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ironde Sep 28. 2021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1992년 미국 대선과 클린턴 행정부의 명암

미국 42대 대통령, 빌 클린턴




“It's the economy, stupid"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 1992년 미 대선 빌 클린턴 후보 선거 운동 문구




  1990년 소련이 무너졌다. 연이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길었던 냉전 체제도 끝이 난다. 미국과 소련은 실질적으로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군비를 증강하고 과학 기술을 과시하며 상대 진영보다 우월함을 뽐냈다. 결과는 미국의 승리였다. 소련의 총서기장 고르바초프는 더 이상 공산주의 체제만으로 소련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해 서방과의 개방정책을 실시한다. 소련 온건 개혁파 및 보수파 세력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을 계기로 소련은 무너진다. 1991년 12월 26일 드디어 소련이 연방 해체를 선언함으로써 냉전은 완전히 종결된다.


  이에 힘입어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하워드 워커 부시의 인기는 하늘 높게 치솟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쟁 위험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국방비 축소라는 두 개의 목적을 달성했다. 미국인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지지율 상승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이 바로 걸프전이었다. 1991년 이라크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 유전 확보를 위해 기습적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한다. 미국은 유가 폭등을 막기 위해 이라크를 침공한다. 소련과의 냉전 직후 한창 군 기술이 발전 해 있던 미국은 전쟁은 빠르게 끝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사막의 폭풍' 작전을 통해 전쟁을 단기간에 끝냄과 동시에 미국이 여전히 세계 최강의 대국임을 전 세계에 공고히 했다. 미국은 자신들이 보유한 최첨단 전쟁 기술을 전 세계 앞에서 선보였다.



걸프전 당시 병사를 독려하는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



로스 페로의 출마로 대통령이 된 빌 클린턴



  냉전 붕괴와 걸프전 승리를 통해 부시는 무려 90%라는 압도적인 지지율을 보였다. 그가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민주당 측에서는 누구도 인기 절정의 조지 H.W. 부시와 대결하기를 꺼려했다. 괜히 나섰다가 정치 인생만 꼬일게 분명해 보였다. 결국 잃을 게 없던 인기가 서서히 높아지고 있던 어린 정치인이 선택을 받는다. 그가 바로 당시 아칸소 주지사였던 빌 클린턴이다.


  빌 클린턴은 무려 32라는 젊은 나이에 처음으로 아칸소 주지사에 올랐다. 그가 처음으로 하원 의원에 당선된 1974년에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민주당의 인기가 절정이라 쉽게 당선되었다. 그 덕분에 클린턴은 20대에 하원 의원이 되고 30대에 주지사에 올라 탄탄하게 정치 경력을 쌓았다. 중간에 한차례 낙선하기는 했지만, 78년부터 92년까지 아칸소 주지사를 재임한 클린턴은 민주당에서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카드였다. 다른 후보들이 모두 거절하니 젊고 잃을 게 없으면서 인기가 높은 유일한 사람이 클린턴이었다. 클린턴 역시 처음엔 부시의 인기가 너무 높아 대통령 후보 출마를 꺼려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조지 H.W. 부시의 당선이 너무나도 당연해 보였던 1992년 미 대선에 변수가 하나 발생한다. 바로 '로스 페로'의 등장이다. 인기 있던 미국 IT 사업가 출신인 그의 등장으로 공화당 표가 갈리기 시작했다. 그가 출마 선언을 한 직후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그 덕분에 공화당의 표를 양분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미국 최악의 성폭행 사건인 테일후크 스캔들이 터지면서 클린턴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당시 클린턴 진영에서 내세운 문구가 바로 위에서 소개한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이다. 이는 클린턴 정부의 방향성을 단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부시 행정부의 약점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부시 대통령은 당시 걸프전 승리에 가려져서 안보였을 뿐 몇 가지 경제 정책에서 실책을 저지르고 있었다. 세수를 지속적으로 증가시킨다는 비판에 직면한 부시는 개선되지 않는 실업률과 경기 침체로 인해 국민들의 평가는 점점 떨어져 갔다. 클린턴 캠프의 슬로건으로 부시 행정부의 문제가 부각되었고 결국 대선에서 대역전극이 벌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문구는 미국 대선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슬로건으로 자리 잡는다.


(그렇다고 해도 당연히 부시 캠프의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은 로스 페로의 출마 때문이다.)


92년 미 대선 후보 (좌측부터 빌 클런턴, 조지 H.W. 부시, 로스 페로)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 성장과 2008년 금융 위기



  1993년 출범한 클린턴 정부는 캠프 슬로건에 맞게 미국 경제 살리기에 초점을 맞춘다. 전임 정부가 해결하지 못한 장기 경제 침체와 실업률 문제 해결이 가장 시급했다. 그가 처음으로 실시한 경제 정책은 북미자유무역협정이다. 이는 부시 행정부 시절부터 꾸준하게 도입 논의가 존재했다. 미국은 유럽 연합 출범에 대항하여 캐나다 멕시코와 함께 3개 국가 간의 관세를 없애 미국 산업의 시장 확대를 꾀한 것이다.

 

  미국의 시장 확대는 IT산업 확대와 같이 맞불려 시너지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자유무역협정으로 활성화된 경제를 통해 미국 내의 여러 IT 기업들이 크게 성장했다.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롯해 애플, IBM 등 IT 기업들의 해외 수출 실적이 증가했다. 이른바 닷컴 산업의 활황기라고 불렸던 이 시기는 실리콘 밸리에 있는 IT 기업들의 고속 성장을 가져왔다. 현재 미국을 넘어 세계 인터넷 업계를 주도하는 넷플릭스, 아마존닷컴, 구글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시장 확대와 IT 활성화는 기업의 성장을 가져왔고 실업률 감소로 이어진다. 그의 임기 첫해 6.5%였던 실업률은 임기 말기 3%로 크게 낮아졌다. 경제는 늘 한쪽의 실적이 개선되면 연쇄적으로 좋은 반응을 보인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미국 행정부의 지독한 장기 재정적자를 흑자로 전환시켰다. 그는 누진세를 확대해 재정 수입을 크게 늘렸는데, 공화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통령 앨 고어의 노력 덕분에 간신히 통과시킬 수 있었다. 클린턴은 정부의 재정 확보를 위해 공무원 일자리를 크게 줄였다. 미국 재정의 장기 흑자 전환은 이전 행정부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목표였다. 특히,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성장하여 장기 인플레이션 국면에 도달한 이후엔 최초였다. 자유무역협정과 누진세 확대를 통해 클린턴은 무역 적자와 미국 재정 적자를 해결했다. 이를 통해 미국은 지독한 경제 침체에서 호황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클린턴 2기 행정부 때, 섹스 스캔들이 발생했어도 그가 아직까지 그렇게 나쁜 평가를 받지 않고 있는 데에는 경제 정책들이 주효했다.



2008년 금융 위기의 시작, 리먼 브라더스


  하지만 미국의 고속 성장에 가려져 있었을 뿐 그의 정책이 장기적으로 미국 경제에 좋은 영향만 끼쳤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2008년 일어난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촉발된 미국 발 금융위기가 그의 실책으로 비롯되었다는 평가까지 존재한다. 그의 실책으로 가장 유명한 정책이 바로 글래스-스티걸 법(Glass-Steagall) 폐지다. 1933년 대공황 후유증을 겪고 있었던 미국이 은행 개혁과 투기 규제를 목적으로 은행의 업무를 엄격하게 분리한 법이다. 해당 정책의 골자는 상업 은행은 여신 및 수신 업무만을 담당하고, 투자 은행은행은 증권 업무만 담당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로 인해 상업은행이 고객의 예금을 가지고 주식 투자를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이 법을 제정한 이유는 명백하다. 상업 은행들이 투자 업무를 동시에 진행하여 고객이 보유한 예금을 활용해 무분별하게 주식에 투자했고, 이로 인해 은행 재정의 거품을 가져온 것이 대공황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혔기 때문이다. 클린턴의 목적은 은행의 규제를 풀어 경제를 활성화시킬 목적으로 해당 법안을 폐지했으나, 이 행동이 약 10여 년 뒤의 경제 위기에 시발점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또한 북미자유무역협정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빛보다 어둠이 더 많은 것으로 드러난다. 자유무역 협정을 통해 멕시코와 캐나다의 경우 농업 시장이 크게 약화되었다. 여기에 더불어 양국의 값싼 노동력이 미국으로 넘어오자 부시 정부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던 실업률 문제가 다시 부각되었다. 클린턴 정부 이후에 조지 H.W. 부시의 아들인 조지 부시가 대통령이 되어 클린턴의 실책을 떠맡게 된다. 어찌 보면 부시 가문에서 클린턴을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도 저런 부분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클린턴의 경제 정책은 재임 당시에는 높은 경제 지표의 성장과 함께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 행정부 당시엔 실업률은 크게 감소했고 미국의 재정 적자를 해결했다. 이에 더불어 IT를 비롯한 경제 시장의 다각화까지 이뤄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 성장에 가려져 안보였을 뿐 그렇지 여러 실책들도 공존한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2008년 금융 위기의 원인 제공자인 동시에 아직까지도 회복되지 못하는 미국의 대침제를 만든 주범이라고까지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늘 행정부는 장기적인 안목의 경제정책 수립이 필요하다. 눈앞의 지표 회복을 위한 단기적인 경제 정책은 국가의 경제 활성화에 큰 효과를 주지 못한다. 기업과 국가 산업 그리고 부동산 정책 수립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장기적인 안목을 통해 산업 인프라에 대한 전반적인 발전과 토기 및 주거 계획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