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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Jun 22. 2021

편견과 고정관념을 깬다는 것

기존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고 인류의 진보를 위해 노력한 3인

에라토스테네스


지구의 둘레를 측정한 에라토스테네스


  

  지구는 둥글다. 이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당연한 사실이다. 이 사실을 증명한 사람은 1521년에 최초로 세계일주에 성공한 마젤란이다. 그는 필리핀에서 항해 도중 사망했지만, 스페인에서 출발해 한쪽 방향으로 달려 다시 스페인에 도착하면서 지구 구형론은 몸소 증명했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지구의 위성사진을 찍는 게 가능해졌고 이제 더 이상 반박이 불가능한 진리가 되었다.

  과학이 발달되지 않은 고대에 지구가 둥글다는 건 상식이 아닌 주장에 불과했다. 우리가 실제로 보고 느끼는 지구의 땅은 그 크기가 너무 커 평면과 다름없다. 그래서 많은 고대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모두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은 건 아니다. 일부 고대 과학자들은 연구를 통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기록에 남아있는 사람 중 고대 그리스 과학자 탈레스가 최초로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중해를 항해하면서 바다의 수평선이 조금 튀어나왔다는 사실을 보고, 지구가 둥글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외에도 기원전 6세기의 수학자 피타고라스 역시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했다. 다만 피타고라스의 경우 과학적인 증거를 제시한 것이 아닌 종교적 관점에서 지구는 완벽한 구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북부지방과 남부지방에서 관측되는 별자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통해 지구가 원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고대에도 지구가 둥글다고 말한 있었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과학자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전제로 세계 최초로 지구의 둘레까지 측정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사서 에라토스테네스였다.


  에라토스테네스 역시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지구 둘레 측정을 위해 두 가지 가정을 세웠다.



가정 1. 지구는 완전한 구형이다.

가정 2. 햇빛은 지구에 평행하게 도달한다.



  그리고 시에네와 알렉산드리아 두 도시 중 시에네에는 우물을 파고, 알렉산드리아엔 지팡이를 세운다. 만약, 시에네 우물에 들어온 햇빛의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면, 햇빛은 시에네에 평행하게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동시간에 알렉산드리아에 세운 지팡이에 생긴 그림자의 길이를 잰다. 이 길이를 통해 알렉산드리아의 햇빛에 대한 각도가 계산된다. 그리고 이 각도가 바로 원형 지구에서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 두 도시의 각도가 된다.


지구 둘레 측정 방법 (출처 : 소년 한국 일보)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의 각도 차 : 7.2도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의 거리 : 5000 스타디아 (약 925km)



  이제 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다. 1번 가정을 통해 지구가 완전한 구형이라면 360도에서 원의 둘레를 구할 수 있다. 이렇게 에라토스테네스가 구한 지구의 둘레는 25,000 스타디아 (약 46,250km)으로 계산된다. 인공위성을 통해 실제로 계산된 지구의 둘레는 40,009Km이다. 당시 과학 기술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에라스토테네스의 계산 정확도는 실로 놀라운 수준이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측정을 살펴보면 그가 기하학에 능통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우리가 더 집중해서 봐야 할 부분은 그가 당시 사람들이 갖는 고정관념을 깨고 나아가 지구의 둘레까지 측정을 해보는 도전의식이다. 우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고정관념에 묻혀 종종 창의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그는 지구 평면설 이론을 탈피했기에, 지구의 둘레를 측정해 고대 기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을 깨고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악바르 대제 초상화


이슬람과 힌두교의 화해를 이끈 악바르 대제



  중앙아시아와 오스만 제국, 북부 인도를 정벌한 티무르. 그로 인해 인도-중앙아시아의 국가가 재편된다. 그리고 티무르의 후손 바부르는 조상님의 영토를 찾겠다는 명분 하에 인도 정벌에 나선다. 바부르는 독실한 수니파 무슬림이었다. 그는 과거 티무르가 정복했던 인도의 심장 델리를 다시 정복하게 된다. 이로서 바부르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북부 지방을 모두 차지한다. 그리고 그는 인도 역사에 남을 새로운 제국인 무굴 제국을 세우고 초대 황제에 오른다.

  바부르는 호기롭게 제국을 세웠지만, 국가는 생각만큼 힘이 강하지 못했다. 제국의 아침엔 늘 적이 많았다. 아프가니스탄은 바부르의 아들 후마윤이 지배하고 있는 무굴 제국을 공격해 델리를 점령했다. 후마윤은 쫓기듯이 이란으로 도망갔으며 사파비 왕조의 도움을 받아 훗날 간신히 델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 신흥 제국은 한 가지 큰 문제점이 있었다. 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이슬람 신자였다. 반면에 인도에 거주하는 절대다수의 백성들은 힌두교 신자였다. 무굴제국 지도층과 힌두교를 믿는 피지배층 인도인들 간의 반목이 생겨난 것이다. 이는 제국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후마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악바르는 겨우 13세의 나이에 황제에 오른다. 그를 보좌하기 위해 후마윤의 친구인 바이 람 칸이 재상에 올라 섭정을 했다. 유능했던 바이 람 칸은 악바르를 잘 보좌했지만 점차 권력이 커져 황제의 권위를 위협했다. 성인이 된 악바르는 부하들과 결탁해 그를 내쫓았고 친정을 시작한다.

  악바르는 선대 황제 바부르의 의지를 이어 정복 사업을 벌였다. 제국 주변에 있는 수많은 적들을 없애야 했다. 그는 여러 민족과 국가를 정복했는데,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것은 힌두교 전사 부족인 라지푸트였다. 이들은 전사 민족답게 악바르의 군대에 맞서 싸웠지만 악바르의 공격에 결국 패배한다. 라지푸트를 굴복시킨 무굴 제국은 이들을 포섭해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다. 악바르는 데칸고원을 넘지 못해 인도 남부 정복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영토 확장은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악바르 대제가 인도 북부를 모두 통일하자 제국의 지배를 받는 힌두교도들의 숫자가 크게 들었다. 악바르 대제는 힌두교도들에게 이슬람 지배층을 인정받았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종교적 관용 정책을 실시한다. 수니파 무슬림 출신의 악바르의 종교 관용 정책은 놀랍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피지배 계층 중 타 종교에만 부과하는 인두세인 지즈야 제도가 존재한다. 이는 타 종교인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기 위한 법이었는데, 악바르 대제는 무굴 제국에서 지즈야 제도를 폐지한다.

  당시 기준으로 굉장히 놀라운 행동이었다. 지즈야 제도는 이슬람의 상징과도 같았다. 물론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지즈야는 악폐습처럼 보이겠지만, 이때는 16세기다. 당대 기준으로 보면 그리 나쁜 제도만은 아니다. 지즈야에 대한 내용은 이슬람 경전인 쿠란에 명시되어있다. 지즈야 제도를 쿠란에 써놓은 이유는 이슬람 지배계층이 타 종교 지역을 공격해 지배하게 되었을 경우, 타 종교인들에게 보호비를 받아 무분별하게 학살하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보호비를 받아야 하므로 학살의 이유가 줄어들고, 동시에 지배층에게 해당 민족에 대해 보호할 의무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쿠란엔 비 무슬림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이 쓰여있다. 이슬람이 처음 생겼을 때는 굉장히 의미 있는 제도인 셈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점차 바뀌고 이슬람 숫자가 많아짐에 따라 지즈야는 점차 세금 부과 수단처럼 변해갔다. 지배계층이 종교를 탄압하고 국고를 채울 목적으로 악용하기 시작한다. 쿠란에도 지즈야에 대한 부과 비율 같은 건 따로 정해놓지 않았기에, 이슬람 지배계층은 상상을 초월하는 만큼의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이교도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그러나 무굴 제국 3대 황제 악바르의 생각은 달랐다. 인도의 절대 다수인 힌두교도를 지배하기 위해서 강경책으로 일관했다면 반발심이 생겼을 것이 분명하다. 악바르는 종교적인 편견을 깨고 과감히 지즈야를 폐지해 힌두교인들을 끌어안았다. 이슬람과 힌두교의 극적인 화합이었다. 같은 지배층 입장에서는 쿠란에 명시된 지즈야를 폐지시키는 행동에 반대하기도 했다.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들에겐 지즈야 폐지는 무함마드에 대한 반발로 해석된다. 하지만, 악바르는 이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관용 정책을 실시한 셈이다.


  악바르의 종교 관용 정책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전 황제 시대에 강압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힌두교인들에게 다시 힌두교로 개종할 수 있는 권리를 줬다. 그리고 과거부터 이슬람과 힌두교는 지역적인 인접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교류가 있었다. 그리고 두 종교의 화합을 주장하던 시크교라는 종교도 존재했다. 악바르는 처음에 시크교 경전에서 이슬람과 무함마드를 모욕하는 구절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문책하기 위해서 시크교 교주를 궁궐로 소환했다. 그리고 그는 교주에게 경전을 가져오라 하고 직접 문제 된 문구를 읽어본다. 그런데 악바르는 오히려 경전을 읽고 감동한다. 그는 시크교 5대 구루였던 아르준을 불러 가르침을 받았고, 시크교 성전을 완공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전해진다. 그가 얼마나 종교적인 관점이 진보적이었는지 보여준다.

  그는 또한 종교적인 논쟁을 즐겼다. 그는 종교인들을 모아놓고 궁궐에서 자주 종교 토론하기를 즐겼다. 종교의 나라인 인도답게 다양한 종교인들이 있었는데, 각자의 교리를 들으며 종교에 대한 학식을 넓혔다. 16세기 종교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대에 놀라운 행보였다.


  인도에서 이를 지켜본 포르투갈인 신부는 악바르 대제를 이렇게 평가했다.



"무신론자가 흔히 저지르는 잘못을 그 왕도 범하고 있다. 이성을 신앙의 밑에다 두기를 한사코 거부하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는 문제를 불완전한 이성으로 처리하면서 자기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신부의 구시대적 평가와 다르게 악바르의 관용 정책은 무굴 제국의 번영을 가져다줬다. 악바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인도 정벌을 위해서 힌두교 피지배층의 협력은 필수적이었다. 오스만 제국이 가톨릭에 관용 정책을 펼쳐 제국의 치세를 이어간 것처럼 무굴 제국의 관용 정책도 제국의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이슬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즈야를 폐지함으로 고정관념을 깨고 화합과 진보의 정치를 펼쳤다. 그것도 종교가 첨예하게 갈등하던 16세기 인도에서 실시했다. 악바르는 분명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하는 지도자다.



살바도르 달리 - 기억의 지속


인간의 꿈을 그린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은 살바도르 달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미술에 문외한 필자는 이 작품을 해석하기 위해서 여러 자료를 찾아봤다. 달리의 예술관을 피상적으로나마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달리의 이 작품은 그가 스페인 카탈루냐의 해안선과 녹아내린 까망베르 치즈를 모티브로 만들어 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여겨볼 대상은 녹아내린 시계다. 시계 자체는 유리나 고철로 만들어진 단단한 물체다. 하지만 시계가 표현하는 시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물체일뿐더러 유동적이다. 심지어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에도 시간은 계속 흐른다. 그래서 시계는 단단하지만 시간은 부드럽다. 시계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보이는 영역이지만 시간은 무의식적으로 흐르는 영역이다.

  우리는 흔히 시간을 표현할 때, 시간과 분 그리고 초로 나누어 설명한다. 좀 더 큰 개념으로 일, 월, 년이 있을 것이고 과학분야 그중에서도 컴퓨터 과학 분야가 발달함에 따라 인간이 느낄 수 없는 초소형 시간 단위인 밀리세컨드, 마이크로세컨드, 나노세컨드까지 사용한다. 이 시간의 단위들은 지구의 공전과 자전 주기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다. 결국 시간의 단위는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약속 같은 개념이다.

  우리의 약속과 달리 실제 시간은 그냥 흐를 뿐이다.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을 굳이 우리가 편의를 위해 의식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낸 것이 시계다. 달리는 녹아내린 시계를 표현함으로 써 시간을 잠시라도 멈추고 싶은 욕구를 표현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결국 그는 카탈루냐 해변의 영원한 시간을 원했다.


  이처럼, 살바도르 달리의 시계는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살바도르 달리는 삶 자체도 아주 독특했다. 학창 시절에는 상당한 멋쟁이였다. 하지만 학교에서 가르치는 미술 공부에 크게 관심이 없어 퇴학당하고 평소 자신이 존경하던 파블로 피카소를 만나러 간다. 피카소에게 푹 빠진 그는 몇 년 간 피카소의 화풍과 비슷한 작품을 그렸다. 그는 정신분석학 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 시기를 시작으로 인간의 무의식에 관심을 가졌고, 결국 그가 초현실주의에 큰 관심을 가진 게 아닐까 생각한다. 또 그는 평소 존경하던 화가인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따라 콧수염을 기르기 시작했고, 이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다. 살바도르 달리는 관심 분야가 참 많은 화가였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현실주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근대 초기 미술은 현실을 그대로 그림에 담아내는 것이다. 이를 현실주의라고 한다. 이탈리아 예술계에는 근대 초기 이른바 르네상스로 불리는 고대 학문의 부활이 시작된다. 르네상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전주의로 발전한다. 고전주의는 고대 그리스, 로마 예술 양식의 부활로 고고학적 정확성과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두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근대 후기의 초현실주의는 기존의 합리성을 깨고 무의식의 개념을 제시한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인간의 의식 영역을 탈피하기 위해 애썼다. 현실에 존재하며 우리의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닌 무의식의 영역을 표현한 것이다. 현실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타파하고 우리가 보는 물체의 속성을 현실의 인식과 다르게 보는 것이다. 고정관념에 얽히지 않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 초현실주의의 시작이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던 세계 1차 대전 역시 초현실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 1차 대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허무하게 죽어나갔고,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가정과 재산이 파괴되어 현실에 적응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유럽은 호황이었는데 잠깐의 전쟁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는 사람들의 현실 부정으로 이어진다. 즉, 현실에서 탈피하려는 시도가 초현실주의로 표현된 것이다. 늘 그렇듯 힘든 현실은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을 가져오기도 한다.


  살바도르 달리 작품을 보면 대부분의 물체가 우리가 인식하는 것과 크게 다른 모습을 띄고 있다. 또 그의 작품에는 서랍이 많이 등장한다. 그는 인간의 뇌를 서랍에 종종 비유하곤 했다. 서랍의 모양이 인간의 뇌에서 무의식을 꺼내는 것과 유사하다고 느꼈다. 그의 손을 거치면 평범한 물체도 모두 비범하게 변했다. 녹아내리는 시계를 비롯해, 식물의 형상을 한 사람,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피아노, 사람의 형상을 한 음식물 등이 등장한다. 모두 현실에 나오는 물체를 기반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물체에 대한 인식을 뒤틀어서 표현했다. 이처럼 그는 현실의 관념을 독창적으로 해석하는 걸 즐겼다.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작가였지만, 놀랍게도 다른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걸로 유명했다. 또 다른 초현실주의 작가 앙드레 브로통과의 불화는 유명하다. 브로통은 초현실주의의 순수함을 위해서 정치적인 발언을 자제하기를 원했는데, 주변 말 참 안 듣는 달리는 자주 정치적 발언을 자주 일삼았다. 그는 스페인의 파시스트인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는데, 이 발언으로 브로통은 물론 공산주의자이자 스승과 다름없었던 피카소와도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그가 자신에 대해 스스로 했던 말이 그의 인생을 대변하고 있다.



“세상은 나를 우러러볼 것이다. 어쩌면 나는 경멸당하고 오해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위대한 천재가 될 것이고, 그것 만은 확실하다.”



  편견과 고정관념을 깬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우리가 보고 있는 현대는 가장 문명이 발달하고 진보한 세상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현대 역시 언젠간 구시대가 된다. 그 사이 또 다른 천재들이 나타나 역사, 과학, 예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것이고, 이에 따라 문명은 계속 발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에 안주한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기존의 세계관을 깨고 지구 평면설을 채택해 지구의 둘레를 계산한 에라토스테네스. 종교적인 관념을 타파해 새로운 화합의 장을 연 무굴 제국의 악바르 대제. 의식의 현실세계를 벗어나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려 한 살바도르 달리. 이 세 사람은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고 각자의 분야의 진보를 가져온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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