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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Jul 13. 2021

경쟁에서 이겨내는 것이 남자의 삶

수많은 역경과 경쟁을 이겨내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3인

  우린 태어난 이상 경쟁해야 한다. 경쟁의 패배는 곧 인생의 도태를 의미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단 한 번이고, 꿈을 이루는 사람은 한정적이다. 목표가 있는 한 타인과 경쟁은 필연적이고 이겨내야 꿈에 도달한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내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다른 무기를 가지기 위해서다. 난 미래에 책을 내겠다는 목표가 있다. 책을 쓴다는 것은 인생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 이야기를 통해 내 삶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쓰는 게 내 목표다. 그래서 나는 아직 할 말이 너무 많다. 그리고 이 목표를 통해 부수적으로 경제적인 이득까지 얻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오늘 소개할 세 사람은 자신의 인생 앞에 놓인 수많은 경쟁을 이겨낸 사람들이다. 이들은 경쟁에서 승리했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승자 독식 사회 구조에서 피라미드 정점에 선 인물들이다.


  테스토스테론의 냄새 짙게 풍기는 세 남자의 경쟁에서 이기는 삶을 알아보자.




주사위는 던져졌다! 루비콘 강을 넘은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영어로는 시저(Caesar). 동구권의 황제의 대명사가 진시황이라면 서구권의 황제는 바로 이 사람이다. 시간이 지나고 이 사람 이름 자체가 황제라는 단어로 자리 잡는다. 독일의 황제 카이저, 러시아의 황제 차르가 이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유럽 전체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 바로 카이사르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많아 모두 다루지는 못하고 오늘은 그중에서도 그와 폼페이우스의 대립을 이야기해볼 생각이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로마에서 태어난다. 로마에서 잘 나가는 귀족인 율리우스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로마 재무관, 안찰관, 법무관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한다. 당시 로마 제국은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죽고 그의 추종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그의 사위였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였다. 마그누스는 라틴어로 위대한이란 뜻으로, 위대한 폼페이우스라는 의미다.

  반면 카이사르는 반 술라파의 대표 주자였다. 카이사르의 부인은 술라와 대척점에 서 있었던 루키우스 킨나의 딸이었다. 기원전 84년 술라가 쿠데타를 일으켜 로마 권력을 장악했을 때, 술라는 킨나를 숙청하고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그의 살생부에 적혀 있는 사람은 로마 공화정에서 공직을 이어갈 수 없었는데, 카이사르 역시 그의 살생부에 적혀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남았는데, 술라가 어린 카이사르의 비범함을 알아채 살려주었다고도 전해진다. 다만 이 기록은 후대에 추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일부 역사가는 카이사르가 수년간의 도주 끝에 간신히 살아남았다고도 한다. 어찌 되었든 청년기의 카이사르는 술라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제법 많은 고생을 했다.


  술라 사후 카이사르가 착실히 경력을 쌓아가고 있을 때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권력을 장악한다. 술라가 죽고 새로 선출된 집정관은 에트루리아 시민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는데, 폼페이우스가 이를 진압한다. 진압 후 로마 원로원의 군대 해산 명령을 무시한 폼페이우스는 그대로 스페인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스페인에 가 권력을 장악한다. 폼페이우스는 스페인에서 마치 왕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기회로 삼아 폼페이우스는 로마에 돌아온다. 원로원은 반란 진압을 당대 로마 최고의 부자 크라수스에게 부탁했다. 크라수스는 대부분의 반란을 진압했지만, 폼페이우스가 뒤늦게 참여해 공을 가로챈다. 이 사건으로 둘은 사이가 안 좋아졌다. 둘은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원로원에게 집정관을 요구했고 기원전 70년에 공동 선출된다.


  비슷한 시기 법무관에 오른 카이사르는 야먕이 넘쳤다. 그 역시 로마 집정관 자리를 원했다. 그는 권력을 얻기 위해 당대 최고 권력자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했다. 술라처럼 로마의 독재관이 되고 싶었던 폼페이우스는 원로원과 수시로 싸웠다. 그리고 원로원을 적절히 견제하면서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집정관이 필요했는데 카이사르가 제격이었다. 둘은 이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둘은 서로 손을 잡았고 여기에 크라수스가 포함된 세명이 로마 정치를 주도하게 된다. 이를 삼두정치라고 부른다. 폼페이우스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카이사르는 기원전 59년 집정관에 오를 수 있었다.


  성공적인 집정관 임기를 보낸 카이사르는 임기가 종료된 이후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된다. 갈리아에 간 카이사르는 무려 8년간의 전쟁을 통해 갈리아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이 업적은 원로원에게 매우 충격적이었다. 갈리아 지방의 게르만인들은 누구보다도 싸움을 잘하는 민족이었다. 그 누구도 갈리아를 정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불과 10만 안팎의 병력으로 갈리아를 정복했다. 그는 무려 300만 명의 적과 싸워 100만 명을 쓰러뜨렸으며 100만 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기록되어있다. 그가 점령한 도시만 800개가 넘었고, 나라만 300개가 넘었다. 그는 혼자 힘으로 현재 프랑스와 베네룩스 3국 지역이 있는 위치 모두를 점령한 셈이었다. 전쟁 이후 로마의 영토는 이전의 2배가량 팽창했다. 이 업적으로 카이사르는 로마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다.

  로마에 남아있던 삼두정치의 또 다른 일원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위기감에 빠졌다. 자신들보다 한수 아래라고 생각한 카이사르가 둘의 인기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폼페이우스 휘하의 몇몇 장수들과 도시들이 카이사르 편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을 보고 위기감을 느껴 갑작스럽게 대규모 파르티아 원정을 떠난다. 하지만 파르티아는 갈리아에 비해 몇 배는 강한 제국이다. 크라수스는 실패했고 먼 결국 동방에서 전사하고 만다.


  크라수스가 죽게 되자 이제 삼두정치는 붕괴된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2파전이 시작되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로마로 돌아갈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폼페이우스가 스페인에서 했던 행동을 똑같이 따라한 것이다. 정치 9단 폼페이우스는 그가 로마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대부분의 원로원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기회가 카이사르에게 찾아왔다. 기원전 51년, 로마는 집정관과 호민관을 선거하게 되는데 카이사르는 자신의 최측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호민관으로 당선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를 본 로마 원로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전국구 인기 스타이자 야망이 컸던 카이사르가 로마에 돌아온다면 공화정이 무너지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독재 정치가 시작될 거라 우려했다. 결국 원로원들은 총독 임기가 끝난 카이사르에게 즉시 군대를 해산하고 홀로 로마로 속히 돌아오라고 명령한다. 명령을 받은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군대도 같이 해산하는 경우에만 자신도 군대를 해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전쟁도 불사할 각오였다.




  원로원은 고민에 빠졌다. 카이사르의 권력을 견제해야 함은 분명했지만, 이전에 술라 시대처럼 다시 로마 내전을 겪기는 싫었다. 원로원이 문제 해결을 위해 집정관들을 소집해 회의를 연다. 원로원 중 한 명인 렌툴루스는 회의 도중 불같이 화를 냈다. 그는 더 이상 고민하지 말고, 카이사르가 기한 내 군대를 해산하지 않는다면 반란으로 간주하겠다는 서신을 보내라고 제안한다. 이 표결은 원로원에서 통과한다. 친 카이사르 성향의 호민관 안토니우스가 거부하면서 집행은 연기되었는데, 이 경우 원로원이 재투표를 통해 다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원로원을 재투표를 통해 다시 이 법안이 통과되었고, 서신이 카이사르에게 전달된다.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소집해 만일에 사태에 대비한다.

  원로원의 최후통첩이 카이사르에게 전해진다. 로마 공화정에서 원로원의 최종 권고는 매우 강력했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계엄령보다 더 강력한 명령이다. 최종 권고가 떨어지게 되면, 곧바로 국가 비상사태로 전환되고 원로원에 의해 즉결 심판이 가능해진다. 집정관과 호민관의 재가도 필요 없었다. 최종 권고를 받은 카이사르는 고민에 빠진다. 그들의 최종 권고에 순응하게 되면 군대를 해산하고 정치적 생명을 잃게 될 것이 뻔했다. 반대하게 된다면 곧바로 전쟁이다. 루비콘 강 앞에 선 카이사르는 병사들을 모아놓고 원로원의 부패와 강압적인 정치를 낱낱이 고발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병사들을 향해 한마디를 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는 드디어 13군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남하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카이사르 내전이라 불린 이 전투는 무려 4년간 지속된다. 한때 삼두정치의 거두로 로마의 정치를 이끈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이제 최후의 적이 되어 로마의 패권을 놓고 싸운다. 로마 공화정 대부분은 폼페이우스를 지지한 상황, 카이사르의 지지기반은 갈리아 속주가 유일했다. 제국 내 대부분의 세력은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다. 카이사르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카이사르 군은 갈리아와의 전쟁으로 전투에 대한 경험이 쌓여있었다. 무려 8년 동안 전장에서 갈고닦은 솜씨는 상당했다. 카이사르와 부하들은 루비콘 강 남쪽에 있는 리미니, 피렌체, 플라미니아를 정복하며 로마까지 손쉽게 진격한다. 카이사르의 빠른 진격에 놀란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은 로마를 버리고 도망친다.


  카이사르는 로마를 정복하지 않고 그대로 폼페이우스를 쫓아갔다. 그는 폼페이우스만 잡으면 이 전쟁도 자연스럽게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반도 외부의 지지를 받은 폼페이우스는 그리스로 도망가는 데 성공한다. 카이사르는 하는 수 없이 로마로 돌아갔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그리스로 도망간 사이 히스파니아, 일레르다, 마실리아, 북아프리카 지역을 차례대로 정복하며 자신의 기반을 착실히 닦았다. 그리고 최측근 안토니우스에겐 해군을 키워 그리스로 도망간 폼페이우스를 잡기 위한 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48년, 카이사르는 드디어 로마 독재관에 오른다. 술라에 이어 2대 독재관에 오르는 그는 폼페이우스를 잡기 위해 그리스 반도로 향한다. 전쟁은 예상보다 쉽지 않았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해군은 강력했지만, 폼페이우스에게도 능력 있는 제독인 마르쿠스 비불루스가 있었다. 비불루스의 활약으로 카이사르 해군은 고전했다. 하지만 역시 승리의 여신은 카이사르 편이었다. 갑작스럽게 비불루스가 병에 걸려 사망했고, 비불루스 사후 해군 사령관을 두고 폼페이우스 진영 내에서 다툼이 발생한다. 이 소식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60척의 함대를 이끌고 반격을 시작했고, 폼페이우스 해군을 무너뜨리고 해상봉쇄를 푸는 데 성공한다. 결국 그리스 침공을 허용한 폼페이우스는 다시 도망갈 처지에 놓인다.

  폼페이우스는 시리아와 이집트 중에서 어디로 도망갈지 고민하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그리스와 가까운 시리아에 먼저 서신을 보냈지만, 시리아는 폼페이우스를 거부했다. 그러자 그는 이집트로 도망갈 계획을 세운다. 당시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누나 클레오파트라의 내전이 한창이었다. 폼페이우스는 과거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자신의 도움으로 파라오에 오른 것을 생각하며 그의 아들에게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서신을 보낸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그의 입성을 허락해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향한다.

  하지만, 이는 이집트의 술수였다. 이집트로 향하는 도중 폼페이우스를 마중 나오기 위해 몇몇 이집트 배가 그의 일행을 수행하기로 했는데, 폼페이우스의 배에 탑승한 이집트 인들은 그대로 폼페이우스를 암살했다. 이집트인들은 배를 장악하고, 그들의 부하를 사로잡아 이집트로 돌아간다.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까지 온 카이사르는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로마로 돌아간다. 폼페이우스 사후에도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많았기에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4년간의 전쟁 끝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동맹 세력을 모두 격파하고 로마 공화정을 완전히 정복한다.


  기원전 44년 그는 드디어 로마의 종신 독재관, 임페라토르에 취임한다. 여전히 로마 원로원이 존재했지만, 이제 그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말로만 공화정의 형태를 유지했지 황제나 다름없었다. 그의 동상은 로마 전역에 퍼졌고, 그의 얼굴을 새긴 주화가 발행되었다. 로마 공화정에 전례 없던 절대 권력의 탄생이었다. 2인자가 된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에게 왕관을 바쳤지만 카이사르는 공화정에 예우를 갖춰 거부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자신의 권력을 채 1년도 누리지 못하고 공화주의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하며 생을 마감한다.

  

  그는 드넓은 갈리아 영토를 단 8년 만에 정복하고 숙명의 경쟁자 폼페이우스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전쟁의 승리로 로마의 권력을 손에 넣었다. 황제와 다름없는 자리에 오른 카이사르는 로마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로 평가받았고, 아직까지도 황제의 대명사로 자리 잡는다.




내 자리는 스스로 얻어내고 지킨다! 태종 이방원



  국왕의 자리는 기본적으로 세습된다. 물론, 로마나 신라처럼 특수하게 투표를 통해 왕을 선출했던 나라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국왕의 직위는 세습된다. 세습의 기본 원칙은 대부분 적장자를 1순위로 둔다. 하지만 적장자가 무능하고 총명한 동생이 있다면 왕의 명령에 따라 후계 순위는 충분히 뒤바뀔 수 있다. 이 과정을 유교에서 어진이를 선택한다고 하여 택현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 택현이라는 기준은 늘 모호하다. 아버지 입장에선 어진 사람일지 몰라도 다른 형제들이 이를 쉽게 납득할 리 없었다. 그리고 국왕은 세자 책봉을 잘못할 경우 자신의 왕위를 걸어야 한다. 조선 전기에 진행된 택현 중 가장 유명한 사례가 바로 태종의 첫째 아들이었던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고 그의 동생 충녕대군이 세자에 오른 것이다. 이 충녕대군이 바로 세종대왕이다.


  조선은 이 세자 책봉 문제가 거의 매 왕마다 발생했다. 적장자로 원자 책봉이 되어, 세자 코스 밟고 왕으로 즉위한 사례가 많지 않다. 그리고 세자 책봉 문제는 심지어 조선 초대 왕 이성계의 아들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오랜 시간 동안의 준비 끝에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세운다. 조선 건국에 있어 사대부들의 도움을 크게 받은 이성계는 유교 사상을 새로운 국가의 이념으로 세운다. 그리고 국가 운영에 있어 전반적인 사안들을 유교적 성격에 맞게 처리한다.

  1392년 새로 탄생한 조선은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나이가 50을 넘은 태조 이성계의 후계자 문제였다. 이성계는 정도전을 불러 자신의 후계자로 누가 되면 좋을지 물었다. 정도전은 유교적 관점에서 택현과 적장자 우선 계승 원칙을 설명하며, 국왕께서 직접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간언 했다.



신의왕후 한씨 (사망) 소생 왕자


첫째 진안군 이방우

둘째 영안군 이방과

셋째 익안군 이방의

넷째 회안군 이방간

다섯째 정안군 이방원

여섯째 문안군 이방연


신덕왕후 강씨 소생 왕자


일곱째 무안군 이방번

여덟째 의안군 이방석



  이성계에게는 총 8명의 왕자가 있었다. 이 중 건국 이듬해 사망한 첫째 이방우와 여섯째 이방연의 경우 사망했다. 장남 이방우는 세자 책봉 직전에는 살아 있었는데 알 수 없는 이유에 의해 권력에서 배제되었다고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그가 고려에 충신이라 아버지의 조선 건국에 반대에 야인에 되었다고도 전해지나 설득력이 높지 않다. 실질적으로 왕세자가 가능한 인물은 이방우, 이방연을 제외한 6명이었다.


  이 중에서 이성계는 놀랍게도 막내아들은 의안군 이방석을 왕세자로 지목한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조선 첫 번째 왕비 신덕왕후의 소생 중에서 왕세자로 책봉 가능한 유일한 인물이 이방석이었다. 신의왕후는 조선 건국전에 사망해, 조선이라는 나라의 첫 왕비 자격은 신덕왕후가 얻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이성계는 둘 중에 한 명을 왕세자로 책봉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정도전, 조준 등 주요 대신들을 불러 모아 토론한 결과 이방번의 경우 평소 행실이 경솔하고 볼품이 없어 이방석이 세자에 적합하다고 결론이 났다. 앞서 말한 택현의 논리를 앞세운 것이다. 그리고 이방번이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의 조카사위라는 점도 불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8명의 왕자 중 가장 어린 10살 이방석이 왕세자로 책봉된다.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특히나 이들은 아버지를 따라 조선을 건국하는 개국 공신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아버지의 선택에 분개한 것은 다섯째 이방원이었다.


  그가 분개한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다른 왕자 중에서 조선 건국에 대한 공이 확실했다. 1388년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는데,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남하하고 있을 당시 고려의 국왕 우왕과 그의 측근 최영은 이성계를 막기 위해 그의 부인 신덕왕후와 아들을 사로잡기로 한다. 회군을 지시한 이성계는 부인과 자식의 안위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이 일련의 과정을 보고 있던 이방원은 아버지가 군대를 일으키자 눈치껏 신덕왕후와 이복동생들을 데리고 도망쳤다. 그는 최영의 추격을 간신히 뿌리쳐 안전하게 가족들을 지켰으며 사태가 일단락되자 다시 이들을 데리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392년 이방원은 친어머니 신의왕후의 사망으로 삼년상을 치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성계가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고려를 지키기 위해 싸워온 정몽주는 이 틈을 타 정도전, 조준 등 이성계 일파의 주요 인사들을 귀양 보내고 조정을 장악해 이성계를 암살하려 했다. 마침 이성계의 아들들 대부분이 상을 치르고 있어 정몽주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식을 들은 이방원은 상 중이었음에도 자리를 박차고 나와 이성계가 있는 벽란도로 향했다. 그는 아버지를 데리고 개경에 돌아왔고, 이성계 일파를 조정으로 돌려보내 사건을 일단락시켰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반 이성계 일파의 수장이자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제거했다. 물론, 이는 이성계가 바라는 바는 아니었다. 평소 정몽주를 존경하던 이성계는 그를 죽이는 것을 탐탁지 않아했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에게 화를 냈다고 전해지지만, 정치적으로 볼 때 이방원의 행동은 불가피했다.  분명 정몽주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조선 건국은 힘들었을지 모른다.

  비록 정몽주 사건으로 이성계와 이방원의 사이가 틀어졌지만, 그가 조선 건국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어 보인다. 그는 뛰어난 상황 판단력으로 아버지를 적재적소에 도왔다. 이방원이 아니었다면, 이성계는 조선 건국이라는 대업을 이룰 수 없었다.

  

  또한, 그가 유일하게 아들들 중에서 고려 과거 시험을 통과한 유학자라는 점을 통해 볼 때, 아들들 중 능력이 가장 특출 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세자 책봉에 있어 불만이 많던 이방원은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시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조선 건국을 한 이듬해 곧바로 신덕왕후가 사망해 이방석의 지지기반이 약해졌다. 게다가 명나라와 조선이 표전문 사건으로 사이가 틀어졌다. 정도전은 명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요동정벌을 발표했다. 그리고 정도전은 요동 원정군을 모으기 위해 사병 혁파를 중앙군에 편입시킬 것을 지시한다. 이는 당시 귀족들 특히 세자들에게 큰 반발을 산다. 당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은 정치권력에서 배제되어 유일한 재산이 사병이었다. 사병 혁파는 자신들의 유일한 생명줄을 자르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방석의 형인 이방번의 사병만은 인정해 준다는 소식을 듣자 왕자들은 더 화가 났다.


  이방원은 평소 정도전의 개혁에 반발하던 인사들을 대거 모아 1398년 쿠데타를 일으킨다. 조선이 건국된 지 불과 6년 만에 일어난 반란이다. 평소 자신이 스승처럼 생각하던 하륜을 비롯해, 평소 눈여겨보던 사대부 이숙번 등이 참가한다. 이방원은 이복동생 이방번에게 쿠데타에 동참할 것인지 물었다. 이방번은 이방원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반란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려주지도 않았다. 결국 그는 손 놓고 있다가 이방원에 의해 살해된다. 정도전을 비롯해 그의 정책에 지지하던 남은, 심효생들의 모두 살해당했다. 특히나 조선 건국에 있어서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정도전의 죽음이 가장 안타까웠다. 정도전은 죽기 전 이방원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태종이 작성한 태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어 실제와 다를 수 있다.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신의왕후 소생의 둘째 아들 이방과가 조선 2대 왕 정종에 오른다. 하지만 실권은 이방원이 쥐고 있었다. 이방원은 형을 대신해 국정 전체를 담당했다. 이방과는 정치에 그리 관심이 없었다. 동생 이방원을 양아들로 삼아 세자에 올린 뒤, 하루빨리 양위하려고 했다. 1400년 이방원의 형 희안공 이방간이 다시 난을 일으켰다. 그는 동생 이방원이 쥐락펴락하는 조정을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1차 왕자의 난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진 박포와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세력이 워낙 적어 쉽게 진압당한다. 애초에 조정 대부분의 신하들은 이방원의 능력을 높게 평가했기에 이방간의 난에 참여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결국 이방간과 박포는 포박되어 이방원에게 끌려온다. 박포는 당연히 곧바로 처형되었고, 차마 형을 죽일 수 없던 이방원은 그를 멀리 유배를 보낸다.


   2차 왕자의 난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1400년 이방원이 드디어 조선 왕에 오르게 되었고, 그가 바로 조선 3대 왕 태종이다.


  이방원은 다른 조선 왕들에 비해 남달랐다. 대부분의 조선 왕들은 세자 교육이라는 틀에 갇혀 학습했다. 물론 조선의 세자 육성 시스템은 굉장히 체계적이었으나 이방원의 경험에 비할바는 못된다. 그는 어릴 적부터 스스로 공부해 유학자가 되었고, 아버지를 도와 왕이 되는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며 스스로 왕의 길로 나아갔다.


  결국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여말 선초의 최종 승리자가 된다. 그 배경에는 어릴 적부터 정해진 길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간 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쿠바의 영웅 혹은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



  20세기 가장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 피델 카스트로. 누군가는 그를 공산주의 독재자라고 평가하고, 누군가는 쿠바를 구한 영웅이라고도 평가한다. 그는 공산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언론을 탄압 헸으며 수많은 반대파를 숙청했다. 반면에 무능하고 부패한 쿠파 정권을 전복시켜 그나마 지금 쿠바가 정상적인 국가 반열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 카스트로다. 비록 이념 전쟁 속에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지만 그가 남자다운 인생을 살았다는 점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상대로 당당히 협상을 요구했다.


  피델 알레한드로 카스트로. 그는 꽤나 부유한 스페인 이민자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6년 쿠바 비란에서 태어난 그는 좋은 배경 출신답게 고등 교육을 통해 하바나 법대에 입학해 변호사로 활동했다. 1930년대 지식인 사이에서는 레닌의 인기가 대단했다. 소비에트 연방이 한창 성장하고 있었을 때라 더욱 그랬다. 그는 변호사 출신으로 노동자들과도 친하게 지내면서 공산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딱히 공부를 잘하지도, 변호사로서 성공하지도 않았지만 30대 아저씨 카스트로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는 사건이 일어난다.


  쿠바는 19세기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하지만,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함에 따라 스페인으로부터 쿠바를 할양받게 된다. 이후 미군은 쿠바에서 철수했지만 내정을 간섭할 권리를 얻었고, 이 과정에서 쿠바 공화국이 탄생한다. 미국의 간섭은 여전했으나 오랜 시간 스페인의 식민지로 살았던 이들은 초기에 친미 정권에 대해 크게 나쁜 인식을 가지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쿠바의 주 수입원은 관광 산업이다. 문제는 1920년대 미국에서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미국 코앞에 있어 영향권에 속하는 쿠바 역시 타격을 입게 된다.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1933년 산 마르틴이 이끄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급진 정권이 장악했다. 이후 계속 군인들의 쿠데타가 발생했고, 이를 정리한 것이 풀헨시오 바티스타다. 그는 군대에서 중사로 복역 중이었는데, 친한 군인들과 합심해 쿠바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대통령에 오른다. 1940년 바티스타의 첫 임기는 나쁘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쿠바를 나름 잘 정리하고 교육을 확대시켜 쿠바의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하지만, 반대파를 숙청하고 독재 체제를 갖추려 하자 많은 사람들이 반발하기 시작했고, 1944년 대선에서 패배해 플로리다로 망명을 떠난다.


  그가 떠난 뒤 쿠바는 다시 부정부패와 비리로 휩싸여 정상적으로 국가가 운영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바티스타는 1952년 3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쿠바로 돌아온다. 부정부패에 신물이 나있던 쿠바인들은 그의 복귀를 환영했다. 그러나 그는 두 번째 임기에서 경제 성장은커녕 오히려 미국에 달라붙어 권력 유지에만 신경 썼다. 비리 문제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대학과 언론 및 의회를 통제해 독재 체제를 키워나가는데만 초점을 썼다. 그리고 그는 비밀경찰을 활용해 국민들을 감시했고, 자신의 권력에 조금이라도 반하는 사람이 있으면 색출하려 했다. 그의 집권 이후 빈부격차가 더 심화되고 실업률이 40%까지 올라갔다. 여기에 부정선거 의혹까지 더해지며 쿠바 국민들은 바티스타 정권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바티스타의 독재와 정부의 부정부패에 눌려있던 국민들과 카스트로는 행동에 나선다. 카스트로는 1953년 7월 26일 산티아고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아무리 정부가 무능해도 일개 시민들의 소규모 봉기를 진압 못할 리 없었다. 카스트로는 병영 습격에 실패하고 정부에게 사로잡힌다. 그리고 법정에서 15년 형을 선고받은 그는 이때 한 시대를 풍미하는 멋진 말을 남긴다.



역사가 나의 무죄를 증명할 것이다.(La historia me absolvera!)


  이 말은 쿠바 국민들의 가슴을 크게 울렸다. 곳곳에서 카스트로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여론에 못 이겨 바티스타는 2년 만에 카스트로를 석방시킨다. 그는 멕시코로 이동해 더 많은 군대를 모아야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때 만난 사람이 바로 쿠바 혁명의 또 다른 영웅 체 게바라다.


  카스트로는 1956년 체 게바라를 비롯한 82명의 대원들과 함께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로 향했다. 하지만, 쿠바 정부는 이를 눈치채고 있었다. 82명의 대원 중 내륙에 숨어 들어간 건 10여 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산속에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친다. 재밌는 사실은 혁명 대원들이 쿠바의 마을을 돌며 사람들에게 의료와 교육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법학과 출신의 카스트로와 의사 출신이었던 체 게바라가 있어 이것이 가능했다. 결국 이런 행동으로 혁명 대원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환영받기 시작했다. 이미 바티스타의 독재에 신물이 나있던 마을 사람들에게 혁명군은 희망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자 혁명군의 사람이 점점 불어났다. 심지어 혁명군은 이제 쿠바 도시 전체에 혁명에 동조할 사람들을 심어놓을 수 있었다.


  세력이 커진 혁명군은 1958년 12월 체 게바라가 이끄는 군대가 산타클라라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 있던 혁명 세력이 동시에 일어났고, 정부는 패닉 상태에 빠진다. 같은 해 12월 13일 쿠바의 수도 하바나에서 혁명군이 승리를 거두게 되자 드디어 바티스타의 정권은 종지부를 찍는다. 사람들이 얼마나 바티스타 정권에 신물이 나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바티스타 패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미국의 배신이었다. 미국 정부는 바티스타의 무능함을 알고 그를 포기했다. 바티스타는 미국으로 망명을 요청했지만, 미국 정부는 이를 거절했고 결국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을 떠난다. 그렇게 30대 쿠바의 변호사는 이제 쿠바의 지도자가 되었다.

  미국은 카스트로 정권을 초기에는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열렬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했다. 카스트로가 쿠바 내에 있는 미국 기업을 추방시키고 대규모 국유화를 주장하자 양국의 사이가 틀어진다. 그러자 미국은 CIA를 활용해 카스트로를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한다. 결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 망명자 출신의 1,500여 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훈련시켜 쿠바에 상륙해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고 오라는 지시를 내린다. 카스트로가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미국은 본래 자신들이 배후에 있음을 숨기려 했는데, 그러기엔 작전이 너무 거대했다. 미국 정부는 몰래 키운 망명자 부대를 상륙시킴과 동시에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공군 병력도 출발시켜 쿠바 공군을 무력화시키려고 했다. 이런 대대적인 작전을 수행하는 데 전 세계 그 누구라도 그 배후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결국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침공이 시작되었고, 전쟁 경험이 많은 카스트로가 쉽게 승리한다. 게릴라전으로 단련된 쿠바 군의 대응은 무척 빨랐다. 이 사건이 바로 피그만 침공이다.

  미국의 행동에 제대로 열 받은 카스트로는 국민들에게 미국과의 전쟁을 호소한다. 그리고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 소련에게 SOS를 요청한다. 이 소식을 들은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는 기회가 왔음을 직감하고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기로 한다. 미국 입장에서는 비상사태였다. 자신들 바로 코 앞에 있는 나라가 공산화가 되는 것에 모자라 심지어 소련의 미사일까지 주둔을 허용하는 것은 미국에겐 위협적이 행동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냉전 체제에서 가뜩이나 소련에게 연전연패를 당하고 있었고, 쿠바에 소련 미사일 기지까지 설립을 허용한다면 다음 대선은커녕 당장 탄핵까지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상황인 셈이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이 행동이 세계 3차 대전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때 케네디는 미국이 보유한 미사일 중 터키에 있는 무기가 떠올랐다. 케네디는 이를 이용해 흐루쇼프와 협상을 벌였다. 이야기가 잘 마무리되어 양국의 미사일을 철수하고 쿠바에 대한 안전을 약속받으며 물러갔다. 갑작스러운 소련의 행동에 카스트로는 항의했지만, 소련은 인류 전체를 잃을 바엔 동맹국 하나를 잃는 게 낫다는 말을 하고 쿠바에서 손을 뗐다.


  이후 카스트로는 1959년부터 1976년까지는 쿠바의 총리에 올라 정치를 실시했고, 1976년부터 2008년까지는 국가평의회 의장을 재임했다. 무려 80살의 나이까지 정치를 한 그는 2008년을 끝으로 정계에서 물러났으며, 2016년 9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의 후임으로는 같이 혁명에 참여한 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뽑혔으며, 올해 4월 16일까지 공산당 제1서기직을 역임했다. 현재는 미겔 디아스카넬 대통령이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역임하고 있다. 이로서 카스트로의 독재는 현재 완전히 끝난 상태다.


  카스트로는 독재자다. 그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언론을 탄압했다. 쿠바의 정치인들 중에서 카스트로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총리직 재임 중에 즉결처형권이 있어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사법기관을 초월해 사형을 시키거나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 1980년대 동구권을 중심으로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자유주의 바람이 부는 와중에도 그는 언론 탄압을 유지했다. 그는 분명히 독재자다.

  하지만, 독재자이지만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부분도 존재한다. 그는 제3세계에 대한 지원 사업을 자주 벌였다. 그리고 독재자임에도 불구하고 우상화 정책을 펼치지 않았다. 쿠바에 가면 체 게바라에 대한 동상이나 초상화는 쉽게 볼 수 있지만, 카스트로에 대한 동상은 전혀 없다. 그리고 열렬한 공산주의자는 아니어서 서구에 유화정책을 펼치고 국가 복지 시스템을 정상적으로 유지시킨 점은 그가 그나마 좋은 평가를 받는 큰 이유 중 하나다. 실제로 동구권에서 시작된 공산주의 붕괴에서도 쿠바가 큰 위기 없이 살아남은 데에는 카스트로가 쿠바의 사회 기반을 잘 닦아 놓았고, 서구 경제 시스템을 어느 정도 차용한 점들이 작용한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무능한 정권 속에서 고통받고 있던 쿠바 국민들을 구했다. 본인은 변호사로 비교적 괜찮은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의를 보고 참지 않았으며, 잘못된 정부의 행동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초강대국과의 대결에서도 쉽게 머리를 숙이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미국 CIA에서 그를 죽이기 위해 미인계를 써서 암살하려 했으나, 스파이가 카스트로에게 반해 그를 죽이지 못했다는 것은 너무 유명한 일화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충분히 비판받을 여지가 많지만, 확실한 건 잘못된 것에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신념과 거대한 적 앞에서도 쉽게 무릎 꿇지 않는 점만큼은 높이 살만 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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