회는 식민지 확장에 소극적이었는데, 식민지 사업이 좋은 건 인정하는데 이미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열강이 전 세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처음엔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구매하려고 했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다. 다른 방법으로 식민지를 확장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유일하게 아프리카에서 비어있던 나라가 눈에 보였는데 바로 콩고였다. 레오폴드 2세는 영국 출신의 탐험가 헨리 모건 스탠리를 지원해 콩고 연구 위원회를 설립하여 콩고 지배를 위한 사전 작업에 들어간다. 그리고 1879년 기존에 있던 국제 아프리카 협회를 '국제콩고협회'로 바꾸었고, 콩고를 통치하는 기구로 바꾼다.

  사전작업을 모두 마친 레오폴드 2세는 콩고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권을 열강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아프리카 대륙을 양분하고 있었기에 언제든 콩고의 지배권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힘이 강했던 독일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부탁해 간신히 베를린 회담에서 콩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게 된다.


  참고로 이 베를린 회담은 아프리카의 운명을 유럽 열강들이 제멋대로 결정한 끔찍한 회담이었다. 겉으로는 노예제를 폐지한다고 선언했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현재 아프리카의 국경을 보면 마치 자를 대고 그린 듯이 직선으로 그어진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이는 베를린 회담에서 유럽 열강들이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맘대로 선을 그어 버린 경우다. 베를린 회담 이후 벨기에의 지배권을 인정받은 레오폴드 2세는 콩고 자유국을 만들어 콩고에 대한 실효 지배를 시작했다.

  그런데 콩고 자유국은 다른 식민지와 달랐다. 예를 들어 식민지 국가를 지배하는 경우 자치권을 보장하거나 동인도 회사 혹은 총독부를 통해 위임 통치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콩고는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사유지였다. 국가 소유가 아닌 국왕의 사유지였기 때문에, 콩고에서 재배하는 천연고무와 상아 같은 상품은 전부 레오폴드 2세의 지갑 속으로 들어갔다. 정부 소유가 아니었기 때문에 벨기에 의회는 식민지에 대한 영향력 행사가 불가능했다. 레오폴드 2세 개인의 명령에 따라 원주민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구조였다.


  그리고 이 것이 콩고에 비극을 가져왔다.   



콩고 수탈의 시작



  대부분의 국가가 그러하듯 처음에는 원주민들에게 친절하게 다가갔다. 레오폴드 2세는 사람을 시켜 콩고에 있는 원주민 추장들에게 술과 옷감을 선물했다. 동시에 각 원주민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전달했는데, 알고 보니 이 것은 해당 원주민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는 위임장이었다. 글을 모르는 원주민들은 벨기에 군인들의 호의에 속아 위임장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위임장에는 원주민들의 영토 소유권, 노동력, 자원 소유 이관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레오폴드 2세가 처음에 관심을 가진 품목은 상아였다. 그는 콩고의 상아 무역을 독점하고 원주민들을 이용해 코끼리를 사냥하게 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상아를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이 크지 않았다. 그는 상아를 포기하고 다른 수입원을 찾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고무였다. 19세기 말 고무 타이어의 발명으로 자동차 산업이 크게 발달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고무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천운이 레오폴드 2세에게 왔는지 콩고는 영토의 절반 가량이 고무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고무 수입이 괜찮다는 사실을 알아챈 레오폴드 2세는 이제 원주민들을 모두 투입해 고무 생산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당시 기술로 고무 채집을 하는 것은 상당히 고된 작업이다. 고무나무의 경우 대부분 열대 우림의 습지에서 자란다. 수시로 열대성 폭우가 내렸는데, 비가 오는데도 나무를 타고 직접 올라가 고무를 수집해야 한다. 보호 장비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고, 나무가 미끄러워 수시로 위에서 떨어져 다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너무 고된 작업이라 원주민들은 일을 하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레오폴드 2세는 원주민들이 고무 채집을 강제로 시키게 하기 위해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힘든 행동을 지시한다.




원주민 협박과 신체 절단  



  우선 마을에 있는 모든 여자들을 감금한다. 그리고 아내와 딸을 보고 싶으면은 그가 요구하는 양의 고무를 채집하라고 시켰다. 만약 이를 거부하면 곧바로 가족을 강간하거나 죽였다. 만약 단체로 노동을 거부하는 마을이 있다면 총칼을 앞세워 몰살시켰다. 그리고 원주민이 정해진 고무를 가져왔다고 해서 바로 풀어준 것도 아니고, 추가로 여자 한 명당 염소 2마리를 줘야 그제야 가족들을 풀어줬다.  

  가장 악명 높았던 것은 콩고인들의 손목을 자른 행위였다. 레오폴드 2세는 처음에 원주민들이 고무 할당량을 채워오지 못하면 곧바로 죽였다. 그러다 보니 처형하는데 소모되는 총알이 아깝다고 느끼게 되었고 원주민의 손목을 자르는 방법으로 바꿨다. 그는 원주민들에게 할댱량을 채우지 못할 시 처음에는 손목을 잘랐고, 두 번째 채우지 못한다면 팔 전체를 잘랐으며, 세 번째 에는 아예 목을 잘랐다. 벨기에 용병들은 자기들이 열심히 일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원주민들의 손과 팔을 많이 담은 바구니를 가지고 서로 자랑하기도 했다. 독일에서 발행된 신문에 따르면 하루에 원주민의 손 1,308개를 받은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같은 인간으로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운 수준이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이 죽게 되어도 할당량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살아남은 가족이나 이웃 주민들에게 고스란히 그 몫이 돌아갔다. 결국 원주민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서로 고무를 빼앗는 지경에 이르렀다. 말 그대로 벨기에는 생지옥이었다. 콩고 자유국은 출범할 당시 총인구 수가 3천만이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9백만 명으로 감소했다. 무려 인구가 70%나 감소했다.

  역사저술가 아담 호크실드가 쓴 '레오폴드 왕의 유령'이라는 책에서는 콩고 수탈로 인해 그가 벌어들인 개인적인 수익이 약 2억 2000만 프랑으로 현재 가치로 약 1조 1000억 원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수익으로 그는 부인 캐롤라인에게 큰 저택과 드레스를 선물했고, 브뤼셀에 있는 개선문을 만드는 등 다양한 건축 활동을 위해 쓰였다.


  재밌는 사실 중 하나가 그렇게 콩고 사람들은 죽였으면서 자신의 죽음에는 엄청 두려워하는 쫄보였다. 특히 여자관계가 좋지 못했다. 평소 불륜을 저질러 딸들에게 외면당하고 자국의 성직자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 가톨릭 신자의 비율이 과반수 이상이었던 벨기에에서 성직자들의 외면은 상당히 뼈아팠다. 1909년 12월 초 그는 창자가 막히는 심각한 병에 시달렸고, 어떤 치료법을 사용해도 낫지 않았다. 이대로 죽기 너무 싫었는지 정부 블란차 들라크루아와 결혼을 급하게 하고, 그녀에게 남작 부인의 작위를 준다. 그래도 마지막 눈치는 있어 자신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 달라고 후손들에게 부탁했다. 불륜 행각으로 국민의 지지도가 바닥을 쳤기 때문에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간 폭동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치가 없던 그의 조카 알베르와 정부 들라크루아는 국왕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고, 예상대로 국민들의 폭동이 일어나 그의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길마다 시민들의 야유를 받아야만 했다.



후대의 평가



 “늑대 배설물보다 못한 놈 - 어니스트 시튼”


  영국 출신의 동물학자이자 화가인 시튼은 레오폴드 2세를 이렇게 표현했다. 어린 시절부터 캐나다 원주민들과 소통한 그는 이전부터 백인들의 학살에 반대하고, 열강의 원주민 차별정책과 자연파괴에 앞장서서 비난했다. 자연을 소중히 생각했기에 그는 레오폴드 2세의 다이아몬드와 자원 수집 역시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다.



“그 자식이 인간이라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다! -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


  덴마크와 아이슬란드의 국왕 크리스티안 10세 역시 그를 비판했다. 그는 레오폴드 2세의 악행을 보고 영향을 받아 노예제를 혐오하게 되었다. 그러나 덴마크 왕국이 그린란드 원주민을 대상으로 벌인 행위를 생각해보면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칭하는 건 너무 허세가 강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벨기에 내에서 레오폴드 2세의 평가가 좋았다. 이른바 '위대한 잊기'라는 역사 왜곡을 통해 벨기에 교과서에서 그의 악행을 지워지고 좋은 행동들만 남아 사람들 사이에서 미화되었다. 아직까지도 역사에 관심 없는 대다수의 벨기에 인들은 그를 그냥 벨기에에 있던 왕들 중 한 명 혹은 국가를 부강하게 만든 국왕 정도로 알고 있다. 그가 콩고에서 벌인 학살에 대해 소개한 책은 거의 없다. 레오폴드 2세는 임기 중에 콩고에서 학살을 하는 와중에도 자국민들에게는 선량한 이미지로 포장했다. 마치 콩고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프로파간다를 사용했다.

  그러다 갑자기 불과 1년 전인 2020년 6월 30일, 벨기에의 필리프 국왕은 과거 콩고 민주공화국을 식민 통치할 때 저지른 폭력에 대해 유감을 표현했다. 이는 벨기에에서 국가적으로 처음 보여준 공식적인 사과였다. 그리고 7월 1일 헨트 시에 있던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이 철거되었다. 서서히 벨기에인들 사이에서도 그의 악행에 대한 반성을 하자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많은 시민 운동가들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레오폴드 2세의 악행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했고, 일부 사람들은 자국 내에서 그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이미 콩고 사람들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 지금이라도 어서 정신 차리고 벨기에 정부 측에서의 콩고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와 대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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