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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Oct 19. 2021

당백전은 조선 경제를 어떻게 파탄시켰을까?

흥선대원군과 영의정 김병학의 당백전


당백전


“당백대전을 주조하여 널리 쓰이고 있는 통보와 함께 사용한다면 재정을 늘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조선 영의정 김병학



  19세기 말 조선. 쇄국정책을 선언한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차지하고 있었을 당시 온 국가가 한번 화폐 문제로 들썩였다.


  18세기부터 조선은 이른바 거상이라고 불리는 거대 교역 보부상들이 생겨나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박지원의 '양반전'에도 나오듯이 영조-정조 집권 시기에 일부 상인들은 조선이 유교 국가라는 점을 이용해 일부 상품을 독과점하며 물가를 크게 올랐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여러 정책을 시도를 했다. 실학 계열 중 중상학파가 등장하며 유교 사회에서 금기시되었던 상업 활동도 서서히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뒤이어 집권한 세도 가문은 조선 정치와 경제를 모두 손에 쥐었다. 이들은 이른바 삼정의 문란이라는 조선 최악의 조세 시스템을 운영 중이었다. 삼정의 문란은 전정, 군정, 환곡 세 가지 조세 제도에 있어 일어난 부정부패였다. 백성들의 민심은 크게 떨어지고 있었다. 흥선대원군 집권 전후로 일어난 임술 농민 봉기와 동학 동민 운동은 당시 조정에 백성들이 얼마나 큰 분노를 느끼고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1864년, 아들 고종을 왕위로 앉히면서 조선의 권력을 잡게 된 흥선대원군은 삼정의 문란으로 피폐해진 조정의 재정 문제와 백성들의 가계 안정을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흥선대원군은 19세기 무너져가는 조선을 중흥시키기 위해 노력한 지도자이다. 하지만 그도 결정적인 실책 몇 가지를 한다. 그의 안 좋은 평가에 가장 큰 몫을 하는 것이 바로 경복궁 증건과 당백전 발행이다.

  이 두 개의 문제는 사실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흥선대원군은 19세기 조선을 멍들게 한 세도가문을 몰아내고 왕권을 강화시키려 시도했다. 이를 위해 첫 번째로 시도한 것이 임진왜란 때 불타 소실된 경복궁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경복궁은 조선 왕들이 거처했던 왕권의 상징과 같았다.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듯, 흥선대원군 역시 경복궁 증건으로 세도 가문을 견제하고, 왕실의 기강을 다잡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문제는 돈이 없었다. 조선의 국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불법적으로 세금을 걷었으면 국고라도 차있었어야 정상일 텐데 이 돈이 고스란히 세도 가문의 금고 속으로 들어갔다. 결국 경복궁 자금 조달을 위해 흥선대원군과 영의정 김병학은 몇 가지 정책을 생각해낸다.



흥선대원군



  우선 원납전이라 하여 경복궁 증건을 위한 기부금을 받는다. 원납전이란 궁궐 공사를 위해 백성들이 돈을 국가를 위해 자발적으로 내는 것을 의미한다. 흥선대원군은 대대적으로 원납전을 홍보하고, 지불에 있어 계급의 차별 없이 모두 걷을 거라 말했다. 그럼에도 목표 액수만큼 모이지 않았다. 결국 원납전 지불 액수에 따라 신분 상승의 기회를 주기로 선언한다. 이미 조선 후기에 공명첩을 발행하며 신분제가 흔들린 조선에서 다시 한번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신분을 담보로 한 비용 징수 단기적으로 국가 재정에 도움이 될지 모르나 장기적 관점으로는 그다지 좋지 못하다.

  조선의 상위 계급인 사대부는 면세 혜택이 있었다. 조선에서 오랜 기간 신분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소수의 양반에게 면세 혜택을 주어도 그들이 국가 운영을 위해 힘쓰는 대신, 다수의 백성들이 일을 해 세금을 지불하기 때문이다. 만약 양반의 숫자가 늘어나게 된다면 국가 운영 능력이 없는 상위 계급 사람들이 늘어나는 반면 면세 혜택자도 동시에 늘어나고, 반대로 소수의 백성들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 더욱 커지게 된다. 또다시 국가는 재정 확보를 위해 세수를 늘리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사회 이탈이 시작되며 사회가 파탄 나게 된다.


  결국 원하는 만큼 세수를 확보하지 못한 흥선대원군은 원납전을 강제 징수한다. 당시 언급에 따르면 상거지들의 돈까지도 뺏어 경복궁 사업 비용에 투입시켰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경복궁을 세우기 위한 노동력까지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했으니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기에 비용 확보를 위한 정책을 하나 더 실시하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당백전 발행이다. 원납전으로 돈이 모이지 않자 영의정 김병학의 의견 받아들인다. 아래 내용은 고종 실록에 실린 김병학의 상소다.




  백성들의 생활은 어렵고 재정은 다 떨어졌는데 건축 공사를 크게 벌이고 있으므로 일을 더 지탱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 신은 이에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잘 조절하여 메워 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였지만  아직 그 방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돈이라는 것은 경중을 잘 맞춰 준절하여 쓰는 물건입니다. 옛 전에 당십전이나 동오전을 쪼개에 당이전이나 당삼전으로 만들어 쓴 법 모두 일시적으로 임시변통한 정사였습니다. 지금 나라의 재정이 몹시 고갈된 때에 응당 이익되는 것과 손해 보는 것을 절충해서 쓰는 원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당백대전을 주조하여 널리 쓰이고 있는 통보와 함께 사용한다면 재정을 늘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영의정 김병학의 의견을 들은 흥선대원군은 곧바로 당백전을 발행하게 되고, 조선 경제가 파탄이 나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다.


  당시 조선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고 있는 화폐는 상평통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포를 통해서 세금을 받고 있어 실제로는 포 역시 화폐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 사이 영국의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따라 값싼 모포들이 청나라로 흘러들어오게 되는데, 이는 먼 우리나라에까지 전해져 모포의 가치를 떨어진다. 화폐의 역할을 하는 모포의 증가는 통화량의 증가와 동일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로 인해 조선에도 서서히 인플레이션이 야기된다.

  그 와중에 흥선대원군이 당백전을 발행하자 대혼란이 시작된다. 당백전은 이름 그대로 상평통보의 100배 가치가 있는 통화였다. 그러나 실제 당백전 제조에 들어가는 비용은 상평통보에 비해 5~6배에 지나지 않다. 실제 가치와 화폐 액면가 차이가 너무 컸다. 정부는 실제 가치는 낮지만 액면가가 높은 화폐를 만들면 약 20배가량의 이익을 얻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는 너무 단순한 계산이었다. 당시에 상평통보의 가치가 많이 하락한 상황이라 고액 화폐의 필요성이 증가되고 있기도 했지만, 단위가 커도 너무 컸다.


 조정은 당백전을 통해 어머어마한 양의 금액을 확보하려고 조선의 정식 화폐로 인정함과 동시에 백성들에게 사용을 권장한다. 그리고 곧바로 당백전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조정에선 100전의 금액을 가져온 사람들에게 당백전을 나눠줬다. 이를 통해 국가는 일시적으로 국고가 늘어났다. 그러나 그건 정말 일시적이었다. 당백전은 앞서 언급한 대로 실제 화폐 제조 금액과 액면가가 20배가량 차이가 난다. 고액 화폐를 발행했으면 국가에서 화폐 사용에 대한 그만큼의 보상을 해야 한다. 아니면 상업 사회에서 고액 화폐를 유통시킬만한 시장의 힘이 있어서 자체적으로 계속 화폐과 원활하게 돌면 된다. 그 과정에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겠지만, 사실 이는 고액 화폐를 신규로 생산하게 되면 발생하는 필연적인 문제다. 만약 해당 국가의 산업이 해당 화폐를 활성화시킬 정도로 크다면 장기적으로 볼 땐 큰 문제는 없다. 경제는 어차피 우상향 곡선을 그리기 때문에 급격하지만 않는다면 인플레이션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당시 19세기 조선은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었다. 시장에 있는 사람들은 당백전을 기피했다. 당시 조선은 당백전의 사용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당백전을 들고 있으면 뭐하나, 살 물건이 없는데.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시장에 있는 상인들은 당백전으로 돈을 받는 것을 기피했다. 액면가만 높지 실질적인 가치는 전혀 없었다. 심지어 조정에서 까지 직접 발행한 당백전을 공과 수납으로 받지 않았다. 국가가 발행한 화폐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정책이다. 이로 인해 당백전의 가치는 더 떨어져 갔다. 결국 당백전의 발행으로 조선 사회에 현대에서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인플레이션이 찾아오게 된다. 겨우 1년 사이에 쌀 한 가마니의 가격이 8배로 뛰는 등 화폐 가치는 크게 손상되고 조선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그제야 흥선대원군은 수습에 나선다. 시중에 유통되고 있던 모든 당백전을 전량 회수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당백전의 회수 비율이 1:1이었다는 것이다. 즉, 당백전 1개를 가져가면 상평통보를 100개가 아닌 1개로 준 것이다. 조선 조정이 직접 발행한 화폐였지만, 이를 세금으로 내는 것을 거부했고, 훗날 회수 비용도 1:1로 해줬으니 국가가 대놓고 백성들을 상대로 벌인 사기극이나 다름없었다.


  당백전 문제와 경복궁 재건 사업은 흥선대원군을 비판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요소다. 경복궁 재건이야 당시 백성들을 병들게 했지만 어찌 되었듯 왕권 강화을 달성할 수 있었고, 현대에 와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했으니 어느 정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

   이에 반해 당백전 발행은 그의 최대 오판이었다. 경제학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던 조선에서 너무 안일한 생각으로 벌인 일이었다. 당시 백성들에게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보게 했다. 이 당시의 당백전의 안 좋은 이미지가 오늘날까지 이어저 '땡전'이라는 말이 유래가 될 정도로 조선 경제를 극심한 인플레이션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최악의 경제 정책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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