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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Mar 22. 2021

사랑한다면 표현하세요

잘못된 교육이 낳은 미치광이, 사도세자

사도세자 초상화


  뉴스를 보면 부모에 의해 학대당한 어린아이들의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부모들의 인터뷰를 보면 대부분 아이를 사랑해서 한 행동이라며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녀를 키워 보지 않은 입장에서 그 심리를 완벽히 알기 어렵지만, 어릴 적 교육 환경이 그 사람의 성품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건 잘 안다. 자식 교육은 자녀가 컷을 때 자존감을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다. 사랑받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성격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이 격차가 인생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 사랑을 받은 아이는 자신의 가치를 알게 되고, 부모의 사랑은 나라는 존재를 만든다. 그만큼 부모의 자식 교육이 중요하다.

  반대로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쉽게 삐뚤어진다. 자식 교육이란 게 항상 오냐오냐 해주면 안 되겠지만, 모든 교육의 목적은 아이가 훗날 사회에 나가 잘 적응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부모의 가치관을 그대로 강요하거나, 아이에게 상처가 되는 언행은 되도록 해선 안 된다. 심한 체벌을 받은 아이는 커서 애정결핍 증세를 보이기도 하고,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며 심한 경우 정신 질환까지 앓는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얼마나 스스로와 주변인들에게 상처를 주는지 알려주는 좋은 사례가 있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국사 시간에 들어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충격적인 사건, 아버지에게 억울하게 죽은 아들, 사도세자 이야기다. 이제 자식 교육의 중요성을 알기 위해 영조 38년인 1762년 윤달 5월 13일 창경궁으로 가보자.    



뒤주 속에 갇히게 된 사도세자



  아버지 영조 앞에 세자가 무릎을 꿇고 있다. 영조는 세자에게 칼 한 자루를 던져주며 자결하라고 명한다. 세자는 차가운 궁궐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청을 거둬달라고 간청한다. 영조는 그런 세자 앞에서 더욱 목소리를 높이며 자결하라며 소리친다. 세자는 하는 수 없이 칼을 들고 자기 목을 치려고 하자 스승 임덕제가 급하게 달려와 칼을 쳐낸다. 임덕제가 펑펑 울며 세자를 살려달라 왕에게 간청했지만 영조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주위 군병들에게 임덕제와 신하들을 끌고 가라고 명했고, 사람을 시켜 뒤주를 가져오게 한다. 궁궐 한가운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조는 세자에게 뒤주 안에 들어가라고 말한다.

  모든 신하들은 하도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아들의 다스리기 위한 훈육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며칠만 있으면 명을 거두고 세자가 나올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놓쳤는데 이미 영조는 폐세자 교지를 전국에 뿌린 상태였다. 이 점을 간과한 신하들은 세자가 뒤주 안에서 배고플까 음식과 물을 가져다줬다. 영조가 없는 밤엔 뒤주를 열어 바깥공기를 마시게 도와줬다. 세자의 아들 세손은 매일 밤마다 뒤주 옆으로 가 아버지와 대화를 나눴다. 이 모든 사실을 알아차린 영조는 포도대장 구선복으로 하여금 뒤주를 지키게 하고 근처에 다른 사람이 오지 못하게 막았다. 구선복은 뒤주 안에서 직함을 말하라는 세자의 명을 거역하고, 밥을 못 먹은 세자 옆에서 진수성찬을 차려 세자를 더욱 괴롭혔다.

  8일이 지난 5월 20일, 구선복이 영조에게 세자가 죽었다고 보고를 했다. 영조는 하루 뒤인 21일 사람들을 불러 뒤주를 열어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했다. 세자의 죽음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서야 세자의 위호를 회복시켰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그 이름 '사도'라는 시호를 내린다. 영조는 사람을 시켜 세자의 죽음에 대한 모든 기록을 지웠다. 실제로 영조, 정조실록엔 사도세자에 죽음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쓰지 않았다면 세자에 죽음에 대한 진실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지 모른다. 아버지가 세자를 죽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영조의 학대 일화들



  1735년 (영조 11년) 1월 21일, 영조와 후궁 영빈 이씨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다. 7년 전 첫째 아들 효장세자를 잃은 뒤 슬픔에 빠진 42살의 영조는 후사를 위해서라도 아들을 빨리 낳았어야 했다. 영조는 이런 아들의 탄생이 얼마나 좋았는지, 태어난 지 열흘 만에 왕의 적자에게 주는 원자를 칭하게 했으며 돌이 지나자마자 왕세자로 책봉한다. 이는 조선 최연소 세자 책봉이었다. 영조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직접 경전을 필사했다. 영조에게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아들이 태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세자는 아버지의 사랑에 응답하듯 아주 총명했다. 기록에 따르면 태어난 지 4달 안에 스스로 기었고, 생후 6개월 때에는 영조의 부름에 답할 정도가 되었다. 7개월엔 동서남북을 구분할 줄 알았다. 세자가 3살이 되었을 때, 영조는 비단옷과 무명옷을 두고 어느 것이 사치이고 사치가 아니냐고 물어봤는데, 비단이 사치고 무명이 사치가 아니라고 대답하며 자신이 입은 무명옷을 보여줬다. 영조는 세자의 대답과 검소함에 크게 기뻐했다. 영조는 직접 신하들 한 명 한 명에게 세자를 안아보라고 하며 세자는 왕실의 명실상부한 후계자가 되었다.

  

  하지만, 세자의 행복은 딱 여기까지 였다.



잘못된 자식 교육 사례



1. 교육 과목 편향 간섭

  세자는 학문 공부 외에도 관심 분야가 많았다. 사냥과 무예를 좋아했지만, 영조는 세자가 글공부만 하기를 원했다. 세자는 무예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는데 훗날 대리청정을 하며 조선 무관 양성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무예제보'에 12가지 무예를 더한 '무예신보'를 만든다. 세자의 노력으로 효종 이후 거의 중단된 병법 제도에 대한 개편이 이루어졌다. 정조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장용영이라는 국왕 근위대를 만들 수 있었다.

  문제는 영조가 글공부 이외에 관심을 두는걸 가만 보지 않았다. 영조는 세자에게 임금이 갖춰야 할 덕목인 '자치통감'을 읽게 했다. 그러나 세자가 책을 읽는 소리가 점점 줄어들자 영조는 세자와 스승을 불러 글을 하루에 얼마나 읽는지 물어본다.

 


영조 : 세자가 글을 읽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

스승 : 평소에는 크게 잘 읽고 있습니다.

영조 : 세자는 하루 중 얼마나 많은 시간의 글을 읽는가?

세자 : 하루에 2~4시간 정도 읽습니다.

스승 : 아직 세자가 시간에 대해 깨닫지 못한 듯합니다.

세자 : 저는 이미 시간에 대한 개념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영조 : 너는 정직해서 참 좋구나.



  영조의 마지막 답변은 반어법이다. 영조는 세자가 글을 읽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세자의 글을 읽는 양을 더 늘리기 바랐다. 조선 왕실에선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별도의 조직이 있었고, 교육 매뉴얼도 존재했다. 그러나 영조는 매뉴얼을 모두 무시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글을 읽게 강요했다. 기존 다른 세자들 보다 몇 배의 교육 양이었다. 어린 세자가 따라가기에 너무 혹독했다.



2. 자녀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는 답정너식 교육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영조는 세자의 가치관이 잘못 형성되어 간다고 느꼈다. 청소년기에 다양한 생각은 창의력 발현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영조는 세자에게 자신만의 가치관을 강요했다. 하루는 영조가 세자를 불러 다음과 같이 물어봤다.



영조 : 한나라의 황제 중 누가 가장 우수하다고 생각하느냐?
세자 : 문제입니다.
영조 : 너는 어째서 한고조를 말하지 않느냐?
세자 : 문제와 경제의 치적이 가장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영조 : 너의 기질을 보아 한무제를 좋아할 것인데 문제를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세자 : 무제는 비록 쾌활하나 오만한 부분도 많습니다.
영조 : 어떤 일이 오만하고 어떤 일이 쾌활한 것이냐?
세자 : 급암을 포용한 것이 영웅의 일이고 쾌활한 부분입니다.
영조 : 그것은 어질다고 하는 것이 가능하나 굳이 그를 영웅이라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세자 : 급암의 강직함을 포용하니 한고조의 활달한 기상과 같습니다.
영조 : 급암을 포용한 것을 두고 참된 영웅이라 하면 너도 왕으로서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강직한 것을 포용하는 것은 강직한 이를 등용하는 것만 못하다. 너는 더 배워야겠구나.



  급암이라는 자는 한무제의 신하로 왕에게 바른말을 하다가 크게 욕을 먹고 유배되었다. 영조는 한무제가 급암을 포용했으나 중히 쓰지 않았다는 점을 말했다. 즉, 세자는 무제가 강직함을 포용한 점은 잘했으나 오만한 부분도 있어 한문제가 더 훌륭한 지도자라 말한 것이다. 영조는 세자의 답변은 무시하고, 너의 성품을 보면 분명 무제를 좋아할 것이다라고 스스로 정해버린 것이다. 여담으로, 한무제는 흉노와 고조선을 정복해 한나라의 영토를 크게 늘렸지만 그 과정에서 무리한 토목공사를 진행하고 많은 부하들을 죽였다. 반면 문제는 한나라가 약 400여 년 가까이 지속될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한 성군으로 평가받는다. 영조는 자기 맘대로 세자가 무제를 좋아할 것인데 자기한테 잘 보이려 일부러 문제라고 돌려서 말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 세자의 나이는 겨우 13살이다.



3. 형제자 편애하기

  영조의 비 영빈 이씨에게는 총 4명의 자녀가 있었다. 남자는 사도세자 한 명뿐이었고, 위로 두 명의 누나와 한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영조는 첫째 화평옹주와 막내 화완옹주를 아낀 반면, 둘째 화협옹주와 셋째 사도세자는 매우 싫어했다. 그것도 너무 티 나게 편애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화평옹주가 홀로 부왕의 자애를 받는 일이 숨은 아픔이 되어 부왕께 "마옵소서" 여쭈나 아무리 해도 영조께서 듣지 않으시니 할 수 없었으니라.



  영조는 첫째 효장세자를 잃고 큰 슬픔에 빠졌다. 세자 나이 10살로 요절했는데, 당시 영조의 나이가 35세였다. 당시 기준으로 35세는 중년층의 고령이었다. 이때 힘이 되어 준 것이 첫째 딸 화평옹주였다. 영조는 옹주가 천연두에 걸렸을 때 병을 낫게 하기 위해 국가의 추국과 형신을 모두 멈출 정도였다. 환자에게 부정탈만 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녀가 혼인할 땐 이현궁을 신혼집으로 마련해 줬으나 옹주는 이를 과분하다 하여 사양했다. 영조는 화평옹주를 보러 갈 땐, 사도세자에게 뭐라도 물어봐 대답을 들은 뒤 더럽혀진 귀를 씻고 양치질을 한 뒤에 딸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화평옹주가 22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영조는 매우 슬퍼했고, 장례식 역시 성대하기 치렀다.

  그렇게 사랑하던 딸이 떠나자 그는 다른 자식에게 또 마음을 준다. 슬프게도 그 자녀는 사도세자가 아닌 막내 화완옹주였다. 화완옹주는 자녀들 중 가장 총명했고, 성격도 붙임성이 좋아 불같은 아버지의 마음을 잘 녹였다. 화평옹주의 경우 아버지의 사랑을 자신이 독차지하는 걸 미안해했는데, 화완옹주는 오히려 영조의 편애를 독차지하려고 애썼다. 오빠인 사도세자가 아버지한테 어떻게 비치는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세자의 아들은 세손(훗날 정조)에게까지 집작 하는 고모였다. 혜경궁 홍씨 입장에서는 정말 얄미운 시누이였다.

  사도세자와 바로 윗 손 누나인 화평옹주는 영조의 미움을 받는 자녀들이었다. 영조는 첫째 효장세자가 죽자 아들을 보고 싶어 했지만 고령에 또다시 딸을 낳게 되었고, 그때 태어난 것이 화평옹주였다. 태어날 때부터 그녀는 미움을 받을 운명이었다. 아버지의 미움을 같이 받아서였는지 동생 사도세자와는 친하게 지냈다. 영조는 꼭 둘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더러워진 귀를 씻어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두 남매는 우리는 아버지의 귀를 씻을 준비물이라며 서로 비웃으며 장난쳤다.

  영조의 극단적인 편애는 세자의 정신건강을 더 악화시켰다. 미움을 받은 자식들이 딱히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10살도 안된 어린아이들이 잘못을 해봐야 얼마나 할 것이고, 충분히 실수할 수 도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영조는 자식에게 있어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4. 자녀의 감정과 건강을 고려하지 않는 교육 방식

  세자를 힘들게 한 또 다른 행동은 대리청정과 선위 파동이다. 대리청정이란 왕세자가 국왕을 대신해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다. 대부분 왕이 국무를 수행할 수 없거나 건강이 위독할 때 내지는 세자에게 국무 처리 경험을 주기 위해 시행된다. 선위는 말 그대로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영조는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자주 사도세자에게 선위 할 것을 말했다. 어떻게 보면 아들을 믿어 선위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영조는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영조가 선위 파동을 일으킨 이유는 왕권 강화였다.

  영조가 재위에 올랐을 때 조선 조정은 노론과 소론의 붕당 대립이 격화되었다. 신하들이 당파로 나눠 싸울 때면 영조는 자주 선위 파동을 일으켰다. 영조가 선위를 조정에서 말하면 신하들은 왕에게 청을 거두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이 유교의 예절 중 하나다. 신하들은 싸움을 멈추고 왕께 재청을 부탁할 것이고, 영조는 그제야 고집을 꺾는 척하며, 선위를 거두며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는 걸로 타협했다. 매우 정치적인 계산이었다.

  문제는 사도세자도 신하들과 같이 선위 철회를 청해야 하는데, 세자는 옷 한 벌만 입고 석고대죄를 해야 한다. 영조는 이 과정을 무려 다섯 번이나 반복한다. 어떤 날은 한겨울에 선위 파동을 일으켜 눈보라가 치는 가운데 옷 한 벌만 입고 궁궐 앞에 엎드린 적도 있었다. 신하들이 세자의 건강을 걱정해 서둘러 영조에게 청을 거둬달라고 말했지만 정치적 지위를 물러설 생각이 한 발도 없던 영조는 이를 가뿐히 무시했다. 청소년기의 세자는 아버지의 고집과 변덕에 수시로 무릎을 꿇어야 했다.

  대리청정을 실시하고 나서도 문제였다. 영조는 아들에게 정치를 맡길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세자가 왕으로서 하는 행동을 사사건건 방해했다. 다른 왕들이 대리청정을 할 때 전권을 세자에게 맡기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처음에 신하들 앞에서 세자의 정치를 지켜보겠다고 말했지만 전부 거짓이었다. 세자가 왕으로서 실수를 하면 신하들이 전부 보는 앞에서 대놓고 그를 문책했다. 사도세자는 15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대리청정을 하는데, 흔히 요즘 말하는 중2병에 걸릴 나이다. 사춘기의 아들에게 국사를 맡기고 그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혼내기를 반복했다. 세자의 자존감은 점점 낮아졌다. 영조는 세자가 홍역에 앓고 있어도 대리청정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당시 의료기준으로 볼 때 홍역은 완치율이 매우 낮고, 죽음에 이르기 쉬운 병이었다. 세자가 3일 밤낮 동안 홍역과 고열 증상을 보였지만, 또 선위 파동을 일으켜 아픈 와중에 궁궐 앞에서 석고대죄를 해야 했다.



세자가 보인 정신 질환 증세



1. 아버지에 대한 광적인 공포

  세자는 성인이 되자 정신 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영조가 하도 혼을 많이 내서 세자는 아버지만 보면 광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1755년 11월 사도세자의 모친 영빈 이씨가 병에 걸렸다. 세자는 당연히 어머니의 문병을 가는데, 그곳에는 여동생 화완옹주도 같이 있었다. 남매가 같이 어머니의 간호를 맡고 있었는데, 영조가 뒤늦게 와서 불같이 화냈다. 자신이 아끼는 딸과 증오하는 아들이 같이 있는 걸 보고 화가 난 것이다. 영조는 세자가 동생과 같이 있다는 이유로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다. 세자는 너무 놀라 창문과 담벼락을 넘어 도망쳤다. 세자는 자택에 와 생각해보니 동생과 같이 있었을 뿐인데 욕을 먹은 것이 너무 화가 나 자결하겠다고 울부짖었으나 신하들과 부인의 만류하고 간신히 진정시켰다.

  영조는 평소 검소한 생활을 즐겨했는데, 이는 신하들과 백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술을 멀리 한 그는 국가 전체에 금주령을 선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조는 세자의 침소에 갑작스럽게 방문했다. 세자는 아버지가 온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러 온다는 소식 하나에 겁을 먹은 셈이었다. 세자는 헐레벌떡 준비했지만, 너무 늦게 소식을 받아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채 아버지를 맞이했다. 영조는 그런 세자를 보고 술을 먹었다고 제멋대로 판단하고 문책했다. 세자는 분명 변명을 해도 듣지 않으니 그냥 술을 마셨다고 인정해 버린다. 실록에 따르면 세자는 아버지가 보러 온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항상 불안하고 무서워 전날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파국을 향해 가고 있었다.  


2. 애정결핍, 성폭행 및 살인

  한중록에 따르면 세자는 좁거나 어두운 곳에 있지 못한다고 했다. 외출을 위해 옷 한 벌을 입는데도, 20~30번 이상 옷을 갈아입었다고 한다. 현대 의학으로 분석할 때 그는 강박성 성격장애를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자는 왕을 보러 갈 때 항상 의관을 갖춰 입는 것이 왕실의 예이다. 영조는 세자의 의관을 보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세자는 옷 한 벌도 제대로 입기 힘든 지경이 된 것이다. 심지어 옷을 갈아입으면서 옷을 입히는 나인이 살결에 손이라도 대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말했다.

  세자는 애정결핍 증세도 보였다.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존감이 떨어지자. 그는 잘못된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고 했다. 바로 성폭행과 살인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나인들은 물론이고, 조금만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궁녀나 내시들이 있으면 마구잡이로 죽였다. 심한 날은 하루에 6명이나 되는 궁궐 사람들을 죽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광증으로 죽은 사람만 100여 명이 된다고 추정한다. 그는 발작 증세를 보일 때마다 칼을 꺼내 누군가를 죽였다. 심지어 비구니를 성폭행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이제 세자가 아니라 연쇄살인마와 다름없었다. 그가 유일한 왕의 아들이라는 신분만 아니었어도 훨씬 일찍 궁궐 사람들의 눈 밖에 나 죽음을 맞이 했을 것이다. 그를 걱정한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이 약을 지어 세자에게 주었지만, 증세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혜경궁 홍씨는 안쓰러운 남편을 바라보며 한중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옷을 입힐 때 옷이 살갗에 닿기라도 하면 칼을 꺼내서 옷 입히는 궁녀를 해치고, 쳐다본다고 내관을 해치고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사태가 이르게 되었다.



  세자가 사람을 죽이는 지경에 까지 이르자 결국 아내 혜경궁 홍씨와 장인 홍봉한도 칼을 꺼낸다. 남편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아들 세손이라도 지켜야 했다. 홍봉한의 경우 세자가 왕에 오르면 왕의 장인이 될 수 있었지만, 세자가 도저히 왕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해 권력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한다. 가뜩이나 반대파로부터 사도세자를 감싼다는 공격을 자주 받고 있었기에 결국 그를 버리게 된다. 혜경궁 홍씨는 시어머니 영빈 이씨를 찾아가 세자의 죄목을 낱낱이 말했다. 영빈 이씨는 세자의 살인 행동을 영조에게 말하게 되어 앞서 언급했듯이 세자는 뒤주 속에 들어가 죽음을 맞이한다.

  이 부분으로 인해 혜경궁 홍씨에게 남편을 버린 비정한 아내라는 이미지가 씌워지기도 했는데,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런 평가는 꽤나 억울할지 모른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의 비행을 바로잡기 위해 여러 차례 노력했다. 세자가 힘들어할 때마다 조언을 해주고 도움도 주는 등 많이 노력했다. 그녀는 남편이 뒤주에 갇혀 있을 때, 어찌 그렇게 힘이 쎄신 분이 순순히 뒤주 속에 들어갔냐고 오열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아들을 지켜야 했다. 세자를 그대로 두었다간 세자가 언제 아버지를 죽이려 달려들지 몰랐다. 세자는 죽음을 맞이하기 1,2년 전 아버지가 사라져야 모든 게 해결된다는 말을 자주 중얼거렸다. 정말 세자가 정말 진심을 담아 아버지를 죽이려 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옆에서 세자를 지켜본 아내는 분명 불안했을 것이다.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남편은 물론 자신과 세손도 역적으로 몰리게 된다. 참고로 이 기록은 혜경궁 홍씨가 작성한 '한중록'에 기록되어 있다. 세자 고발의 정당성을 위해 그녀가 일부로 기록했을지도 모른다. 진실은 혜경궁 홍씨만 알고 있다. 영조는 이 사실을 듣고 자신의 손으로 세자를 죽이면 세손 역시 역적이 되므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뒤주 속에 가두는 것을 활용해 세손을 지킬 수 있었다.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 역시 왕의 장인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외손자를 왕에 올려 외척의 지위를 유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홍봉한의 처세술을 여기서 빛났는데, 그는 실제로 사도세자 처형을 앞장서 주장했고 그로 인해 몇 년 뒤 영의정에 오를 수 있었다. 자기 자신과 딸, 손자 모두 살린 묘안이었다. 이 말은 즉, 세자를 지켜줄 마지막 희망인 홍씨 가문 마저 그를 저버리게 된 것이다. 궁궐에 그의 죽음을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조가 자식 교육을 강압적으로 한 이유



  영조의 광적인 교육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까지 강압적으로 하는데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영조는 궁궐에서 살아남아 왕이 되기 위해 수많은 간섭과 경쟁을 이겨내야 했다. 영조의 아버지 숙종대에도 마찬가지로 붕당 간의 대립이 극심했다. 숙종은 조정의 일당 전제화를 막기 위해 환국 정치를 활용했다.

  숙종에게는 정비였던 인현왕후가 후사를 낳지 못하고 후궁 희빈 장씨가 첫아들을 낳는데, 그가 바로 훗날 경종에 오르는 이윤이다. 그리고 인현왕후를 모시던 무수리 숙빈 최씨 사이에서 두 명의 아들을 또 낳았는데, 그중 둘째가 바로 연잉군 영조였다. 장희빈을 지지했던 소론은 경종이 왕에 오르길 바랬고, 인현왕후를 지지했던 노론은 연잉군이 왕에 오르길 바랬다. 숙종 말기엔 노론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어 연잉군은 큰 문제없이 궁궐에서 생활을 이어갔다. 다만 장자를 내칠 명분이 없어 세자 이윤이 그대로 왕에 오르자 상황이 바뀐다. 마치 조선 조정이 여소야대 국면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소론은 권력을 잡기 위해 경종이 빨리 후사를 낳고, 연잉군을 내칠 명분을 만들어야 했다. 반대로 노론은 후사가 없는 경종을 압박하여 연잉군을 세자로 책봉하길 원했다. 다수파였던 노론은 야밤에 조정에서 날치기로 연잉군 세자 책봉 안건을 통과시켰다. 늘 그렇지만 오늘날의 국회나 당시 조선의 조정이나 큰 차이가 없다. 노론의 날치기 통과로 연잉군은 소론 파에게 매번 공격당하는 신세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연잉군은 소론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형이자 왕인 경종에게 석고대죄를 하며 간신히 빠져나왔다. 특히 경종에게 깍듯이 대했고, 다행스럽게도 경종 역시 유일한 혈육이라며 동생인 연잉군을 잘 챙겼다. 노론 대신들이 선을 넘어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때면, 연잉군은 이는 자신의 불찰이라며 저자세로 일관했다. 궁궐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이었다. 노력이 성공한 것인지 경종은 37세 후사 없이 죽게 되어 세자이자 세제 연잉군이 다음 왕인 영조가 된다. 영조는 왕이 된 후에도 경종은 독살했다는 음모론에 시달렸다. 소론 세력은 노론과 영조를 견제하기 위해 언론을 통해 경종 독살설을 퍼트려 공격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현대와 조선의 정치는 다를 게 없다. 지금도 가짜 뉴스를 활용해 상대 정치 세력을 공격하는데, 18세기도 똑같았다.

  영조는 왕이 되기 위해 처절하게 살아남았고, 궁궐의 섭리를 잘 알고 있던 그였기에 사도세자를 강압적으로 교육한 것이다. 첨예하게 당쟁 간 대립이 발생하는 조정에서 왕이 제대로 정신 차리지 않는 다면 국가가 무너질 수 있었다.



결론



  영조에게 이런 뒷 배경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자식 교육은 정도가 지나쳤다. 교육이라고 칭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오히려 학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영조가 단 한 번도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세자가 어릴 때, 영조는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왕에 오를 수 있게 노력했다. 올바른 자식 교육을 위해서 적절한 당근과 채찍을 주어야 하는데, 아들에게 지나친 기대감을 가진 영조는 너무 한쪽으로만 강요했다.

  분명 자식에게 사랑을 표현해주어야 할 때는 확실하게 말해줘야 한다. 임오화변을 그린 영화 '사도'에서도 나오는 사도세자의 대사 중 "나는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가 있다. 이 말 한마디가 세자와 영조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조는 세자에게 아버지가 아닌 왕으로서의 교육만 너무 강조했고, 자식을 배려하지 않은 교육은 결국 그를 미치게 했다.  


  점차 사회가 현대화되면서 삶이 바빠지며 커져 부모 자식 간의 표현이 메말라가고 있다. 삶이 바빠지면서 점점 연락도 뜸해지고, 표현도 점점 삭막해지고 있다. 사랑은 표현해야 비로소 가치가 있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생은 그리 길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많이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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