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ironde Apr 27. 2021

러시아에선 지도자가 국민을 선출합니다

러시아의 팽창주의와 유혈 사태

2014년 크림 사태



러시아에선 모르는 사람이 주는 홍차를 함부로 마셔선 안됩니다.



  2020년 8월 20일. 시베리아 톰스크에서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탄 미래의 러시아 당 대표 알렉세이 나발니가 갑작스럽게 복통을 호소한다. 비행기는 비상 착륙했고, 나발니는 재빨리 병원으로 후송된다. 다행히 목숨을 건졌고, 독일 정부는 그를 치료하겠다고 나섰다. 독일 의료진은 나발니의 몸속에서 독극물이 검출되었다고 발표했다. 독극물의 이름은 러시아에서 사용하고 있는 화학 무기의 일종인 노비촉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독극물이 나온 원인이 그가 비행기를 타기 전 공항에서 마신 차 한잔 일지 모른다고 추측했다. 그는 유명인이라 공항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모습이 SNS를 통해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나발니는 건강을 회복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싶어 졌다.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 역시 러시아 정부에게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독일 정보기관은 이 사건이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의 책임이라고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FSB 산하 독극물 팀의 암살 기도를 주장했다. 이 말을 들은 나발니는 러시아 고위 관직자로 신분을 속인 뒤, FSB 요원과 통화하여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었음을 밝혀냈다. 그는 이 장면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러시아 정부 측은 나발니의 통화가 가짜라고 주장한다. 현재 나발니는 러시아에 다시 돌아갔고, 2014년 금품 수수 사건 집행유예를 위반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상태이다.


  러시아 정부가 나발니에게 목을 매는 이유는 반 정부 인사 중 영향력이 가장 세다. 러시아에서 푸틴을 비난하기 위해서는 단단히 각오해야 하는데, 나발리는 각오를 한 사람이었다. 그는 러시아 내의 반푸틴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위해 SNS 통해 푸틴의 부적절한 행동을 폭로했다. 2011년 총선 당시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고, 2012년에는 모스크바 시장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한다. 정계에 진입하기 위해 수차례 시도했지만 푸틴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했다. 2018년 나발니는 지금의 미래의 러시아 당을 만들었고, 당선에는 실패했지만 2019년 지방선거에서 야권 인사들에게 힘을 실어주어 푸틴 정권을 위협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푸틴의 가장 강력한 정적으로 떠오른다. 나발니가 체포된 지금 곳곳에서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가 일어나고 있다.


  러시아 정부의 야권 인사 암살 시도가 이번 한번뿐은 아니었다. 전직 FSB 요원이었던 알렉산드르 발테로비치 리트비넨코는 영국에서 반푸틴 운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2006년 11월 1일 그는 과거 FSB 동료를 만났고 갑작스레 심한 복부 통증을 느낀 후 병원으로 급하게 후송되었으나 사망했다. 그의 몸속에선 방사능 물질인 폴로늄이 검출되었고, 그가 호텔에서 마신 홍차에서 검출되었다. 런던 경찰청은 폴로늄을 운반한 러시아인을 수색했고 지목된 러시아인들의 인도를 요청했으나, 물증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보내주지 않았다. 결국 사건은 그렇게 미궁 속으로 종결되었고, 양국과의 사이만 틀어졌다.


  2015년 2월 27일에는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보수파 야권 인사 보리스 넴초프가 4발의 총알을 맞고 사망했다. 범인은 체첸 공화국 경찰 특공대 소속의 자우르 다다예프로 지목되었다. 체첸 공화국 경찰 특공대는 친러 성향의 공화국 대통령의 직속 하위 부서다. 자우르 다다예프는 처음에 살해 행위를 인정했으나, 이후 번복했다. 처음에는 러시아 정부의 심한 고문을 받아 인정했을 뿐, 실제로 넴초프를 죽인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살해당하기 하루 전날 범야권 인사들을 결집시켜 통합 러시아당에 대항할 것을 주장했고, 3월 1일 야권 인사들을 모아 반정부 시위를 하기로 계획했다. 그리고 사망 17일 전인 2월 10일에는 푸틴이 자신을 죽일까 봐 두렵다는 글도 남겼다. 푸틴은 넴초프의 죽음에 대해 명백히 밝혀 낼 것을 요구했으나, 사건을 맡은 경찰이 사건 현장을 깨끗이 물청소해 많은 증거가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이 사건도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앞으로의 정권 지속을 위해서라도 반 정부 인사들의 의문스러운 죽음들에 대한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될 것으로 생각한다.


(P.S. 필자는 이 글을 업로드 하기 직전 내 인생의 마지막 홍차를 마셨다)




크림 반도의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내일부터 러시아 사람이 됩니다.



  크림반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최대 국경 분쟁지역이었다. 과거 구 소련 정부는 양국의 우호 관계 조성과 소련 합병을 위해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 영토로 귀속시킨다. 하지만 소련이 해체되고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은 친서방 정책을 펼쳐 공식적으로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의 소유권을 인정했다. 반대로 크림반도 주민들은 오랜 시간 러시아에 소속되어 있어서 러시아 합병에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와중 2014년 친러 성향의 우크라이나 4대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탄핵당하자 크림반도 사람들은 러시아 편입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던 와중 FSB는 우크라이나의 친 EU 성향의 유로마이단이 서방세력을 끌어들여 크림반도 자치 공화국을 해체할 것이라는 첩보가 전달된다. 그리고 세르게이 악쇼노프라는 의문의 인물이 크림 공화국의 총리에 오른다. 그는 통합 러시아당이라는 크림 반도 내 군소 정당 대표라는 것 외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의문의 군사 조직과 함께 의회를 무력으로 점거해 총리에 올랐다. 악쇼노프는 푸틴에게 군사적으로 크림 반도에 개입해줄 것을 요구했다. 2014년 3월 1일 러시아 군이 크림반도에 군사를 투입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반발했고, 미국 대통령 오바마 역시 러시아에게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서방 세력의 경고를 푸틴은 가볍게 무시했다. 2000여 명의 러시아 군은 크림반도를 점거하고 3월 16일 곧바로 주민들을 대상으로 러시아 편입에 대한 주민 투표를 실시한다. 재밌는 것은 선택지는 단 2개로 우크라이나에서 분리독립과 러시아 편입이었다. 러시아의 의도대로 투표는 진행되었고, 무려 96.7%라는 압도적은 찬성표를 받아 크림반도는 러시아에 합병되었다. 다음날 푸틴은 러시아 의회에 크림반도 합병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크림반도 내에 군대를 모두 철수시켰다.

  미국과 EU가 이를 가만히 보지 않았다. 독일 메르켈 총리는 러시아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며, 유럽 연합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EU와 미국 등 서방 세력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고 러시아에 경제적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비록 주민 투표로 결정된 러시아 합병이라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 그러나 러시아는 유럽연합에게 우크라이나가 자국에 가진 채무를 갚지 못한다면, 유럽으로 향하는 가스 지원을 중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서방 세력들을 말로만 러시아에 경제적 불이익을 줘야 한다고 했을 뿐 실제 행동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미 푸틴의 러시아는 유럽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대국이 되었다. 이를 통해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손에 쥘 수 있었고, 크림반도 영해에 있는 흑해 유전을 비롯한 다양한 자원을 얻었다. 약소국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블라디미르 푸틴은 러시아 내에서 압도적인 지지율을 보이며 고공행진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은 유난히 짧았습니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전 세계는 냉전 체제에 돌입한다. 동유럽의 약소국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냉전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소련의 영향권에 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당과 스탈린의 협력으로 자연스럽게 공산국가가 탄생한다. 공산주의 정책을 이어가던 체코슬로바키아의 7대 대통령 안토닌 노보트니는 1960년대에 경제 5개년 개발 정책을 세워 체코슬로바키아 경제 살리기에 노력한다. 기대와 달리 정부는 연이은 실책으로 경제는 점점 악화되었다. 결국 1965년 정부는 기존의 경제 정책을 포기하고 수정주의 정책을 채택하기로 한다. 수정주의란 기존의 공산 정책에서 벗어나 서구 세력과의 협력과 원조를 통해 위기를 벗어나고 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해 국가의 경기를 회복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노보트니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소련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비밀리에 초대하여 자신에 대한 재신임을 요청했다. 하지만 상황은 노보트니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노보트니는 수정주의 정책으로 소련의 심기를 건드린 상태였다. 결국 브레즈네프는 노보트니를 축출한다. 브레즈네프는 모스크바에서 교육을 받은 알렉산데르 둡체크를 후임으로 지목했고 그가 새로운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도자가 된다.


  여기서 반전이 시작된다. 알렉산데르 둡체크는 소련의 기대대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둡체크는 노보트니가 세웠던 수정주의 정책을 더욱 강화한 자유주의 개혁을 시도한다. 1968년 3월 둡체크는 기존의 언론 검열제도를 완전히 폐기하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개혁안을 제출한다. 이전 스탈린주의에서 억울하게 탄압을 받은 사람들을 석방하고, 과거 공산당의 악행을 비판하는 글이 언론에 계속 등장한다. 공산당의 숨 막히는 정치에 고생하던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은 정부의 정책에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그리고 1968년 4월, 둡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표어를 만들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완전히 끝내려고 했다. 다당제 가능성을 열어두고, 서방 세력과의 완전한 개방할 것을 약속했다. 소련은 둡체크를 비난했고 그는 여전히 소련을 지지한다고 말했지만, 실제 행동은 그의 말과 전혀 달랐다. 드디어 체코슬로바키아의 기나긴 공산당의 독재가 끝나고 민주주의의 봄이 찾아오는 듯했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체코슬로바키아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브레즈네프는 프라하에 민주화가 찾아온다면, 동구권 전역으로 퍼질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소련은 동독을 제외한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20만 군대를 프라하로 진군시켰다. 1968년 8월 20일에 출발한 군대는 다음날 곧바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했다. 소련의 갑작스러운 침공으로 72명의 체코슬로바키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체코인의 안전을 위해 둡체크는 소련에 저항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조국을 지키려는 프라하 시민들은 소련군에 산발적으로 저항했다. 소련군을 방해하기 위해 표지판을 없애거나 길을 잘못 알려주는 등 소극적인 저항하기 시작했다. 1969년 1월 19일, 얀 팔라흐는 소련의 불법 점거를 규탄하기 위해 프라아 바츨라프스케 광장에서 분신자살한다. 그리고 둡체크는 모스크바로 압송되었고, 그렇게 프라하의 짧디 짧은 봄이 막을 내렸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새로운 지도자로 구스타우 후사크를 지목했다. 그는 정상화 정책을 통해 프라하의 봄 이전 상태로 체코슬로바키아를 되돌려 놓았다. 둡체크의 개혁 정책은 전면 취소되었고, 그의 정책을 지지했던 개혁파 공산당원들은 모두 쫓겨났다. 언론은 다시 공산당의 검열을 받기 시작했고, 시민들의 정치적인 발언이 금지되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은 너무도 짧디 짧았다.


  비록 둡체크의 개혁은 몇 개월 만에 막을 내렸지만, 그의 노력이 완전히 의미 없던 것은 아니었다. 1987년 소련 서기장에 오르는 고르바초프는 소련 개혁안을 만들 당시 둡체크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참고했다. 그리고 1989년 벨벳 혁명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가 찾아오자 둡체크는 다시 연방 의회의 의장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프라하의 봄을 소재로 쓰인 글이다.




1905년 피의 일요일


러시아 제국 차르 니콜라이 2세는 평화 시위 행렬에 총알은 선사합니다



  러시아 제국은 늘 다른 서방 세력들보다 성장이 뒤쳐져있었다. 19세기 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산업화가 완료되고, 전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세워 자국 산업을 키웠다. 그리고 자유주의 사상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어 전제 군주정이 몰락하고 입헌군주제 혹은 공화제로 변신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사정이 달랐다. 여전히 농업이 국가의 주 생산 수단이었고, 차르 황제 중심의 제정이 이뤄지고 있었다.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전혀 무지한 인물이었다. 그나마 재무 장관 세르게이 비테가 공업화를 진행하고,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런 공업화를 너무 급하게 진행했고, 농업 생산량 마저 바닥을 치자 물가는 폭등하고 제국의 경제는 파탄 났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과 높은 물가를 감당할 수 없어 불만이 쌓였다. 제국에는 이해하기 힘든 제도가 하나 있었는데, 가족의 수가 많을수록 더 많은 농토를 농민들에게 지급했다. 그러자 러시아의 출산율은 급격하게 올라갔고, 기근으로 인해 생산량은 올라가지 않자 많은 백성들이 노숙자로 전락하게 된다.


  그 와중에 공산주의 사상이 러시아에 들어오기 시작해 이들을 중심으로 반정부 운동이 시작되었다. 차르는 공산당을 견제하기 위해 반정부 세력 곳곳에 프락치를 심어두었다. 이것이 재앙의 시작이었다. 1905년이 되자 반정부 시위는 더욱 과격해졌다. 러시아는 일본과 한반도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는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고도 일본에게 패전을 거듭했다.


  1905년 1월 22일. 일요일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성당에 가야 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굶주림에 지친 러시아 노동자들은 성당이 아닌 니콜라이 2세가 있는 겨울 궁전으로 향했다. 20세기까지도 제국 백성들에게 차르는 신과 다름없었다. 성당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듯이 노동자들은 궁전 앞으로 가 차르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러시아 정교회 신부 게오르기 가폰은 노동자 행렬의 가장 앞에 서서 차르에게 청원서를 전달해 줄 것을 요구했다. 청원서에는 노동자의 처우 개선, 기본권 확립, 러일전쟁 중단 등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기초적인 요구가 담겨있었다. 그저 노동자들이 살기 위해 차르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이 순진한 노동자들은 니콜라이 2세에게 부탁하면 자신들의 급료가 개선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청원서에는 니콜라이 2세에 대한 만수무강의 내용도 들어가 있었다. 노동자들은 점점 불어나 오후 무려 6만 명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였다. 노동자들은 겨울 궁전 앞에서 차르를 숭배하는 노래를 불렀다. 대열 맨 앞사람들은 ‘병사들이여, 인민들을 향해 총을 쏘지 말아라’라는 플랜카드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1905년 1월 22일 오후 2시 황궁 군대의 노동자들을 향한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다.


  비무장 노동자들은 군대의 일제 사격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저 혼비백산하여 마구 도망치고 있었을 뿐이다. 발포로 인해 무려 1000여 명의 노동자가 순식간에 쓰러졌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혼란에 빠진 백성들을 향해 기병대가 투입하여 마구잡이라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무려 4000여 명의 노동자가 학살당했다. 말 그대로 피로 물든 일요일이었다.

  그렇게 백성들이 울부짖던 니콜라이 2세는 휴가를 떠나 있었다. 수도에서 이 난리가 일어나고 있던 와중에 그는 왕실 휴양지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궁전 앞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황궁의 군대가 완전히 진압했다는 단 한마디의 보고만 들었을 뿐이었다.

 

  1905년 피의 일요일은 제국의 백성들이 차르에 대해 완전히 돌아서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왕권은 무너지고 더 이상 백성의 우상이 아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해 모스크바, 바르샤바 등에서 반 차르 운동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10월에는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으로 러시아 경제가 흔들렸다. 니콜라이 2세는 이후에도 특유의 우유부단함으로 러시아 제국을 망하게 하는데 크게 일조한다. 개혁을 요구하는 백성과 신하들의 요구를 철저히 무시하고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에만 생각하다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 결국 피의 일요일이 일어나고 10여 년 뒤 레닌이 일으킨 볼셰비키 혁명에 의해 처형당하며 제국의 역사도 끝나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내 이름은 베드로 직업은 조선 성리학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