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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Jun 01. 2021

한일관계 뺨치는 앙숙, 터키와 그리스

만지케르트 전투부터 동지중해 가스 시추까지 이어진 양국의 대립 역사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 요안니스 메탁사스



기원전 12세기, 트로이 전쟁  



트로이 전쟁은 일리아스 서사시를 기반으로 작성된 신화로 실제 역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트로이 왕국과 현재의 터키는 전혀 다른 민족으로 지역적 연관성만 존재합니다.



  스파르타의 공주 헬레네는 그리스에서 가장 예쁜 미녀였다. 헬레네의 결혼 적령기가 다가오자 많은 남자들은 그녀에게 줄을 섰다. 그의 아버지 튄데라오스는 많은 가문의 남자들이 딸을 두고 싸울 것을 두려워해 당대 최고의 지략가 오디세우스에게 해결책을 물었다. 그는 헬레네를 원하는 남자들에게 나중에 헬레네에게 어떤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모두 함께 나서서 싸우자는 약속을 받아내라고 조언했다. 튄데라오스는 헬레네를 원하는 남자들에게 서약서를 쓰고, 그중 가장 힘이 센 아트레우스 가문의 메넬라오스를 남편으로 낙점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리스 신들이 사는 올림푸스에서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이 열렸다. 부부의 행복을 축하해야 하는 자리인 만큼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초대받지 못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결혼식장에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글귀가 있는 황금사과를 몰래 놓고 간다. 이를 본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 세 여신은 서로 사과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들의 세상에서 주인이 누군지 결론이 나지 않자 이들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잘생겼다고 소문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황금사과의 주인이 누군지 묻는다. 그러면서 세 여신은 자신을 고른다면 선물을 주기로 하는데 헤라는 최고의 부와 권력을, 아테네는 세상의 모든 지혜와 전쟁의 승리를,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아내를 약속했다.

  파리스의 선택은 아프로디테였다. 그녀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파리스에게 헬레네가 있는 스파르타로 여행 갈 것을 지시했다. 파리스가 궁궐에 도착해 메넬라오스와 헬레네를 맞이하자 큐피트는 헬레네에게 화살을 쏘았고, 헬레네는 파리스에게 한눈에 반했다. 그녀는 곧장 파리스를 따라 트로이로 도망갔고 메넬라오스는 격분했다. 그는 앞서 수많은 남자들이 헬레네에게 위기가 생기면 돕기로 한 조약이 있던 것을 떠올린다. 형 아가멤논의 도움으로 조약에 따라 그리스 전역에 있는 영웅들을 소집했다. 그렇게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트로이 원정군이 출발했다.


  그리스 전역에서 모인 대규모 원정군은 트로이보다 세력이 월등하게 컸다. 그럼에도 트로이는 쉽게 항복하지 않고 결사 항전했는데, 그리스 원정군을 상대로 무려 10년이나 버티는 데 성공한다. 그리스 원정군의 에이스는 전쟁의 신 아킬레우스였고, 트로이의 영웅은 왕세자 헥토르였다. 그리스의 대규모 군대를 막아내는 데에는 헥토르의 활약이 주효했다. 그리스 측에서 헥토르를 이길 사나이는 아킬레우스 딱 한 명뿐이었다.

  10년간의 원정으로 지친 그리스 군대를 본 아킬레우스는 트로이를 무너뜨릴 심산으로 거세게 공격했다. 전쟁의 신이라는 별명답게 대승을 거두고 트로이 병사를 전멸시키기 위해 돌진했다. 하지만 태양의 신 아폴론의 개입으로 트로이 병사들은 안전하게 성에 귀환할 수 있었다. 오랜 전쟁으로 버티기 힘든 것은 트로이도 마찬가지였다. 헥토르는 성 안에 들어가지 않고 홀로 창을 들고 아킬레우스에 맞섰다. 아킬레우스 역시 헥토르와의 결전을 받아들인다. 양 국의 에이스는 엄청나게 치고받는 전투를 벌였지만 결과는 아킬레우스의 승리였다. 헥토르는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는데,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강의 여신 테티스는 아들이 죽는 것이 두려워 아킬레우스를 스틱스 강에 담가 상처가 나지 않게 했다. 단, 테티스가 잡은 발목 뒷부분은 물에 닿지 않았다. 이 유래가 전해져 발목 뒷부분을 아킬레스 건이라고 부른다. 헥토르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했고 호각으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다. 아킬레우스는 그를 죽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의 시체를 마차에 묶고 트로이 성벽을 몇 바퀴나 돌았다고 전해진다.


  헥토르가 죽자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에 빠진다. 그리스 원정군도 이제 헥토르가 없으니 트로이가 금방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트로이 측은 그리스 원정군에게 죽은 헥토르를 위한 성대한 장례식을 열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고, 그리스 원정군도 이를 수락했다. 이제 트로이의 총사령관은 헥토르의 동생이자 전쟁의 원흉인 파리스가 물려받았다. 이 철부지 미남 왕자는 형이 죽자 책임감이 갑자기 생겼는지 신께 부탁해 아킬레우스를 죽을 방법을 묻는다.

  그리고 헥토르의 장례식이 열렸다. 놀랍게도 아킬레우스 역시 참석했다. 그런데 아킬레우스는 장례식에서 파리스의 여동생이자 트로이의 공주 폴릭세네에게 한눈에 반한다. 아킬레우스는 매일 밤 폴릭세네를 보기 위해 군대에서 몰래 빠져나와 그녀를 만나러 온다. 소식을 들을 파리스는 폴릭세네를 미행해 둘이 몰래 만나는 신전 기둥 뒤에 숨는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아킬레우스가 나타났고 둘이 포옹을 하고 있을 때, 파리스는 독화살을 꺼내 아킬레우스의 발목을 노렸다. 파리스는 트로이에서 제일가는 명사수였다. 그의 독화살은 정확히 아킬레우스의 발목을 관통했고, 아킬레우스는 그대로 쓰려졌다. 폴릭세네는 당황해 울부짖었지만, 파리스가 등장해 그녀를 끌고 나간다. 그리고 아킬레우스는 그 사이 온몸에 독이 퍼져 죽게 되었다. 그렇게 그리스 최고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허망하게 죽었다.


  양국의 에이스들이 모두 죽고 그리스의 사령관은 오디세우스가 물려받았다. 철부지 왕자 파리스는 그리스 최고의 지략가 오디세우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파리스는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에 돌입했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를 뚫기 위한 기가 막힌 계략을 생각한다.

  오랜 전쟁에 지친 그리스는 이제 전쟁을 멈추고 평화 협상을 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관행에 따라 전쟁이 끝나면 전쟁의 여신 아테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하는 데, 이를 위해 그리스 측에서 거대한 목마를 제작해 트로이에 전달하기로 한다. 하지만 이는 오디세우스의 계략이었다. 자신을 포함한 정예 병사 30여 명은 몰래 목마에 올라탔다. 드디어 트로이의 성문이 열리고 목마와 그리스 정예 병사 30명이 성안에 잡입 하는 데 성공한다. 트로이는 전쟁이 끝난 행복에 취해 연회를 연다. 연회가 끝나고 밤이 되자 성 안에는 목마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 병사들은 목마를 몰래 빠져나오기 시작했고, 곧바로 성문을 열었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리스 군이 물밀듯이 성 안으로 들어왔다.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해 안심하고 있던 트로이 병사들은 크게 당황했다. 그리스 군은 트로이 사람들은 마구 죽이기 시작했다. 오랜 전쟁에 대한 분노, 아킬레우스 등 수많은 영웅들에 대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트로이는 완전히 무너지고 도시 전체가 불타게 된다. 이제 트로이는 지도에서 사라졌고,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끝난다. 10년간의 대규모 원정을 통해 간신히 그녀를 데려온 셈인데, 지나간 시간과 쓴 돈을 생각하면 그리스 측도 얻은 게 자존심 말고 또 있을지는 의문이다

.

  트로이 전쟁은 실제 역사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있고, 현재 터키와는 지역 외에는 아무 관련성이 없지만 그리스 반도와 아나톨리아 반도 간 치열한 반목 역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유럽의 중세가 시작된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할된 후 각자 서로가 가톨릭 정교회의 정통임을 주장해 사이가 멀어진다. 서방과 동방 유럽 세력 사이의 반목이 시작된다. 훈족과 게르만족에게 사라진 서로마에 비해 동로마 제국은 자신들만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들은 현재 그리스 소유의 그리스 반도와 터키 소유의 지역인 아나톨리아 반도를 기반으로 크게 성장했다.

  그러던 와중 동방의 돌궐 세력이 점차 서방 세계로 넘어온다. 그들은 동로마 제국이 소유하고 있던 아나톨리아 반도로 도착한다. 이들을 튀르크라고 불렸고, 현재 터키의 기원이 된다. 튀르크 세력은 점차 커져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게 된다. 바로 셀주크 제국이다. 이들은 동쪽으로는 페르시아 지역까지 뻗어갔고, 서쪽으로는 동로마 제국을 밀어내고 있었다. 아나톨리아 반도의 주인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는 더 이상 셀주크를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해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튀르크를 밀어냈다. 제국을 지키는 데 성공했지만 셀주크는 생각보다 매우 강력했다. 20년간 계속된 셀주크의 침공을 동로마 제국은 간신히 방어에 성공하지만 더 이상 그들이 우습게 보던 유목 민족 튀르크가 아니었다.

  그리던 와중 동로마 제국의 마케도니아 왕조의 지배가 끝나고 명확한 황제가 나타나지 않는다. 각자 가문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수많은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를 지켜본 셀주크의 2대 술탄 알프 아르슬란은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1070년 아르슬란은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했다. 표면적으로는 이슬람 세력인 파티마 왕조를 정복이었지만, 실제 목표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 점령이었다. 그의 원정에 대항하기 위해 동로마의 황제 로마노스 4세도 원정군을 구성했다. 아나톨리아 반도의 패권을 놓고 양 국의 대규모 전역이 시작되었다.

  

  로마노스는 아르메니아, 프랑크, 노르만 용병들로 구성된 연합군을 이끌고 만지케르트로 향했다. 그는 7만의 군사를 이끌고 호기롭게 출발했지만, 만지케르트에 도달해서는 겨우 2만 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줄어든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원정 중에도 최대한 용병을 많이 구하려 했다. 또한, 아르슬란이 오기 전에 만지케르트를 탈환해 성을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아르슬란은 로마노스의 움직임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스파이를 통해 실시간으로 로마노스 원정군의 위치 정보를 받고 있었다. 1071년 8월 23일, 만지케르트에 도달한 로마노스는 빠르게 성을 장악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아르슬란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고 기병대로 기습해 그의 전략을 방해했다. 8월 25일 아르슬란은 로마노스에게 평화 협정을 제안했지만, 이미 먼 원정을 떠난 로마노스는 이를 거절했다. 로마노스의 정적이자 원정군 사령관 두카스는 용병을 이끌고 도망갔다.

  결국 로마노스는 아르슬란에게 대패한 뒤 포로로 잡혀 그의 앞에 끌려오게 된다. 이후 둘의 대화가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알프 아르슬란 : 만약 내가 당신 앞에서 포로로 보내졌으면 어떻게 하시겠소?

로마노스 4세 : 아마 당신을 죽이고 콘스탄티노플 거리를 내 걸었을 것이오.

알프 아르슬란 : 내 처분은 당신보다 더 무겁소. 나는 당신을 용서하고 해방시키겠소.



  아르슬란은 그를 풀어주었고, 동로마 제국은 굴욕적인 조건으로 셀주크와 강화 협정을 맺었다. 로마노스는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막대한 금을 셀주크에 지급하게 되었다. 아르슬란에게 굴욕을 당하고 심지어 살아서 제국이 돌아간 그는 더 슬프게도 두카스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로마노스 4세는 폐위 당하고도 아르슬란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전재산을 보내주었다. 비록 전쟁 수행 능력은 많이 부족했지만, 전장에서 의리만큼은 끝까지 지켰다.

  만지케르트 전투는 동로마 제국의 패망을 알리는 시발점이었다. 이후 약 3백여 년간 십자군이라는 명목 하에 가톨릭과 이슬람 세력 간의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또, 이 전투는 우리가 아는 터키라는 나라의 기원이 되는 아주 중요한 전투였다. 이처럼 만지케르트 전투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오스만 제국 근위대, 예니체리



1919년 터키 독립 전쟁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유럽의 근세가 시작된다. 근세 초반 유럽의 헤게모니를 쥔 국가는 투르크 인들이 세운 오스만 제국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그들의 숙원사업이었던 콘스탄티노플 정복하고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렸다. 오스만 제국은 발칸-그리스 반도와 아나톨리아 지방 이집트, 페르시아 지역까지 3 대륙에 영토를 걸친 대제국을 만들었다. 근세 초기 오스만의 위상은 마치 지금의 미국과 같았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조차 오스만이 무서워 동방으로 가기 위해 저 먼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야 했고, 누군가는 지구가 둥글다고 믿고 서쪽으로 움직여 신대륙을 발견했다.

  하지만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절치부심하던 서방세력은 식민지 사업을 통한 경제 안정화, 산업혁명을 통한 기술과 과학의 발달로 자신들의 역량을 끌어올린다. 반면 광활한 영토에 심취해있던 오스만 제국은 내부 분열을 거듭해 점차 쇠퇴해가고 있었다. 게다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민족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해 제국에 눌려 큰소리를 내지 못한 발칸반도와 북아프리카의 나라들이 독립하기 시작한다. 그리스 역시 1832년 오스만 제국 치하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 왕국을 세운다. 이 시기부터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환자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그렇게 환자의 상태로 간신히 목숨만 유지해 오던 오스만 제국은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드디어 숨통이 끊어진다. 그동안 영국, 프랑스로부터 받은 도움을 무시하고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편에 섰던 대가는 끔찍했다. 연합군은 물밀듯이 이스탄불로 진격해 순식간에 제국을 점령했다. 1920년 세브르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을 분할 통치하기로 합의한다. 사실상 제국의 해체였다.

  오스만에게 오랜 지배를 받은 그리스는 이번 기회에 제국에 대한 복수를 꿈꾼다. 그리스는 결국 아나톨리아 반도를 집어삼키기 위해 이즈미르로 진격한다. 투르크 인들은 무기를 들고 그리스 군에 저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지원을 받는 그리스는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을 쉽게 점령했다. 영토 곳곳에서 제국의 술탄에 반대하는 소요사태까지 일어나고 있는 대혼란의 상황이었다.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외치던 그리스에게 아나톨리아 반도가 넘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다급해진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흑해 연안에 있는 삼순항에서 일어난 소요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오스만 군에서 가장 통솔력이 뛰어난 장군을 보낸다.


  이 사람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 파샤.


  삼순항에 도착한 무스타파는 소요사태를 진정하기는커녕 그들과 연합한다. 그는 삼순항에 모인 주요 반란 세력과 힘을 합쳐 혁명을 선언한다. 무스타파는 세계 1차 대전 당시 오스만의 대승으로 끝난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이었기에 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무스타파는 혁명에 동참하는 군벌을 모아 앙카라에 모였고 그들만의 대국민회의를 만든다. 무스타파와 군벌들은 대국민회의에서 그리스와 전쟁을 선언한다.

  같은 연합국이었던 프랑스 역시 영토 확장과 무스타파 체포를 위해 군대를 이끌고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을 침공했다. 신식 군대를 보유한 프랑스 계속 터키 혁명군을 밀어냈다. 이들은 아르메니아와 동맹을 맺고 터키를 공격했는데, 이 과정에서 터키인들을 강압적으로 대해 반감을 샀다. 터키인들은 결사항전을 하며 프랑스 군을 막아냈다. 결국 경제 위기와 전쟁의 장기화를 두려워한 프랑스가 전쟁에서 손을 떼머 서부 전선은 종료된다.

  하지만 그리스와 터키가 맞붙은 동부 전선은 여전히 치열했다. 철천지 원수답게 서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리스의 국왕 콘스탄디노스 1세는 승리를 위해 계속 병력을 아나톨리아에 보냈다. 마치 3천 년 전 트로이에 병력을 보내는 그리스와 같았다. 이번에도 병력 규모에서 그리스가 터키를 압도했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었는데 바로 터키엔 전쟁의 화신 무스타파 케말이 있었다.


  터키는 게릴라 전략으로 그리스 군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지중해에서는 그리스의 보급을 방해해 그들이 제대로 군대를 운용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여전히 패전을 거듭해 지속적으로 퇴각했고, 터키군은 앙카라로부터 200Km가량 떨어진 사카리야 지방까지 그리스의 진군을 허용한다. 1921년 8월 23일 사카리아를 놓고 그리스와 터키의 군대가 만난다. 전쟁은 3주 동안 밤낮없이 진행됐다. 터키는 이 지역이 뚫린다면 곧장 앙카라로 그리스 군이 진주하게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터키는 모든 병력을 사카리야 전투에 집중시켰고, 드디어 터키는 그리스 군을 막아내는 데 성공한다.

  터키가 결정적인 전투에서 그리스 군을 막아내자 연합국에서 터키를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다. 무스타파의 측근이자 그의 오른팔 이스메트 파샤가 영국의 요청에 의해 특사로 파견되었다. 이스메트 파샤는 연합군이 모인 스위스 로잔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협상의 조건은 단 하나. 투르크 민족의 단일 정부 수립이었다. 무스타파가 이끄는 터키 독립군이 이즈미르까지 수복하자 연합군은 드디어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손을 뗀다.


  19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이 체결되면서 터키의 독립이 보장된다. 투르크 인들은 연합국으로부터 민족 고유의 정부를 받아낸다. 반면 그리스는 아나톨리아 반도에 있는 모든 영토를 비롯해 이스탄불 지역을 터키에게 내주게 되었다. 그 대신 키프로스를 비롯한 에게해의 섬들을 돌려받았다. 하지만 키프로스 섬에는 여전히 튀르크 계열의 사람들이 많이 분포해 있었고, 이것이 훗날 키프로스 분쟁의 씨앗이 된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초라하게 영국 군함에 실려 몰타로 망명을 떠났으며 무스타파 케말은 터키의 초대 대통령에 오른다.

  무스타파 케말은 터키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며 국부로 칭송받고 있다. 그는 아타튀르크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는데, 이는 투르크 족의 아버지라는 의미다. 터키인들이 얼마나 그를 존경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터키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어딜 가나 무스타파의 초상화를 볼 수 있고, 자칫 그의 험담을 하게 된다면 현지인들의 보복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투르크 족은 사분오열 당했을 것이고 어쩌면 자신들의 나라 없이 그리스, 키프로스,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떠돌며 살아갔을지 모른다. 그의 행적으로 보면 왜 그가 터키인들에게 예수에 가까운 존경을 받는지 알 수 있다.



2020년 동지중해 가스 시추 문제



  2020년 9월 12일.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현 그리스 총리는 18대의 전투기와 어뢰 미사일들을 대거 구입했다. 동시에 공개적으로 터키가 동지중해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으며, 자국 안보를 위해 군대를 증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터키도 이에 질세라 군함을 동원해 키프로스 일대의 안보를 강화해 그리스를 견제했다.

  양국이 동지중해 일대에 군대를 동원한 이유는 키프로스에서 발견된 대규모 가스 때문이다. 키프로스 섬 일대에 발견된 천연가스는 무려 300억 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추정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리스, 터키, 키프로스 3개국은 각자 서로 해안의 영유권을 내세우며 자신들에게 가스 시추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서로 영해를 주장하게 된 이유는 찾기 위해선 앞서 언급한 로잔 조약 체결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터키 독립전쟁을 끝으로 그리스와 터키는 지금 우리가 세계지도에서 보고 있는 영토를 보장받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에게해에 있는 섬들은 그리스 소유가, 아나톨리아 반도 및 이스탄불은 터키의 영토가 된 것이다. 조약 체결 당시에는 큰 문제가 없었는데 이후 배타적 경제 수역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되면서 로잔 조약은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배타적 경제 수역이란 1982년 국제연합 협약에 의해 규정된 개념이다. 각국은 영토를 비롯해 해상에서의 영토의 개념인 영해를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영해를 기준으로 최대 200해리까지의 영역에서 자원을 채취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이 경우 로잔 조약에 따르면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는데, 아나톨리아 반도를 소유하고 있는 터키의 배타적 경제수역에 수많은 그리스 섬들이 포함되고, 그리스 역시 자신들이 주장할 해상 수역 범위가 터키와 겹치게 된다. 그리고 이 수역이 키프로스와도 공유가 되는데, 이 3개국 모두가 주장할 수 있는 수역 한가운데에 대규모 천연가스가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키프로스의 독특한 역사도 문제를 키우는 데 한 몫했다. 로잔 조약에 의해 터키는 키프로스에서 손을 뗀다. 그리고 키프로스 섬 내에 그리스인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은 키프로스가 그리스의 영토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국은 이런 움직임을 좋게 보지 않았다. 왜냐면 여전히 키프로스 북부에는 투르크 계열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그리스 통합을 승인하게 된다면 이들의 반발을 피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를 두려워한 영국은 1960년 키프로스를 그리스에 편입시키지 않고 독립시켜 키프로스 공화국으로 독립된 정부를 만든다.

  초기에는 영국의 바람대로 키프로스 내의 그리스, 투르크 계열의 사람들이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리스계의 키프로스 지도자들이 투르크 인들에 대한 박해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리스에서 파파도풀로스의 군사정권이 시작되면서 키프로스 합병을 무력으로 시도했고, 이로 인해 키프로스 내전이 발발한다. 터키는 투르크계의 키프로스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같이 전쟁에 참여했다. 결국 전쟁은 어느 한쪽의 승리로도 끝나지 않고 키프로스는 남북으로 분리되었다.


  키프로스의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동지중해 가스전은 더욱 치열하게 대립 중이다. 남키프로스와 그리스 그리고 북키프로스와 터키가 서로 연합하여 가스 시추권을 놓고 전쟁 아닌 전쟁을 벌이고 있다. 터키는 여전히 동지중해 연안에 시추선을 지속적으로 보내고 있고, 이때마다 주변국인 그리스, 키프로스, 이스라엘은 터키를 비난하고 있다. 과연 동지중해 가스 시추권 경쟁이 새로운 전쟁으로 벌어지는 것은 아닐지 모두가 주목해 보아야 한다.


  이처럼 그리스와 터키의 경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짧게는 1000년, 길게는 3000여 년 동안 양국은 치열한 경쟁관계에 놓여 있었다. 한국-일본 못지않은 세계에서 유명한 라이벌 관계의 두나라는 여전히 서로에 대한 감정이 굉장히 좋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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