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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Jul 27. 2021

당신의 인생을 바꾸는 방법

한번 주어진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간 3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인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주변에 난관을 극복하고 인생을 바꾼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피나는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노력만으로 인생을 바꾸지는 못한다. 성공에 있어 운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뭐라도 인생을 바꾸기 위해 남들이 어려워하는 일을 하나씩 해나가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 오늘도 성공을 위해 나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응원하며, 아래 세명의 이야기가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한다.



간호학의 대모,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1820년 5월 12일 이탈리아 피렌체를 여행하던 영국인 부부 사이에서 딸이 태어난다. 둘은 피렌체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로, 아이의 이름을 이름을 플로렌스로 지었다. 이 부부는 영국에서 꽤나 잘 살던 부유한 집안이었다. 플로렌스는 부자 부모님 덕분에 남부럽지 않게 잘 자라고 있었다. 그러다 17살이 되자 그녀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돌보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당시 간호사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좋지 못했다. 간호사는 병원에서 잡일을 도맡아 했으며 시체를 다뤄야 한다. 이런 점 때문에 상류층 집안의 사람들은 간호사를 하기를 기피했다. 평균 임금도 매우 낮았다.

  플로렌스가 가족들 앞에서 간호사가 되겠다고 선언하자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그녀의 아버지는 플로렌스가 딴생각하지 못하게 혼사를 준비했지만 플로렌스는 모두 거절했다. 플로렌스는 나중에 내가 가족에게 간호사가 되겠다고 말하자 “마치 내가 식모가 되겠다고 말한 것 같은 반응이 나왔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녀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이후 플로렌스는 집에 있을 때면 의학과 병원 관련 서적을 사 와 읽기 시작했고 가족과 여행을 갈 때면 인근 병원, 요양원, 빈민 수용소를 견학했다.


  그렇게 10년이 넘도록 조용히 자신의 길을 향해 묵묵히 걷던 플로렌스는, 33살에 런던에 있는 소규모 자선 요양소의 책임자가 된다. 그녀의 풀 네임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다.


  그녀가 35살이 되던 1854년. 크림반도를 넘어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와 이를 막으려는 영국-프랑스-오스만 연합군 사이의 전쟁이 일어난다. 이 크림 전쟁은 무능한 지휘관들이 많았던 전투로 유명하다. 잘못된 지휘체계와 전수로 군대에선 많은 사상사가 발생했다. 또한 보급 체계도 제대로 구성하지 못한 채 전쟁에 돌입해 제대로 된 물자를 공급받지 못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군 간호사로 크림전쟁에 참전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나이팅게일의 모습이 바로 이 전쟁에서의 모습이다. 당시엔 전쟁에는 제대로 된 의료 시스템이 없었다. 많은 사상자가 나오자 시체를 둘 곳이 없어 병사들은 자신들이 자는 숙소 안에 놓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에는 전장에서 총에 맞아 죽는 사람보다 전염병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았다. 보건 위생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상황이 이렇자 영국의 한 장군이 전장에서보다 나이팅게일의 병원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고 비아냥 거렸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나이팅게일은 장군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 통계자료를 준비했는데, 실제로 전장보다 병원에서 사람이 많이 죽어나갔다. 이 일을 계기로 그녀는 전장에서 필요한 의료 규범과 제대로 된 위생 관리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이팅게일은 군 의료 체계 개선을 상부에 끊임없이 요구했다. 초기에 잘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영국 군 장성들을 설득하기 위해 명확한 통계자료를 제출했다. 그녀는 늘 통계적인 차트를 보여주며 남들에게 자신의 업무에 대한 필요성을 설명했다. 이때의 노력으로 그녀는 훗날 여성 최초 통계학자로 평가받으며 영국 왕립 통계학회 최초의 여성 회원으로 선정된다. 그녀의 피나는 노력 덕분에 영국군은 위생 시스템을 도입하기로 한다.

  그녀가 전장에 도입한 위생 시스템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일들이다. 그만큼 당시 위생에 대한 인식이 떨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번 사용한 붕대를 다시 사용해서는 안된다.

한번 사용한 침대 시트에 환자를 눕혀선 안된다.

환자를 한번 만지고선 반드시 손을 씻는다.



  나이팅게일의 노력으로 영국군 부상자 사망률은 40%에서 2%로 떨어졌다. 위상 문제로 죽는 사람은 거의 사라졌다. 그녀는 전장에 나간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수시로 최전방에 나가 환자들을 보살폈다.

  

  또한 그녀는 전쟁 도중에 위생 체계만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 당시 연합국 오스만 제국은 특유의 관료주의와 무슬림 전통에 따라 야전 병원을 운영했다. 오스만 측에서 관료주의 때문에 병사들이 치료받지 못하고 있어 오스만 제국 연합군에도 영국과 같은 위생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육군 고위직에 그녀의 친구인 시드니 허버트가 있어 그녀는 한결 편안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수뇌부에 전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인맥과 돈을 총동원해 전장에서 죽어나가는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힘썼다.


  그녀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헌신했다는 점에서 '등불을 든 여인(The Lady with the Lamp)'라고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녀의 헌신은 영국의 여왕 빅토리아에게까지 알려져 직접 치하를 보냈다.


  이후 나이팅게일은 전쟁을 통해 얻은 유명세를 활용해 최초의 근대식 간호학교 세인트 토마스 병원을 세운다. 그녀는 세인트 토마스 병원에서 전염병이 퍼지는 경로를 연구했다. 그리고 환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병원에서 필요한 최소 환자와의 거리, 온도와 습도, 간호사 1명당 담당해야 하는 최대 환자 수 등 의료 체계에 대한 다양한 기준을 세웠다. 오늘날 병원의 환자 관리 규정에 대한 기초를 세운 것이 나이팅게일이다.

  그녀는 온화한 이미지와 달리 실제 성격은 매우 불같았다. 그녀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상부에 행동을 요청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배짱이 좋고, 강단이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요구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치료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불상사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녀는 오늘날 간호사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간호사들이 사명감을 갖고 환자를 돌보게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오늘날 국제적십자사에서는 매년 세계의 우수한 간호사들에게 나이팅게일 기장을 수여한다. 그리고 1893년 간호사로서의 윤리와 간호 원칙을 담은 나이팅게일 선서를 발표했다. 이는 미국의 한 간호학교에서 그녀의 정신을 본받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되었다. 간호학도들은 손에 촛불을 들고 흰 가운을 입고 아래의 선서를 하고 있다.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나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전력을 다 하겠으며 간호하면서 알게 된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면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부유한 가문에서 평범하게 살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그녀는 마음속에 생긴 사명감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 그는 간호학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내야 할 때 절대 침묵하지 않았다. 꿈에 대한 열정과 정의에 대한 확신이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다. 그녀는 오늘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간호사로 평가받고 있다.



앤드류 카네기


성실함과 판단력으로 철강왕이 되다, 앤드류 카네기



  미국의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는 존 록펠러, J.P 모건과 함께 19세기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거대 기업인이다. 어렸을 적 돈이 없어 기차역에서 심부름을 하던 아이는 미국 역사에 남을 손꼽히는 부자로 생을 마감했다. 추정되는 그의 재산은 약 3720억 달러로 한화로 환산하면 약 450조 원이라고 한다. 청년 시절 돈을 벌기 위해 방적 공장 노동자, 기차역 심부름, 전보 배달원 등 다양한 일을 했다. 그는 특유의 성실함과 놀라운 판단력 그리고 행운까지 겹치며 수조 원대 재산을 축적한 부자가 된다. 스코틀랜드의 평범한 소년이 어떻게 미국 철강왕이 됐는지 알아보자.


  1835년 스코틀랜드 파이프 던펌린에서 태어난 앤드류 카네기는 평범한 섬유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엄마는 동네에 있는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카네기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회사에 가 조금씩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가내 수공업의 수요가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회사도 힘들어졌다. 결국 카네기의 가족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친척이 있었던 미국에 간다.

  카네기가 간 곳은 펜실베이니아 주의 피츠버그였다. 아버지는 이번에 용광로에 석탄을 넣는 화부 일을 했다. 카네기 역시 아버지를 따라 이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이를 눈여겨본 고용인은 그에게 전보 배달부 일을 해볼 것을 추천했다. 그는 전보 배달부 일도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또다시 인정을 받아 전신기사로 승진한다. 그리고 1853년에는 펜실베이니아 철도 회사의 전신 기사로 정식으로 취직한다.


  1860년대 미국에서 노예제 갈등으로 인해 남북전쟁이 일어난다. 이로 인해 철도 회사는 엄청난 부흥을 맞게 된다. 전쟁이 시작되자 운반해야 되는 물자는 산더미처럼 쌓였고, 미국 정부는 군용 물자를 운반할 철도 노선이 필요했다. 미국 정부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거대 노선을 만들고 싶어 했다.

  철도 회사에서 일하던 카네기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었다. 그는 철도 운송량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과, 여전히 미국에 나무로 된 다리가 많다는 점을 보고 이 다리들을 모두 철제 다리로 바꾸기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862년 키스톤 브리짓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철제 다리를 만드는 회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1865년 철강회사를 설립해 철도 건설의 주재료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카네기는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늘 열려있었다.

  당시 제철사업은 주로 용광로에서 만들어진 철제 재료를 유통단계를 거쳐 별도의 회사로 운반하는 분업 구조였다. 카네기는 이 과정을 한 공장에서 진행하도록 해 생산효율을 높였고, 제품 단가를 낮췄다. 또한, 철 원료를 생산하는 회사를 인수해 철강 제조에 관한 모든 과정을 자신이 손에 쥘 수 있었다. 원료 생산을 제한함으로써 미국에서 만들어지는 철에 대한 독점 체계를 만들었다. 이는 치솟는 철도 건설에 대한 수요 속에서 그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1892년 회사의 이름을 카네기 철강회사로 바꿨고 본격적으로 그의 이름을 건 사업을 시작한다.



부자로 죽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카네기는 기부와 평화 운동을 많이 하기로 유명했다. 대부분의 미국의 초거대 부자들은 독과점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카네기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가 다른 부자들에 비해 그나마 좋은 이미지로 남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막대한 재산 기부와 많은 자선 및 교육 사업 덕분이다. 그는 사회적 환원을 강조한 재벌이었다.

  그는 훗날 자신의 저서에서 자신의 인생을 두 부분으로 나눴는데, 전반부는 부를 획득하는 시기로 설명하고 후반부는 부를 나누는 시기라고 말했다. 그는 기부를 위한 자신만의 확고한 생각이 있었다. 그는 사회 환원이야 말로 부자들이 가져야 할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분별하고 단순한 기부는 사회적으로 효과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공도서관을 설립하거나 대학교를 만드는 교육 자선사업을 실시했다. 그는 미국 전역에 무려 2500여 개의 도서관을 설립했다. 그가 사회 환원을 위해 쓴 돈은 무려 재산의 70% 이상이었다. 덕분에 그는 몇 가지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좋은 이미지를 남긴 기업인이 될 수 있었다.



많은 유산은 의타심과 나약함을 유발하고, 비창조적인 삶을 살게 한다.


  카네기가 세상을 보는 열린 눈을 가지고 있었다. 철도 회사 근무와 전신 기사 경력은 시대의 흐름을 찾기에 좋은 경험이었다. 그리고 철도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자 곧바로 회사를 만들어 투자하기 시작했고 막대한 돈을 쓸어 담았다. 늘 그는 미국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손에 쥐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인생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성실함이다. 돈을 벌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고, 맡은 업무마다 능력을 인정받아 주위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그리고 경영자들은 사람이 필요할 때면 항상 카네기를 찾았다.

  그가 부자가 되는 데에는 남북전쟁이라는 행운도 존재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나도 남북전쟁이 벌어진 미국에 태어났더라면 카네기와 같은 부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그런데 우리 삶에서 특수한 상황이 안 왔는가? 2020년에 일어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야 말로 어쩌면 남북전쟁보다 더 큰 위기일지도 모른다. 2008년 일어난 미국발 금융위기, 90년대 말 IMF 등 최근에도 사회적 특수 상황은 늘 찾아온다. 그 기회를 잡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을 탓해야 한다.


  또 우리는 욕망에 자주 지배당한다. 늘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더 좋고, 밤에 시켜먹는 치킨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시간에 누군가는 공부를 하며 실력을 쌓고, 샐러드를 먹으며 체지방을 줄인다. 그렇게 하기 싫은 일을 꾸준히 하는 사람들이 결국 성공한다.

 누군가 나에게 매일 아침에 러닝 하기 힘들지 않냐고 물어본다. 힘들다. 매일 힘들다. 매일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는 건 너무 고되다. 그런데 뛰고 나면 너무 행복하니까 그냥 뛴다. 하기 힘들 일 매일 성실하게 하다 보면 나도 언젠간 카네기 같은 부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제시 오언스


히틀러 앞에서 보란 듯이 왕관을 차지하다. 제시 오언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독일은 나치당이 장악했고, 총리는 아돌프 히틀러였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1936년 일어난 올림픽을 홍보의 기회로 삼는다.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로도 유명한 이 대회는 세계 최초로 TV를 통해 전 세계에 중계된 올림픽이었다. 나치 독일은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 알리기 위해 자국 선수들에게 유리하게 일정을 짜고, 타국 선수들에게 보이지 않는 각종 페널티를 줬다. 심지어 유대인은 올림픽에 참여조차 불가능했다. 올림픽 정신에 심각한 훼손을 입히는 행동이지만 이 미치광이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회의 개회사 역시 아돌프 히틀러가 읽었다. 그리고 이 글을 써준 사람은 선동의 달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였다. 대회장 곳곳에 하켄크로이츠 문양이 있는 나치당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제시 오언스는 흑인이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다. 그는 이 대회에 미국 국가대표팀 육상선수로 출전했다. 그는 100m, 200m, 400m 계주와 멀리뛰기 총 4개 종목에 출전했다. 이 중 가장 먼저 열린 종목은 100m 달리기였다. 오언스의 주력 종목이기도 했는데,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로 평가받는 건 독일 대표팀의 에릭 보크마이어였다. 히틀러 입장에서는 게르만족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에릭이 금메달을 따기를 내심 기대했다.

  출발 총성이 울리자마자 한 선수가 재빠르게 뛰쳐나갔다. 바로 미국인 제시 오언스였다. 그는 100m를 단 10초 3에 달렸고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건다. 오언스의 신화는 100m 달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멀리뛰기 종목에서도 유럽 신기록 보유자인 독일의 루쯔롱을 제치고 금메달을 차지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오언스가 큰 무대에 익숙하지 않아 예선전에서 유럽 선수들의 조언으로 간신히 통과했다. 그러나 정작 결선에 올라서는 자신의 실력을 맘껏 발휘했고 당당히 1위를 차지한다. 오언스는 나머지 종목인 200m 달리기는 물론 계주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해 올림픽 4관왕에 오른다. 적어도 육상에서 만큼은 게르만 우월주의를 보여주려던 히틀러의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오언스는 1913년 앨라배마에 있는 가난한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제는 무려 13명이 있었고 제시는 그중 막내였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20세기 초반 오언스의 가족들은 돈이 없어 밥을 자주 굶었다. 당시 사회에서 흑인은 번듯한 직장 하나 구하기 어려웠다. 오언스의 부모님은 수많은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공장에서 일했고, 자식들도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바로 공장에 갔다. 유일하게 막내 오언스만 돈을 모아 학교에 보냈다.

  그는 평소에 자주 밥을 굶어 매우 허약했다. 이를 본 백인 선생님 찰스 라일리는 그에게 운동을 해볼 것을 권유했다. 이를 계기로 오언스는 육상을 시작했는데, 의외로 그가 육상에서 놀라운 성과를 보이자 라일리는 그에게 육상 선수가 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는 선생님의 말에 따라 육상선수가 되기로 한다.

  고등학교 육상부에 들어간 그는 놀라운 실력을 선보이며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를 전액 장학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출전한 1935년 미국 육상대회에서 세계 신기록 1개와 미국 신기록 3개를 기록하며 단번에 미국 최고의 육상 스타로 떠오른다.


  그렇게 출전하게 된 올림픽에서 그는 4관왕을 차지하고 돌아왔고, 미국 미디어는 오언스를 섭외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방송사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오언스를 출현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가 다니고 있던 오하이오 주립대학교는 대규모 퍼레이드를 계획해 그의 수상을 축하했다. 제시 오언스는 당시 대공황 후유증으로 힘들어했던 미국인들의 희망이었다.

  애석하게도 그의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여전히 미국은 인종차별이 심한 사회였고, 그를 고용하려는 회사는 없었다. 그는 다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공장일을 비롯해 다양한 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그를 주목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나중에는 미국 체육계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는 미 전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고 자서전을 쓰며 다시 미국인의 영웅이 되었다.


  훗날 오언스는 자서전에서 인종과 상관없이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 준 찰스 라일리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는 라일리 덕분에 자신의 재능을 만개시키고 인생을 바꿨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제시 오언스는 누구보다 굴고 있는 삶을 살았지만 라일리라는 엄청난 행운을 얻었다. 그는 재능을 알아봐 주는 사람과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피나는 노력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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