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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Apr 20. 2021

내 이름은 베드로 직업은 조선 성리학자

조선의 천주교 전파와 최초의 천주교 탄압 신유박해



  정부의 비대면 예배 조치는 종교 탄압일까? 최근 일부 종교인들이 비대면 예배를 종교 탄압이라 주장하고 있다. 코로나와 방역 수칙은 효율성은 오늘 다룰 이야기가 아니니 깔끔히 넘어가자.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에서 당연히 각자 종교의 문화도 보장됨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특수한 상황이라면 시대에 맞게 종교도 변화해야 한다. 어쩌면 필자는 종교가 없어 쉽게 말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일부 종교인들이 종교 탄압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떨어져 있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물론 절대 종교인들에 대한 존중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신앙은 모두 존중받아야 한다. 나 종교 없다고 상대가 믿는 신앙 무시하며, 그들이 지키는 율법 무시하는 행동은 절대 해선 안된다. 무슬림들에게 돼지고기 먹으라고 강요해서도 안되고, 스님에게 살생을 강요해서도 안된다. 비종교인들이 종교인들을 존중해야 하듯, 종교인들 역시 시대적 상황에 맞게 교리를 조금 수정할 줄 알아야 한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겠지만 우리 역사 속에서 종교의 탄압이 없던 것은 아니다. 특히 18~19세기 조선 조정에서 실시한 천주교 박해가 가장 컸다. 당시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종교가 어떻게 전파되었고, 조정으로 부터 어떤 박해를 받았는지 알아보자. 그리고 이 과정에서 종교 탄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면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조선에 기독교가 전파된 과정


  조선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 없이 천주교가 전파된 나라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스스로 성리학의 한계를 깨닫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천주교를 들여왔기 때문이다. 종교는 늘 살기 힘든 사회에 빠르게 전파된다. 조선은 당시 두 번의 큰 전쟁으로 생업이 힘들어진 백성들과 당쟁으로 조정에서 밀려난 성리학자 사이에서 크게 전파된다.

  가톨릭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올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청에 굴복하고,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를 볼모로 잡아간다. 세자는 무려 9년간 청나라에 머물면서 서방 문물을 체험한다. 조선이라는 좁은 우물에 있던 그가 청에서 보는 신물문은 놀라웠다. 소현세자는 천주교 선교사 아담 샬과 친해지게 되는데, 나중에 조선에 돌아갈 때 천주교 선교사들을 데려가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9년 만에 돌아간 소현세자는 병에 걸려 70일 만에 죽고 그의 약속도 흐지부지된다. 세자는 천주교 서적도 가져왔지만, 아들을 질투한 인조는 그가 청에서 가져온 모든 물건을 불태운다. 그렇게 조선은 가톨릭이 전파될 첫 번째 기회를 놓치고 만다.

  시간이 흘러 18세기 수차례의 환국 정세를 통해 노론 세력이 조선 조정을 장악한다. 권력을 쥔 노론 세력은 반대파인 남인 세력들을 찍어 누르기 위해 그들이 성리학적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말했다. 주자의 학문을 더럽히는 죄목을 씌워 남인 계열의 학자들을 유배 보내거나 죽이곤 했는데 이를 '사문난적'이라 부른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상대파에게 이념에 반하는 행위를 한다는 죄를 씌우는 것은 조선이나 현대나 크게 다를 게 없다. 결국 많은 남인 학자들은 노론에게 밀려 지방에 들어가 성리학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이때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서양의 학문, 서학이다. 지방에 있던 남인 계열 실학자 성호 이익이 서학에 눈을 뜬다. 그는 조선 사대부였지만, 성리학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중국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쓴 '천주실의'라는 책을 통해 천주교를 배운다. 천주교가 학문으로서 상당한 가치를 인정했으나 종교로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호의 생각은 초기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이익을 비롯한 남인 계열 성리학자들은 가톨릭을 학문으로써 배우기 시작해 처음에는 유교와 공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학은 신앙으로 변한다. 예수의 교리가 조선에 정착되기 시작했다. 양반들과 백성들 사이에서 신앙으로 천주교를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나온다. 최초의 가톨릭 신부 베드로 이승훈은 베이징까지 가서 세례를 받는다. 이제 철저한 유교 국가인 조선과 가톨릭 신앙이 충돌하기 시작한다.



성리학 교리와 가톨릭의 충돌, 신유박해


  18세기 말, 조선의 성리학과 가톨릭이 충돌한다. 가장 문제가 된 부분은 조상에 대한 제사였다. 정교회마다 유교 제사를 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었다. 어떤 정교회에서는 유교 제사를 그 나라의 문화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다른 정교회에서는 제사 행위를 미신으로 간주해 교인들에게 제사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로마 정교회에서 정식으로 제사에 대해 금지하기로 결정한다. 그러자 조선에 천주교인들은 제사를 거부했고, 성리학 국가에서 제사 거부는 명백한 범죄행위였다. 정조 시기에는 그래도 큰 박해는 없었다. 정조는 탕평책을 위해 남인들의 힘을 키우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 사대부들도 경고 조치하는 정도로 끝내는 수준이었다.

  전라도 진산군의 양반 윤지충은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로마 정교회의 제사 금지령에 따라 제사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 소식이 조정에 들어가게 되고 그는 처형당한다. 윤지충은 순교하기 전 "하느님께 죄를 짓느니 사대부에게 죄를 짓는 것이 낫다"라고 말하고 죽는다. 고종 사촌 권상연 역시 같은 혐의로 순교한다. 이 사건이 조정과 양반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게 되어 천주교 신자들은 조상에 대한 은혜도 모르는 집단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는다. 그래도 정조는 신자들이 배교 선언을 한다면 거의 다 살려 주었고, 죄가 크지 않은 경우 혹은 제사를 다시 지낼 것이라는 약속을 받으면 죄를 없애 주었다. 큰 수준의 박해는 일어나지 않았다.


  19세기가 되자 상황이 바뀐다. 정조가 죽고 그의 아들 순조가 왕위에 올랐다. 순조가 너무 어려 영조의 아내였던 정순왕후 김 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데, 그녀는 사도세자 추존에 반대한 벽파였다. 결국 그녀는 시파와 남인 세력을 견제하기로 마음먹고, 천주교는 아주 좋은 명분이었다. 이전부터 천주교 인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아 조상에 대해 불충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매우 강했다. 정순왕후는 조선에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로라는 대대적인 명령을 내린다. 결국 정치적인 이유와 종교적인 이유가 겹쳐 신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된다.

  당시 기득권이었던 노론 벽파 입장에서는 국가 체제에 반하는 세력을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성리학은 그들을 지탱하는 이념이었고, 마침 이에 반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남인이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 과정에 잡힌 사람 중 정약용의 형 정약종도 있었다. 그는 책에서 '무부무분(아버지도 없고, 군주도 없다)'이라는 낙서가 발견된다. 유교 사회에서 불효가 어떤 걸 의미하는지는 굳이 설명 안 해도 모두 알고 있다. 이 글귀는 천주교가 패륜적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줌과 동시에 교인들에게 악마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앞서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은 베드로 이승훈을 필두로 수많은 신도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정약용 역시 형의 죄를 물어 유배를 떠나게 되고, 이 기간에 우리가 아는 '목민심서'를 작성했다. 조정의 기록에 따르면 100여 명이 순교했고, 대부분 남인 계열의 사대부들이 많았다. 종교 탄압임과 동시에 정치적 이유에 의한 박해인 셈이었다. 이들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 되었다.



종교가 우선인가? 국가가 우선인가?


  박해는 이대로 조용히 끝나지 않았다. 조정의 탄압을 피해 몰래 제천에 숨어있던 황사영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베이징에 있는 구베이 주교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는 정조 14년 과거에 급제해 정조의 신임을 받는 사대부였다. 정조는 초기에 천주교에 유화적인 정책을 펼쳐 별달리 문제없이 업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정조가 죽고 박해가 시작되자 급히 도망간 상태였다.

  구베이 주교에 보낸 편지를 명주천에 썼기 때문에 백서라고 불렀다. 국사시간에 집중했다면 한번쯤 들어봤을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그가 백서에 단순히 교인들을 구해달라고 썼다면 이슈가 되지 않았다. 그는 백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 청 황제에 조선에 칙령을 내려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게 하고, 중국 황조에 충성할 것

-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됨과 동시에 영토로 편입시킬 것

- 서양의 신식 군대를 이끌고 와 조선에 주둔시킬 것



  아무리 종교의 자유가 중요하다 하더라고 이는 명백히 내란 음모죄에 해당된다. 서양인 선교사 활동의 자유는 이해할 수준이었지만, 서양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주둔시키라는 건 스스로 식민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꼴이었다. 19세기 영국, 프랑스 군대들이 영토 확장에 목매고 있을 당시 알아서 문을 열어준다는 것인데, 황사영이 얼마나 당시 국제 사회에 무지했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이는 당시 조선 조정의 지배층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황사영은 이 백서로 인해 거열형에 처해지게 되었고 아내는 제주도로 귀양 가게 되었다.

  성리학과 가톨릭의 충돌이면서 종교의 자유와 국가의 안보와의 충돌이었다. 종교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백성들의 안전도 중요하다. 황사영의 백서가 전달되었다 하더라도 실현되기 어려웠겠지만, 만약 실제로 이루어졌다면 청나라 군대에 의해 백성들이 죽었을지 모를 일이다. 백성의 안전을 담보로 한 황사영이 위험한 발상이었다.



공동선과 종교의 자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


정의는 공동선을 추구하며 이를 만들기 위해서 시민의 참여와 노력이 필요하다.


  자유주의적 사고가 당연히 현대 사회의 기본이 된다. 우린 우리의 권리를 침해하는 모든 것에 대해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현대 사회에서 내가 어디서 예배하든 그 권리를 침해하면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다만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다. 이 시국의 비대면 예배 조치는 종교 탄압이 아닌 공동선을 위한 노력으로 봐야 하는 것이 옳다. 우리의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의 안전이 위협받는다면, 내 권리의 침해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 물론, 정부의 방역 방침이 잘못되었다는 거는 아예 다른 문제다. 방식의 문제가 있을지는 몰라도 이 문제를 종교 탄압으로 몰아가는 건 심히 잘못되었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 보장을 기반으로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 고등 시민 의식은 자유 갈망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공동선과 자유가 같이 상호작용 할 때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이 나온다고 믿는다. 황사영 백서 사건과 비대면 종교 예배는 우리 사회에서 갖춰야 할 공동선의 목적이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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