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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Jun 15. 2021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

강력한 적 앞에서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운 3인의 영웅

처인성 전투 상상도


테미스토클레스 (vs 페르시아)



  기원전 490년, 서아시아를 통일한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한다. 이오니아 반란을 아테나가 지원한 사실을 빌미로 페르시아 국왕 다리우스 1세는 2만 5천 명의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로 향한다. 페르시아와 작은 도시국가 아테네는 체급 자체가 달랐다. 하지만 놀랍게도 결과는 아테네의 승리. 그리스 남부 마라톤에서 양측의 군대 맞붙는다. 홈 어드밴티지를 살린 아테네는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혼쭐 낸다.

  창피를 제대로 당한 페르시아.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에 대한 복수심 하나로 그리스 원정을 꿈꾼다. 10년간의 준비를 거쳐 무려 20만 대군을 키운 페르시아가 다시 그리스로 향한다.

  그리스 반도는 비상사태에 빠졌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중심이 된 그리스 도시국가는 동맹을 맺어 페르시아에 대항한다. 육군이 강력한 스파르타가 테르모필레에서, 해군이 강한 아테네가 아르테미시움에서 페르시아 군을 막아서기로 했다. 테르모필레의 스파르타 용사들은 페르시아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수적 열세를 넘어서지 못했다. 영화 300의 배경이기도 했던 테르모필레 전투 패배로 그리스의 방어선은 뚫리게 되었고 아테네는 페르시아에 의해 불바다가 된다. 그렇게 크세르크세스의 복수는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아직 아테네엔 테미스토클레스가 남아있었다. 아테네를 점령당하자 그리스 해군 지휘관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르테미시움이 방어에 적합하지 않은 지역이라고 판단한다. 그는 군대를 뒤로 빼고 살라미스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맞이하자고 주장한다. 같은 해군 지휘관이자 코린토스의 장군 아데이만투스는 코린토스 지협에서 군대를 막을 것을 주장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간신히 장교들을 설득시켜 아테네의 해군을 살라미스로 돌리는 데 성공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해군의 저력을 믿었다. 다리우스 1세의 1차 침공 당시 테미스토클레스도 전투에 참가했다. 비록 이겼지만 그는 승리에 취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마라톤 전투를 이겨 아테네를 지켰지만 자칫 졌다면, 분명 페르시아에게 아테네가 짓밟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페르시아의 육군을 막기 위해선 상륙 자체를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 오래전부터 해군 양성을 주장해왔다.


  살라미스에 도착한 그리스 연합군은 내분이 발생한다. 크세르크세스의 대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스파르타가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후퇴하여 싸울지, 살라미스에 남아 해군력으로 승부할 것인지 토론 중이었다. 펠로폰네소스 퇴각으로 의견이 기울자 테미스토클레스는 한 가지 계략을 짠다. 그리스 연합군이 펠로폰네소스로 퇴각할 것이라는 전보를 몰래 페르시아 측에 흘린다.

  첩보를 듣게 된 크세르크세스는 재빠르게 살라미스 해협으로 이동해 그리스 군을 포위했다. 그리스 군은 갑작스러운 포위에 당황했다. 이제 선택지는 없어졌다. 퇴각은 불가능했다. 무조건 살라미스에서 싸워야 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참 당돌하면서 간사했다. 아무리 자신의 의견을 위해서 한 행동이라도 적에게 계략을 노출시키는 건 미친 짓이다. 그러면서도 승리에 대한 자신감도 대단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리스 연합군의 배는 378척이었고, 페르시아군의 배는 1200척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기록이라 정확하지 않으나 페르시아 배 200여 척은 살라미스로 이동 중 파손되었고, 다른 200여 척은 살라미스 서부로 이동해 그리스의 퇴각로를 차단했다. 그리고 남은 600~800여 척이 그리스 연합군을 상대하기 위해 이동 중이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승리를 확신했다. 적의 진영이 잘 보이는 산 정상에 올라 그리스 해군과 페르시아 군대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압도적인 군세를 확보한 페르시아. 그리고 지휘관들의 분열로 혼란에 빠진 그리스. 전쟁 결과는 불보 듯 뻔했다. 관대한 성격으로 유명한 크세르크세스는 승리를 확신하고 전쟁에서 승리하여도 그리스인들을 모두 용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테미스토클레스의 살라미스 신화가 쓰인다.


  그리스 전함 40여 척이 갑자기 후방으로 이동했다. 이를 본 페르시아 군은 결국 저들이 내분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고 판단했다. 크세르크세스는 총공격을 지시했다. 이미 첩보를 통해 그리스 연합 내부 지휘관의 의견 충돌이 있다는 걸 들었다.

  문제는 살라미스 해협이 너무 좁았다. 거대한 페르시아의 대선단이 좁은 해협으로 들어가자 배들이 서로 뒤엉켰다. 거기에 거세지는 파도로 인해 배들은 정상적인 주행이 불가능했다. 전함들은 서로의 배에 부딪히며 혼란에 빠진다.

  곧바로 측면에 대기 중이던 그리스 연합군의 갤리선이 출동한다. 그리스의 배들은 페르시아보다 작고 날렵해 높은 파도에도 비교적 안정적인 주행이 가능했다. 날카로운 뱃머리를 이용해 그대로 페르시아 함선의 노를 차례차례 부러뜨렸다. 노가 없다는 것은 배를 움직일 방법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 해군은 이에 멈추지 않고 움직이지 못하는 페르시아 배의 정 가운데를 공략해 배를 둘로 쪼개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해군은 살라미스 해협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그리스 해군에게 농락당한다.


  그나마 이동 가능한 페르시아 함선은 전부 페레룸 항구로 퇴각했다. 그곳은 페르시아 함대가 잠시 정박하는 곳이었는데, 그리스 장군 아리스티데스는 그들을 끝까지 쫓아가 항구에 병사들을 하선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를 본 페르시아 군대는 자신의 진영 방향으로 도망가기 바빴고, 그리스 연합군은 추격을 시작했다. 함선에 남은 페르시아 병사들은 배를 버리고 바다에 뛰어들어 도망치려 했지만, 반도에 사는 그리스 인들의 수영 실력이 더 뛰어났다. 승기를 잡은 그리스 병사들은 쉬지 않고 추격했고 결국 페르시아는 살라미스의 모든 함선과 병력을 후퇴시키며 그리스의 대승리로 끝난다.

  언덕에 올라 모든 상황을 지켜본 크세르크세스는 분노했다. 화가 난 그는 흙으로 해협을 메우고 육군을 진격시켜 그리스 군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지금도 거액이 드는 새만금 사업이 기원전 5세기에 제대로 이뤄질 리 없었다. 흙을 메우기는커녕 공사 도중 오히려 그리스의 공격에 피해를 입는다.

  

  관대하지만 집요했던 크세르크세스는 이듬해 다시 플라타이아를 침공한다. 그러나 또다시 그리스에게 지며 2차 침공도 실패한다. 그리스 반도를 집어삼켜 페르시아의 영토를 완성시키려는 그의 꿈은 끝내 좌절된다.

  살라미스 해전은 기원전에도 전쟁 기술이 충분히 뛰어났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2500년 전 해전임에도 테미스토클레스가 전쟁에서 보여준 기술들은 상당히 경이롭다. 페르시아의 약점을 파악하고 이에 대비했으며, 놀라운 전술적 역량을 발휘했다. 그의 능력 덕분에 그리스는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적 앞에서도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김윤후 (vs 몽고 제국)



  세계 최고의 정복자 칭기즈 칸. 몽골의 대칸이 된 그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정복전쟁을 한다. 동쪽으로는 금나라를 무너뜨리고, 서쪽으로는 동유럽에 위치한 키예프 공국과 우크라이나-헝가리 지방까지 공격한다. 극동의 작고 조용한 나라 고려 역시 몽골의 정복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이자 2대 칸 오고타이는 고려에 형제의 맹약을 맺기 위해 사신을 보냈는데 의문의 피살을 당하자 이를 빌미로 고려를 공격한다.

  사실 몽골은 명분이 필요했다. 오고타이는 금나라를 지원하는 고려를 공격해 후방의 위협을 없애고 싶었다. 부장 살리타이로 하여금 3만의 군사를 주어 고려를 정복하도록 지시했다. 1231년 살라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압록강을 넘어왔다. 양국은 9개월간 치열하게 싸운 끝에 개경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고 고려의 국왕 고종은 살리타이의 강화 협상을 맺고 금나라를 지원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으며 1차 전쟁은 끝난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오고타이가 아니었다. 다시 한번 살리타이에게 대군을 주어 고려를 확실히 짓밟아 다신 금나라 지원을 못하게 하려 했다. 고려는 최우를 중심으로 한 무신 정권이 조정을 장악했는데, 살리타이의 남하 소식을 듣자마자 고종과 함께 강화도로 도망간다. 서경의 방어를 담당한 홍복원은 몽골에게 항복하고 심지어 살리타이에게 개경까지 가는 길까지 친절히 알려준다.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도망간 사실을 들은 살리타이는 한반도 내의 온갖 배를 불태워 없애 그들이 내륙에 상륙하지 못하게 막는다. 왕을 잡기 어렵다고 생각한 살리타이는 한반도 전체를 돌며 국토 전역을 약탈하기로 한다. 백성들이 고통받으면 국왕이 알아서 협상 테이블로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사이 한반도에 남은 고려 백성들은 죽어나갔고, 문화재는 불에 타 재가 되었다. 1231년 11월 한양을 점령한 살리타이는 계속 남하해 처인 부곡(현 용인시 처인구)에 도착한다.


  처인 부곡의 방어를 담당한 처인성은 둘레 400미터의 작은 토성이었다. 몽골군은 처인성을 무너뜨려 이 지역을 통과해야 했다. 공성전이 공격하는 입장에서 어려운 건 맞지만, 그건 수비 측이 제대로 된 성벽과 방어 무기가 갖추어졌을 때 해당되는 얘기다.

  사실 몽골군 입장에서 점령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작은 성이었다. 하지만 원정 기간이 길어지자, 군량이 필요했고 마침 처인성에 군량 창고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

  당연히 이런 작은 성 막겠다고 편성된 고려 정규군은 없었다. 결국 근처에 살던 승려 김윤후가 중심이 되어 승려 100여 명과 주변에 사는 남녀노소 백성들을 소집해 1000여 명과 함께 성을 방어하기로 한다. 살리타이는 소수의 기병만 이끌고 재빠르게 성을 무너뜨리고 식량만 조달할 심산이었다. 그는 직접 처인성 공격을 주도했다. 처인성에 남은 김윤후를 비롯한 의용병과 승려들은 무기들 들고 몽골군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쟁에선 때론 말도 안 되는 이변이 일어난다.


  몽골군은 처인성 동북부를 공략하기로 한다. 처인성의 약점이 동문 방향이었다. 김윤후 역시 이 점을 눈치채고 있었다. 김윤후는 자신을 비롯해 활을 잘 쏘는 저격수들을 뽑아 동문에 배치시키고 적의 주요 지점을 향해 쏘라고 지시했다. 김윤후는 역시 화살을 들어 몽골군을 겨냥했다. 몽골군은 쉽게 정복하리라 생각 한 작은 섬이기에 별다른 전술은 없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처인성을 향해 달려갔다.



  그 사이 김윤후는 적장으로 보이는 자에게 활을 쏘았고, 그대로 머리 정중앙을 통과했다. 적장은 그대로 쓰러져 사망했다. 죽은 자는 바로 제2차 고려 원정의 총책임자 살리타이였다. 오고타이의 총애를 받은 맹장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작은 성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쓰러졌다.



  지휘관을 잃은 몽골군은 혼란에 빠졌고, 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도망간다. 예상치 못한 살리타이의 죽음으로 몽골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2차 침공 군은 결국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한 채 본국으로 돌아간다. 김윤후가 살라타이의 대군을 막는데 필요한 건 단 한 발의 화살이었다. 김윤후의 활약에 놀란 고려 조정은 그에게 상장군의 지위를 하사했지만, 승려였던 그는 거절했다. 결국 그에게 섭랑장의 지위를 내려 어떻게든 공은 하사했다.


  그렇게 몽골의 2차 침입은 끝났지만 고려와 몽골의 전쟁은 무려 9번이나 지속된다. 처인성 전투 후 21년이 지나 김윤후는 다시 한번 역사에 등장한다. 몽골의 5차 침입 당시 충주성 방호별감으로 있었는데, 몽골군이 하필 충주성에 다시 온 것이다. 그는 처인성 때와 마찬가지로 백성, 노비, 승려들을 모아 몽골에 다시 한번 승리했다.

  김윤후는 이 승리 이후 지금의 군단장 혹은 군사령관 급에 해당하는 동북면 병마사까지 오른다. 이후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분명 고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말년을 보냈을 것은 분명하다.


  고려는 무려 50년간 전쟁 끝에 고려 조정이 항복하며 부마국으로 전락한다. 이후 공민왕의 반원 정책이 시작되기 전까지 약 1세기가량 몽골에게 공물과 여자를 바쳤으며 내정 간섭을 받는다. 고려는 전쟁 내내 승리한 적이 많지 않다. 무신 정권은 별다른 계획 없이 권력 유지를 유해 몽골에 무작정 항쟁을 선언한다. 김윤후를 비롯한 승려와 백성의 저항마저 없었더라면 부마국 수준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지키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김윤후의 활약은 고려를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줬고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시모 헤위헤



시모 헤위헤 (vs 소비에트 연방)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 북유럽의 작은 나라 핀란드. 이들은 역사적으로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배를 번갈아 받으며 자주국에 대한 열망을 키워갔다. 20세기 레닌의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사라지고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하자, 제국의 간섭을 오랜 시간 받아온 핀란드는 드디어 독립을 선언한다. 레닌은 적위군을 이끌고 핀란드로 침공하지만 자주국에 대한 열망이 큰 핀란드가 이들을 막아낸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적위군은 수많은 핀란드 인을 학살했고, 핀란드 내에 반소련 정서가 커진다.

  레닌의 후임은 이오시프 스탈린, 그 역시 핀란드 합병을 원했다. 1930년대 히틀러가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고 가자 스탈린은 히틀러에게 접근한다. 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양국은 군사 조약을 맺는다. 이 것이 세계 2차 대전의 신호탄인 독소 불가침 조약이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손을 잡고 폴란드를 침공하며 세계 2차 대전이 시작된다. 폴란드는 순식간에 둘로 쪼개지고 히틀러는 서부전선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스탈린은 발트 3국을 합병하고, 곧바로 핀란드를 공격한다.

  스탈린은 핀란드에게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안전을 핑계로 주변 지역에 대한 할양을 요구한다. 이는 수도 헬싱키를 비롯한 핀란드 남부 지역에 대한 할양 혹은 군사 주둔 권리였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핀란드가 수락 할리 없었다. 더군다나 이 지역에는 카렐리야를 비롯한 핀란드의 주요 공업 시설이 존재했다. 핀란드가 이를 거부하자 스탈린은 54만 명의 대규모 붉은 군대를 이끌고 핀란드로 침입한다.


  겨울 전쟁으로 불리는 양국의 전쟁은 1939년 11월 30일 시작되었다. 전체 인구가 370만 정도인 핀란드 입장에서 붉은 군대를 막기란 역부족이었다. 핀란드는 현역, 예비역, 퇴역군인 모두 긁어 모아도 20만 명도 되지 않았다. 군수 물자는 더욱 처참했다. 핀란드는 자체 생산하는 무기가 없어 독일을 비롯한 해외에서 수입을 받아야 하는데, 독일과 소련은 동맹 관계였기에 제대로 물자를 지원해줄 리 없었다. 가동 전차는 겨우 33대였고 비축 연료량은 보름으로 예상되었다. 반면 소련군의 가동 전차는 무려 3300대로 100배 차이였다. 핀란드의 작전은 최대한 시간을 끌며 서구의 지원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핀란드는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해 세워놓은 만네르하임 선에서 결사 항전하며 최대한 시간을 끌어 서구의 지원을 기다리기로 한다.

  소련의 대규모 항공 병력이 수도 헬싱키에 폭격을 가하며 전쟁이 시작된다. 모두의 예상대로 소련군은 빠르게 진격했고, 전쟁 시작 1주일도 안되어 만네르하임 선에 도달했다.

  하지만 만네르하임 선 앞에서 전쟁의 양상이 바뀐다. 소련의 추운 겨울에 핀란드로 향했다. 소련도 춥기로 유명했지만 핀란드의 겨울은 그 이상이었다. 예비역 파보 탈벨라 대령은 추위에 발이 묶인 소련군을 상대호 라도 호수에 진격을 막아낸단 전쟁 시작 당시만 하더라도 자신감에 차 있던 소련군은 크리스마스가 지나도록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소련군에게 하얀 사신으로 불린 시모 해위해가 있었다.


  1905년, 핀란드 농부 출신인 그는 20살에 입대해 15개월의 의무 복무를 마치고 상병으로 제대한다. 그러던 와중 겨울 전쟁이 발발해 다시 국가의 부름을 받는다. 그의 저격 실력을 눈여겨본 지휘관은 그에게 특수 임무를 부여해 어떤 소대에도 귀속되지 않는 임무를 부여한다. 그는 핀란드제 M28 소총 한자를 쥐고 눈밭 사이에서 위장하기 쉽도록 흰색 군복을 입고 홀로 전장을 누볐다. 그가 전장에서 쓰러뜨린 소련군은 무려 542명이다.



  훌륭한 저격수였던 시모 해위해는 스코프를 쓰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가 스코프를 쓰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스코프를 사용할 경우 안구를 스코프에 갖다 대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시야가 좁아지고, 머리를 들어 올려야 하므로 적에게 위치를 노출당하기 쉬워진다.  

    스코프에 있는 유리가 빛에 반사되어 적들에게 위치를 노출당할 우려가 있다.  

    영하의 날씨에 스코프의 성에가 끼게 되어 렌즈 관리가 어려워진다.   



  시모 해위해는 조준경도 없이 수많은 소련군을 쓰러뜨렸다. 조준경이 없었기 때문에 해위해의 사격 유효 거리는 짧아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정확한 위치 선정과 기민한 움직임, 그리고 놀라운 저격 실력으로 이 단점들을 상쇄시켰다. 그는 겨울 전쟁에 참전한 당시 일기를 썼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1939년 12월 21일 무려 혼자 25병의 병사를 사살하는 데 성공한다. 소련군은 그를 사살하기 위해 1개 소대를 투입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소련군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1940년 3월 6일 소련군이 그를 사살하기 위해 폭탄을 투하했다. 이때 그는 또다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유탄의 파편에 맞아 얼굴 절반이 함몰되었다. 그는 1주일간 기절했는데 다시 깨어난 날 핀란드와 소련의 겨울 전쟁이 종결되었다.


   시몬 해위해는 전장에서 놀라은 활약을 했지만, 애석하게도 핀란드의 패전을 막을 순 없었다. 애초에 50배 가까운 전력차를 대상으로 4개월 간 버텨낸 것조차 기적이었다. 핀란드의 전사자는 2만 5천 명인 반면, 소련의 전사자는 무려 12만 명에 달했다. 그리고 소련군은 전투 중 죽은 사람보다 얼어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소련은 전세를 뒤집기 위해 무려 90만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야 했다. 스탈린은 처음에 전쟁을 1주일 만에 끝낼 거라고 호언장담 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핀란드는 결국 소련에 항복한다. 하지만, 핀란드는 끝까지 항전했고 그 대가로 굴욕적인 항복 조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세계 최강이라 자부한 스탈린 붉은 군대는 망신당했다. 히틀러는 동맹국의 겨울 전쟁을 멀리 지켜보며 스탈린의 붉은 군대가 예상외로 약하다는 걸 깨닫는다 이는 1년 후 히틀러가 스탈린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시작되는 독소 전쟁의 계기가 된다.


  기원전 5세기 중동 최강 페르시아의 군대에 맞선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 13세기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한 몽골군에 맞선 고려의 김윤후. 1930년대 소련의 붉은 군대에 맞선 핀란드의 시모 해위해. 이 세명은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국을 지키기 위해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워 각자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쾌거를 이뤘다. 상대가 강하다 하여 싸워보지도 않고 무릎을 꿇느니 서서 죽겠다는 각오로 싸운 세명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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