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집권적 정치체제의 출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서 -
발생 원인
파르티아 제국의 몰락
조로아스터교의 발달
결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출범
이슬람이 등장하기 직전 중동의 패권은 페르시아인들이 세운 사산 왕조가 차지했다. 사산 왕조는 현재 이란의 역사에 있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의 등장 이후 많은 중동인들이 이슬람을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지만, 사산 왕조의 등장으로 이란 사람들은 그들의 뿌리에 대한 동질성을 가지게 되어 오늘날 이란이라는 국가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중동 정치 역사에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국가다.
사산 왕조의 탄생을 살펴보기 위해 셀레우코스 제국이 있던 2세기로 돌아가 보자.
기원전 2세기경 셀레우코스 제국이 몰락하고 그 세력은 파르티아가 고스란히 물려받는다. 파르티아 제국은 서방의 로마와 자주 맞붙었다. 초기에는 파르티아가 로마를 압도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로마 제국은 세계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고 파르티아는 서서히 몰락했다.
기원후 3세기에 접어들자 로마제국은 수시로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침략했다. 파르티아의 아르사케스 왕조의 권위는 크게 떨어지고 페르시아의 후손을 자처한 파르스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파르스의 지도자 바박은 왕조에게 독립을 주장했지만 거부당하고 그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아르다시르가 224년 파르티아의 황제 아르타바누스 4세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왕조의 세우게 된다. 이것이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출범이었다.
아르다시르의 아들이자 사산 왕조의 2대 샤한샤 샤푸르 1세는 제국을 안정화시키자 로마 제국으로 눈을 돌린다. 당시 로마는 군인 황제 시대가 시작되고 게르만과 훈족의 침입으로 이전보다 힘이 많이 약화된 상태였다. 샤푸르 1세는 로마의 혼란기를 틈타 그들의 시리아 속주들을 차례차례 점령한다. 이에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에 오지만 샤푸르 1세는 로마군을 무찌르고 로마 황제를 포로로 잡는다. 황제가 적국의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당한 발레리아누스는 페르시아의 감옥에서 쓸쓸하게 죽고 만다.
이후 사산왕조는 몇 번의 침체와 발전을 반복한다. 사산왕조는 동로마 제국과 함께 동서방 세력을 상징하는 강대국이 된다. 하지만 알라의 뜻을 전한 무함마드가 등장하며 이슬람이 탄생하자 사산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후 이슬람을 대제국을 건설하고 중동의 상징이 된다.
사산 왕조의 정치 체제는 인도의 굽타 왕조와 반대였다.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지향했다. 이전에 페르시아가 지방 분권적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사산조의 황제들은 지방 분권적 체제가 앞선 중동 제국들이 목록한 이유라고 판단했기에 지방 군주들에게 권력을 최대한 제한했다. 중앙 집권 체제로 사산조는 국가의 발전을 계획이 쉬워졌고, 영토 확장 또한 수월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 필요한 전제는 강력한 황제의 카리스마다.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의 안착은 지도자의 카리스마에 달렸다.
다행스럽게도 사산 왕조에는 비교적으로 역량 있는 지도자가 많이 나왔다.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사산 왕조 페르시아 지도자들의 평균 역량이 꽤 높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사산왕조가 몰락과 쇠퇴를 반복했는데 이 역시 사산 왕조의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고대 왕국으로서의 여러 면모를 가지고 있다. 전 세계 주요 문명은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면서 정치, 종교, 사회 체제가 크게 변화한다. 서방 세력이 '고대 로마 다신교' , '1인 황제 독재 체제'에서 중세로 넘어가면서 '가톨릭', '봉건제'로 변화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 역시 '조로아스터교', '중앙 집권적 왕조'에서 '이슬람교' , '지방 분권적 술탄제'로 바뀐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중동 지역의 마지막 고대 특성을 지닌 국가였다.
분서갱유(焚書坑儒) : 진의 책이 아는 것은 모두 태우고, 진의 정치를 비판한 유학자는 매장하라
발생 원인
진시황의 중국 대륙 통일 및 폭정
한족 고유의 통일 정부 수립에 대한 열망
한고조의 탄생
결과
한족의 탄생 및 한족 고유의 통일 왕조 출범
오늘날 중화사상의 근거가 되는 문화 확립
민족은 어떤 기준으로 구분될까? 사실 명확한 기준은 없다. 같은 언어, 종교, 문화를 서로 공유하는 비슷한 집단끼리 편의상 나누는 개념이다. 그래서 민족이란 게 칼로 자르듯이 딱 나눠지는 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데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니 애초에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게 당연하다. 워낙 폐쇄적인 환경에 있던 우리나라나, 민족의식이 강한 유대인들의 경우는 비교적 명확히 구분되기도 한다.
이번에 살펴볼 한족 역시 명확히 구분되는 민족 중 하나다.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한족은 말 그대로 한나라의 후예다. 한나라란 중국 한고조가 세운 나라다.
중국 황하 문명의 경우 은나라를 거쳐 주나라를 중심으로 크게 성장한다. 그리고 주나라가 무너지면서 수많은 왕국으로 분열되어 중국 대륙에 춘추시대가 시작된다. 이들은 주나라의 후예라는 공통점만 있었을 뿐 자신들에 서로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래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진시황이 통일하고 진나라를 세우며 달라진다. 드 넓은 중국 대륙 하나로 통일해 건설하게 되었다. 진시황의 통일은 당시 중국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심어 줌과 동시에 나도 진시황처럼 통일 황제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중앙 집권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군현제를 도입한다. 군현제란 전국을 군 단위로 나누고, 그 아래에 현을 두어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는 방식의 통치 체제를 의미한다. 이는 승상 이사가 계획한 방식이었다. 춘추 전국시대에는 각 지방에 왕을 두어 그들에게 정치를 일임했다. 하지만 이사는 통일 국가에서 지방 세력 세력의 독립과 반목을 우려해 중앙 집권적인 군현제를 실시하는 방향으로 바꾼다.
이사의 의견을 옳았다. 지방 분권적 봉건제가 아닌 중앙 정부에서 태수를 파견하게 되면 통치의 효율성을 올라가고 반란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진시황을 도와 중국 대륙을 평정한 명재상답게 뛰어난 통찰력이었다. 진시황이라는 카리스마 있는 군주까지 보유했으니 이사의 군현제는 순조롭게 적용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군현제가 제대로 정착되기도 전에 사건이 터진다. 진시황이 통일 이후 권력 유지를 위한 강압적인 정치를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분서갱유다. 이는 진나라 서적 외 모든 것을 불태우고, 진시황을 비판한 유학 사상을 완전히 몰살시키려는 목적으로 유학자들을 생매장한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몇 차례 나오는 대탄압의 역사 중 분서갱유는 그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불로초 소동을 비롯해 환관 조고의 패악질까지 겹치면서 진나라는 순식간에 몰락한다. 비슷한 시기에 인도에서 종교적 관용을 베풀어 마우리아 왕조의 중흥을 이끈 아소카 대왕과 큰 차이를 보인다.
곧바로 시황제가 죽자 지방 세력들은 이때다 싶어 모두 반기를 들고일어난다.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제후들 사이에서 세력을 모두 통합하고 통일 왕조를 건설하는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한고조 유방이다.
진시황의 실패를 두 눈으로 직접 본 한고조 유방은 기존의 군현제와 과거의 봉건제를 혼합한 새로운 군국제라는 제도를 만든다. 이사가 실시한 군현제는 정착하기엔 아직 일렀고, 많은 도움을 받아 통일을 했던 한나라였기에 이들을 분왕의 자리를 주어 대우를 해줬어야 했다. 한나라를 세우는데 일조한 공신들인 한신, 영포, 팽월 등은 자신만의 군사권을 가지고 있어 한나라 황실의 골칫거리였다. 분왕의 자리를 약속해 한나라에 합류한 이들이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나라의 승상 소하는 황제가 있는 수도 장안을 비롯한 주변 지역은 군현제를 실시하고, 거리가 멀어서 직접 통치하기 어려운 지방에는 문왕을 두었다. 다만 소하는 지방 분왕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들을 중앙 권력에서 배척하고 여러 가지 트집을 잡아 처형시켰다. 한신의 토사구팽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결국 이들은 모두 한나라 황실 사람으로 대체되었다. 어떻게 보면 다소 치사한 방식이지만 매우 효과적이었다. 만약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한고조와 소하를 알았다면 그의 저서 '군주론'에 이 이야기를 담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후 오초칠국의 난이 발생해 중앙에서 파견한 한나라 황실의 왕들도 믿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왕의 숫자를 크게 줄이며 한나라의 군국제는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한다. 이후 후한을 세운 광무제는 전국을 13개의 주 단위로 나눴고, 후한의 공신들에게 주를 나눠주었다. 주자사 직책은 세습되지 않았고 황제가 직접 파견했다.
한나라는 전한 과 후한을 포함해 약 400년간 지속되었다. 지금 그렇게 강력한 것처럼 보이는 중화인민공화국도 아직 100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한나라에 비하면 신생국가다. 한나라의 오랜 지속으로 중국 대륙의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심어 주었다. 중국 인들 사이에 이민족의 기준은 한나라 출신 사람이냐 아니냐로 갈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기준이 되어 아직까지도 한족의 통일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하나의 중국과 중화사상 개념이 만들어진다.
우드로 윌슨이 말했듯이 민족 본인의 운명은 스스로 정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그 자유가 절대 누군가의 사상은 누군가의 피해가 되어선 안된다. 그런데 한정된 자원 내에서 서로 싸우는 지구에선 자신들만의 고유한 권리와 민족을 주장이 필연적으로 다른 민족에 대한 피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민족자결주의를 방패로 삼아 많은 다수의 민족들은 소수의 민족의 고유의 권리를 핍박하고 그들의 영토를 빼앗는 근거로 삼기도 한다. 과거 민족의 영토 회복을 목적으로 힘이 없는 소수 민족을 힘으로 밀어내는 횡포를 자주 볼 수 있다. 모든 민족의 사상이 이러한 횡포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