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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Jun 29. 2021

제주도에 가기 전에 한 번씩 읽어주세요

대한민국 비극의 역사, 제주 4.3 사건


  아름다운 섬 제주도. 국내 여행지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대한민국 대표 휴양지다.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하고, 볼거리도 풍부하다. 코로나 사태 이후 해외여행을 못 가게 되어 관광객이 이전보다 더 많이 늘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제주도지만 역사까지는 그렇지 못하다. 제주도는 한반도 역사 이래 오랜 시간 동안 차별받은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은 과거에 제주도는 고립되어 있어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차별 대우는 조선시대는 물론 일제 강점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제주도에 가장 슬픈 역사는 대한민국 광복 이후 남한 정부 전복을 노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섬에 흘러들어 가면서 시작된다.


  아름다운 섬 제주도가 피로 물들여진 사건. 제주 4.3 사건을 다뤄보자.



1947년 3월 1일 발포사건


 

 1947년 3월 1일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행사가 열렸다. 수많은 제주도민들은 삼일점을 기념하기 위해 모여 가두 행진을 했다. 군중 행렬들은 학교를 벗어나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던 관덕정을 지나가고 있었다. 오후 2시 45분경 한 기마 경관이 말을 타고 군중들 옆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던 한 어린이가 경관이 타고 있던 말의 말발굽에 치였다. 하지만 경관은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가버렸다. 그 장면을 본 주변 군중들은 분노해 경찰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항의에 당황한 경찰은 말을 타고 경찰서로 도망간다. 주민들은 경관이 사과하지 않고 도망가자 계속 경찰을 쫓아갔다. 사람들은 경찰서 앞에 모여 경관에게 사과를 요구했고, 몇몇 사람들은 경찰서를 향해 돌을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경찰서에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이 주민들을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이 발포로 인해 제주도민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갑작스러운 발포 사건은 시민들의 분노를 사기 충분했다. 주민들의 시위는 정당했다. 시위는 기마 경관의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경관은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경찰이 시민들 향해 뺑소니 사고를 일으키고 사과하지 않고 경찰서로 돌아간 것이다. 경찰은 먼저 사과하고 치인 아이를 빨리 병원에 데려갔어야 했다.

  게다가 죽은 사람 전부 총상을 등 뒤에 입었다, 일반적으로 시위를 할 때 발포하면 앞에서 총에 맞는 게 보편적이다. 이 말은 경찰들이 공포탄을 쏘고 이에 놀란 주민들이 뒤돌아 도망치자 주민들을 향해 실탄을 쏜 것이다. 명백한 경찰들의 과잉진압이었다. 사건을 보고 받은 미군정 역시 경찰의 발포를 비이성적이라고 규정했다. 이 발포 사건으로 제주도민들은 경찰에 대한 민심은 바닥에 떨어졌고 총파업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경찰은 여전히 사과하지 않은 채 강경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총파업이 시작되자 저녁에 제주도 전체에 대한 통행금지령을 선포한다. 그리고 총파업 주도자들을 체포해 고문했다. 이 사건은 중앙정부의 귀에 들어갔고,  제주도에 경찰을 파견해 사태 진정을 위해 힘쓴다. 하지만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3월 10일 제주도민들이 모여 민관합동 파업이 도내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난다. 이들은 3.1 사건 발포 사건에 대한 사과와 책임자 처벌 및 발포로 사망한 유가족들에 대한 피해 보상을 요구했다. 여기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동조했다. 공무원인 물론 학생, 노동자 대다수가 시위에 참여했고 모인 사람만 무려 4만 명이 넘었다.


  하지만 총파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앙정부와 미군정은 사건에 대해 아무런 사과를 하지 않았다.


  

1948년 4월 3일, 사건의 시작



  1947년 3월 10일 민관합동 파업 이후 약 1년간 민중의 시위는 계속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주도민의 시위는 민중 단계의 파업이었다. 이 시점까지만이라도 경찰들이 자신들의 과잉 발포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만 했다면 앞으로 일어날 제주도의 끔찍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총파업과 별개로 제주도에는 남조선로동당, 줄여서 남로당과 좌익세력이 존재했다. 이들이 제주도에 있던 이유는 한반도 내에서는 탄압을 피해 비교적 치안이 느슨한 제주도로 도망을 온 것이다. 또한 제주도는 대부분이 산지라 경찰들의 수사를 피하기에도 좋다. 이들은 산에 몰래 숨어있다 해안가로 내려와 주민들과 경찰들에 대해 게릴라적인 테러를 했다. 이른바 빨치산 활동이었다. 1947년 3월 10일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들은 군중 시위와는 전혀 다른 국가 체제의 전복을 위해 활동하는 반국가단체였다.


  문제는 남로당과 좌익 세력이 민중들의 총파업을 기회로 삼아 민중 사이에 몰래 스며들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그렇게 큰 세력을 만들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유의미한 세력을 만들어 일부 파업 세력의 성격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파업 행렬에 성공적으로 녹아든 남로당 세력은 국가 체제 전복을 위한 계획을 세운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활동하며 파업 세력과 좌익세력을 경찰 측이 서로 분간 못하게 만들었다.


  사태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중앙정부와 미군정도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당시 중앙정부 경무부장이던 조병옥은 제주도에 응원 경찰을 대거 투입시킨다. 조병옥의 경우 제주도에 오기 전 제주도민들의 대부분이 좌파 색채를 띈 공산당이라고 주장했다. 더불어 “대한민국을 위해 제주도 전역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버려야 한다”는 끔찍한 발언을 한다. 미군정 역시 제주도에서 일어난 파업을 공산당의 소행으로 결론 지어버리고 강경하게 진압한다. 그리고 과격 우익 단체들이 공산당 소탕이라는 명목 하에 제주도로 내려간다. 대표적인 다네가 서북청년회와 대한청년단이다. 진압 세력과 우익 단체 들은 조금이라도 공산당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 제주도인들을 임의로 판단해 잡아들이고 고문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아무런 죄가 없는 제주도민들도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남로당 세력은 1948년 4월 3일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다. 제주도 전체에 격문을 뿌려 경찰에게 수모를 당한 민간인들의 참여를 독려하며 활동을 개시한다. 4월 3일 제주도 전역의 오름에 봉화가 오른다. 무장대의 목표는 주요 우익 인사들의 집과 관공서였다. 하지만 무장대 총기가 턱없이 부족했고, 겨우 죽창과 몽둥이를 들고 싸웠다. 경찰 입장에서는 이 무장대를 손쉽게 진압 가능했다. 하지만 5.10 총선거를 앞둔 중앙정부는 이들에게 민감하게 반응했다.

  4월 22일이 되자 무장대도 어느 정도 진압되었다. 진압대 총책임자인 9 연대장 김익렬은 더 이상 동족상잔의 비극을 지켜볼 수 없다며 무장대에게 평화 협상을 하자고 요청한다. 무장대 대장 김달삼은 연대장이 직접 나오고 자신들이 원하는 장소에서 협상하자고 한다. 김익렬은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4월 28일 드디어 군경대와 좌익 무장대 간의 평화 협상이 맺어진다. 협상 시간으로부터 72시간 이내로 모든 전투를 끝내고 무장대는 무장을 해제하기로 약속했다. 김익렬은 제주도민들의 안전을 우선으로 생각했다.


  사건이 이대로 끝났으면, 제주도의 끔찍한 비극 역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라리 방화사건, 학살의 시작



  1948년 5월 1일 제주도 오라리에서 무장대에 의해 죽은 한 여인의 장례식이 한창이었다. 장례식에 만일의 사태가 일어날 것을 대비해 경찰 4명도 참석한다. 장례식은 다행히 조용히 끝났고 이들은 경찰서로 돌아갔다. 경찰들이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정체불명의 세력에 의해 집 10여 채가 불탄다. 이 사건을 ‘오라리 방화사건’이라고 부른다.


  사건의 전말을 이랬다. 경찰이 돌아가자 무장대와의 평화 협상에 앙심을 품고 있던 우익 단체 대원들이 모여 좌익 세력으로 의심되는 집에 찾아가 12채의 불을 지른 것이다. 경찰이 급하게 오라리로 돌아갔지만 이미 늦었다. 대원들은 전부 도망쳤고, 주민들은 불 끄기에 바빴다. 소식을 들은 김익렬은 재빨리 오라리로 갔다. 조사 결과 우익 단체의 소행임을 알아낸 그는 이를 미군정에 보고했지만, 미군정은 이를 묵살했다. 결국 평화 협상은 백지화되고 무장대와 토벌대의 전투가 다시 시작된다. 전쟁을 끝내려는 김익렬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사건이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자 윌리엄 딘 미 군정장관과 조병옥 경무부장이 제주도에 도착한다. 사건의 전말을 알던 김익렬은 제주도의 혼란을 막기 위해 다시 평화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조병옥은 이를 무시했다. 심지어 그는 조병옥으로부터 좌익인사가 아니냐는 비아냥을 받아 회의 도중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다. 김익렬은 이로 인해 해임당했고, 5.10 총선거까지도 사태가 진정되지 않았고 무장대의 테러 속에서 투표를 진행한다. 선거가 끝나고도 학살은 계속되었다. 김익렬의 후임으로 온 박진경은 전임자와 다르게 강경 진입을 지시한다. 그러던 와중 6월 18일 부하들에게 돌연 암살당하면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무장대 대장 김달삼도 월북하고 이덕구가 새로 무장대 대장으로 뽑힌다. 이덕구는 9월 15일 갑작스럽게 무장대를 모아 관공서와 우익 인사의 집을 대대적으로 습격한다. 이로 인해 미군정과 토벌대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박진경의 후임으로 온 송요찬 소령의 지시하에 대대적인 진압이 시작된다.


  그리고 송요찬 소령은 10월 17일 토벌대를 독려하는 포고문을 발표한다.



“우리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력분자를 소탕하기 위해, 해안선 5km 이외 지점 및 산악 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명령한다. 만일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무장대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이다.”



피로 물든 제주도



  송요찬의 포고 이후 제주도는 피로 물들어갔다. 1948년은 지금처럼 뉴스나 라디오가 가정마다 보급되지 않은 상태였다. 즉 송요찬의 포고문이 모든 제주도민 가정에 전달되지 못했다. 하지만 포고문 이후 토벌대는 해안선 5km를 벗어난 제주도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였다. 당시 많은 제주도민들은 내륙에 거주하다가 해안선으로 내려와 생업을 이어갔는데, 생업을 위해 일하러 간 제주도민들을 이유 여하 없이 모두 죽였다. 단지 해안선에 살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였다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송요찬은 계엄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계엄령 선언 이후 군경토벌대는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펼쳤다. 계엄령으로 제주도를 취재하기 어려워져 언론에서도 사건을 다루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제주도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다. 송요찬은 해안선 밖에 사는 모든 주민들은 이미 폭도들에게 물과 식량을 제공하거나 길을 안내했을 것이 분명하니 공산당과 다름없다 궤변을 펼쳤다. 이를 근거로 군경대는 해안선 밖의 주민들은 잡아들이거나 죽였다. 


  토벌대의 학살은 상상을 초월했다. 토벌대는 제주도 전역에 있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무장대를 수색했는데, 이들은 마을에 가서 무장대를 잡는다는 핑계로 주민을 집결시키고 가족끼리 말타기 놀이를 하거나 서로의 뺨을 때리게 했다. 만약 말을 따르지 않으면 공산당으로 간주해 구타하거나 죽였다. 그리고 총살당하는 사람을 보게 하면 옆에서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인간으로서 가능한 행동인지 의심스럽다.

  그리고 토벌대는 함정 수사도 했다. 이들은 일부러 무장대로 위장해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도움을 주변 곧바로 죽였다.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주민들에게 함정수사를 했다는 것은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힘없는 주민일 뿐이었다. 특히 우익 단체들의 만행이 가장 심했다. 이들은 무장대를 토벌해야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잊고 단지 사람을 죽이기 위해 행동했다. 우익 단체들은 임의로 무장대와 관련 있다고 판단해 처형했고, 처형 대상이 없는 경우 그 가이나 이웃을 잡아와 대신 죽이기도 했다. 심지어 자수 명단이 있으니 어서 자수하라고 종용했고 자수하면 죽이는 일도 있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무장대와 토벌대 모두 피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고, 오름과 동굴에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토벌대는 오름에 숨어있다는 이유로 무장대로 판단해 주민들을 죽였다. 에 있는 사람들은 점차 미쳐갔다.


  1949년 3월 유재흥 대령이 통합 부대장으로 오자 사태가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는 산간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토벌대 대장 이덕구를 사살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이미 수많은 민간인 학살을 통해 무장대는 힘을 잃은 상태였다. 6월 7일 군경은 드디어 이덕구를 사살하는데 성공했다. 죽은 이덕구의 목이 제주경찰서 정문에 전시되었다. 이후에 살아남은 무장대와 토벌대의 충돌이 간간히 일어났지만 유재흥은 지역 주민들을 최대한 안심시키는 방향으로 작전을 진행했기에 민간인 피해는 크게 없었다. 1957년 마지막 무장대원을 검거하면서 제주도 사태는 드디어 끝이 난다.


  제대로 된 공권력의 역할은 주민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공산당 무장대를 토벌했어야 한다. 민간인을 지키는 것이 군인의 의무다. 군인이 존경받는 이유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힘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1948년 제주도의 군경대는 무장대 토벌을 명분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을 공격했다. 1948년 제주도는 정말 끔찍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2011년 드디어 제주 4.3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위원회가 열린다. 4.3 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해 오랜 조사를 펼쳤고, 2019년 발표한 인명 피해는 다음과 같다.



총 희생자 14,422명

(진압군에 의한 희생 7,624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528명)

가해자 비율 : 진압군 78.7%, 무장대 15.7%, 기타 5.6%

진압군(토벌대) 전사자 : 군인 162명, 경찰 289명, 우익단체 640명


(출처 : 위키백과 - 제주 4.3 사건)



  위에 기록된 희생자는 신고자료를 토대로 작성되었고, 실제론 최소 3만 명에서 최대 8만 명이 사망 혹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제주도 인구 비율로 살펴볼 때 10%~20%에 달하는 주민들이 죽거나 다쳤다.


  제주 4.3 사건은 대한민국 사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중 손에 꼽힐 정도로 큰 사건이다. 특히 제1공화국 초기 혼란을 틈타 발생한 여러 학살 중에서도 가장 크고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외에도 여순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등 공산당 토벌을 빌미로 양민을 학살한 사례가 존재한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아직까지도 대중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데에는 위 사건들이 크게 작용했다. 공산당 토벌해야 된다는 취지는 좋았지만 토벌대는 인간임을 포기한 민간인 고문 및 학살을 자행했고 정부는 손 놓고 있었다.


  독재권력의 속성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독재권력이 가장 비판받는 속성 중 하나는 자유와 다양성의 억압이다. 로베스피에르의 단두대, 스탈린의 대숙청, 히틀러의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이유는 명확하다. 권력의 이념 혹은 프로파간다를 앞세워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고 전부 억압하고 죽였다. 그래야 본인들의 권력 유지가 쉬워진다.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단기적으로 국가 성장에 효율적 일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볼 때 지속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승만의 독립운동 등 일부 공은 인정하나 그는 절대 좋은 리더가 되지 못한다. 리더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문제 해결을 위한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또한 국가의 리더라면 국민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라고 뽑는 게 대통령이다. 그런 리더가 자신에게 쥐어진 총구를 시민들에게 돌리는 것은 절대 일어나선 안된다. 그리고 리더라면 토벌대의 학살 행위를 제지할 의무가 있다. 제주도의 끔찍한 참사에 대해 당시 공권력 지도자들이라면 누구도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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