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ironde Mar 29. 2021

유럽 남자들을 홀린 팜므파탈

그녀는 과연 이중 스파이였는가, 마타하리

마타 하리


  나는 마타 하리와 같은 인물을 좋아한다. 선과 악의 경계에 걸쳐 있는 사람을 분석하는 걸 좋아한다. 저번에 쓴 로젠버그 부부 간첩사건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나는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역사적 인물 혹은 사건에 대해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게 어떤 것이어도 좋다. 나와 반대의 의견이라면 더욱 좋다. 이런 생각 만으로도 난 내 글이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사족이 조금 길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녀가 어떻게 유럽 대륙을 홀렸고 논란의 중심으로 남았는지 알아보자.


 

유럽을 홀린 무용사



  마타 하리는 인도네시아어로 태양을 뜻한다. 그녀가 인도네시아 예명을 쓴 이유는 첫 번째 남편이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근무하던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십 대의 어린 나이에 신문 광고만을 보고 남편을 골랐다. 어린 나이의 타향살이는 쉽지 않았다. 결국 26살이 되는 1901년 파리로 이동해 본격적으로 매춘 활동을 시작한다.

  그녀는 키가 크고 몸매가 매우 가냘펐으며, 피부는 까무잡잡했다고 한다. 전형적인 동양 미녀의 느낌을 풍겼다. 유럽 사교계에서 그녀가 이목을 끌 수 있던 건 동양적인 외모와 이름이 한몫했다. 거기에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 배운 전통 춤은 그녀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언어적인 재능이 남달라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를 모두 구사할 줄 알았다. 그녀는 옷을 거의 입지 않은 채 선정적인 춤을 추면서 많은 남성들을 유혹했다. 워낙 말솜씨가 좋았는지 때론 인도네시아 공주 출신이라고도 하고 네덜란드-인도네시아 혼혈인이라고도 하며 접근했다. 실제로 그녀는 네덜란드 출신의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독특한 매력으로 얼마 되지 않아 파리 사교계를 접수했다.

  파리 남자들은 유혹한 그녀는 베를린으로 넘어갔다. 이번엔 독일 남성들을 홀렸다. 그녀의 목표는 주로 돈이 많은 독일의 군 간부, 왕가 인물 혹은 정치인들이었다. 마타 하리는 특히 군복을 입은 남자들에게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독일 군부와 가까워지면서 자연스럽게 독일 군의 중요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많은 유럽 도시를 순회하면서 상류 사회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마타하리가 유럽 사교계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20세기 초 유럽의 호황도 한 몫한다. 유럽 열강 국가들은 산업 혁명이 끝난 후 자본주의가 완전히 뿌리내리면서 부의 계층이 늘어갔다. 거기에 수많은 식민지에서 발생되는 경제적 이득으로 유럽은 호황기를 맞이한다. 이에 힘입어 부유층 사이에선 자연스럽게 사교계가 형성이 된다. 또한, 식민지 국가가 늘어남에 따라 군의 숫자를 늘리는 데에도 힘을 쓴다. 많은 유럽인들은 해외 식민지에서 근무한 군인들을 존경했다. 그들은 명예를 얻어 본국으로 돌아와 국가의 상류 계층이 된다. 이 시대를 벨 에포크 시대라고 부른다.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뜻이다. 마타 하리는 유럽 대호황기에 힘입어 사교계에서 더욱 빛이 났다. 하지만 역사에서 아름다운 시절은 항상 격동 직전의 신호일뿐이다.



세계 1차 대전의 이중 스파이?



  만약 이대로 평온한 시대가 지속되었다면 그녀의 이름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열강 제국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는 결국 한쪽으로 쓰러진다.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대공이 암살되면서 제1차 세계 전쟁이 시작된다. 세르비아의 동맹국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동맹국 독일은 서로 양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사실 사라예보 사건은 명분이었을 뿐 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 간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 독일과 프랑스는 서로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마타 하리는 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인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네덜란드는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안전할 거라 생각했다. 문제는 사교 활동으로 배를 채워온 그녀는 전쟁이 시작되자 돈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재능을 탐낸 독일군은 그녀를 프랑스 스파이로 심으려고 한다. 독일 정보부는 그녀를 포섭해 스파이로 키웠다. 마타 하리는 독일군으로부터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2만 프랑을 약속받고 프랑스로 넘어가 군 수뇌부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프랑스 국방장관이 자주 가는 사교 클럽으로 향했다. 남자를 유혹하는데 천부적 재능이 있던 그녀는 쉽게 프랑스 군 수뇌부와 외교관들에게 접근했다. 미인계를 활용해 프랑스의 기밀 정보에 손쉽게 다가갔다. 프랑스의 에이스 조종사와 염문설이 나기도 할 정도로 프랑스는 그녀의 유혹에 쉽게 흔들렸다.

  하지만 스파이가 이름을 남겼다는 건 임무 실패를 뜻한다. 워낙 매혹적이었기에 프랑스 수뇌부 사이에서 금방 유명세를 타고 독일군 스파이라는 사실을 눈치챈다. 프랑스는 역으로 그녀를 이용해 독일군 정보를 빼내오기로 한다. 마타 하리를 협박한 프랑스는 독일 기밀을 빼올 목적으로 그녀를 스페인으로 보낸다. 스페인에 있는 독일 방첩 기관장을 유혹해 정보를 가져오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다.

  문제는 그녀는 전문적인 스파이가 아니었다. 대부분 정보국에서 키워낸 스파이들을 수년간의 교육을 거쳐 완성된다. 하지만, 그녀는 독일에서 몇 개월 간의 짧은 커리큘럼뿐이었다. 그녀가 실제로 양국에 보낸 정보는 형편없었다. 독일군 스파이로 활동할 당시 주로 전달한 정보는 전쟁과 전혀 관련 없는 프랑스 수뇌부들의 사생활이었다. 군사 기물과 외교 문서는 전무했다. 스파이 능력과 남자를 유혹하는 능력은 별개의 문제였다. 프랑스군 역시 그녀에게 전달받은 정보가 형편없기 짝이 없었다. 이를 본 프랑스 군은 그녀가 여전히 독일 스파이로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1917년 2월 13일 그녀를 체포한다.

  그녀가 체포된 과정도 재미있는데, 그녀는 매춘 활동을 위해 평소에 살정자제 스프레이를 지니고 다녔다. 하지만, 정보를 보내는 데 사용하는 무색 잉크라고 착각한 검문관이 그녀를 체포했다. 양국을 오가는 이중 스파이를 하기에는 너무 허술했다. 이틀도 채 안 되는 짧은 재판을 통해 그녀는 총살형을 선고받는다. 1917년 10월 15일, 파리에서 형이 집행된다. 보통 총살을 집행할 때엔 죄수의 눈을 가리는데 마타 하리는 눈을 가리지 않고 당당하게 총구 앞에 섰다. 사수들이 차마 쏘지 못하고 있자, '어서 쏘세요.. 총을 들고 있는 게 무겁지도 않나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럽을 홀린 무용사는 만 41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옐로 저널리즘의 희생양?



  팻 시프먼은 팜 파탈(Famme Fatale)이라는 저서를 통해 그녀가 스파이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그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그녀의 스파이 활동은 모두 조작된 것이고, 실제론 매혹적인 무용사로 유럽 사교계의 어두운 면을 감추기 위한 희생양이라고 지적했다. 1910년대는 여성의 참정권이 전혀 보장되지 못했다. 당시 프랑스 사교계엔 사생활에 대한 폭로가 끊이질 않았고, 언론에서 심심치 않게 블랙리스트를 뿌리며 상대파를 흠집 내기 위해 서로 흠집을 내는 데 열을 올렸다. 시프먼은 마타 하리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었을 뿐이고, 사교계의 어두운 면을 잘라내기 위해 스파이라는 죄목을 씌웠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프먼은 당시 시대상을 정확히 지적했지만, 스파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전쟁 후 독일의 기밀문서들이 세상 밖으로 공개되었는데 실제로 마타 하리가 독일군으로부터 2만 프랑을 받기로 약속한 문서가 있었다. 그녀가 쾰른에서 스파이 교육을 받은 기록도 존재한다. 이는 제퍼슨 애덤스의 저서 Historical Dictionary of German Intelligence에 나타나 있다. 프랑스 재판에서 그녀가 독일군에게 전달한 정보는 프랑스 병사 5만 명을 죽일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그녀의 스파이 실력을 보았을 땐, 이는 거짓에 가깝다. 그녀는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네덜란드에서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평온한 일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대는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전쟁은 그녀를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게 했다.

  무능했던 미녀 스파이는 결국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또 다른 의문점을 남겼다. 유럽 사교계의 어두운 면, 옐로 저널리즘을 보여주고 당시 바닥난 여성 인권 문제 역시 보여준다. 20세기 초 유럽은 자본의 허울에 빠져 상류층 사이의 문란한 사교 생활이 퍼져있었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이를 숨기기 위해 희생양을 찾아야 했고 마타 하리는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녀가 스파이 활동을 했지만, 겨우 이틀만의 재판으로 총살형을 당한 건 다소 과한 처사였고, 그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어느 언론에서도 다루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뒤늦게서야 여러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그녀에 대한 인권 문제가 대두되었다. 현대에 마타 하리는 뮤지컬로 부활해 오늘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그녀의 죽음은 세상에 메시지를 던졌다. 앞서 말한 문제들은 20세기 초 사회적 문제들은 여지없이 보여준다. 그렇다고 순교자라고 볼 순 없다. 군 기밀을 빼내는 스파이를 가만히 두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더욱이 전시 상황이었기에 스파이에 대한 판결은 즉각 처형이다. 그녀는 분명한 스파이였기에 죽음 역시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시대상으로 볼 때 누군가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어야 한다. 선과 악의 경계에서 사람들은 그녀를 어떻게 볼지 정말 궁금하다.


작가의 이전글 사랑한다면 표현하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