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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May 25. 2021

우리 역사의 가짜 뉴스들

대한민국 역사에서 일어난 주요 가짜 뉴스 사건

1945.12.27 동아일보 1면 기사 (출처 : 위키백과)


  좋은 글을 쓰는 법은 딱 하나. 사람들의 흥미를 이끌어야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 늘 어떻게 해야 독자들이 내 글을 한 줄이라도 더 읽을지 항상 고민한다. 하지만 한 가지 금기시되는 행위가 있는데, 바로 거짓 정보를 쓰는 것이다.

  반대로 황색 언론에서는 오히려 거짓 정보를 적극 활용한다. 이들은 사람들의 흥미를 이끌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조작한다. 특히나 SNS의 발달로 최근 가짜 뉴스는 큰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SNS는 파급 속도가 기존 매체들보다 월등히 빨라 사람들을 속이는 데 효과적이다.


  하지만 가짜 뉴스를 통한 여론 조작이 21세기에 시작된 방식은 아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 동안 가짜 뉴스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해왔다. 대중들의 지지 혹은 권력 유지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가짜 뉴스를 적극 활용했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3가지 가짜 뉴스를 살펴보도록 하자.



1945년 신탁통치 오보 사건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감격적인 광복을 맞이한다. 36년간 일제강점기라는 긴 암흑 속에서 살아온 조선인들은 이제 꽃길만 가득할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며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이 생각은 불과 몇 개월 만에 사라진다.

   광복 직후 소련과 미국은 곧바로 한반도에 온다. 지도자가 명확하지 않았던 한반도의 사람들은 각자의 이념을 앞세우며 서로 헐뜯고 싸웠다. 이는 어느 정도 예견된 문제였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에서도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간의 파벌이 생긴 지 오래였다.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도 서로에 견제가 심했다. 그 세력이 그대로 한반도에 들어왔으니 이는 필연적인 갈등이었다. 갈등이 지속되자 소련, 미국, 영국이 한반도 정부 수립 문제를 놓고 회의를 하는 모스크바 3상 회의를 실시한다.  

  조선인들은 모스크바 3상 회의에 결과에 집중했다. 한반도에 소련 군정과 미 군정이 동시에 들어온 상황에서 이들의 회의는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 1면에 한 기사가 등장한다.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도선 이북 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즉, 소련 측이 신탁 통치를 주장하고 38도 이북 지역은 자신들이 주둔할 것이고, 반면 미군정의 경우 한반도 단독의 독립 정부를 세우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을 본 한반도 국민들은 분노했다. 조선인들은 소련이 주장하는 신탁통치를 식민통치와 비슷하다고 인식해 받아들일 수 없었다. 36년이라는 긴 식민통치를 겪은 한반도 인들은 또다시 다른 민족에게 다시 주권을 내주는 역사를 납득하기 힘들었다. 이 기사를 통해 한반도 내의 반 소련 정서가 급속도로 퍼지게 된다.


  문제는 이 기사가 오보였다. 기사가 등장한 12월 27일에 아직 모스크바 3상 회의가 끝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회의는 끝났지만 아직 발표 전이었다. 이후 회의에서 발표된 안건은 총 3개였는데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코리아를 독립국가로 건설하고, 일제에 의해 발생한 참담한 결과를 제거하고 코리아의 산업과 운수, 농업 발전을 위한 조치를 취한다.  

    코리아 임시정부의 구성을 위해 적절한 방책을 만들고 이는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진행한다.  

    조선 국가의 독립 수립을 만들고 협력하기 위해 공동위원회가 지원할 것이며 미국, 영국, 소련, 중국 정부에 의해 5년간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  



  그리고 기사의 내용과 달리 실제로 신탁 통치안을 제시한 것은 미국이었고, 소련의 경우 프롤레타리아 계급혁명을 통한 사회주의적 통치를 주장했다. 결국 양쪽 진영 모두 자신들의 이념과 이익을 위해 한반도를 통치하려 했다.


  문제는 이 오보로 인해 한반도 내의 여론이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좌우대립에서 신탁과 반탁 진영의 싸움으로 양상이 바뀌게 된다. 좌익세력은 소련의 신탁 통치에 찬성 입장을 보였다. 반대로 우익 세력은 신탁 통치에 결사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반면 중도 세력은 신중한 입장으로 고수했지만, 좌우측 대립이 극렬해짐에 따라 점차 세력이 줄어들어 한반도의 양극화가 더욱 앞당겨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한반도의 통일 국가가 생길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김규식, 여운형 등 통일 정부를 주장하는 세력이 쇠퇴하게 되었고, 좌우측이 점점 힘을 받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할 때까지 혼란을 거듭한다. 우익의 대표 주자였던 이승만은 이 일을 계기로 신탁 통치를 주장하는 좌익세력들에게 소련에 나라를 팔아먹는 이미지를 씌워 자신이 권력을 잡기에 용이해졌다.

  동아일보의 결정적인 오보는 누군가의 공작이었는지 혹은 동아일보의 단순 실수였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국가적으로 대대적인 혼란을 가져왔으며 이후 대한민국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지만 그 누구 한 명도 책임을 진 사람이 없고,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정기사가 나오지 않고 있다.



우창비왕설이 기록된 '고려사'



1389년 우창비왕설  



  고려 32대 국왕 우왕. 그가 재임하고 있던 1388년, 중국의 새로운 주인이 된 명나라는 고려의 철령위 이북 지역을 요구한다. 이 땅은 원나라가 소유하고 있다가 공민왕의 반원 정책으로 다시 고려의 손에 들어간 땅이다.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우왕은 명의 요구를 거절하고 요동 정벌을 추진한다. 우왕은 문하시중 최영을 총사령관으로 수문하시중 이성계, 판문하부사 조민수에게 각각 우군, 좌군도통사를 맡겨 요동을 공격을 지시한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번 요동정벌이 무리라고 판단, 우왕에게 4가지 이유를 통해 요동 정벌 지시에 대한 재고를 요구한다.  



<이성계의 4 불가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해서는 안된다.  

    요동 정벌을 한 사이 왜구들의 공격에 대비할 수 없다.  

    장마철이라 활에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군대가 전염병에 걸리기 쉽다.  



  하지만 우왕은 단호했다. 이성계는 하는 수 없이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으로 향했다. 원정군은 1398년 음력 5월 7일 압록강변 위화도에 도착했다. 일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이성계의 예측은 정확했다. 떨어져 가는 식량과 계속되는 장마 그리고 병사들 사이에 퍼진 전염병으로 군대의 사기는 떨어져 갔다. 이성계의 측근들은 더 이상의 원정은 힘들다며 그에게 군사를 돌릴 것을 호소했다. 결국 5월 22일 이성계는 결심을 하고 군대를 돌려 우왕과 최영이 있는 개경으로 향한다. 이것이 바로 위화도 회군이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최영을 죽이고, 우왕을 폐위시켰다. 그리고 그의 아들 창왕을 다음 왕으로 앉힌다. 창왕은 이성계 일파 중에서도 고려를 유지하기를 원했던 조민수, 이색, 정몽주 등의 주장으로 왕으로 옹립되었다. 정도전과 같은 급진파들을 먼 친척인 공양왕의 즉위를 주장했다.

  이미 대중의 많은 지지를 받고, 조정 내에 자신의 세력을 구축한 이성계였지만 모두가 그를 따른 것은 아니었다. 조정 내에는 여전히 고려 왕실에 충성심을 보내는 권문세족과 사대부들이 존재했다. 새로운 왕조를 세우기 위해서 대중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성계 일파는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내는데, 그것이 바로 우창비왕설이다.


  우창비왕설이란 말 그대로 우왕과 창왕이 왕씨 가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로 두 왕은 이성계에 의해 폐위를 당해 묘호를 받지 못하고 본인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둘의 이름이 왕우와 왕창이라서 그대로 우왕과 창왕이 되었다. 우왕은 본래 공민왕의 아들인데, 그가 사실 공민왕이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소문이 어떻게 퍼질 수 있었던 것일까?


  다시 공민왕이 한창 개혁을 하고 있던 과거로 돌아가 보자. 고려의 개혁을 위해 힘썼던 공민왕은 신돈과 함께 다양한 개혁정치를 펼쳤다. 둘은 완벽한 파트너였다. 신돈은 조정의 기득권인 권문세족을 몰아내기 위해 유유교 학문을 배운 신진사대부를 조정에 대거 등용했다. 그리고 백성들의 삶을 해결하기 위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했다.

  하지만 한 명의 권력이 비대해지면 누군가의 반발을 자연스레 일으킨다. 몇몇 사대부들이 신돈의 권력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신돈도 점차 거만해지며 공민왕의 요구를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개혁 파트너가 되어야 할 신돈과 공민왕 사이에 균열이 발생한다. 결국 공민왕은 신돈을 처형하기로 하며 그의 개혁 정치는 일단락된다.

  그렇게 신돈의 개혁 정치가 한창이던 당시 공민왕은 부인인 노국대장공주의 불임으로 후사가 없었다. 공민왕은 평소 노국대장공주를 너무나도 사랑해 다른 여자를 쳐다보지 않았다. 노국대장공주가 후사를 낳지 못하고 죽자 신돈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시녀 중 노국대장공주와 가장 닮은 반야를 공민왕의 후궁으로 들인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드디어 우왕이 탄생한다. 그 이후 공민왕은 시해당했고 자연스레 우왕이 다음 왕위를 물려받는다.


  문제는 반야의 출신이었다. 신돈의 시녀 출신이라는 점이 결국 우왕과 창왕의 발목을 잡게 된다. 이성계 일파는 이를 이용해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의 사건이라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매우 어려우나, 이성계 일파에서 의도적으로 저 말들을 퍼트린 것만큼은 사실이다. 고려사에도 이 내용이 적혀있는데, 고려사가 이성계의 명에 의해 쓰인 책이다.

  결국 우창비왕설을 통해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옹립했는데, '폐가입진(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움)'을 내세우며 쉽게 진행할 수 있었다. 명분 없이 왕을 폐위시키면 반대 측의 반발을 사기 매우 쉬워지는데, 우창비왕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적절한 방안이었다. 공양왕이 왕에 오른 시점부터 고려 조정은 사실상 이성계와 정도전의 뜻대로 움직였다.  


  무려 700여 년 전의 일이기에 우창비왕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밝혀낼 수 없다. 하지만, 이성계와 정도전은 이를 이용해 조선을 세우기 유리한 방향으로 여론을 몰아갔다. 명분 없는 역성혁명은 주변의 반발을 사기 쉬웠다. 물론, 우창비왕설 하나만으로 조선의 정통성이 세워진 것은 절대 아니지만, 조선 왕조가 세워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좋게 표현하자면 새 왕조를 위해 여론을 조성한 둘의 지혜가 돋보였고, 안 좋게 말하면 왕조 수립을 위해 멀쩡한 아빠도 바꾸게 되는 비열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6세기 말 서동요와 선화공주  



  권력 장악을 위해 가짜뉴스를 활용해 여론을 몰아가는 것은 비단 오늘날의 문제 만은 아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대립이 한창이던 6세기에도 가짜뉴스는 활용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가 서동설화로 익히 알고 있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다.

  설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백제에 있던 가난한 청년 서동은 평소 집에서 마를 캐며 살고 있었다. 신라로 넘어간 그는 마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밤마다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자신과 사랑을 나눈다는 내용이다. 이 노래를 신라 전역에 퍼져 궁궐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소식을 듣고 화가 난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궁궐에서 내쫓았고, 서동의 계획대로 둘은 결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때, 서동이 아이들에게 부르게 한 서동요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훗날 유명세를 탔고, 역사시간에 소개되며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원문을 해석하면 서동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시집을 가 서동이를 밤 몰래 나와 안고 간다.


  둘의 결혼 이후 스토리가 명확히 전해지지 않지만, 가난한 서동은 갑자기 어느 날 백제의 무왕이 되었고 둘은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내용으로 끝난다.

 

  천년도 넘은 고대 설화를 가지고 진위여부를 파악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포인트는 이 설화를 통해 6세기 당시의 시대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이다. 이 설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과거 6세기에도 가짜뉴스를 활용한 여론 몰이와 비슷한 행위가 이뤄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6세기 말부터 7세기 초까지는 삼국 간의 대립이 더욱 첨예하게 일어나고 있을 시기다. 실제로 무왕과 그의 아들 의자왕은 신라를 정복하기 위해 수많은 전쟁을 벌였다. 특히 의자왕은 서라벌로 가는 거점 지역인 대야성을 격파해 당시 신라 왕이자 (설화가 맞다는 전제하에) 선화공주의 큰 언니인 선덕여왕에게 엄청난 굴욕을 선사한다. 이 대야성 전투 패배는 김춘추가 본격적으로 당과 손을 잡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다.


  서동요는 우리가 가짜 뉴스를 퍼트리는 이유와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짜 뉴스의 소재는 우선 자극적이어야 한다. 자극적이지 못한 소재는 관심을 받지 못한다. 서동요에 내용은 성적 가십이다. 오늘날에도 디스패치의 스캔들 폭로가 사람들에게 큰 흥미를 내는 이유는 연애, 섹슈얼 테마이기 때문이다. 서동은 성적 가십의 바이럴 효과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동이 아이들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사실 역시 주목해보아야 한다. 오늘날에도 신문물과 가십에 많이 주목하는 세대는 10대다. 10대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자신이 들은 가십을 주위 사람들에게 퍼 나른다. 서동은 신라에 어린아이들에게 노래를 알려주어 주위에 노래를 퍼트렸고, 아이들은 아무 생각 없이 이 노래를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만약 어른들이었다면, 궁궐에 관한 소문을 함부로 발설했다 화를 입을게 두려워 조심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짜 뉴스의 완성은 누군가의 이득으로 이어져야 한다. 결론적으로 서동은 선화공주와 결혼에 성공한다. 서동요를 통해서 서동은 신라 공주와 결혼하고 인생역전에 성공한다. 선화공주는 궁궐을 빠져나올 때 가져온 금이 있어 둘은 부유한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6세기 설화에서 우린 가짜 뉴스의 속성을 모두 살펴볼 수 있다.


  가짜 뉴스는 말 그래도 속임수다. 누군가는 가짜 뉴스를 통해 이득을 보지만 반대로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하기도 한다. 가짜 뉴스는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면서 피할 수 없는 문제다. 가장 큰 잘못은 제대로 팩트체크를 하지 않고 퍼 나르는 언론사에 있다. 하지만, 이게 잘못된 것을 인식하더라도 계속 가짜 뉴스는 세상에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늘 우린 언론을 바라볼 때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언론사의 정보가 항상 옳을 것이라는 건 굉장히 잘못된 전제다. 우리가 비판적인 견해로 언론을 바라보아야 언론 역시 가짜 뉴스가 효용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줄이게 될 것이다. 우린 이렇게 역사를 통해 문제를 인식하고 더 나은 오늘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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