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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Oct 05. 2021

히틀러에게 평화 협정을 받아낸 사람

서구의 배신과 네빌 체임벌린

히틀러의 평화협정서를 들고 연설하는 모습


  1938년 9월 30일 독일 뮌헨에서 영국, 프랑스, 나치 독일, 이탈리아 간의 국가 협정이 체결된다. 히틀러의 전쟁 위협이 한창이었던 당시 나치를 제외한 모든 국가의 목표는 평화 유지였다. 4개국은 쉽지 않았지만 각자의 목적을 달성했다. 이 협정으로 각국은 각자의 이해관계를 얻어갔다. 

  1939년 당시 영국의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체임벌린은 이 협정을 통해 인기와 평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고 믿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네빌 체임벌린은 영국 국민들 앞에서 연설을 하며 한 장의 종이를 보여줬다. 그리고 그 한 장의 종이가 영국 국민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그 문서는 바로 히틀러와의 평화 협정 문서였다. 그리고 이 평화 협정이 지켜진 기간은 딱 6개월이었다.



전쟁의 도화선 발칸반도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30년대에 이르러 다시 유럽은 긴장감에 휩 쌓인다.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그 긴장감의 시발점은 발칸반도였다. 1차 대전 역시 세르비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의 암살이 시작이었다. 동맹국으로 참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쟁에서 패배해 국가를 해체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1차 대전의 승전 국인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광풍을 불러일으킨다. 민족자결주의란 민족은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윌슨의 한마디는 전 세계 식민지 들의 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태평양 건너의 작은 나라에서 일어난 3.1 운동 역시 윌슨의 한마다가 큰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체코슬로바키아 가 1918년 제1공화국을 세운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서슬라브계열의 민족으로 대부분의 역사를 공유한다. 이들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 원래 발칸반도에서 거주 중이던 게르만족이 훈족의 침입으로 서쪽으로 이동하고, 로마제국이 무너져 게르만 족이 유럽 서부에 자리 잡자 비어있는 발칸반도에 정착하기 시작한 민족이 슬라브다. 이 중에서도 발칸반도 서부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현재 서슬라브 계열에 속하는 나라는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가 있다. 세 나라의 역사를 보면 게르만 국가들과 가장 가깝게 붙어있어 항상 게르만의 침입에 시달렸다. 서쪽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이, 동쪽에서는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늘 괴롭혔다. 동서로 강력한 적을 마주한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자신들만의 독립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1918년 드디어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독립의 기회를 맞이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오랜 시간 같은 지방에서 살다 보니 민족 구성이 뒤섞였다. 서슬라브인의 국가를 표방했지만 공화국에 존재하는 게르만인이 무려 35%나 되었다. 

  특히 오스트리아-독일 국경에 위치한 주데텐란트 지역은 게르만인들이 주를 이뤘다. 심지어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은 체코인, 독일인, 슬로바키아인 순으로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주데텐란트 지역은 유럽에 내에 공업 생산력이 매우 높은 지역이었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이 지역을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주데텐란트가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 속하게 되면서 세계 분쟁의 씨앗이 되고 동시에 히틀러에게 전쟁에 대한 빌미를 제공한다.



세계 대공황


세계 대공황과 히틀러



  1930년 미국 발 세계 대공황이 발생한다. 대공황은 가뜩이나 긴장감이 높던 체코슬로바키아의 갈등에 가속화를 가져온다. 공업 수출을 주력 산업으로 하는 체코슬로바키아는 대공황의 피해를 크게 받았다. 주데텐란드 지역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먹여 살린다고 생각한 공화국 내 독일인들은 공화국을 탈퇴해 독일에 합병되기를 원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새 수상으로 게르만인들의 통합을 주장하는 아돌프 히틀러가 선임되면서 주데텐란드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20년 전의 패배를 설욕하고 독일이 중심이 된 세계 질서를 구축하고 싶었던 히틀러는 게르만의 대통합을 주창한다. 그는 미국에서 말한 민족자결주의를 역이용한다. 게르만의 자결주의를 내세워 전 유럽에 퍼져있었던 게르만인들이 하나가 되어 나치 독일에 모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 미친 소리가 대공황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던 게르만인들에게는 놀랍게도 큰 힘이 된다. 그리고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는 데 성공하자 범게르만 주의는 힘을 얻고 주데텐란트의 독일인들이 더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공화국에 반대하는 시위가 연이어 발생하고 소요사태까지 일어났다. 공화국은 병력을 동원해 진압하고 있었지만, 치안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발등에 불이 붙은 체코슬로바키아는 SOS를 요청한다.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나라는 동맹국가였던 영국과 프랑스였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소극적이었다. 동맹 협정을 통해 요청에 응답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반응만 하는 수준이었다. 반면에 히틀러는 전쟁에 대한 준비를 진행 중이었다. 물론 당시 나치 독일 역시 내부 문제가 많이 전쟁을 수행할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영국, 프랑스 보단 나았다. 늘 그렇듯 승부를 거는데 완벽할 필요는 없다. 영국과 프랑스가 체코 문제에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곧바로 히틀러는 행동을 개시한다.





서구의 배신



  히틀러는 독일의 안전 보장을 빌미로 주데텐란드에 군대를 출동시킨다. 대부분의 나치 군 간부들은 반대했지만 히틀러는 거침없었다. 이를 통해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 사이에 선전포고가 선언된다면 프랑스와 영국도 조약에 따라 전쟁에 참여해야 했다. 그렇기에 이번엔 분명 체코슬로바키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도와줄 것이라 생각했고, 양국이 드디어 반응했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와 영국-프랑스의 생각은 서로 달랐다. 체코슬로바키아 와는 전혀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 이탈리아 왕국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 그리고 독일 나치 총리 아돌프 히틀러가 문제 해결을 위해 뮌헨에서 만난다.


  주데텐란트를 지키고 싶었던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과 달리 영국과 프랑스의 목적은 달랐다.


  



1. 전쟁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양 국의 주목적은 평화다. 두 나라는 세계 1차 대전의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은 나라였다. 현재 양국의 국민들은 대다수가 1차 대전의 참혹함을 직접 두 눈으로 본 사람들이었다. 불과 20년 전이었기에 기억 속에 생생했다. 직접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아직도 머릿속에 전장의 포탄 소리가 맴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국민들 사이에서 전쟁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는 것은 당연했다. 영국의 수상 네빌 체임벌린과 프랑스 공화국의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 역시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기 어려웠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나치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 한다면 양국도 군대를 파견해야 돼서 이는 막아야 했다.




2. 만약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면 소련-미국을 연합국으로 끌어들인다.  


  그래도 히틀러의 야욕이 거세다 보니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게 되면 전쟁에 돌입할 것이고 이 경우 소련이나 미국 중 한 나라의 도움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영국-프랑스-소련 혹은 미국과 손을 잡으면 나치 독일은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소련과 미국과의 동맹은 쉽지 않았다.

  양국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보다 같은 자본주의 진영의 미국을 1 옵션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은 동맹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1930년대 대공황이 시작된 중심지였기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쟁에 국력을 소비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해 동맹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미국 국민들 역시 전쟁에 반대했기에 경제적인 지원만 약속한 상태였다.  


  2 옵션인 소련과의 동맹은 애초에 성립되기 어려웠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공산주의 진영과 동맹을 맺는 것이 모순이었는 데다가 스탈린은 자국에서 대숙청을 하고 있었고 어디로 튈지 모를 사람이라 불안감을 안고 가야 했다. 그리고 일단 양국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 시간 안에 어떻게든 미국과 동맹을 맺어 전쟁에 참전시키고 정 안되면 소련에게 손을 뻗자는 스탠스를 취한다.


  하지만, 영국 프랑스의 생각과 달리 전쟁은 당장 내일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수순을 밟아가고 있었다.  




    3. 히틀러는 이성적인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다.  


  사실 양국의 가장 큰 실책이 바로 이것이다. 히틀러라는 인물이 이성적인 협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국의 60대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후대의 평가와 다르게 굉장히 유능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가 총리에 당선될 수 있었던 비결은 대공황의 늪에서 벗어 남과 동시에 끌어 올림과 동시에 독일과의 긴장감을 외교적으로 풀어나갈 적임자라고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청년 시절 굉장히 뛰어난 사업가였고 대공황 시절 영국의 재무장관을 역임하며 금융 개혁을 실시해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하지만 그는 국가적인 안목은 떨어졌다. 그는 히틀러 역시 대화를 통해 외교적으로 문제를 풀어 나간다면 충분히 컨트롤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 점은 지극히 합당한 선택이다. 본래 정치와 외교란 타협이다. 내가 요구하는 바를 위해 한발 물러서고, 반대로 상대의 요구가 있다면 내 것 하나 챙겨가면 된다. 이는 정치의 기초 속성이다. 네빌 체임벌린은 역시 우리가 주데텐란드 할양을 묵인한다면 히틀러가 한발 물러서서 군사적 위협을 줄일 것이라는 지극히 이성적인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체임벌린 오판은 전쟁을 더욱 급속도로 당겨 왔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나치 병합 과정 (출처 : 영문 위키 백과)


1 : 주데텐란트 할양 (1938.10)

2 : 체코의 실레시아 지방 폴란드 병합 (1938.10)

3 : 슬로바키아 국경지대 헝가리 병합 (1938.11)

4 : 카르파티아 산맥의 루테니아인 거주 지역 (1939.03)

5 : 나치 괴뢰국 보헤미아-모리바 보호령 출범 (1939.03)

6 : 슬로바키아는 독립국 존속

(출처 : 영문 위키 백과)




주데텐란트 할양과 전쟁의 시작



  협상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위의 이해관계를 따르던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주데텐란트 할양을 묵인한다. 그 대가로 영국과 프랑스가 받은 건 히틀러로부터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조약서 하나였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조약이지만, 네빌 체임벌린과 영국 사람들은 열광했다. 영국 국민들은 체임벌린 총리가 영국을 대공황의 수렁에서 건져내었는 데에 이어 전쟁마저 피했다고 생각했다. 총리의 인기는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로부터 정확히 6개월이 지난 1939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군대를 이끌고 무력으로 점거한다.

  이미 서구의 배신을 한차례 지켜본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 에밀 하하는 나치 군대가 쳐들어 오자 곧바로 항복한다. 애초에 양국은 체급이 맞지 않았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은 보헤미아-모리바 보호령이라는 나치 독일의 괴뢰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뮌헨 협정으로 공화국이 보장받았던 평화의 시간은 딱 6개월이었다.


  서구의 배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합병을 지켜본 소련은 독일의 다음 타깃이 폴란드와 자신이라는 걸 알았다. 이제 반대로 다급 해진 건 스탈린이었다. 소련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애초에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결국 양 진영의 협상이 결렬되고, 스탈린은 반대로 히틀러와 동맹을 체결한다. 이것이 바로 세계 2차 대전의 신호탄인 독소불가침조약이다. 이제 동부 전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히틀러는 전쟁을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뮌헨 협정이 체결되고 1년이 지난 1939년 9월 독일과 소련의 연합군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세계 2차 대전이 시작된다.



왼쪽부터 네빌 체임벌린, 에두아르 달라디에, 아돌프 히틀러, 베니토 무솔리니, 갈레아초 치아노




뮌헨 협정이 우리에게 남긴 것



  뮌헨 협정은 우리 역사에 있어 많은 교훈을 준다. 정치라는 것이 항상 학교에서 배운 대로 이성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정치는 사람이 하기에 때론 이론과 달리 비이성적으로 흘러한다. 항상 다수가 모여 집단 지성을 이루지는 않는다. 무지성 다수가 끔찍한 일을 벌이는 일은 역사 속에서 종종 발생한다. 나치 독일은 무지성 집단의 가장 대표적인 예다.

  평화에 있어서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항상 정답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교훈과 궤를 같이 하는데, 외교 테이블에 나오는 상대 국가는 대부분 자신의 약점을 끝까지 숨긴다. 히틀러는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끝까지 숨겼다. 그리고 협상에 앞서 라인란트 재무장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를 테스트해보았고 그들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자 좀 더 과감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주데텐란트 합병이었다.


   그리고 국민의 뜻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꼭 좋은 정치는 아니다. 체임벌린 총리의 행동은 당시 영국 국민들이 원하는 바였고 그는 국민의 대리인 역할을 잘 수행했다. 어떻게든 히틀러를 달래서 다시 전쟁을 안 했으면 하는 것이 당시 여론이었다. 당장 협정이 끝나고 그의 인기가 치솟은 걸 생각하면 모두가 히틀러라는 사람 자체를 간과한 것이다. 이 행동으로 세계 대전이 앞당겨졌다. 정치인은 국민의 여론을 잘 수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우에 따라선 국민들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올바르게 조정할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국민의 대리인이면서도 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는 리더가 소신을 가지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

  체임벌린은 희대의 오판으로 20세기 최악의 영국 총리로 꼽히긴 했지만 마냥 무능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다. 재무 장관 때 뛰어난 능력은 물론, 뮌헨 협정 이후 어쨌든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손 놓고 기다리지는 않았고 그 시간 동안 혹시 모를 전쟁에 대비했다. 어떻게 보면 정말 큰 오판 하나가 그의 좋은 점 전체를 뒤엎은 셈이 된 것이다. 네빌 체임벌린 때 모아놓은 군사력 덕분에 2~3년 뒤에 벌어지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이 끝끝내 독일의 침공을 버텨내는 초석이 되었다고 분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훗날 총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자신의 행동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세기의 악마 히틀러에게 평화 협정을 받아낸 네빌 체임벌린. 비록 당시에 그는 찬양받았지만 지금은 서구의 배신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음과 동시에 전 세계를 2차 대전이라는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장본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네빌 체임벌린과 뮌헨 협정은 국제 정치에 있어 많은 교훈을 우리에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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