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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Jun 08. 2021

살아남고 싶다면 변화하라

19세기 중엽 중국과 일본의 근대화 정책

 



 역사의 헤게모니는 늘 변화하는 쪽이 가져간다. 스페인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무적함대를 만들었다. 영국은 인도 시장과 산업 혁명을 통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만들었다.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의 등장으로 프랑스와 독일은 강대국 반열에 올라선다. 사회주의 이론을 현실화한 레닌은 전 세계에 사회주의 바람을 일으켜 소련을 세계 최강국 반열에 올려놓는다. 자유방임주의와 세계 대전을 통해 부를 축적한 미국도 세계 최강국에 오르게 된다. 이처럼 관습과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위인과 사회 모델을 제시한 나라는 강대국이 된다.


  18세기까지 세계 무대의 흐름에서 떨어져 평화롭게 살고 있던 중국과 일본. 양국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현대화된 무기를 앞세워 중국과 일본을 자기 국가만의 시장으로 집어삼키려 노력했다. 두 나라는 서구 열강의 요구에 맞서 싸울지, 아니면 굴복적인 요구를 수용할 것인지, 그 혼란 속에서 나라를 어떻게 지켜야 할지 선택의 기로 앞에 놓였다.



1868년, 일본의 메이지 유신



미국의 일본 진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몰아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3년 일본에 에도 막부를 세운다. 오래전부터 포르투갈 상인과 자유롭게 교역하고 있었던 에도 막부는 천주교 박해를 시작으로 1639년 쇄국 정책으로 전환한다. 이후 200여 년간에도 막부는 외국의 개항 요구를 거부한다.

  1853년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이끄는 증기선 함대가 일본 시모다 항구에 도착했다. 이전에도 서양 함선이 일본에 오는 건 자주 있었다. 이미 수차례 개항 요구를 받아왔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게다가, 네덜란드로 부터 미국의 개항 요구가 있을 것이라는 전보도 받은 상태였다. 에도 막부는 계속 그래 왔듯이 시간을 끌며 개항 요구를 흐지부지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태도는 강경했다. 결국 전쟁을 해봤자 질게 뻔한 에도 막부는 미국의 개항 요구를 들어준다. 계속되는 기근으로 점차 국고가 말라갔고, 인구도 급격히 감소하는 추세였기 때문에 미국과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결국 일본은 미국의 함선에 대포 한 발도 쏘지 못하고 무릎을 꿇는다. 1854년 3월 31일 미국과 일본의 화친조약이 맺어지고,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에도 막부는 200년간 지속해온 쇄국 정책을 철폐하고 미국의 개항 요구를 수락한다.


  문제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일본 천황 덴노의 서명 없이 막부가 단독으로 서명했다. 막부는 당시 천황이었던 고메이 덴노를 설득했지만 서양인은 무조건 싫다며 떼를 쓰는 바람에 단독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에게 천황은 곧 종교였다. 결국 하급 사무라이를 막부 단독 결정에 반발해 반 막부 운동이 시작된다. 이들은 현재 막부로는 서구 열강을 막아낼 수 없어 막부에게 빼앗긴 정부를 다시 덴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천황에게 권력을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존황', 서양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양이'. 이 두 단어를 합쳐 존황양이파가 등장한다.



존황양이파 VS 에도 막부


  존황양이파는 군대를 모아 막부에게 저항했고, 막부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른바 '안세이의 대옥'으로 에도 막부는 존황양이파를 대거 참수시킨다. '안세이'는 당시 일본의 연호다. 2년간의 숙청으로 무려 100여 명의 인사가 죽거나 유배를 당한다. 그중 가장 유력한 인물은 요시다 쇼인이었다. 그는 조슈 번 (현 야마구치현) 출생의 사무라이로, 해당 지역에서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교육자이자 당시 가장 유력한 양이론자였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은 스승의 억울한 죽음을 보고 대부분 존황양이파의 핵심 인물이 된다.

  안세이의 대옥을 일으킨 책임자는 이이 나오스케였는데, 그는 미일수호통상조약 당시 덴노의 의견을 무시하고 결재한 책임자이기도 했다. 수많은 존황양이파를 죽여 붉은 귀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결국 이들의 분노를 사 이듬해인 1860년 암살당한다.

 

  이이 나오스케의 죽음은 반 막부 운동의 방아쇠를 당겼다. 사쓰마, 조슈, 도사 등 웅번들은 서로 힘을 합쳐 에도 막부에 대항했다. 이들은 세수를 늘리고 병사를 모집했다. 그러던 1862년 사쓰마 번에서 번주의 아버지가 이동하던 도중 영국인 상인 4명이 예를 갖추지 않고 지나쳤다. 분노한 사무라이들이 영국인 1명을 사살하고, 2명을 부상 입힌다. 이 사건이 '나마무기 사건'이다. 영국 정부는 이를 빌미로 에도 막부와 사쓰마 번에 10만 파운드를 배상할 것을 요구했다. 에도 막부는 이에 응하려 했으나 사쓰마 번은 이를 거절했다.

  결국 영국 상선은 싸스마 번의 가고시마만에 출동해 상선 3척을 탈취했다. 사쓰마 번은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영국 상선에 포격을 개시했다. 전쟁준비가 되지 않은 영국 함대는 크게 놀라 무차별적으로 대응 사격했다. 이 교전을 사쓰에이 전쟁이라고 부른다.


  사쓰마 번은 영국의 무차별 포격으로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 2일간 포격으로 10개의 해안 포대가 초토화되었고, 관공서와 같은 주요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영국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증기선 3척을 손실했고, 13명이 사망했으며 50여 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해상강국 영국은 해상 최강국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한 창피를 당했다.

  번 동맹이 막부를 찍어 누르자 이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일어난다. 조슈 번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번들보다 먼저 손을 써 고메이 덴노로 하여금 양이 칙서를 받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조슈 번의 군대는 시모노세키에 정박해있던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4개국의 함선에 포격을 하는 대담함을 보인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서양세력은 놀라우면서도 어처구니없었다. 미국은 보복을 결의하고 요코하마 항구에 정박해있던 함선을 시모노세키로 돌려 조슈군 함선 4척을 순식간에 지워버렸다. 프랑스 함대 역시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해안 포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조슈번은 그제야 자신들의 단독적인 양이 운동이 얼마나 무책임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에도 막부와 연합한 사쓰마 번이 조슈 번의 반란을 진압해 이들은 완전히 실각한다.



사카모토 료마와 대정봉환


  그리고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존황양이파에 한 사무라이가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서양에 대한 호기심으로 서구 문물을 배웠고, 민주주의 공화정 제도를 알게 된다. 일본의 발전을 위해서 사무라이를 떠받드는 신분제를 철폐하고 신식 무기를 도입이 시급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사무라이의 이름은 훗날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는 사카모토 료마다.


  그는 사이가 멀어진 조슈 번과 사쓰마 번에 접근해 막부 타도라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다시 뭉칠 것을 호소했다. 끝내 양 측의 합의를 성사시켜 삿초밀약 체결한다.


  삿초 동맹 체결로 당황한 에도 막부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번들의 요구를 수락한다. 15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국가의 통치권을 메이지 덴노에게 반납한다. 이 사건을 '대정봉환'이라고 한다.


 에도 막부는 서구의 삼권분립을 본 따, 각 번의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이 포함된 의회를 세운다. 상원 의장은 에도 막부의 당주가 맡았다. 내전을 피하기 위해 정치 기구를 전반적으로 개혁했다. 대정봉환은 겉으로 보기에 아주 평화적인 방식의 권력 이양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속엔 에도 막부의 속셈이 있었다. 막부는 각 번의 사병은 인정하나 몇 년 후 모두 중앙 정부군으로 통합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반발한 삿초 동맹은 결국 에도 막부를 상대로 내전을 일으킨다. 이 전쟁이 메이지 유신의 시작을 알리는 보신 전쟁이다.


  2년간 치열한 보신 전쟁을 통해 삿초 동맹이 승리하게 된다. 드디어 200여 년 넘게 일본을 지배한 에도 막부가 사라지고 메이지 덴노에게 권력이 돌아갔다. 하지만 정작 국가의 주요 사안은 번들의 장들이 협의했다. 메이지 정부는 이제 근대 국가를 세우기 위해 서구 자본주의를 도입하고 신식 무기를 대거 들여왔으며 전 국가 차원의 대대적인 개혁이 시작되었다.



일본의 근대화 작업


  삿초 동맹 출신의 사무라이들이 뭉친 메이지 정부는 지방분권적인 번 제도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적인 현 제도를 도입한다. 번 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사병을 소유였는데, 메이지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군사를 중앙 정부에 귀속되었다. 이는 '폐번치현'으로 부른다.

  그리고 지방에 있는 모든 토지를 몰수하고 덴노의 소유로 돌렸다. 각 번들의 다이묘들은 모두 도쿄(에도)로 이주해야 했다. 모든 다이묘들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토지와 농민들을 덴노에게 돌려주는 대신 정부로부터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1869년 모든 다이묘가 덴노에게 자신들의 재산을 돌려주는 '판적봉환' 조치가 실시된다. 이 두 조치로 계속되고 있는 반정부 운동을 진압하기 수월해졌고, 보신 전쟁 이후 악화된 국고 예산을 확보하게 되었다.


  국고를 확보한 메이지 정부는 이제 근대화를 실시한다.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을 유럽과 미국에 파견한다. 이들은 사절단의 대표였던 이와쿠라 도모미를 중심으로 뭉친 이들은 서양 열강의 문물을 배워오고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의 재협상을 요구하는 것이 주 목표였다. 당연히 재협상에는 실패했지만, 이들은 서양의 선진 문물을 조사하고 도입하는 데는 성공한다. 여기에는 훗날 일본 제국 초대 총리이자 대한제국 통감이 되는 이토 히로부미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이른바 좋은 것은 받아들인다는 '이이토코토리' 정신에 입각해 각 국의 선진 문물을 그대로 따오는 근대화를 실시한다. 이이토코토리의 가장 중요한 컨셉은 각 나라의 장점을 모아 흡수하는 것이다. 육군은 독일 모델로 해군은 영국을 그대로 본 따 일본군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식민지 사업을 통해 서양 열강이 경제력을 확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정한론으로 발전해 대한제국을 합병시켜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게 되는 원인이 된다.


  사회 제도도 전면으로 개편되었다. 사무라이 제도가 폐지되고 신분제를 완전히 철폐했으며, 개인의 자유로운 직업 선택을 보장했다. 결혼의 자유와 이주의 자유도 보장되었다. 당시 일본 사람들은 머리를 기른 촌마게를 하고 있었는데, 서구화를 위한 단발령을 실시했다. 초기에는 많은 사무라이들이 반발했지만, 메이지 덴노가 나서서 직접 서양식 머리로 자르자 백성들도 반발 없이 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폐도령을 통해 사무라이와 민간인이 칼을 차고 다닐 수 없도록 했으며, 국민개병령으로 백성들 모두가 군대에 가는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이렇게 일본은 전역에 걸친 근대화를 실시하게 되었다.


  강력한 중앙정부의 힘으로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한다. 이는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가장 큰 이유다. 보신 전쟁으로 정부에 대항할 세력이 사라져 버린 것이 큰 힘이 되었다. 둘째로 태평양 지역에서 러시아의 진출을 견제하기 위한 영국의 지원도 큰 역할을 했다. 영국은 자신들의 극동 지방에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본을 지원했다. 영국의 지원은 훗날 영일동맹으로까지 발전한다.






1861년 청나라의 양무운동



중체서용 운동


  중화사상. 중국은 세상의 중심이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은 진시황의 통일 이후 2천5백여 년간 자신들이 스스로 세계 최강국이라고 자부하고 다녔다. 그러나 1856년 영국과의 아편전쟁을 통해 자신들이 세계 무대에서 얼마나 나약한 존재였는지 깨닫는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난징 조약을 맺어 서구 열강에게 문호를 개방한다.

  이 조약은 청에게 매우 굴욕적인 조건이었다. 영국은 청나라에게 5개 항구를 개항해야 했고, 홍콩 섬을 영국에 넘겼으며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후 청 황제 함풍제가 31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 동치제가 6살의 나이에 즉위한다. 정치하기에 너무 어린 동치제를 대신해 그의 어머니이자 함풍제의 후궁이 섭정을 시작한다.


그녀가 바로 그 유명한 서태후였고, 위기의 청나라를 구해야 하는 지도자가 된다.


  아무리 정치에 무능한 서태후라도 청나라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건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정권을 장악한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과 서태후는 양무운동을 실시한다. 양무운동의 주요 내용은 '중체서용'이었다. 중국의 학문을 본질로 삼으며 서양 학문을 도입하자는 내용이다. 1861년 청나라는 총리아문 설치를 시작으로 청나라 개혁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근대화의 시작은 서구식 문물 이해에서 출발한다. 이를 알고 있던 양무운동 지도부 총리아문은 양무 학당을 개설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를 교육하는 외국어 학당을 설립한다.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하고 아편전쟁 지휘관이었던 이홍장은 서태후의 명에 따라 독일과 영국으로 유학을 보낼 인재를 선발했다. 이들은 서양으로 넘어가 총포, 탄약 기술을 습득하게 배웠고 순양함 구매한다. 이 기술로 만들어진 청나라 해군이 북양함대였고, 이홍장이 지휘관이 된다. 서양의 해군 기술을 본 따 그대로 만든 복양 함대는 아시아 최강의 해군 함대로 평가받았다.

  청나라는 서구 기술자들을 등용하기 위해 과거 시험에 양무 진취라는 과목을 추가한다. 이를 통해 등용된 화약과 포탄을 만들 줄 아는 기술자들은 서양식 기사들과 협업을 하게 되고, 근대식 공장도 설립한다. 지방 곳곳에 무려 24개의 군수 공장이 개설된다. 석탄과 철을 공급받기 위해 근대식 채광 시설도 만들어 비록 서양의 무기에 비해서 품질은 떨어졌지만, 어찌 되었든 청나라 자국의 기술을 이용해 서구식 무기를 만들 기술력을 보유하기 시작했다.


  난징 조약 이후 청나라에 개항된 항구를 중심으로 서양 상인들은 부를 축적한다. 양무파들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자국 민족 자본과 기업 양성에도 힘을 쏟는다. 당시 청의 해운업을 외국 기선 회사가 독점하고 있었는데, 이를 막기 위해 윤선초상국이라는 청나라 자본의 기업을 1872년 새로 만든다. 양무운동은 우려와는 달리 1870년대를 기점으로 꽤나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서태후의 권력욕과 청프 전쟁


  문제는 서태후의 권력욕이었다. 자신이 옹립한 아들 동치제가 천연두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하자 과감히 아들을 버리고 꼭두각시 황제 광서제를 옹립해 권력을 이어갔다. 자신과 권력을 함께 나누던 공친왕도 몰아내며 자신 중심의 독재 권력 체제를 만든다. 운을 타고났는지 서태후가 난리를 치는 동안 서구 열강의 청나라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어 서태후는 더욱더 안정적으로 권력을 이어갔다.


  1884년 사건이 터지게 된다. 프랑스는 당시 베트남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다.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는 참 묘한데, 베트남은 원래부터 반 중국 성향이 매우 강했다. 그러면서도 문화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베트남은 프랑스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청나라에 SOS를 요청한다. 하지만 영국의 강함을 맛본 이홍장은 프랑스와 전면전은 피하고 싶었고, 베트남에서 이익도 크게 없을 거라 판단해 간명에서 회견을 통해 적당히 전쟁을 끝내려 했다. 청나라는 프랑스의 베트남 보호권을 승인하고 청나라는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던 모든 병력을 철수 시킴과 동시에 프랑스는 청나라를 침입하지 않는다는 협약에 양국이 동의한다.

  하지만 프랑스는 간명 조약에 서명하자마자 청나라 군대를 공격한다. 간명 조약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었는데 청나라 함대를 언제까지 철수해야 한다는 내용이 빠져있었다. 이로 인해 군대를 전부 철수시키지 못한 프랑스의 결국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기 시작한 청나라는 복건 함대 전체를 잃고 프랑스에 선전 포고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청나라의 해군이 프랑스를 상대로 나쁘지 않은 성과를 보인다. 이홍장이 그렇게 노력해 만든 식신 군대가 제법 본인들의 역할을 수행한다. 당황한 프랑스는 계속해서 본토의 군대를 증원시킨다. 전쟁은 점차 교착상태에 빠진다. 청나라 정부는 청나라의 선전을 듣지 못하고 이홍장에게 프랑스와 화친하라는 교지를 내린다. 청나라는 당시 조선과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청 조정은 베트남을 노리는 프랑스보다는 조선을 노리는 일본을 상대하기 위해 조선에 집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교지를 받은 이홍장은 프랑스와 굴욕적인 조약에 다시 한번 승인했고, 베트남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게 된다.



청일전쟁과 변법자강운동


  이제 양무운동을 통해 자신들이 성장했다고 느낀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킨다. 그 사이 조선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라는 연속적인 쿠데타 시도가 일어났다. 이 사건을 빌미로 청은 조선에 대한 실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성장한 일본이 조선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조선의 동학 동민들이 대규모 반란이 일으켜 그사이 일본군이 무단으로 조선에 들어왔고 청나라와 일본 양국은 한반도에서 맞붙게 된다.

  이홍장의 군대는 평양성에서 일본과 만난다. 청나라 군대는 평양에 미리 도착해 성을 방어하기로 했다. 근데 일본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자 곧바로 퇴각해 성을 내준다. 이홍장은 계속 일본의 군대에 소극적으로 대항한다. 결국 압록강변까지 퇴각했는데, 사람들은 청이 자랑하는 북양함대를 출격시키기 위한 이홍장의 계략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국제 여론은 극동아시아의 무적함대 북양함대의 승리를 점쳤다. 북양함대의 화포와 함선의 수는 일본 함대의 숫자를 압도했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자 북양함대는 말 그대로 종이호랑이였다. 신식 무기를 운용할 지휘관과 기술자가 전혀 없었다. 무기만 좋았지 이를 적재적소에 활용할 전문가가 없었다. 군대 운용 방식 조차 과거 만주 벌판을 달리던 청나라의 교범 그대로였다. 일본의 경우 병법과 무기 모두 서구식으로 전환한 것과 달리 큰 차이를 보였다. 황해에서 북양함대는 일본 함대에게 전멸당한다.

  결국 양무운동은 청일전쟁 패배로 완전한 실패로 돌아간다. 반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했고, 청일전쟁 승리로 이를 국제무대에 증명했다.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잃게 된다.


  청일전쟁 패배는 자신들이 동아시아 최강국이라고 자부하던 청나라의 자존심에 큰 타격을 준다. 양무운동 책임자 이홍장이 실각한다. 서태후가 꼭두각시로 세운 광서제는 어느덧 성인이 되었고, 서태후를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권력을 휘두르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광서제는 자신과 뜻을 같이할 사람들은 모았다. 평소에 상소를 통해 청의 근대화를 요구한 캉유웨이를 비롯해 량치차오, 탄시통, 위안스카이와 함께 변법자강운동을 계획한다. 변법자강운동이란 말 그대로 법을 변화시키고 국가를 강하게 하는 운동인데, 모델은 역시 일본의 메이지유신이었다. 캉유웨이와 광서제는 급진 개혁을 주장하며 제도의 전면적은 개혁을 시도한다.

  광서제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은 캉유웨이는 제도국을 설치해 본격적인 변법 개혁을 실시한다. 그는 공자와 맹자를 비난하며 과거제를 폐지하고, 서원을 학당으로 전환하기로 한다. 개혁파 인재를 대거 등용되었고, 산업을 진흥시켰으며 자유로운 의법 제도를 도입한다.


  하지만 서태후를 비롯한 수구세력은 변법파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캉유웨이는 수구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대대적인 숙청을 계획했는데, 광서제의 측근이자 위장 변법파였던 위안스카이의 배신으로 숙청 계획을 탄로 났고 서태후와 위안스카이가 군사를 이끌고 자금성을 점령하면서 변법운동도 끝이 난다. 그렇게 청나라는 다시 개혁 이전으로 돌아갔다.

 

  청나라의 양무운동은 결국 용두사미로 끝났다. 아편전쟁의 쓰라린 패전을 겪은 청나라는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지만 그 정신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역사를 잊은 청나라는 일본에게 패배하면서 근대화에 실패한다. 일본과 청나라의 근대화 사례는 역사와 인생 모두 시대에 변화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만이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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