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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Mar 15. 2021

우리 어머니는 스파이가 아닙니다.

군 기밀 유출 혹은 사법 살인 - 로젠버그 부부 간첩 사건

로젠버그 부부


  1951년 4월 5일, 부부 관계인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에셀 로젠버그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다. 재판을 담당한 어빙 카우프먼 판사는 로젠버그 부부의 범죄가 살인보다 더 큰 범죄라고 말했다. 카우프먼 판사는 둘 때문에 한국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미국인이 희생당했다고 말했다. 두 부부의 사형 선고는 당시 전 세계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누군가는 판결에 대해 격분했고, 누군가는 환영했다. 판결에 반대한 사람 중에는 그 유명한 파블로 피카소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있었다. 당시 교황이던 비오 12세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둘의 사면을 요구했다. 사면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53년 6월 19일 로젠버그 부부는 전기의자에 앉아 사형당했다. 둘은 어떻게 전 세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형당했을까?



매카시즘과 냉전 체제



  1950년대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냉전이다. 세계 2차 대전의 승전국 중 전쟁으로 가장 많은 이득을 본 두 나라는 미국과 소련이었다. 두 나라는 전쟁 중에는 동맹 관계였다. 전쟁이 끝난 뒤 패전국의 식민지가 해방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이 충돌한다. 막 독립을 한 나라들은 두 이념 사이에서 저울질 하기 시작했고, 미국과 소련은 각 체제의 리더가 되었다. 일본으로부터 막 독립한 한반도 역시 이런 흐름 속에서 속해 있었다. 북측의 김일성 한반도 북부의 정부를 무단 수립하고, 남측에서도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양 측의 긴장감은 극도로 올라간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은 선전포고 없이 남침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한반도에 발을 들이게 된다.

  놀랍게도 공산주의 확산은 미국 내부 사회에서도 발생하고 있었다. 1930년대까지는 미국 내부의 공산주의 문제는 크게 대두되지 않았다. 분명 당시에도 공산주의자는 존재했지만, 세력이 미비했고 사회적 목소리를 낼 만큼 세력이 형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 2차 대전에서 소련과 미국이 동맹을 맺자 상황이 달라졌다. 서로 다른 이념을 지닌 양국의 동맹으로 인해 미국 내의 공산주의자들이 크게 성장한 것이다. 그나마 전쟁 도중엔 나치라는 공동의 적이 있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어느 정도 묵인되었다. 심지어 이들은 언론에 소련을 찬양하는 기사를 쓰곤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세력이 커진 미국 내 공산주의 자들은 핍박받던 노동자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전쟁 기간 동안 군수품을 만들기 위해 쉬지 않고 돌아갔던 군수 공장들이 주요 타깃이었다. 1945년과 1946년에 무려 4백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자 미국 사회는 충격에 휩싸인다. 이 파업으로 미국의 산업이 직격탄을 맞게 된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사회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한다. 이와 더불어 미국 사회 내부에 자리 잡은 공산주의자 색출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늘 이슈가 존재하면 시대적 흐름에 편승에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자들이 나타난다. 미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는 반공 정서를 정확히 읽었다. 그는 1950년 2월 미 공화당 당원 의회에서 국공내전에서 중화민국이 패배한 이유는 미국 내부의 공산주의자들 때문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자신이 205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을 가지고 있다고 폭로했다. 심지어 미 국부무에는 57명의 공산당원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반공 정서가 들끓던 미국은 매카시의 발언에 집중했다. 그는 매카시 리스트 폭로로 그는 일약 미국 정계의 스타로 떠오른다. 미국은 노동자 파업, 할리우드 스캔들, 소련의 핵무기 개발, 국공내전 패배 등으로 공산주의에게 연전연패를 하고 있었기에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지목했다. 정치인은 물론이고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연구원, 과학자와 할리우드 극작가, 영화배우 등 사회와 예술 전분야에 걸쳐 공산주의자를 색출했다. 

  문제는 매카시 리스트에 포함된 인물들이 공산주의자가 맞는지 제대로 확인하는 절차 없이 마구잡이 식으로 지목되었다는 데 있다. 할리우드 유명 배우였던 스털링 헤이든은 세계 2차 대전 당시 OSS 요원에 자원하여 유고슬라비아 독립 전쟁에 참전했다. 나치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훗날 유고슬라비아 초대 대통령에 오르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친분 관계를 쌓게 된다. 둘은 전후에도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해진다. 하지만, 이 편지로 인해 그는 매카시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지목받게 된다. 그는 공산주의 협력자라는 낙인이 찍혀 할리우드에서 반강제로 쫓겨나게 된다. 훗날 무죄가 입증되어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오지만 예전과 같은 인기를 누리지 못한 채 무명배우로 생을 마감한다. 매카시즘으로 공산주의자의 의심을 받은 유명인은, 맨해튼 프로젝트 참가자이자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로 유명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20세기 최고의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20세기 최고의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이 있었다. 훗날 연구결과에 따르면 매카시에게 지목당한 사람 중 실제 공산주의자는 5%에 불과한다고 말한다. 이런 광적인 색출이 가능했던 이유는 미국 국민들이 공산주의자의 공포에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카시즘이라는 광기는 사법의 기본 원칙인 무죄 추정의 원칙마저 무너뜨렸다.



로젠버그 부부의 사형 과정



  1950년대의 미국의 매카시즘을 이해한다면 로젠버그 부부가 왜 사형을 받게 되었는지 이해하기 쉬워진다. 우선 로젠버그 부부가 누구인지 알아보자. 남편 줄리어스 로젠버그(Julius Rosenberg)는 1918년 5월 2일에 태어났다. 그는 유대계 이민자 출신으로 매우 가난했다. 부인 에셀 그린글라스(Ethel Greenglass) 역시 같은 유대계 미국인이었다. 줄리어스는 뉴욕 시립대학에서 전자과를 전공했고, 동시에 좌익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공산주의에 입문한다. 1936년 국제 선원 노동조합의 파업사태를 계기로 에셀을 만나게 되었고, 3년 후 둘은 결혼한다. 줄리어스는 1939년 미국 공산당에 가입하는데, 이듬해 미 육군 통신대 취직을 위해 이를 숨겼고, 1945년 공산당 이력이 발각되어 해고 통보를 받는다.

  그사이 매카시즘으로 인해 미국 사회 전체의 공산주의자 색출이 시작된다. 특히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자 미국인들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몇몇 과학자들이 거액을 받고 기술을 소련에 팔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중 한 명으로 지목받은 사람이 에셀 로젠버그의 남동생 데이비드 그린 글라스(David  Greenglass)였다. 원자폭탄을 개발한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서 일했던 그는 소련 스파이 해리 골드와 접촉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FBI는 그린 글라스의 집을 수색했으나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FBI는 그를 간첩으로 무작정 몰아갔고 다른 간첩을 불면 죄를 감량시켜주겠다고 했다. 그는 미국 공산당 출신이었던 매형 줄리어스 로젠버그를 밀고한다. 줄리어스가 자신에게 원자폭탄의 설계서를 보여달라고 말했다는 증언을 확보한 FBI는 줄리어스 로젠버그를 체포한다. 그리고 3주 뒤 줄리어스의 부인 에셀 역시 FBI에게 붙잡힌다.

  로젠버그 부부는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증언을 철회하지 않았고, 자신이 알고 있던 소련 연락 통에게 줄리어스 로젠버그를 소개해줬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로젠버그 부부의 범행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했다. 둘을 기소할 근거는 데이비드의 증언밖에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증거가 충분치 않아 기소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3주 전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불안감에 휩싸인 미국 사회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미국인들은 공산주의자를 모두 잡아들여야 한다는 광적인 허상에 사로잡혀 사법적인 절차 없이 로젠버그 부부를 재판부에 올린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적법한 사법 절차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로젠버그 부부의 무죄를 주장했다. 둘이 간첩이라는 증거는 데이비드의 증언밖에 없었기에 이들의 주장은 타당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 설계 기술이 이미 많은 국가에 알려질 정도로 상용화되었다고 주장하며, 줄리어스 로젠버그에게 보여줬다고 주장하는 설계도는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둘에게 절대 사형을 선고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탄원서를 보냈지만 묵살당했다. 

  결국 둘은 1951년 4월 5일 결국 재판부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그사이 한반도에서 수많은 미국 장병들이 목숨을 잃자 로젠버그 부부의 여론은 더욱 안 좋게 돌아갔다. 이 판결에 힘입어 조지프 매카시의 공산주의자 폭로는 더욱 힘을 얻는다. 이에 화답하 듯 FBI의 절대 권력 에드가 후버 역시 공산주의자 색출을 위해 미 전역을 쥐 잡듯이 뒤졌다. 

  그리고 로젠버그 부부 14번째 결혼기념일인 1953년 6월 19일 뉴욕 싱싱 교도소에서 생을 마감한다. 로젠버그 부부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형의 이름은 마이클 미어로 폴(Michael Meeropol), 동생의 이름은 로버트 미어로 폴(Robert Meeropol)이다. 둘은 여전히 어머니가 간첩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둘은 로젠버그 재단을 운영하면서 정치적 행적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구제활동을 하고 있다. 반대로 아버지 줄리어스 로젠버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죄를 인정하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왜 둘은 이렇게 주장할 까?



로젠버그 부부의 사형이 남긴 것



  로젠버그 부부는 허무하게 죽었지만, 그 죽음은 사회에 큰 화두를 던졌다. 우선 이후 미국 사회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둘이 죽음 이후 시간이 지나자 광분의 휩싸였던 미국인들도 서서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도를 넘은 매카시를 사람들은 비난하기 시작했고, 1954년 12월 상원에서 쫓겨나고 3년 뒤 편두통으로 사망하게 되며 미국의 반공주의 광풍도 서서히 막을 내린다. 매카시즘의 문제는 공산주의를 막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는 것 까진 좋았을지 몰라도, 그 과정 도중에 필요한 민주주의의 기본절차가 완전히 무시당했다. 사법의 기본 원칙 중 하나가 열 명의 범죄자를 놓칠지언정, 단 한 명의 무고한 희생자도 나오지 않아야 한다. 매카시 리스트의 적중률이 5%라고 하니, 한 명의 공산주의자를 잡기 위해 시민 20명이 희생된 셈이다. 이것이 자유주의의 상징이자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매카시즘으로 미국 내의 많은 과학자들은 해외로 망명했고, 문화 및 예술계의 성장도 지체되었다. 

  매카시즘의 광풍에서 나오자 로젠버그 부부에 대한 재평가도 시작되었다. 둘의 사형은 분명히 적법한 절차 없이 이뤄졌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에 인식 속에서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생긴다. 그러다 훗날 소련이 패망하면서 1990년 흐루시초프의 녹취록이 공개되는데 로젠버그 부부의 도움을 받아 원자폭탄을 개발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근 40여 년 만에 두 사람의 범죄를 입증할 만한 첫 증거가 나온 셈이다. 그리고 1995년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전파탐지기에 관련된 정보를 소련에 넘겼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소련 스파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나왔다. 현재까지 나온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 남편 줄리어스가 소련 스파이였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그리고 부인 에셀은 흐루시초프의 녹취록에 '로젠버그 부부'라는 내용으로 나왔지만 에셀은 코드명도 없었고 흐루시초프가 말한 도움이 어떤 부분의 도움이었는지의 내용도 애매한 상태라 스파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


  우선 둘의 사형집행은 명백히 잘못되었다.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스파이였어도 민주주의 국가에선 스파이도 적절한 재판 과정을 거칠 권리가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재판 중에 재판부는 그가 스파이였다는 사실을 전혀 밝혀내지 못했다. 둘이 재판에 기소된 범죄는 원자폭탄에 대한 핵심 기술을 소련에 넘긴 것이다. 하지만 훗날 밝혀진 줄리어스가 넘긴 정보는 전파 탐지기에 관한 정보였다. 불고 분리의 원칙에 의해 전파 탐지기 정보 전달은 둘의 기소와 전혀 관련이 없는 내용이다. 즉, 애초에 사형 당하지도 않았어야 하고 훗날 밝혀진 죄목 조차 사형을 받을만한 범죄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 명의 스파이는 운 좋게 얻어걸려서 잡게 되었을지 몰라도 미국 사법부는 씻지 못할 오명을 남긴 셈이다.

  그렇다고 두 부부가 억울한 사법살인의 순교자냐고 말하면 그것도 다소 애매하다. 사법 체계에서 다신 일어나선 안될 사건이긴 한데 재판 과정 중에서 둘의 행보는 약간의 의문점을 가져온다. 사실 FBI는 둘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사형을 집행하는 순간까지도 FBI는 두 부부를 회유했다. 애초에 FBI는 둘의 혐의가 애매했다는 점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두 부부가 어느 정도의 형을 인정만 한다면 형 집행을 취소하고 징역형으로 감면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FBI의 목적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 국가 안보를 세우는 것이지 두 사람을 죽이려는 목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둘의 죽음으로 역풍을 맞이해 공산주의자 색출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둘의 태도가 너무 완강했다. 억울한 누명을 받아 호소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 마치 결연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의 태도라고 밝혔다. 거사를 치르기 위해 죽음을 앞둔 사람과 같았다고 말한다. 실제 소련의 공산주의자들은 처음엔 조용하다가 둘의 형이 집행된 후에 더욱 앞장서 미국 사법체계를 비판했다. FBI는 재판 직전에 재판부를 찾아가 둘의 사형만은 면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판사는 들어주지 않았다. FBI의 예상대로 둘의 죽음은 오히려 역풍을 맞아 매카시즘이 4년 만의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공산주의자 색출도 차질을 빚게 되었다.

  로젠버그 부부의 재판은 아직까지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 국가권력에 의한 억울한 사법살인은 분명하다. 근데 그 과정에서 한 명의 스파이는 잡았다. 그러면서 스파이에 대한 처벌이 적절하지 못했고, 적법한 사법 절차도 거치치 않았다. 반대로 국가의 이익과 안보를 우선 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로젠버그 재판을 다르게 바라볼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들의 죽음은 민주주의의 원칙을 완전히 어기고 집행되었다. 국가 안보가 아무리 중요해도 그 과정에서 억울한 희생자가 나와서는 절대 안 된다. 미국 민주주의 역사의 최대 오점이라고 불릴만한 이 사건은 20세기 가장 논란이 되는 재판으로 남게 된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 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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