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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Aug 03. 2021

고대 그리스와 로마 공화정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와 로마 공화정, 그라쿠스 형제

도편 추방제



4. 고대 그리스의 정치


“군주정이 타락하면 독재정이 되고, 민주정이 타락하면 중우정이 된다.”

- 아리스토텔레스 -



발생 원인

미케네 문명 멸망 후 그리스 반도 내에 수많은 폴리스 출범

폴리스 통치 제도의 필요성

클레이스테네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출생


결과

민주주의, 공화주의 출범

고대 최초의 민주정 탄생

아크로폴리스 출범

서양 철학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책으로 평가받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탄생


  고대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다. 기원전 17세기경 그리스 반도에서도 문명이 시작된다. 바로 미케네 문명이다. 이들은 바다 민족에 의해 금세 사라지고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긴 공백기를 거쳐 비로소 기원전 8세기경에 이르러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탄생한다.


  그중에서도 아테네는 가장 정치적으로 발달한 도시국가였다. 아테네 역시 초기에는 국왕이 있는 평범한 나라였다. 그리스 신화에서 미노타우로스를 쓰러트린 영웅 테세우스가 아테네 최초의 국왕이라는 전설이 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왕의 존재가 사라지고 귀족들이 모여 정치를 하는 귀족정으로 바뀐다. 즉, 아테네는 왕이 없이 소위 말하는 도시의 유력자들이 모여 동등하게 목소리를 냈다. 세계 최초의 민주정이 출범한 것이다.

  참정권을 가진 아테네의 주요 귀족들은 아크로폴리스에 모여 국가의 주요 사안을 나눴다. 하지만, 일부 귀족들만의 독점적 정치는 많은 아테네 시민들의 불만을 산다. 이들은 621년 새로운 성문법 체제를 만들었지만, 너무 강압적인 내용이 많았다. 시민들의 자유는 거의 보장되지 않았고 사형을 남발했다. 이때 만들어진 악법으로 희생된 유명한 사람이 소크라테스다.


  아테네의 집정관 솔론은 기원전 600년 경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한다. 그는 강압적인 법이 농민층을 붕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솔론은 농민들의 빚을 대거 삭감하는 법을 제정하고 새로운 계급제를 도입해 조세율을 명확하게 했으며 시민들에게 참정권을 줬다. 하지만, 모두의 만족시킬 순 없는 법. 서서히 시간이 지나자 귀족은 물론 농민들까지도 솔론의 개혁은 불만을 사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시민들에 의해 아테네에서 추방당한다. 비록 솔론의 개혁은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전의 강압적인 법률이 조금 순화되었고, 백성들에게 정치 참여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높은 가치가 있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 농민층의 지지를 받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새로운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임기 초기에 농민 위주의 법안을 통과시켜 아테네의 개혁을 주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법에 반대한 시민들에 의해 그는 실각하게 된다. 이에 불만을 품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군대를 이끌고 아테나를 무력으로 점거한다. 그리고 스스로 집정관보다 더 높은 직책인 참주에 스스로 올라 독재 정치를 시작한다. 기원전 6세기에 일어난 군사 쿠데타였다. 그의 등장 이후 아테네는 참주가 중심이 되어 정권을 독점하는 독재정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아테네의 시민들은 똑똑했다. 아테네에서 태어난 두 명의 영웅이 아테네의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을 가져온다. 한 명은 직접 아네테를 민주정으로 되돌려 그리스를 넘어 유럽 전역에 공화주의가 퍼져나가는 초석을 다졌다. 다른 한 명은 서양 철학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된다.


클레이스테네스  


  아테네의 귀족 가문 알크마이온 출신의 클레이스테네스는 시민들과 함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이자 아테네 참주 히피아스를 쫓아낸다. 기원전 508년 권력을 잡은 클레이스테네스는 개혁을 시작한다. 기존의 4 부족 체제의 아테네를 10 부족으로 개편한다. 그리고 500인회를 설치해 평의회 제도를 만들어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는 기구를 만들었다. 이들은 각 지역별로 선출되었고, 민회에 제출한 법안을 마련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같은 독재자가 다시 아네테에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한 도편 추방제를 만든다. 도자기 조각에 적힌 사람은 아테네에서 10년간 추방시키는 법안을 만들었다. 도편 추방제는 매년 1월과 2월 사이에 민회에서 열렸다. 아테네 시민들은 올해 도편 추방제를 실시할지 결정하고, 2달의 시간이 지나 도자기의 한 조각에 추방시키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적는다. 그리고 일정 숫자를 넘어 지목받은 사람은 아테네에서 10년간 추방된다. 고대 기준으로 봤을 때 상당히 선진화된 제도였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일반 시민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의 개혁 덕분에 귀족정, 독재정으로 흘러가던 아테네는 민주정으로 탈바꿈한다. 물론 기원전 시대인 만큼 여전히 노예도 있고, 기본적으로 신분제로 운영이 되는 국가였다.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는 아니었다. 그리고 참정권은 경제력이 있는 사람부터 차등 부여받았다. 하지만,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덕분에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정치 체제가 출범하고, 유럽 곳곳에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마케도니아 왕국 출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 플라톤과 더불어 서양 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중세를 넘어 르네상스 시대까지도 많은 철학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분석했다. 심지어 대부분의 서양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으로부터 파생되었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동양에 공자가 있었다면 서양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다. 그는 수학, 기하학, 과학, 윤리학 등 거의 모든 분야의 학문에서 굵직한 업적을 만들었다.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연구와 말을 모아 작성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철학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책으로 평가받는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10권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사상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는 정치 체제를 총 3가지로 나눴다. 한 명이 다스리는 일인정, 소수의 사람들이 다스리는 소수정, 다수가 정치에 참여하는 다수정이다. 그리고 각각 정치 체제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고, 타락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군주정은 좋은 일인정이고, 이것이 타락하면 독재정이 된다. 좋은 소수정은 귀족정이고 이것이 타락하면 과두정이 된다. 그리고 좋은 다수정은 민주정이고 이것이 타락하면 중우정이 된다고 말했다.


  그의 스승 플라톤은 '철인 정치'를 주장했다. 이른바 인격적으로 훌륭하면서 국가를 다스릴만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 직접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조금 달랐다. 그는 실천적인 부분을 강조했다. 정치가는 관념적인 사상가가 아니라 실제로 행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간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 국가적 수준의 행동이 있어야 하고 이런 현실적 부분을 다스리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것이 옳다고 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복에 초점을 맞춘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정당한 정부는 공동체 전체의 선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이것이 그의 사상의 기초였다. 그가 말하는 이상 사회란 결국 선을 구분할 줄 아닌 시민들이 모두 참여하는 정치가 진정한 정치이고, 이렇게 탄생한 정부는 공동체 전체가 행복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의 방향이란 단순한 행복한 감정이 아닌 도덕적이고 지적인 활동을 통해 인간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이다.



플레브스 민회의 가이우스 그라쿠스


5. 로마 공화정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 서양 속담 -


발생 원인

로마 왕국의 몰락

공화정에 맞는 새로운 통치 기구 필요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공화제의 발달 및 확장


결과

민주주의, 공화주의의 확장

집정관, 원로원 출범, 귀족 중심의 공화 정치체제 등장

  

  로마 신화에 나오는 로물루스가 세운 로마 왕국.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처음엔 왕이 다스렸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민주주의가 변화한다. 그렇게 탄생한 로마 공화정은 라티움 지방을 기반으로 크게 성장해 나갔다. 로마 공화정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법을 수행하는 최고 관직은 집정관이었다. 오늘날의 대통령과 비슷한 권한을 가진다. 집정관은 해마다 투표를 통해 선출되었다. 임기는 딱 1년이었고 대부분의 경우 연임은 제한되었으나 전시나 힘이 강한 지도자의 경우 연임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국가의 주요 정책은 원로원에서 제정했다. 로마 공화정의 최고 입법기구이면서 주요 중대사를 직접 결정했다. 원로원은 초기엔 300명으로 구성되었다가 600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임기가 종신직이었기 때문에 원로원 중 한 명이 사망하거나 쫓겨나는 경우에만 다시 뽑았다. 원로원에 뽑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출신 가문과 재산이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로마 공화국 역시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재산에 따라 참정권에 차등을 둔 귀족 중심의 공화정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고 일반 평민들이 아예 정치에 참여할 방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로마 공화정은 호민관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평민 계급의 대표를 선출했다. 호민관은 평민들로 구성된 민회에서 선출되었다. 호민관은 민회를 통해 평민 계급에서 채택하기 원하는 법률을 원로원 회의에 상정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원로원의 결의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호민관 제도는 귀족들의 폭정에 맞설 수 있는 평민들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처럼 호민관의 권력은 막강했으나 초기에는 유명무실한 제도였다. 귀족들이 평민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만든 제도였다. 실제로 선출된 호민관들은 원로원의 비위를 맞추기 급급했다. 그렇지 않았다간 원로원에서 보낸 자객에 암살당하기도 했다. 계급의 차이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호민관 출신의 그라쿠스 형제는 이 호민관 제도를 통해 로마 공화정의 정치를 한 단계 발전시킨다.


  기존의 유명무실한 호민관 제도가 그라쿠스 형제를 만나 재탄생한다. 둘은 호민관에 올라 원로원과 대척점에서 서서 평민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이후 공화정 내에서 호민관의 지위를 크게 높였다.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포에니 전쟁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시기에 로마의 호민관에 선출된다. 그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농민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농민들에게 농지를 재분배하는 법안을 원로원에 제출한다. 문제는 로마 대부분의 토지가 원로원의 대농장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원로원들이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양을 제한하는 대신 몰수한 토지에 대해 보상금을 지급하는 방향으로 법안을 작성했다. 게다가 원로원 측에서 강하게 반대할 것을 염려한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을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이 법안을 민회에 법안을 제출한다. 로마 법에 따르면 호민관은 단독으로 민회에 입법이 가능했기에 절차상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과거 호민관들은 원로원과 대립하면 득이 될 것이 없어 항상 원로원을 거쳐 의결했다.

  티베리우스의 단독 의결은 행동은 원로원을 자극했다. 원로원이 티베리우스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그는 원로원을 상대로 더 강력하게 반발했다. 결국 원로원에서 티베리우스의 해임안을 건의한다. 그러나 원로원은 호민관에 대한 해임을 결정할 수 없고 이는 신성불가침 권한 위배였다. 그리고 티베리우스는 호민관이 가진 거부권을 활용해 로마에서 열리는 모든 시장과 축제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그의 신변을 우려한 티베리우스 지지자들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그를 호위하고 에워싸며 지켰다.

  원로원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결국 원로원의 사주를 받은 로마 제사장 스키피오 나시카가 로마 포럼 한복판에서 티베리우스에게 곤봉을 내리쳐 그를 죽인다. 국가 최상위 지도자 중 한 명이 국가 회의 도중 암살당한 것이다. 로마 시민들은 경악했다. 그렇게 치밀했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대대적인 개혁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에 오른다. 그는 청년이었던 21살에 형의 처참한 죽음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가이우스 역시 원로원과 대척점에 섰다. 가이우스는 형이 통과시키기 못한 농지법을 끝끝내 통과시킨다. 다만, 이번에는 원로원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해외 식민지를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방향으로 바꿨다. 그 외에도 로마 시민들에게 곡식을 나눠주고, 병사들에게 무료로 군복을 나눠줬으며 17세 이하 시민들의 복역을 금지시켰다. 또한, 로마 밖에 있는 동맹국 시민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했다. 가이우스의 평민 위주의 개혁은 성공적이었고, 다시금 많은 지지자를 불러일으킨다.

  가이우스는 호민관을 연임하기 위해서 출마했지만 낙선한다. 득표 수에서는 호민관 연임이 가능했지만 동료들이 표를 속여 팔았다는 의심을 받아 무효 처리된다. 그리고 가이우스에게 적대적이었던 집정관 루키우스 오피미우스는 가이우스가 채택한 모든 법안을 철회시키려 했다. 이에 가이우스 지지자들이 항의하기 시작했고, 몇몇 극렬분자들에 의해 오피미우스의 부하가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를 빌미로 원로원은 최종 권고를 통해 가이우스를 체포하고 그의 모든 법안을 폐기시킨다. 그리고 원로원은 최종 권고를 통해 가이우스를 소환한다.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자살한다. 그렇게 로마를 가장 사랑한 두 형제는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라쿠스 형제는 로마 공화정 정치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우선 둘은 가장 부유한 로마 특권층 출신이었음에도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둘은 식물 유명무실한 호민관 제도를 부활시켜 귀족정 상태로 전락할 뻔했던 로마 민주정을 유지시켰다. 로마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한 둘은 이를 위해 둘은 로마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원로원에 대항했다. 이 결과 식물 상태의 호민관 제도가 활성화되었고, 후대 사람들에게 로마 공화정의 아이러니함을 알렸다. 많은 시민들 역시 원로원의 폭정에 대해 반발심을 가졌고, 충분히 로마 법을 통해 대항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라쿠스 형제의 노력으로 사람들은 귀족정의 위험성을 몸소 느꼈고, 둘의 정치적 사상은 후대의 사회주의 및 공화주의자들에게까지 많은 감명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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