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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Apr 06. 2021

위기의 나라를 구하고 사형당한 시간, 761일

프랑스 구국의 영웅 - 잔 다르크

오를레앙 전투에서의 잔다르크


Prologue.



  1337년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 분쟁이 발생한다. 양국은 대화로 해결되지 않자 전쟁에 돌입한다. 금방 끝날 것 같던 전투는 100년이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영국의 왕 헨리 5세는 길고 긴 전쟁을 끝내기 위해 부르고뉴와 손을 잡고 프랑스를 공격했다. 전황이 불리해진 1420년 프랑스는 왕 샤를 6세는 죽게 되면 왕세자가 아닌 영국 왕 헨리 5세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샤를 6세보다 18살이나 어렸던 영국 왕 헨리 5세는 훗날 자신이 잉글랜드-프랑스 공동 국왕이 될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헨리 5세가 먼저 급사한다. 곧바로 두 달 뒤 프랑스의 샤를 6세도 사망한다. 새로운 영국 왕 헨리 6세는 9개월의 갓난아기였는데, 영국은 헨리 6세가 잉글랜드-프랑스 공동 국왕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헨리 5세에게만 이 조약이 유효할 뿐 그가 먼저 죽었으니 왕세자 샤를 도팽이 프랑스 국왕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국은 다시 관계가 틀어졌고, 잉글랜드는 이번에야 말로 전쟁을 끝낼 생각으로 다시 프랑스를 침공하다

  전쟁은 여전히 잉글랜드에게 유리했다. 잉글랜드 군은 이미 수도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영토 절반을 차지했다. 그들은 프랑스 해안가 위주로 군대를 배치해 영국 본토와의 병력과 물자 수송을 수월하게 만들었다. 잉글랜드는 왕의 정통성에서도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왕은 전통적으로 랭스라는 도시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문제는 랭스가 잉글랜드군의 손에 떨어져 있어 언제든지 대관식을 할 수 있었다. 반면 도팽 왕세자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하지 못해 다른 프랑스 귀족들에게 왕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잉글랜드 군은 왕세자가 헨리 5세와 프랑스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스캔들을 유포했다.  프랑스는 말 그대로 풍전등화였다. 프랑스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반드시 신의 기적이 필요했다.



1429년 4월 29일 (잔 다르크 사망 D-761)



  프랑스 중부의 중심 도시 오를레앙. 그 성에 17살의 한 소녀가 찾아왔다. 그녀의 이름은 잔 다르크. 그녀는 스스로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동레미라는 아주 작은 소도시에서 태어난 그녀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자주 도망 다니던 중 13살이 되었을 때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프랑스를 구하라


  신의 계시를 받은 그녀는 곧장 보쿨뢰르 지방의 영주를 찾아가 자신을 도팽 왕세자에게 데려가 달라고 요구했다. 영주가 결코 17살의 평범한 어린 소녀를 덜컥 왕세자에게 데려다 줄리 없었다. 그녀는 성에서 내쫓겼지만 집에 가지 않고 성에 남아 계속 왕세자 알현을 요구했다. 하도 소녀가 떼를 쓰자 영주는 소녀를 테스트해볼 생각으로 6명의 기사와 함께 왕세자가 있는 시농으로 향하게 했다. 보쿨뢰르에서 시농까지는 무려 435Km로 서울에서 부산 거리와 거의 비슷하다. 심지어 시농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적국인 부르고뉴 지방을 지나야 한다. 놀랍게도 잔 다르크와 6명의 기사는 아무런 신변의 위협 없이 안전하게 시농에 도착한다.  

  잔 다르크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도팽은 그녀가 정말 신의 계시를 받았는지 시험해보기로 한다. 시종에게 화려한 옷을 입혀 왕의 자리에 앉히고 자신은 허름한 옷을 입고 인파 속에 숨어있었다. 왕세자를 알현한 잔은 허름한 차림의 왕세자를 곧바로 발견하고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왕세자는 크게 놀랐다. 측근들은 그녀가 마녀일지 모른다며 여러 질문을 했지만, 총명한 소녀는 곧장 대답을 잘하며 위기를 모면했다. 이를 지켜본 도팽은 그녀에게 비범함을 느끼고 프랑스 최고의 기사들을 붙여 임무를 주었다.

  

  잔 다르크에게 처음 주어진 임무는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에게 포위당한 오를레앙을 구하는 것이었다. 오를레앙은 프랑스 정중앙에 위치한 도시여서 프랑스 전역으로 군사를 보내기 용이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연합군도 이를 잘 알았기에 오를레앙을 격파하고 시농으로 나아가 도팽 왕세자를 사로잡아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다. 연합군은 무려 6개월간 성을 포위했고, 프랑스 병사들은 점점 지쳐갔다.

   1429년 4월 29일,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소녀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에 도착했다. 그녀는 오를레앙에 가면서도 신의 기적을 보여줬다. 시농에서 오를레앙에 가기 위해선 큰 강을 건너야 했다. 문제는 역풍이 불어 전진이 불가능했다. 그러자 잔은 신에게 기도를 올렸고, 곧바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배를 띄워 오를레앙에 도착할 수 있었고, 이 모습을 본 프랑스 병사들은 그녀가 정말 신이 보내주신 성녀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신의 보낸 성녀가 온다는 소문이 돌던 오를레앙의 병사들은 잔이 도착하자 열렬히 환영했다. 그녀는 도팽의 기사들과 함께 최전방에서 잉글랜드 군과 싸웠다. 순백의 갑옷을 입고 가녀린 몸으로 최전방에서 적진에 뛰어드는 그녀를 보자 병사들도 덩달아 사기가 올랐다. 무기력했던 프랑스 군은 그녀의 등장으로 기세가 제대로 올랐다. 그렇게 잔 다르크와 오를레앙의 병사들은 영국군을 상대로 교전에서 승리한다. 1492년 5월 8일 드디어 영국군이 퇴각했고, 프랑스는 오를레앙을 지키는 데 성공한다. 순백의 성녀가 오를레앙 성벽 한가운데서 흰색 깃발을 흔들기 시작하자 프랑스 병사들은 그녀를 향해 미친 듯이 환호했다. 그렇게 백년전쟁에서 프랑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429년 6월 18일 (잔 다르크 사망 D-711)



  오를레앙을 구한 효과는 상당히 컸다. 당시 영주들은 프랑스 왕실에 붙을지, 잉글랜드 왕실에 붙을지 저울질하고 있었다. 줄만 잘 서면 왕실로부터 막대한 돈을 받을 기회였다. 부르타뉴 가문의 아르튀르 드 리슈몽 백작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리슈몽 백작은 도팽 왕세자로부터 프랑스 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군권을 장악한 그가 프랑스를 배신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팽은 리슈몽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도팽은 잔에게 리슈몽 백작을 구원해 그를 프랑스 편으로 끌어들이고 루아르강을 따라 황제 대관식을 하는 랭스를 거쳐 파리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잔에게 프랑스가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비장의 카드를 부탁한 셈이었다. 잔 다르크의 파리 원정이 시작되었다.

  그사이 잉글랜드 군대가 오를레앙을 다시 공격하기 위해 남하했다. 그들이 집결한 장소는 오를레앙 북부에 있는 파테였다. 잔은 서둘러 리슈몽 백작의 협력을 받아내야 했다. 리슈몽은 오를레앙의 성녀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네가 성녀라도 나는 두렵지 않고, 네가 마녀라면 더욱더 두렵지 않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그녀가 정말 프랑스를 구하려는 마음이 있는지 떠보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진짜는 진짜를 알아보는 법. 리슈몽은 대화를 나누고 잔이 비범한 소녀라는 걸 알아챈다. 리슈몽은 그녀와 함께 파테의 잉글랜드를 무찌르기로 한다. 잔 다르크 원정 최고의 조력자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양국은 서로의 강점이 명확했다. 잉글랜드군의 주력 부대는 장궁병이었다. 반대로 프랑스의 주력 부대가 온몸을 철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이었다. 우리가 흔히 중세의 기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일치한다. 프랑스 기사들은 화살이 관통되지 않는 철갑옷을 두르고 적진을 휘젓는 것이 주전술이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장궁은 프랑스의 철갑옷을 뚫고 들어왔다. 게다가 사거리도 매우 길어 프랑스 기사들은 적진에 도착하기도 전에 화살에 맞아 죽어나가기 일수였다. 백년전쟁 기간 동안 잉글랜드 군에게 밀린 이유도 바로 장궁병의 화살이었다. 백년전쟁 기간에 프랑스 사람들은 얼마나 잉글랜드 장궁병이 무서웠는지 포로들을 잡으면 활을 쏘지 못하게 검지 손가락과 중지 손가락을 잘랐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아직도 검지와 중지로 'V'자를 하고 손등을 보여주는 것을 욕이 되었는데, 이것이 백년전쟁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다만, 장궁병이 활약하기 위해선 2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반드시 고지를 점령해서 미리 시야를 확보해야 했고, 주변에 말뚝을 박아 기사들이 말을  타고 장궁병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필요했다. 화살은 총과 다르게 장전-발사되는 시간이 길어, 목표물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즉, 기사들의 말이 말뚝을 보고 당황해야 저격이 수월해진다. 일생을 전장에서 보낸 리슈몽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리슈몽은 잉글랜드 군이 말뚝을 설치하기 전에 빠르게 그들의 위치를 알아내려 했다. 잉글랜드 군은 여기서 결정적인 실수를 하는데, 몇몇 병사들이 진영 근처에 사슴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사냥을 나갔다가 프랑스 정찰병에게 위치가 발각된 것이다. 프랑스 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재빠르게 1500명의 기병을 파견해 잉글랜드 적진으로 보냈다. 영국도 이를 눈치채고 500여 명의 장궁병을 고지에 배치하고 장애물을 설치했다. 리슈몽은 정면으로 고지에 오르면 장궁병의 화살에 쓰러질 것이 뻔했기에 측면으로 군대를 돌렸다. 잉글랜드 군도 이를 눈치채고 대비하려고 했지만 프랑스 기병대가 한발 더 빨랐다. 그리고 장궁병의 옆구리를 정확히 찔렀다. 프랑스 기병대에게 속수무책 없이 당했고, 잉글랜드 군에서 부랴부랴 본대를 이끌고 달려왔지만, 이 역시 리슈몽 손바닥 안이었다. 미리 배치된 프랑스 병사들이 잉글랜드 본대마저 습격하며 잉글랜드 군대는 리슈몽의 속도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 당했다.


  프랑스의 완벽한 승리였다. 프랑스 군대는 잉글랜드 군을 유린하는 동안 겨우 100여 명의 사망자를 냈지만, 잉글랜드 군은 무려 2500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본대의 절반에 달하는 수치였다. 이 승리로 프랑스는 루아르 강 이북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모두 가져왔다. 루아르 강을 얻었다는 건 파리와 랭스로 가기 위한 길목이 열린 셈이었다. 이전에는 연합군의 방비로 인해 강을 건너는 것조차 어려웠다. 1429년 6월 18일 잔 다르크 원정군의 첫 전투는 프랑스의 완벽한 승리였다. 승리의 가장 큰 이유는 리슈몽의 전략 덕분이었다.

  잔은 군대를 이끌고 한 달 만에 옥세르, 트루아, 샬롱 등을 거쳐 랭스에 도달한다. 잔 다르크가 가는 곳마다 프랑스 사람들은 성녀가 도착했다면 크게 환영했다. 1429년 7월 17일, 드디어 랭스를 다시 탈환하고 도팽 왕세자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올린다. 선왕이 죽은 지 7년 만에 간신히 왕으로서의 대관식을 올린다. 승리 왕 샤를 7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샤를 7세와 잔 다르크는 프랑스 곳곳에 있는 영주들에게 호소하며 프랑스를 위해 싸워달라고  부탁했다. 잔 다르크의 성녀 이미지는 프랑스 영주들의 협력을 얻기에 아주 유용했다. 전쟁의 여신이 프랑스의 손을 들어주기 직전 상황까지 온 것이다



피라미드 광장에 있는 잔 다르크 동상


1430년 5월 23일 (잔 다르크 사망 D-372)



  프랑스에서 잔의 인기는 엄청났다. 서서히 전황이 프랑스 쪽으로 기울자 샤를 7세에게 잔은 이제 오히려 걱정거리가 되었다. 잔의 인기를 이용해 전황은 뒤집었지만 이대로 전쟁이 끝나면 자신의 인기를 앞질러 프랑스 왕실을 위협하는 존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프랑스의 많은 영주들은 왕실 자체 보단 잔의 성녀 타이틀을 보고 합류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다소 이해가 되지 않지만, 중세 유럽에게 신이란 절대적인 존재였다. 게다가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리슈몽과 잔이 협력관계라는 것도 샤를 7세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그는 잔에게 갑옷 위에 금실로 짠 옷과 말안장 장식은 지나친 사치라고 지적하며 둘의 사이가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 부르고뉴 측에서 파리를 바치고 프랑스에 항복할 것이라는 제안 한다. 프랑스 왕실은 이게 웬 떡이냐며 덥석 그 제안을 받았지만, 모두 잉글랜드의 계략이었다. 샤를 7세가 저 말을 믿고 파리에서 들어갔고,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이 병력을 이끌고 파리를 공격하려 했다. 이를 미리 알아차린 잔은 샤를을 설득해 파리 주변지역을 탈환하여 시민들이 프랑스 왕실에 협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파리 인근 시민들은 잔의 입성을 저지했다. 오랜 시간 잉글랜드의 지배로 세뇌를 당한 파리 시민들은 그녀를 마녀라고 욕하며 원정대의 입성을 거부했고 화살까지 쐈다. 잔은 허벅지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당하지만 파리를 계속 공격했다. 파리의 견고한 방어를 소수의 병력으로 뚫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이 파리에 다시 입성했고, 잔은 샤를을 구하는 데만 만족하고 물러났다. 이때, 샤를 7세는 잔이 파리에 입성한다면 그녀의 인기가 더 올라갈 것을 두려워해 그녀에게 소수의 병력만 지원하고 곧바로 철수를 지시했다.


  그러던 와중 잔 다르크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다.



프랑스 왕국은 왕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께서 왕에게 맡기신 것에 불과하다.


  이 말은 중세 기독교 관점에서 당연한 말이면서도,  샤를 7세 입장에서는 자신의 왕으로서 인정하지 않는 말로 들릴 수 있다. 누구든 하느님의 인정만 받는다면 자신이 아니더라도 왕에 오를 수 있다는 말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 발언으로 샤를 7세와 잔 다르크는 서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다.

  

  대관식 이후 왕위를 인정받자 샤를 7세는 전쟁에 있어 소극적이었다. 기세를 올린 상태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통해 프랑스를 회복하자는 잔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당시 프랑스는 대부분의 영토를 잉글랜드에게 뺏겨 돈이 없는 와중에도 프랑스에 합류해 전쟁에서 이기면 훗날 영주들에게 거금을 주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이미 재정은 바닥을 난 상태에서 채무까지 불이행한 상태여서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결국 대부분 샤를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고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과 프랑스 사이의 휴전 협정이 체결된다. 약 1년간의 휴전이 끝나고 1430년 5월 23일, 힘을 키운 부르고뉴의 필리프 3세가 군대를 이끌고 콩피에뉴를 공격한다. 샤를 7세는 잔다르크에게 겨우 200여 명의 군사를 주고 콩피에뉴로 향하게 했다. 잔은 처음 기습에는 성공했지만 곧바로 부르고뉴의 증원군 6000여 명이 도착한다. 이를 보고 퇴각하게 되는데, 잔 다르크는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먼저 성에 들어가고 자신은 마지막에 들어갔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갑자기 병사들이 모두 성에 들어가게 되자 다리를 올리고 성문을 걸어 잠갔다. 잔은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부르고뉴 병사들이 쏜 화살에 맞아 사로잡히고 만다. 아직도 잔이 퇴각하는 시점에 왜 병사들이 성문을 걸어 잠궜는지 의문이다.  

  잔 다르크를 사로잡은 부르고뉴의 리니 백작은 그녀를 정중히 대접해줬다. 하지만 잔은 지속적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게 높은 탑에 가뒀는데, 그녀는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도주를 시도했지만 곧바로 병사들에게 잡혔다. 리니 백작은 그녀를 관리하기 어려워지자 샤를 7세에게 몸값을 내고 그녀를 데려가라고 말했지만, 왕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던 리니 백작은 결국 또 거액을 제시한 잉글랜드에게 잔을 팔아넘겼다. 결국 그녀는 잉글랜드-브루고뉴 연합군에 의해 파리로 호송된다.



1431년 5월 30일 (잔 다르크 사망 D-day)



  잔 다르크에 대한 이단 재판이 시작되었다. 잉글랜드 군에게 잔은 얄미운 존재였다. 그녀로 인해 전쟁이 양상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들은 잔에게 마녀라는 죄목을 씌워 화형 시키려 했다. 그녀를 압박하기 위해 무려 70여 명의 이단 심문관을 데려왔다. 시골에서 태어나 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소녀를 이단으로 몰려고 무려 70명의 신학인들을 모은 셈이었다. 첫 번째 재판은 잔다르크에게 창피를 주기 위해 공개 재판으로 열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19살 소녀는 심문관의 질문에 현명하게 대처한다. 재판관들은 잔에게 당한 게 창피했는지 다음 재판부터는 비공개로 바꾼다. 현대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고등학생 소녀를 범죄자로 몰기 위해 국가에서 내로라하는 검사 70여 명을 동원했지만, 이 소녀는 변호사도 없이 홀로 검사의 질문에 완벽하게 대응한 셈이었다. 재판관과 잔이 신앙에 대해 주고받은 대화는 정말 너무 놀라웠다.

 

재판관 : 그대는 스스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잔 다르크 : 제가 만약 은총을 받지 않았다면 하느님께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기도할 것이며, 은총을 받고 있다면 계속 그 상태에 머물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 잔이 은총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감히 하느님에 은총에 관해 얘기를 한다며 이단으로 몰아갔을 것이고, 반대로 은총을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지금까지 잔이 들었다고 주장하는 말은 모두 거짓이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녀를 이단으로 몰아가려는 함정이었지만, 잔은 함정에 빠지지 않고 대답했다.



재판관 : 그대가 행한 일에 대해 교회의 결정을 승복할 것인가?

잔 다르크  : 저는 교회를 사랑하지만 재판관께서는 저를 심판하실 권리가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께서만 저를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재판관 : 그렇다면 교회의 결정에 불복하겠다는 것인가?

잔 다르크 : 하느님과 교회의 뜻은 하나입니다. 어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 재판관들입니다.

-> 잔이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교회의 결정에 반대한다면 신의 뜻을 대리로 전하는 교회에 불복한 이단으로 몰릴 것이다. 하지만, 교회와 하느님의 뜻이 같다고 말해 교회를 존중하면서도 자신을 이단으로 몰 수 없게 심판 권리는 부정했다. 동시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마녀로 몰기 위한 재판관의 행동을 지적했다.



  재판 과정에서 그녀에게 불리한 증언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미란다 원칙도 SNS도 없던 15세기 유럽에서 그녀를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녀에게 화형을 선고되었다. 잔은 교황청에 항소를 신청했다. 교회법 상 재판의 피고는 교황에게 다시 한번 더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재판관은 잔의 요구를 묵살하고 화형을 집행했다. 1431년 5월 30일, 루앙에서 많은 시민과 잉글랜드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속에서 숨을 거둔다. 누군가는 마녀가 드디어 죽었다며 환호했고, 몇몇 사람들은 성녀를 죽여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작은 마을 동레미에서 신의 부름을 받아 프랑스를 구한 구국의 영웅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에서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 단 761일 만에 사망하게 된다.

  그녀가 죽은 후 4년 뒤 부르고뉴와 프랑스가 평화 협정을 맺고, 이듬해 리슈몽 백작의 활약으로 다시 파리를 수복하면서 전쟁은 사실상 프랑스의 승리로 끝난다. 이후 국지전이 20여 년간 일어나지만 잉글랜드는 내부 왕실 문제로 프랑스 영토에서 모두 손을 떼고 본국으로 돌아간다. 잔 다르크 사망 25년 후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끝나자 샤를 7세는 그제야 잔 다르크의 복권을 선언한다. 잔 다르크의 원정로에 있던 도시들에서 그녀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성직자들을 초청해 잔에 대한 복권 재판을 열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에 진행된 명예회복 재판으로 잔이 마녀가 아니었음이 다시 공언되고, 담당 재판관이 이단자로 선언되었다. 물론, 재판관은 이미 죽었고, 잉글랜드 측에선 그녀의 복권에 동의할리 없었으니 실질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복권 재판이 없었다면 그녀에 관한 문서 모두 마녀로 기록되어 삭제될 것이고, 지금의 영웅 잔 다르크는 기억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pilogue.



  나라를 구하기 위한 순수한 그녀의 노력과 달리, 현대 사람들은 그녀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활용한다. 복권 이후에도 프랑스 왕실은 그녀의 업적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렸다. 위기의 프랑스를 구한 게 왕실이 아니라 시골에 있던 10대 소녀라는 사실을 왕실의 체면을 낮출 뿐만 아니라, 그녀의 죽음에 샤를 7세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으니 그녀를 띄워줄 리 없었다. 그러다 19세기 그녀를 활용해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이 나타나는데, 바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다. 실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녀의 이미지를 만든 사람이 나폴레옹이다. 그는 잔이 가지고 있는 열사적인 이미지를 활용해 프랑스 사람들을 선동했고, 프랑스 국민을 결집시켜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다. 프랑스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잔 다르크만 한 사람이 없었다.  이후 세계 1,2차 대전 프랑스의 징병 포스터에는 그녀가 항상 들어가 있었다.

  잔 다르크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현대의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의 인종 차별주의자이자 극우파로 유명한 장 마리 르펜은 잔의 이미지를 팔아먹기로 유명한다. 허구한 날 그녀의 동상 앞에서 자주 유세를 열었다. 잔 다르크가 잉글랜드 인을 프랑스에서 내쫓은 것처럼 프랑스 내 외국인을 내쫓아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좌파 진영도 다를 바 없다. 이들은 국민들에게 혁명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작품과 더불어 잔 다르크의 이미지를 사용해 국민들을 선동하기도 한다. 20세기 초반 영국과 미국에서는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기 위해서 그녀의 이미지를 활용하기도 했다. 잔 다르크는 당연히 참정 운동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15세기에 여성에게 정치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개념이었다. 그녀는 여성 인권에 대한 운동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파워풀한 여성상을 이용해 페미니즘의 심벌로 활용하기도 한다. 그녀의 순수한 행동이 현대 정치인들의 프로파간다로 사용된다는 것은 조금 슬프면서도 현대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그녀의 761일은 우리가 사는 지구에 엄청난 파장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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