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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Sep 14. 2021

인도 고대 역사

인더스 문명과 인도 고대 왕조



7. 마우리아 왕조 (전제군주)



무언가 하고자 하는 사람은 방법을 찾고, 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구실을 찾는다.

- 인도 속담 -




발생 원인

인더스 문명의 성숙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으로 인한 인도 대륙 통합 왕조 필요성 증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등장


결과

인도 대륙 대부분을 통일한 대제국 탄생

인더스 문명 최초의 전제 군주정 등장

드라비다인의 인도 남부 및 실론 섬 이주

불교와 힌두교의 발현 및 문화권 형성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못지않게 인도 역시 자신들만의 문명을 꽃피웠다. 인도 대륙에 흐르는 인더스 강의 이름을 따 생긴 인더스 문명 역시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문명을 발현시켰다. 근대에 와서 기후 변화로 인해 건조한 사막으로 바뀌었지만, 기원전 2500년대만 하더라도 인도는 강수량이 많고 습한 기후였다. 높은 강수량은 높은 농업 생산력을 의미하고, 이런 기후 속에서 문명은 늘 먼저 발현되었다.

  이 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중 역사학계에서 가장 정설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리아인과 드라비다인설이다. 최초에 인더스 문명을 꽃피운 사람들은 드라비다인들이다. 인도 대륙의 원주민이던 드라비다인은 인더스 문명이 서서히 몰락함에 따라 아리아인들에게 서서히 터전을 밀리기 시작했다. 기원전 1500년경부터 인도 대륙에 등장한 아리아인들은 인더스와 갠지스 강의 드라비다인들을 밀어내고 자리 잡는다. 아리아인 중 동쪽의 갠지스강을 따라 남하한 이들이 현재 인도인들의 기원이 되었고, 서쪽으로 남하한 인들은 현재 이란에 정착했다. 이란이라는 이름 자체가 아리아인이라는 뜻이다.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정착한 이후를 베다시대라고 부른다. 베다는 힌두교의 경전 중 하나로, 산스크리티어로 '지혜'라는 뜻이다. 당시 아리아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가 오늘날 힌두교, 불교의 모태가 되는 브라만교다. 브라만교는 세계 4대 종교 중 2개의 모태가 될 정도로 인도는 종교가 발달된 문명이었다.

  종교적 발달이 순기능만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현재는 폐지되었지만 아직까지도 그 잔재가 남아 인도를 괴롭히고 있는 카스트 제도 역시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아리아인들은 피지배계층인 드라비다인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체계가 필요했다. 그들은 브라만교의 카스트 제도를 통해 드라비다인들의 행동을 제약했다는 것이 카스트 제도 탄생에 대한 가설 중 하나다. 이미 아리아인들과 드라비다인들이 융합되어 카스트 제도와 민족은 관련이 없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세계 어디에도 3000여 년 전의 사료가 체계적으로 정리된 곳은 하나도 없다.



인더스 문명 왕국



  아리아인들의 베다시대가 끝나고, 인도 대륙에 총 16개의 왕국 혹은 공화국이 있던 십육대국 시대가 시작된다. 중국의 전국 시대처럼 이전보다 좀 더 중앙 집권적인 국가들이 탄생해 서로 힘겨루기를 했다고 보면 된다. 이 16개 국가 중 가장 강력한 국가는 마가다국이었다. 불교의 창시자로 유명한 석가모니가 바로 마가다국 출신이다.

  마가다국은 본래 시슈나가 왕조의 마하난딘 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마하난딘은 수드라 출신의 여인 사이에서 마하파드마 난다라는 아들을 낳는다. 어머니의 출신이 미천해 그는 왕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마하난딘의 폭정에 참지 못한 마가다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마하파드마가 마가다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된다. 그가 난다 왕조 최초의 황제로 올라 마가다 왕국을 통치했다. 난다 왕조 시기에 마가다국은 주변의 여러 국가들 복속시켜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후 다나 난다가 기원전 329년 난다 왕조의 왕에 오른다. 비슷한 시기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인도까지 공격한다. 북인도의 국가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에 탁샤실라의 차나키아는 다나 난다에게 인도 대륙이 위험하니 동맹을 맺어 마케도니아에 대행하자고 제의한다. 하지만 다나 난다는 차나키아에게 모욕을 주고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창피를 당한 차나키아는 복수를 다짐하고, 난다 왕조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차나키아의 제자 중 한 명이 그와 손을 잡고 난다 왕조를 공격한다. 그의 제자의 이름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였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그의 스승 차나키아와 마케도니아와의 전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10살이었던 찬드라굽타가 본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충격적이었다. 인도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무기와 전술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른바 망치와 모루 전술을 통해 인도군을 무너뜨렸다. 마케도니아 군대와 전쟁을 하면 항상 측면이나 후방에 배치된 병력이 예상치 못한 시간에 나와 인도인들을 공격했다. 찬드라굽타는 마케도니아의 전술을 분석해 인도 최고의 정복군주가 되었다. 찬드라굽타는 재위 기간 동안 스승 차나키아와 함께 난다 왕조를 쉴 새 없이 괴롭혔다. 차나키아는 마우리아 왕조의 초대 재상이 되어 제자를 지원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세운 셀레니움 제국에 이어 세워진 셀레우코스 제국이 지속적으로 마우리아 왕조를 괴롭혔지만, 찬드라굽타는 방어에 성공하고 인도의 전성기를 이끈다.


 그리고 그의 찬드라굽타의 손자 아소카 대왕은 꿈에 그리던 인도 대륙 통일에 성공한다. 실론섬을 비롯한 남부 드라비다인들의 일부 영토는 지배하지 못해 완전한 통일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통일이나 다름없었다. 이로서 당시 기준으로 마우리아 왕조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제국이었다. 아소카 대왕은 마하트마 간디, 악바르 대제를 비롯해 인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아소카 기둥



  아소카의 인도 대륙 통일과 마우리아 왕조의 출범은 인도 역사에 많은 의미를 준다. 우선 인도 대륙의 지독한 분열을 종식시키고 하나의 문화권으로 통합했다. 문명 중간기의 통일 왕국 출범은 매우 큰 의미를 차지한다. 아리아인과 드라비다인의 반목을 넘어 인도 대륙 내의 동일한 문화권에 대한 인식이 인도인들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다. 인도의 옆 문화권인 이슬람이 아직까지도 분열과 반목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과 크게 대비된다. 물론,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미래에 어떻게 역사가 뒤바뀔지는 알 수 없다.


  마우리아 왕조는 인더스 문명에 나타난 최초의 전제 군주정이었다. 십육대국의 국왕들과는 다른 강력한 왕권을 보유했다. 이들은 중앙 집권적인 체제를 통해 전제적인 통치를 수행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찬드라굽타와 아소카의 강력한 카리스마 덕분이었다. 정복 군주로 이름을 날렸던 둘에 직접적으로 반기를 들 인도 군주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찬드라굽타와 아소카는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왕국으로부터 인도 대륙을 지켜냈다. 알렉산드로스와 그 후계자들이 세운 셀레우코스는 비옥한 인도 대륙을 탐냈다. 인도에 지속적인 원정군을 보낸 셀레우코스는 번번이 아소카의 군대에 무릎을 꿇었다. 결국 인도 원정에 실패한 셀레우코스 왕조는 눈을 돌려 중앙아시아 및 서방으로 진출하게 된다.

  마우리아 왕조는 종교적 자유를 인정해줬다. 많은 종교가 발달한 인도답게 마우리아 왕조의 국왕들은 타 종교에 대해 크게 탄압하지 않았다. 심지어 마우리아 왕조의 국왕들은 서로 귀의한 종교가 모두 달랐다. 왜 인도 대륙에서 4대 종교 중 2개가 발현되었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마우리아 왕조의 종교적 관용 정책은 인도의 종교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굽타 왕조 사원



8. 굽타 왕조 (지방 분권적 군주제)



세상에 있는 것은 마하바라타에 다 있고, 마하바라타에 없는 것은 세상에도 없다.

 - 인도 속담 -




발생 원인

마우리아 왕조의 몰락과 인도 대륙의 재분열

중앙 집권적 통치 약화 및 지방 분권 통치 필요성 증가


결과

인도 대륙의 중세 진입

지방 분권적 봉건 형태의 정치 체제 도입

인도 대륙 고유의 문화 형성

힌두교의 발전



  아소카 대왕이 세운 마우리아 왕조의 영광의 순간은 짧았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통치하던 아소카가 죽자 인도 대륙은 다시 분열하기 시작했다. 중앙 집권적인 전제 군주가 통하기 위해서는 군주 한 명의 카리스마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방에 있던 제후들은 다 같이 왕조에 반기를 들었다. 인도 남부에 위치한 드라비다인들부터 과거 십육대국의 지도자들 그리고 헬레니즘 제국의 후손들까지 마우리아 왕조에 반기를 들었다. 인도의 넓은 대륙과 다민족을 통치하기에 중앙 집권적인 방식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이 분열 시기에 인도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공격에 시달린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새로운 주인으로 떠올랐는데, 이들은 지속적으로 인더스 강을 넘어왔다. 외부의 위협은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된다. 과거 마우리아 왕조에 의해 정복된 마가다에서 찬드라굽타 1세가 새로 왕에 올라 굽타 왕조를 창시한다.


  찬드라굽타 1세는 갠지스 강 유역을 모두 점령하여 과거 마가다 왕국이 차지한 모든 영토를 회복한다. 비하르와 뱅골 등 인도 동부 지방을 차지한 찬드라굽타는 소규모 왕국을 제국으로 탈 바꾼다. 그리고 이후 사무드라굽타는 인도 북부 전역을 정복한다. 그는 무려 40년의 치세 동안 굽타 왕조를 인도의 북서부로 진출시키고 내부 체제를 다졌다. 그의 아들 찬드라굽타 2세 역시 제국을 넓혀 인도 대륙 서부의 항구도시까지 차지할 수 있었다. 3대 왕조 동안 굽타 왕조는 대제국을 세우는 데 성공한다.

  굽타 왕조는 약 2백 년간 지속되었다. 이른바 에프탈이라 불리는 중앙아시아의 유목 민족의 침입과 북인도에 위치한 또 다른 왕국인 바르다나 왕조와의 대립 등으로 쇠퇴한다. 굽타 왕조는 오래 지속되지도 않았고, 인도 전역을 통일하지도 못했지만 인도 역사에 있어 몇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마하바라타 삽화


  우선 굽타 왕조는 봉건적인 왕권 국가를 형성했다. 넓은 영토와 분열된 왕국을 보유한 인도에서 중앙 집권적인 통치는 한계가 있었다. 본인은 황제에 오르는 대신 기존 지도자들의 권력을 보장해주는 방식으로 지방 세력의 협조를 가져왔다. 이들에게 카스트제도의 최상위인 브라만 계급을 부여하고 토지를 나눠줬다. 또한, 토지와 계급은 세습되었고, 인도 세력의 지도자로 떠오른다.


  굽타 왕조 시기에 경제력이 발달한다. 서방과의 교역은 비교적 쇠퇴했지만, 국내 교역과 생산력이 크게 증가했다. 생산력이 증가한테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이 수학과 과학의 발달이다. 당시 기준으로 인도의 과학 문명은 세계 최고였다. 대수학과 기하학이 발전했으며, 일부 인도 과학자들은 지동설을 주장했다. 그리고 현재 극한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는 무한대와 0의 개념이 최초로 만들어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큰 수에 대한 단위인 무량대수가 불교 용어다.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 역시 굽타왕조 시기에 편찬되었다. 이 중 마하바라타는 인도 고대의 서사시로 무려 18편의 대서사시로 제작되었다. '위대한 바라타 족'이라는 의미의 이 책은 인도 북부의 두 진영 간의 싸움을 기록한 대작이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 인도였다는 점에서 이 책을 보면 인도인들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그리고 굽타 왕조 시기에 힌두교가 인도에서 완전히 정착한다. 반대로 자이나교와 불교는 비교적 쇠퇴하게 된다. 굽타 왕조는 강력한 신분제를 통해 국가 통치의 효율성을 꾀했다. 이를 위해서는 힌두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적합했다. 앞서 설명한 대로 브라만들을 토지와 계급을 세습해 점점 부를 쌓았고, 반대로 하층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며 그들의 계급이 고착화되는 효과를 낳는다. 인도 역시 중세 봉건적 사회 체제로 변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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