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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May 11. 2021

누구나 계획은 있다. 히틀러의 전차부대가 오기 전까지는

프랑스의 대독일 전선 계획, 마지노 라인과 딜 계획

마지노 선 요새



  나는 잠에 들기 전 내일의 계획을 짠다. 아이폰의 일정 어플을 켜고 회사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 운동할 시간, 영어 공부할 시간, 전공 공부를 할 시간을 나눈다. 그리고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을 따로 분리하는 귀찮은 작업을 매일 반복한다. 이 계획이 잘 지켜질까? 전혀 아니다. 이미 난 알고 있다. 이 계획대로 내가 움직이지 않을 것이란 걸.

  그럼에도 매일 계획을 짠다. 인생은 대응의 연속이다. 우리가 다이어리에 밑줄을 치고 시간을 쪼개는 행위를 하는 이유는 그 시간을 지키라는 의미도 있지만, 변수가 발생했을 때 대응하기 위해서다. 우리의 인생을 살면 중간에 변수가 너무나도 많아서 절대 내 다이어리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도 반드시 해야 할 것, 조금 나중에 해도 괜찮을 것을 분류하고 오늘 틀어진 계획을 보완하기 위해 내일 해야 할 것을 구분할 수 있어진다. 결국 매일의 계획은 선택과 집중. 그리고 변수에 대한 대응을 위해 짜는 것이다.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전쟁도 인생처럼 필연적이고 워낙 많은 변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세계 2차 대전 당시 프랑스 역시 나름대로의 방어 계획을 세워놓았다. 1940년 프랑스가 히틀러라는 변수가 등장했을 때, 어떻게 대응했는지 알아보자.



마지노 라인 계획 세우기



  유럽의 판도를 바꾼 남자, 나폴레옹. 그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짓밟아 버린 뒤 독일 사람들은 프랑스에 대해 늘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다. 이후 독일인들은 나폴레옹의 복수를 하기 위해 틈만 나면 독일을 공격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힘겨루기는 프랑스와 독일의 경쟁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19세기 말,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가 프랑스 파리를 점령하고 나폴레옹 3세에게 굴욕을 안겨준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시작을 알리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다. 첫 번째 굴욕을 당한 프랑스. 이후 다시 경제를 회복한 양국은 세계 1차 대전에서 맞붙게 된다. 역사상 유래 없던 세계 대전은 프랑스와 독일 전선을 주 무대로 진행되었다. 다행히도 이번엔 파리를 내주는 치욕을 다시 겪지는 않았으나, 프랑스 사람들을 전쟁에 신물이 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긋지긋한 소모전과 참호전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는데, 프랑스는 승전국이었지만 전쟁 내내 독일의 공격을 막는데 급급했다. 그리고 다신 독일 군대에게 국경 진입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대대적인 대 독일 전선 방어 전략을 만들게 된다. 그것이 바로 마지노 라인. 일명 마지노선 계획이다.


  첫 번째는 실수였다. 비스마르크가 만든 신생 국가를 얕본 게 문제였다. 두 번째도 참았다. 갑작스러운 세계 대전이었고, 그리고 어찌 되었든 파리는 막았다. 이제 세 번 당하면 호구다. 프랑스는 전 세계에 유래 없는 전쟁 호구로 기록되기는 싫었기에 독일을 막기 위한 대대적인 계획을 세운다. 앞서 두 번의 전쟁은 프랑스 국민들이 독일에 대해 히스테리적인 반감을 가지게 했다. 실제로 1차 대전 전후 배상 문제에서 독일한테 가장 강압적인 요구를 한 나라가 프랑스다. 심지어 같은 동맹국인 영국조차 프랑스를 말릴 정도였다.


  육군 장교 출신 정치인 앙드레 마지노는 1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22년 프랑스 육군 장관에 오른다. 그는 세계 1차 대전에 사병으로 참전할 정도로 애국심이 투철했다. 그는 장관에 오르자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프랑스 국경선을 따라 거대한 방어 요새를 세우자고 계획한다.

  까마득한 기원전에 만리장성을 세운 진시황도 있었지만, 현대 공화국에서는 부동산 세율 구간 조정 조차 국회에서 쉽게 통과되기 어려운 법이다. 독일과 프랑스 국경 약 750km의 거대한 방벽을 세우는 법안은 더더욱 쉽게 통과되지 못할 것이다. 비용이 어마어마했다. 프랑스가 승전국 지위에 오르긴 했지만, 전쟁은 늘 이겨도 손해다. 프랑스는 파탄 직전의 경제 상황이었고, 독일은 전쟁 배상금을 갚을 능력이 안되었다. 마지노는 자신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수많은 국회의원들을 설득하고 로비를 통해 1926년 드디어 1차 실험에 대한 허가가 주어진다.


  1차 대전은 참호전으로 진행되었다.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은 모두 알겠지만, 참호전의 최대 장점은 시간 지연이다. 참호 없이 야전에서 군대가 맞붙는다면 전쟁은 금방 끝난다. 하지만, 참호를 파고 몸을 숨긴 뒤에 전투가 시작되면 처음에는 서로 죽고 죽이지 못하는 지루한 양상이 지속된다. 그러면 양군은 참호를 뚫기 위해 더욱 강한 화력의 무기를 들고 와야 했고, 사람은 사람대로 죽어 나가고 돈은 돈대로 들지만, 전선에 양상은 크게 바뀌지 않는 생지옥을 체험한 것이다.

  참호전을 겪고 프랑스는 발상의 전환을 한다. 참호 하나 점령하자고 수만 명의 군대와 막대한 화력을 쏟아부어야 한다면, 애초에 뚫리지 않을 강력한 전선의 요새를 만들어서 끝까지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즉, 수비 전술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깨닫는다. 이 판단은 꽤나 합리적이다. 참호 여러 개 보다 강력한 요새 하나가 훨씬 더 전략적으로 도움이 된다. 상대방의 돌격을 저지하기 위한 기관총과 대포를 안정적인 환경에서 사용하고, 독일의 전차 부대를 막을 수 있는 장애물을 미리 준비해놓는다면 국경 수비가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전쟁은 늘 대비를 못하고 있을 때나 당하지 대비하고 있으면 쉽게 뚫리지도, 쉽게 쳐들어오지도 않는다.


  마지노 요새는 당대 최고의 기술을 자랑했다. 20세기 내로라하는 군사 전문가가 모두 모여서 독일군을 막을 완벽한 요새를 만든다. 비슷한 건물로 몇 년 전에 지어진 서울에 고척 돔구장을 생각해보면 좋다. 내부에는 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다. 마지노 요새도 마찬가지로 지하에 돔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대규모 요새를 생각하면 된다.

  우선 국경 가장 앞에는 소규모 요새가 빽빽하게 존재한다. 이 요새에는 기관총 포탑이 달려있다. 독일군 입장에선 총안구를 노리거나 수십대의 탱크를 집중시켜 화력을 퍼부어야 요새 하나를 간신히 없앨 수 있는데, 안에 있는 병력은 지하로 연결되어 있어 설령 요새가 무력화되어도 병력과 물자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기에 유용하다. 그리고 요새 뒤에는 대규모 벙커가 존재해 중대 규모의 병력이 취식, 숙영이 가능하고 전기와 환기 기능도 있어 기존 참호전에서 또 하나의 문제점으로 떠올랐던 위생 문제도 해결했다. 그리고 병력을 열차로 수송할 수 있어서 독일의 전략에 대해 빠른 대응이 가능하도록 했다.


  초기에 마지노가 계획한 플랜은 이 정도였는데, 프랑스에서 대대적으로 조명하기 시작하자 독일에 신물 이난 국민들의 기대를 받아 점점 계획이 커졌다. 마지노와 함께 요새를 기획한 팽르베는 기존 마지노 계획에 다중 철조망을 추가하고 대전 차호와 포대를 더 많이 배치시켰다. 그리고 최후방에 현대 기술을 총동원한 거대 요새를 만들었는데, 콘크리트 두께가 무려 3.5m에 내부 탄약고, 식량창고를 배치하여 대대급 병력 운용 및 군수물자 조달이 가능하고, 전시 상황에서 병력을 빠르게 배치할 수 있는 초거대 요새를 만든다. 당시 프랑스 국민들이 전쟁에 대해 얼마나 신물이 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후 경제사정이 좋지 않은 프랑스였음에도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불했다. 정확하게 측정된 자료가 없고, 길이에 대한 측정도 기준이 달라 모두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160억 프랑, 750km의 길이로 건설되었다는 것이 보편적인 평가다. 그렇게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 10년간의 공사 끝에 1936년 드디어 독일군을 완벽하게 막을 수 있는 마지노 라인이 만들어진다.


마지노 선 계획



일반인의 상상보다 더 미친 사람, 히틀러



  마지노 선 계획의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이 약점은 프랑스도 독일도 알고 있었다. 바로 벨기에 국경지대다. 독일이 프랑스 국경이 아닌 벨기에 국경을 통과해 프랑스로 들어온다면 마지노 요새의 저항 없이 들어올 수 있다. 벨기에는 프랑스와 우호국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까지 요새를 설치하는 건 외교적으로도 좋지 못하고, 비용적인 측면에서도 나쁘다. 프랑스가 바보도 아니고 이 사실을 모른 게 전혀 아니었다. 스포츠 경기든 뭐든 결국 전략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완벽한 전략은 없기 때문에 줄 건 내줄고 취할 건 취하면서 승리를 가져와야 한다. 마지노의 계획은 프랑스-독일에 대한 국경은 마지노 라인으로 막고, 연합군은 벨기에 국경지대를 열어 둠으로서 설령 독일이 벨기에 지방으로 우회하여 침공한다면, 1차 대전에 겪었던 참호전을 겪어야겠지만 여러 이점이 있다. 벨기에가 운 좋게 독일을 막을 수도 있고, 아니더라도 시간을 벌 수 있다. 지난 전쟁처럼 지독한 소모전은 어느 정도 피할 수 있고, 벨기에 국경은 프랑스 기준 북부에 위치해 있어 같은 연합국인 영국, 네덜란드의 도움을 받기에도 용이하다. 북해에 있는 영국 해군의 도움을 받기에도 굉장히 좋다. 즉, 프랑스의 계획은 독일군이 세계 최첨단의 마지노 요새는 뚫지 못할 것이고, 벨기에 국경을 통해 독일군이 올 텐데 우리가 그 정도는 화력을 집중해서 막을 수 있다 정도로 요약이 가능하다.


  그리고 1940년 히틀러는 드디어 프랑스를 침공을 계획한다. 독일군은 애초에 마지노 라인을 돌파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도저히 뚫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을 독일 프랑스 양국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 사실 이 것만으로도 마지노 라인은 어느 정도의 역할을 수행해냈다. 난공불락의 요새 앞에서 독일 역시 생각이 많아졌다. 세계 1차 대전에서 독일군이 재미를 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프랑스가 수비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아서였다.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고, 독일군이 이를 예측해 벨기에 국경지대를 대규모로 공략해 회전문 효과로 프랑스를 포위시켰다. 이것이 바로 세계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침공 계획인 슐리펜 계획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마지노 선 계획은 프랑스는 대놓고 방어만 하겠다고 선언한 셈이었다. 결국 국경 안에서 미친 듯이 버티다가 독일군이 회생 불가능한 상태까지 왔을 때만 국경을 넘어 독일군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이런 독일군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주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바로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히틀러는 군사적인 재능이 전혀 없었다. 프랑스를 공격하자고 말은 했지만, 별다른 전략이 없어 군 장성들 보고 계속 서부전선 전략을 짜오라고 압박만 할 뿐이었다. 군 수뇌부들이 보기에 서부전선 공략은 미친 짓이었고, 실제로 일부 장성들은 히틀러에 대한 쿠데타도 계획했다.

  그리고 독일 수뇌부에서 처음 나온 전략은 기존의 슐리펜 계획에서 조금 발전한 황색 작전이었다. 차이점은 거의 없었다. 슐리펜이 주장한 우익 강화를 기반으로 약간 세분화된 전략일 뿐이었다. 히틀러와 달리 독일 군 수뇌부들은 바보는 아니어서 황색 작전이 성공할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히틀러의 계속되는 압박에 태업하기 위해 기존의 전술을 답습했다.


  그런데 일련의 사태들이 히틀러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1940년 1월 10일, 독일 공군 장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 소령 2명이 탄 비행기 메서슈미트 BF-108기가 쾰른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폭풍우와 나침반 고장으로 위치를 잃은 비행기는 라인강으로 가려다 실패하고 방향을 잘못 틀어 네덜란드 국경 지대 메헬렌에 불시착하게 된다. 그리고 해당 비행기에는 독일 총통 지령 2호가 있었는데 여기에 포함된 내용 덕분에 독일군의 군사 전략이 벨기에에 노출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황색 작전이 완벽하게 연합군에게 들킨 것이다. 다급해진 히틀러는 황색 작전과 다른 새로운 전략을 짜오라고 다시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때, 독일군의 구원 투수 만슈타인이 등판해 아르덴 숲을 공격하는 계책을 마련한다. 만슈타인은 발상의 전환을 했다. 앞서 슐리펜 계획이 핵심은 회전문 효과 만들기였다. 독일은 우익에 가장 강력하고 빠른 부대를 배치해야 한다. 그는 여기서 한 단계 발전한 낫질 작전을 독일 수뇌부에 제출한다. 벨기에-프랑스 국경의 북해 인근의 최북단과 아르덴 고원 지대로 구성되어 있다. 낫질 작전의 핵심은 바로 아르덴 숲을 돌파하는 방법이다. 문제는 아르덴 숲이 지대도 높은 데다가 나무가 빽빽하게 있어 대규모 병력 수송이 어려웠다. 아르덴 숲 옆에 흐르는 뫼즈강은 전차를 막아내는데 탁월한 자연 장애물이었다. 뚫기 어려운 이 지역을 만슈타인은 어떻게 뚫으려 했을까? 그리고 프랑스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에리히 폰 만슈타인



만슈타인의 낫질 작전


  아르덴 숲으로 진격해 올 것이란 걸 프랑스가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다만, 1차 대전 때 슐리펜 작전으로 우익이 무너져 크게 고생한 전적이 있었다. 독일이 아무리 아르덴 숲을 통해 오더라도 지대가 높을뿐더러, 나무가 밀집되어 있어 진격 속도가 느릴 테고, 그 사이 마지노 라인의 병사를 충원시켜 막을 것이라 생각했다. 프랑스 입장에선 매우 합리적인 계획이었다. 이것이 프랑스의 독일 방어 전략인 딜 계획이었다.

  딜 계획이란, 앞서 프랑스군의 가정인 마지노 라인은 절대 뚫을 수 없으니, 히틀러가 개전한다면 벨기에-네덜란드 연합군과 합세해 벨기에 동부에 있는 알버트 운하와 뫼즈 강에서 독일 군을 막아내겠다는 계획이었다. 문제는 딜 계획 아래에선 아르덴 숲에 대한 방어는 전혀 없었다. 프랑스는 이미 워 게임을 통해 아르덴 숲 진격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이를 주장한 사람은 프랑스 2군 사령관 앙드레 프레틀라다. 그는 시나리오를 통해 독일 군의 기갑 부대가 60시간 안에 아르덴 숲을 통해 뫼즈강에 도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결과를 받은 프랑스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은 프레틀라가 비관주의자라고 비난했다. 훗날 구데리안의 기갑 부대가 실제로 뫼즈강에 도달한 시간은 57시간이었으니 프레틀라의 워 게임 시나리오는 정확했다. 결국 프랑스는 딜 계획을 통해 아르덴 숲을 간과했고, 프랑스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40년 5월 10일 만슈타인의 낫질 작전이 시작되었다. 독일군의 작전명은 황색 작전. 딜 계획과 낫질 작전의 맞대결은 예상대로 낫질 작전의 완승이었다. 프랑스는 개전 한 달 만에 파리를 함락당하고 나치가 파리 개선문을 통과하는 치욕을 맞보게 된다. 비스마르크가 프랑스 파리를 점령한 지 겨우 80년도 안돼서 또 한 번 그들의 자랑하는 수도를 독일에게 뺏기는 치욕을 겪는다.

  승리의 1등 공신은 육군 사관학교 동기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하인츠 구데리안이다. 만슈타인의 경우 총사령관 프란츠 할더와 싸워 좌천된 상황이었는데, 이번 작전을 통해 다시 독일군 수뇌부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구데리안은 친구의 작전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구데리안은 도중에 히틀러의 정지 명령도 무시한 채 미친 듯이 질주했다. 여담이지만 히틀러의 이 실책으로 덩케르크에서 수많은 연합군이 탈출에 성공했다. 반면, 구데리안을 비롯한 전차 부대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고 전차부대의 속도전에 프랑스 군은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히틀러는 파리에 입성에 에펠탑에 하켄크로이츠를 꽂았다. 프랑스는 몰락해 비시 프랑스와 결사 항전을 주장한 자유 프랑스로 분리된다.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전을 겪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 비용 대비 성과가 낮았던 마지노 라인  


  일부 사람들은 마지노 라인이 무용지물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로 무용지물은 아니었다. 전쟁은 장기판과 같다. 모든 말을 지키면서 승리할 수 없다. 줄 건 내주면서 취할 건 취해야 한다. 전쟁에 있어 완벽한 작전은 없기에 상대방의 선택지를 줄이고 막을 수 있는 건 막아야 한다. 독일군은 애초에 마지노 라인을 통한 공격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군사적 이해도가 떨어지며 일반인의 상식을 벗어난 히틀러조차 마지노 라인을 통한 공격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만, 프랑스 군이 경제 대공황 와중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 설계한 방어선이 그 값어치를 했는가는 의문이 남는다. 결과적으로 마지노 라인 설계에도 불구하고 파리 방어에 실패했다. 축구로 비유하자면 4명의 수비수를 세우는 데, 3명을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로 채우고 한자리는 돈이 부족해 이 지역은 다른 선수들과 협력하여 어떻게든 막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 한 명의 수비수가 실수를 연발하고, 경기 내내 그 약점을 상대방 공격수에게 유린당하며 경기를 망치게 된 케이스라고 보면 된다.

  결국 마지노 라인은 무용지물이라 말하기엔 너무 가혹한 평가지만, 제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하기엔 그 비용이 너무 컸다.



2) 교전에 대한 인식 차이  


  프랑스는 1차 대전에서 호되게 당했기에 만반의 준비를 했다. 문제는 이전의 패배에 대한 인식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참호전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독일은 전차를 앞세워 프랑스 국경을 넘었다. 겨우 20년 사이에 군사 기술과 전술 체계는 엄청난 발전을 거듭했다. 각국에서 전투기가 생산되고 있어 공군력이 핵심 군사력으로 떠올랐다. 이에 맞춰 전술 체계도 자연스럽게 발전했는데, 프랑스는 1차 대전의 참호전에 대한 기억 때문에 당시 전술 교범을 그대로 유지했다.

  독일의 주력 부대인 전차에 대해서도 프랑스는 보병 부대의 지원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앞에서 모리스 가믈랭이 독일의 진격이 생각보다 느릴 것이다라고 평가한 것이었다. 반면에 독일은 전차를 전력의 핵심으로 봤다. 전차의 빠른 속도를 살려 프랑스를 침공하는 게 주요 전략이었다. 독일의 판단은 정확했다. 참호전이었던 1차 대전과 달리 2차 대전은 전격전으로 이뤄졌다. 겨우 개전 한 달 만에 독일군은 파리까지 진입할 수 있었다.  



3) 연합국들의 신뢰 약화

  

  프랑스는 침공 전에 크게 2가지 외교적 실책을 저지른다. 첫 번째는 라인란트 재무장이고 두 번째는 뮌헨 협정이다. 라인란트 지방은 1차 대전 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비무장지대로 설정되었다. 라인란트는 벨기에와 독일 국경에 위치하고 있어 독일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막는 중요 장치였다. 그러나 1936년 히틀러는 라인란트에 군대를 다시 주둔시켰다. 벨기에는 위기감을 느꼈지만, 전쟁을 무서워한 영국과 프랑스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 행동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던 베네룩스 3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불신을 하게 된다. 딜 계획 성공을 위해선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협력이 필수적이었고, 1차 대전 당시에도 네덜란드의 항전이 프랑스에게 크게 도움되었다. 하지만, 라인란트 재무장 때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은 프랑스는 주변 연합국의 신뢰를 잃게 되었다.

  뮌헨 협정은 1938년에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하는 것을 묵인하는 대신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은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또 나중에 다를 준비를 하고 있으니 그때 더욱 자세히 다루겠다. 이 사건들로 연합국들의 신뢰 관계가 많이 약해졌다. 히틀러가 서부전선을 열자 딜 계획에 있어 핵심전력인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는 곧바로 항전을 포기하고 항복한다. 초기에 독일군을 막으며 시간을 끌어야 할 네덜란드의 도움이 사라지면서 프랑스는 서부전선 방어에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나폴레옹 시대 이후 3번의 대결. 유럽의 강대국이었던 프랑스는 1940년을 기점으로 독일에게 완전히 역전당한다. 무려 3번이나 연속으로 국토를 유린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세 번째는 분명 다를 줄 알았다. 마지노 라인이라는 거대한 방벽을 통해 독일 군을 틀어막을 생각이었다. 이들이 계획은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독일의 전차부대는 그들의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마지노 라인과 딜 계획을 통해 독일을 막아낼 수 있을 거란 판단은 이들의 착각이었다.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워도 이를 수행하는 사람의 역량이 떨어지면 아무 쓸모가 없다.   세상은 변수가 워낙 많기 때문에 계획을 바탕으로 융통성을 발휘해 수정하는 모습도 보여야 한다. 계획은 말 그대로 계획일 뿐이다. 계획을 수행을 할 수 있는 능력과 돌발 상황에서의 순발력이 오히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일이라는 걸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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