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재앙이라 불린 사나이, 아틸라
역사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승리와 패배는 반복된다. 우리 인생 역시 너무 힘들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고, 잘 나간다고 해서 자만해서도 안된다. 실패는 인생에 있어 생각보다 치명적이지 않고 성공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늘 발전하고 분석해야 한다. 성공 속에서 부족했던 점을 분석할 줄 알아야 하며 실패했을 때에는 더 뼈저리게 자신의 단점을 바라보아야 한다. 역사 속에서 월등한 실력을 가지고도 자만에 빠져 실패한 사람들이 더러 존재한다. 그중 한 명을 알아보기 위해 5세기 유럽으로 이동해보자.
5세기 유럽의 지배자는 로마제국이었다. 이 당시 로마 제국은 군인 황제 시절을 거치면서 쇠퇴한 상황이었다. 귀족들과 시민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지배 구조가 무너지기 직전의 상태였다. 이때 중앙아시아의 유목 민족인 훈족이 점차 서쪽으로 이동하며 로마 제국을 위협했다. 중앙아시아에서 오랜 기간 세력 다툼을 한 그들은 굉장히 전투에 능숙했다. 특히 훈족의 왕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 부대는 로마 제국에게 무적에 가까웠다. 아틸라는 특유의 전투 방식으로 로마 제국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당시 그는 로마의 재앙이라고 불렸다.
당시 로마가 무너지기 직전이라고 해도 여전히 좋은 군사력을 보유했다. 로마는 유목민족이었던 훈족에 비해 문명과 기술 모두 월등히 뛰어났다. 여전히 로마 제국은 주변 갈리아, 북아프리카 등 수많은 속주를 관리하는 대제국이었다. 하지만 유독 훈족의 아틸라가 이끄는 군대에게는 번번이 좌절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아틸라 고유의 전술 덕분이었다. 바로 기마 궁수를 활용한 치고 빠지기 방식이다.
기마 궁수. 말 그대로 말을 타고 다니면서 화살을 쏘는 병과를 의미한다. 오늘날 올림픽에서도 양궁을 할 때 가만히 서서 쏘는 게 보통이다. 말을 타면서 움직이는 상태에서 정확히 적을 조준하는 건 정말 어렵다. 보통의 경우 조준점이 무너질 뿐 아니라 제대로 된 자세로 활을 당기기 조차 어렵다. 하지만 일 평생을 말을 타면서 생활하는 유목민족들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훈족은 이 기마 궁수 훈련을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받는다. 그들은 충분히 말을 탄 채로 적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여기에 아틸라는 한 가지 전술을 더하는데 그것은 바로 적절한 거리 유지였다.
우선 훈족 병사들을 최대한 가벼운 복장으로 무장한다. 반면 로마의 군대는 철제 갑옷과 철제 무기를 들었는데 기동력에서 큰 차이가 났다. 훈족은 적과 대치한 후 초반에 대응하여 맞서 싸우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군대를 뒤로 무른다. 그러면 로마 병력이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게 되는데 기동력에서 훈족이 앞서므로 로마 군대는 훈족을 따라가다가 포기한다. 그 순간 훈족의 기마 궁수들이 나서서 로마 병사들을 저격하기 시작한다. 이를 막기 위해 로마 군대가 기병을 보내지면 역시 기동력에서 차이가 난다. 결국 로마 부대가 추격을 포기하면 다시 기마 궁수들을 말을 돌려 로마 부대를 저격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로마 측의 피해가 점점 누적된다. 피해가 쌓이다 보면 어느새 전쟁에서 자연스럽게 패배하게 된다. 이런 방식의 전술은 절대 지지 않는 훈족의 공식이었다.
그리고 아틸라는 자신이 지나간 자리를 모두 약탈하고 파괴했다. 기존의 유목민족들은 빠른 기동력을 살리기 위해 곧바로 적의 중심 도시를 공략했지만, 아틸라는 진격 경로에 있는 도시들을 하나씩 철저하게 쓰러뜨려나갔다. 그들에게 반격 의지 자체를 주지 않았다. 이런 방식의 진격은 몇 가지 이점을 제공한다.
1. 포위 위험 감소
만약 지배하지 못하고 지나친 도시가 있다면 그 도시에서 나온 병사들에게 후미를 잡혀 앞에 있는 적과 함께 둘러 쌓여 포위를 당할 위험이 크게 증가한다.
2. 보급로 확보
전쟁에 있어 보급로 확보는 너무 중요하다. 진격 경로 중에 중간에 모든 도시를 파괴하여 보급로가 끊어질 위험을 최소화시킨다.
기존의 유목 민족들 역시 이런 점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위 방식의 진격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하지만 아틸라는 동로마 제국 최후의 벽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존재를 알고 있어서였을까. 앞서 유목 민족과는 다른 위의 방식을 채택했다.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보급로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진군한다. 훈족을 통일한 아틸라는 동서로 분할된 제국을 순차적으로 하나 씩 상대한다.
아틸라는 훈족의 왕이었던 루아의 둘째 조카다. 루아가 죽고 아틸라는 형 블레다와 함께 훈족 공동 왕에 오른다. 블레다와 아틸라는 도나우 강변의 영토 문제로 동로마 제국과 트러블이 발생한다. 양국은 협상 과정에서 동로마가 훈족에게 지불하는 조공을 늘리는 대신 안전을 보장하기로 한다. 하지만 협상 이후에도 블레다는 지속적으로 도나우 강변을 약탈했다. 블레다는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해당 지역에 있는 훈족 왕족들의 무덤을 도굴한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틸라의 형 블레다가 갑작스럽게 암살당한다. 확실하게 기록된 정보가 없어 알 수 없지만 동생 아틸라가 암살했다는 설도 있고, 사냥 중에 사고로 죽었다는 설이 있다. 어찌 되었든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아틸라는 자연스럽게 훈족 단독 최고 지도자 위치에 오른다. 블레다는 공포정치를 통해 훈족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동로마에게 매우 강경했다. 하지만 아틸라는 반대로 동로마에게 친화적인 정책을 시작한다. 아틸라는 동로마에게 이전에 약탈한 도시 나이수스 (현 세르비아 니슈)를 다시 반환하는 대신 금을 요구했다. 하지만 군대를 물렸지만 동로마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금을 지급하지 않자 화가 난 아틸라가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한다.
아틸라는 앞서 언급한 훈족 특유의 전술을 활용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훈족의 군대는 손쉽게 콘스탄티노플까지 도달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 앞에 선 아틸라는 쉽게 넘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알았다. 결국 양 국가 간의 평화 협정이 맺어진다. 동로마 제국은 조공을 8배 더 늘려야 했고, 모든 훈족 포로를 석방했으며 도나우 강 일대의 영토를 지급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 조약을 맺는다.
아틸라의 요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틸라는 동로마에게 더 많은 영토를 받아낼 심산으로 다시 한번 사절단을 파견한다. 그는 로마 출신의 인재이자 자신의 측근 오레스테스와 스키리의 왕 에디카를 보내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로부터 영토를 받아오라고 했다. 이런 무리한 요구에 동로마 제국은 화가 났고 오히려 에디카를 꼬드겨 아틸라를 암살하자고 제안한다. 에디카는 일정 지원금을 받는 조건으로 이를 승낙한다.
동로마 제국은 아틸라를 죽일 사람으로 통역관 비길라스를 뽑았다. 동로마 제국은 훈족의 사절단에 대한 보답으로 다시 사절단을 파견한다. 물론 이들의 진짜 목표는 아틸라 암살이었다. 정보가 새지 않도록 암살 계획은 에디카, 비길라스 두 사람만 알고 있었다. 사절단이 도착했지만 아쉽게도 아틸라는 자리에 없었다. 그는 나이수스의 일을 처리하느라 연회에 오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비길라스가 술에 취해 "어떻게 인간의 왕인 훈족의 왕과 신성한 동로마 제국의 황제를 비교한다는 말인가"라고 말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결국 이 말이 훈족을 자극했다.
이를 지켜본 에디카는 암살이 실패할 것은 직감했는지 모든 사실을 아틸라에게 고발한다. 아틸라는 괘씸했지만 상당히 침착하게 행동했다. 그는 암살에 대한 정보를 사절단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비길라스가 자신을 자신을 죽이기 위해 동로마에서 지급하기로 한 보상금의 두배를 비길라스 목에 걸어 그를 살려 둔 채로 본국으로 돌려보낸다. 동로마 황제는 살아 돌아온 비길라스를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틸라에게 치욕을 당한 것이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자에게 관용을 베풂과 동시에 로마 제국에게 엄청난 굴욕을 선사했다.
동로마 와의 일전 후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으로 눈을 돌린다. 서로마는 동로마 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았다. 서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는 여동생 호노리아가 있었는데, 그녀는 원로원에서 정해준 상대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어 있었다. 이 점을 맘에 들어하지 않은 호노리아는 돌연 아틸라에게 청혼을 한다. 아틸라는 결혼 지참금으로 서로마 제국의 영토 절반을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다. 당연히 서로마는 들어주지 않았고, 전쟁에 대한 명분이 생긴 아틸라는 군대를 이끌고 서로마로 향했다.
당시 나름대로 기반을 쌓아가던 동로마와 달리 서로마는 황제의 권위가 날로 추락해갔고, 게르만과 반달의 연이은 침공으로 국력은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지방 속주들의 반란도 끊이지 않았고 아틸라가 손쉽게 정복할 것만 같았다.
아틸라는 반란으로 서로마가 거의 모든 지배권을 상실한 갈리아로 진격했다. 훈족의 군대는 라인강을 여러 도시를 쓰러뜨려 나갔다. 예상대로 서로마 제국은 아틸라의 군대를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 그간 서로마에게 지배를 당한 갈리아 인들이 훈족과 규합했다. 서로마 역시 단독으로 훈족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해 서고트의 왕 테오도릭에게 연합을 요청했다. 반대로 서고트와 사이가 안 좋던 동고트는 아틸라와 손을 잡는다. 이로서 서로마-서고트 연합군과 훈족-동고트 연합군이 갈리아 지역에서 맞붙게 된다.
서로마 제국의 장군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는 갈리아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20여 년간 갈리아 지역의 반란을 막아 전쟁에 도가 튼 사람이었다. 처음에 그는 훈족과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조공을 바치려고 했지만 아틸라가 이를 거부했다. 그는 당장 아틸라의 전면전은 위험하다고 판단해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훈족과의 일전을 준비한다. 아틸라의 군대는 갈리아 남부의 도시 아우렐리아눔(현 프랑스 오를레앙)에 도착한다. 이 도시는 갈리아 남부의 주요 도시이자 이탈리아 반도의 입구 역할을 했다. 이곳을 빼앗긴다는 것은 이제 서로마 군대는 본국으로부터 전혀 보급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에티우스는 이제 일전이 다가왔음을 직감하고 군대를 모아 아우렐리아눔으로 향했다.
아틸라는 아우렐리아눔을 포위했는데 아에티우스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 포위를 풀었다. 그리고 서로마와의 전면전을 위해 근처 도시 카탈라우눔으로 향했다. 서로마 연합군은 중앙에 알라니족을 포진시키고 아에티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좌익에, 서고트 군은 우익에 배치했다. 아틸라의 경우 동고트 족을 좌익에 배치하여 서고트와 직접적으로 맞서게 했고, 우익은 게피드 족을 세웠으며 자신이 직접 이끄는 훈족 정예 병력을 중앙에 위치시켰다. 본인이 직접 최전방이 위치했고 아틸라는 자신감이 넘쳤다. 아틸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이전에 서로마와의 전쟁에서 수없이 이겨온 그였다. 그는 자신감을 넘어 자만심까지 보였다. 그는 병사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내가 적에게 첫 창을 던지리라. 이 아틸라가 싸우는 전장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죽은 자들뿐이다.
역시나 훈족 정예 병력은 알라니족의 부대를 압도했다. 동고트 역시 서고트 족을 압도했다. 심지어 서고트의 왕 테오드릭 1세는 전쟁 도중에 사망했다. 반면 훈족 연합군 기준 우익은 교착상태였다. 신중한 성격의 아에티우스는 사기가 오른 훈족을 상대로 냉정하게 군대를 지휘하며 피해를 줄였다.
시간이 지나고 훈족은 알라니 족을 공격하는데 정신이 팔려 적진 한가운데로 깊숙하게 들어왔다. 아에티우스는 정예 로마 부대를 이끌고 아틸라의 후미를 공략한다. 아틸라는 기동성을 살려 퇴각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아에티우스 역시 아틸라의 전술을 인지하고 있었다. 갈리아에서 20년간 전쟁을 치른 그는 이 지역 지리에 밝았다. 그는 훈족의 예상 이동경로를 파악해 위치를 사수하며 계속 훈족의 퇴각 속도를 지연시켰다. 밤이 찾아오고 어둠 속에서 우왕좌왕하며 후퇴하는 훈족을 끝까지 추격해 괴롭혔다.
아침이 되자 훈족의 병력은 크게 줄었고, 길을 잃고 서로마 연합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한다. 패배를 직감한 아틸라는 안장을 쌓아 올려 자결을 하겠다고 말했다. 이때, 갑자기 아틸라에게 천운이 따르는데 아에티우스가 아틸라를 살려서 본국으로 보내라고 말한다. 그는 만약 아틸라가 여기서 죽으면 서고트를 견제할 세력이 없어져 오히려 국제 균형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해 그를 살려서 돌려보낸다. 아에티우스의 속셈을 알고 있던 서고트의 왕자 토리스먼드는 훈족의 싹을 자르려 야습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자신이 부상당한다. 결국 토리스먼드는 본국의 왕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귀국하게 되고 카탈라우눔 전투는 서로마 제국의 승리로 끝난다. 전쟁의 화신이라 불린 아틸라에게 있어서 너무 뼈아픈 패전이었다. 로마 제국의 무패 신화가 무너진다. 빈사 상태였던 서로마 제국은 이 승리로 목숨을 몇 년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었다.
카탈라우눔 전투는 당시 유럽 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서로마 제국은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목숨을 연장했다. 서로마 제국은 당시 아틸라의 원정이 성공했다면 무너졌을지도 모를 정도로 세력이 약했다. 갈리아의 지배권은 이미 상실한 상태였고, 황제의 여동생이 이민족의 왕에게 청혼할 정도로 권위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에티우스를 비롯해 서로마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장군들은 각자 이민족들과 연합하여 호시탐탐 본국을 노리고 있었다.
식물 제국 서로마는 카탈라우눔 승전 이후 약 25년 후에 멸망한다. 서로마 제국의 목숨을 연장시킨 장군 아에티우스는 제국을 지키기위해 싸운 공적을 인정받아 '최후의 로마인'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발레티니아누스 3세의 딸과 아에티우스의 아들이 결혼하여 그는 제국 황실 사람이 된다. 하지만 황제는 아에티우스의 아들이 자신의 아들을 몰아내고 황제에 오를까 두려워했고, 이에 원로원 의원과 환관이 짜고 아에티우스를 암살한다. 제국 최대의 적 아틸라를 몰아낸 장군은 제국 내부 사람 손에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본국으로 돌아온 아틸라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서로마와의 전쟁에서 너무 뼈아픈 패배를 겪어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헝가리 지역으로 돌아온 아틸라는 다시 만만한 동로마에게 눈을 돌려 더 많은 상납급을 올려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전쟁에서 지고 돌아온 나라에게 상납금을 올릴 나라는 없다. 로마 제국의 재앙으로 불린 사나이의 추락은 한순간이었다.
아틸라의 추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틸라는 군대를 다시 모아 로마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는 453년 봄 자신의 목조 궁전에서 일디코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는데 첫날밤 일디코와 성관계를 하는 도중에 갑작스럽게 복상사를 당하고 만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일디코에게 암살을 당했다고 하지만 워낙 고대 사료라 정확한 근거는 없다.
아틸라가 허무하게 죽자 그에게 당하고 있던 주변국들이 들고일어났다. 여기에 장남 엘라크와 아틸라의 동생인 뎅기지크, 에르나크의 내분까지 겹치며 훈족의 위세는 급격하게 꺾인다. 훈족에게 수없이 당했던 게르만인들이 왕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훈족의 세력을 이어받은 뎅지기크는 동고트 왕국과 싸우지만 아틸라가 없는 훈족은 정상적인 군대가 아니었다. 결국 뎅기지크는 살기 위해 동로마 제국에게 망명을 요청했지만 그동안 훈족이 동로마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양심이라곤 전혀 없는 짓이었다. 동로마는 망명 요청을 당연히 받아들여주지 않았고, 그렇게 훈족 왕국은 자신들이 그렇게 괴롭혔던 게르만에 의해 멸망한다.
아틸라는 신의 채찍이라고 불렸다. 로마 제국 말기는 기독교가 공인화 되며 가톨릭 문화가 정착해가는 시점이었다. 그 와중에 제국은 향락에 빠져 부패했는데 아틸라의 등장을 마치 신이 로마에게 주는 징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훈족이 가지고 있던 빠른 기동 전술은 로마 제국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술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지나간 도시에는 사람과 시설 모두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이런 행동은 로마 사람들에게 그가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와도 같았다. 결국 오늘날까지도 그는 로마 제국의 재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로마 제국 멸망이라는 마지막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무적이라고 생각되었던 훈족의 전술은 결국 서로마 제국의 장군 아에티우스에게 간파당한다. 발전하지 않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아틸라는 그간의 승리에 도취되어 별다른 준비 없이 같은 전술로 서로마 제국에게 맞섰고 이는 결정적인 패배를 야기했다.
승리는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정상에 위치한 사람은 늘 그렇듯 수많은 사람들의 도전을 받는다. 같은 방식으로 도전자를 상대한다면 승리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건 금방이다. 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리누스 미헬스의 명언처럼 우승은 어제 내린 눈에 불과하다. 아틸라의 삶은 완벽한 성공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승리 이후에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