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가톨릭 탄압
영화에 무지한 나도 좋아하는 감독은 있다. 바로 마틴 스콜세지다. 러닝타임이 긴 영화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데 스콜세지 정도의 연출력이라면 오히려 대환영이다. 그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고 시대적 배경을 관통하는 영화를 많이 제작했다. 갱스 오브 뉴욕과 아이리시 맨을 통해서 현대 미국 사회의 범죄상을 그렸고,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서는 현대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단면을 그렸다.
그리고 오늘 소개할 영화 사일런스 역시 일본 에도 막부 시절의 종교 탄압이라는 어두운 단면을 다루고 있다.
16세기에 이르러 동아시아에도 가톨릭이 들어온다. 7세기경 기록에 실크로드를 통해 가톨릭 신자가 중국에 갔다는 문헌도 있지만 신빙성이 크지 않고 진실이라 하더라도 큰 영향력을 만들지는 못했다. 동아시아는 지리적으로 가톨릭이 도달하기 힘든 위치에 있다. 대서양만 건너면 도달할 수 있는 아메리카와 달리 가톨릭에 부정적인 이슬람 세력권을 지나 힌두교 세력권인 인도를 거쳐서 사막을 건너야 중국이 나온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 열대 우림인 동남아시아를 지나야 간신히 도달할 수 있는 머나먼 땅이다. 16세기 유럽 사람들에게 동아시아를 간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건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가는 길에 죽기 딱 좋은 장애물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선교를 목적으로 동아시아로 향한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한 스페인 태생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명나라로 넘어간 이탈리아 출신의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대표적이다.
마테오 리치는 당시 명나라 사람들이 유교에 대한 믿음이 굉장히 크다고 느끼고 그들의 입맛에 맞게 천주교 교리를 만들어 책을 쓴다. 이 책의 이름이 바로 천주실의다. 이 책은 중국을 넘어 조선에 전달된다. 이를 본 성호 이익은 조선에 와 서구의 학문이라는 서학을 전파했다. 그리고 훗날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 역시 이 책을 봤다고 전해진다.
일본에서 활동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역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많은 일본 청년들에게 세례 성사를 해주었다. 여러 군웅들이 할거한 센코쿠 시대의 일본은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하다 보니 특정 종교의 파급력이 강했다. 게다가 일본에는 이전부터 많은 포르투갈 상인들이 활동을 하고 있어 가톨릭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들은 서양과의 무역을 통해 이득을 챙기려 해 유럽인들이 가톨릭 전파를 허용했다. 심지어 다이묘 중에서도 가톨릭 교리에 감명받아 스스로 개종하는 경우도 생겼다.
하지만 이는 센코쿠 시대라는 특수성이 작용했을 뿐 양국의 사상적 기반과 가톨릭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에서는 하나님 외의 우상 숭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유교 문화권이 중국은 조상을 숭배하고 일본은 천왕을 숭배한다. 오늘 이야기할 일본과 가톨릭의 충돌도 필연적이었다.
우선 사일런스의 시대적 배경인 에도 막부 시대로 가기 전에 센고쿠 시대에 전파된 가톨릭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센고쿠 시대란 15세기경 무로마치 막부가 끝나고 시작된 전국 시대를 의미한다. 센고쿠 시대의 각 지방의 영주를 다이묘라고 부른다. 다이묘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동맹을 맺고 전쟁을 벌여 자신들의 영토를 넓혔다.
앞서 언급했듯이 다이묘들은 서양과의 교역을 통해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몇몇 다이묘들은 유럽인들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며 지속적으로 유럽과의 교류를 시작한다. 유럽인 선교사들은 일본에 도착해 세례를 하고 가톨릭 교리를 전파했다.
이렇게 생겨난 일본인 신자들을 포르투갈의 크리스탕에서 유래된 기리시탄으로 불리게 된다.
중앙 권력의 부재와 지방 다이묘들의 이익에 의해 기독교는 일본 내에서 쉽게 전파되었다. 특히 일본 서부 끝에 있는 항구 섬 나가사키는 기리시탄의 본거지 역할을 한다. 과거부터 포르투갈 상인과 선교사가 많으니 자연스럽게 가톨릭 신자 비율도 높았다. 나가사키의 다이묘 역시 기리시탄이었고, 기리시탄 다이묘들끼리 동맹을 맺는 수준까지 가톨릭이 퍼졌다. 현재 나가사키는 일본의 가톨릭 교구 3개(도쿄, 오사카, 나가사키) 중 하나가 위치해있고, 평균 가톨릭 신자가 1%도 안 되는 일본에서 무려 4.5%의 신자 비율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아직까지도 일본 가톨릭의 중심지로 남게 되었다.
센고쿠 시대가 끝나게 되자 기리시탄들에게 먹구름이 드리운다. 오와리국의 다이묘였던 오다 노부나가는 무로마치 막부를 점령해 오랜 기간 이어진 센고쿠 시대를 끝내고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는 일본 열도를 전부 점령하려는 목표가 있었기에 굳이 적을 많이 만들지 말아야 했다. 굳이 신앙을 탄압 이유가 없던 그는 가톨릭 신자들을 용인하면서 그의 집권기에는 큰 문제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갑작스럽게 죽고, 그의 모든 세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넘어간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마무리 짓지 못한 일본 통일에 성공하자. 초기에는 오다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받아 기독교에 대해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오사카 성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료를 만나 예수회의 포교에 대한 허가증을 발급해줬다. 그러나 규슈를 정벌하던 도중 나가사키에 예수회 깃발이 세워진 모습을 본 히데요시는 가톨릭이 신앙심으로서 일본을 지배하려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가톨릭 포교를 전면 취소하고 신앙을 금지시켰다. 그 내용이 바로 1587년에 예수회 선교사에 대한 추방 명령인 바테렌 추방령이다. 이 추방령으로 총 26명의 천주교 신자가 순교해 훗날 이들은 26 성인으로 추존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톨릭을 부정적으로 봤지만 평범한 신자들에게까지 손을 대지는 않았다. 그는 일본 내 선교 활동을 금지할 뿐 민간의 기리시탄을 색출하지는 않았다. 당시 그의 신경은 온통 조선과 명에 있었다.
조선 정벌에 목을 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작스럽게 죽고 뒤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이어받는다. 늘 그렇듯 강력한 카리스마의 지도자가 사망하자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시작된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성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 드디어 새로운 막부 정부를 연다. 막부란 천황의 권력을 대신하는 일본 내 최고 권력자이다. 이 시대를 수도인 에도(현 도쿄)의 이름을 따 에도 막부라고 부른다.
새로 통일된 정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내부 결속이다. 이제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이에야스는 일본 내에서 가톨릭 신앙은 완전히 금지시키고, 포르투갈 상인과의 교역도 거부하는 쇄국 정책을 시작한다. 이제 일본의 모든 다이묘들은 서양 선박과 거래하기 위해 반드시 막부의 허가가 필요했다. 에도 막부는 서양 세력이 일본 진출할 가능성을 시전에 차단하는 동시에 지방 다이묘들이 교역을 통해 이득을 보는 것을 전면 금지시킨다.
문제는 신앙이라는 게 오늘부터 금지시킨다고 선언해봤자 종교인들 입장에서는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 신앙이란 정치 그 이상의 존재이며 삶 그 자체다. 오히려 많은 신자들은 힘들 때일수록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야 한다며 더 신앙심이 강해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믿음이란 인간은 목숨을 무엇보다 소중히 생각한다는 일반적인 통념을 넘어설 수 있는 개념이다.
나가사키 남동부에 위치한 시마바라 시는 에도 막부의 신앙 금지령에 가장 크게 반발했다. 다수의 기리시탄은 본격적인 항거가 시작한다. 시마바라의 기리시탄 2만여 명은 무장을 하고 지방 관리와 다이묘의 군대를 공격했다. 시마바라의 기리시탄 사무라이들도 전쟁에 합류했고, 혼도 성과 하라 성을 점령해 본거지를 확보한다. 다급해진 다이묘는 막부에 구원을 요청했고, 10만이 넘는 에도 막부의 병력이 시마바라로 향한다.
막부의 병력은 반란군의 열 배였다. 숫적으로 열세에 있던 반란군들을 힘을 잃기 시작하고 성을 다시 막부에 내주게 된다. 기리시탄 반란을 진압한 막부는 기리시탄들을 철저히 짓밟았다. 극소수의 인원만 살아서 도망쳤고, 나머지 반란군은 모두 죽었다. 에도 막부의 탄압을 지켜본 다른 기리시탄들은 공포감에 떨며 신앙을 이어간다.
에도 막부의 가톨릭 탄압은 기존에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 한 탄압과는 차원이 달랐다. 에도 막부는 가톨릭을 일본 내에서 완전히 뿌리 뽑을 목적으로 가혹하고 끔찍한 탄압을 이어갔다. 일본이 오늘날까지도 웬만한 다른 다라들에 비해 낮은 가톨릭 신자를 보유하고 있는 이유 역시 여기서 기인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1) 5 가구 감시
에도 막부는 기리시탄을 물론 기리시탄에게 도움을 준 일반 백성들까지 같이 참수했다. 시마바라의 난 이후 유럽 선교사들은 마카오나 마닐라를 통해 일본 큐슈 지방으로 숨어들어갔는데, 이들을 숨겨주는 일반 백성들까지 예외 없이 죽였다. 그리고 이를 감시하기 위해 백성들을 다섯 가구씩 묶어 이웃이 기리시탄이 아닌지 감시하도록 했다. 만약 기리시탄을 제보하면 보상을 해줬고, 숨겨준다면 다섯 가구 모두 가구가 처벌받게 되었다.
2) 에부미
기리시탄을 색출하기 위해 금속 판에 예수의 형상을 새겨놓은 후미에를 모든 백성들이 주기적으로 밟게 했다. 이는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 때부터 시행되었는데, 막부 정권에서 파견 나온 관리가 백성을 모아 후미에를 밟고 지나가는 행위인 에부미를 명령했다. 만약 밟지 못하거나 예를 표하거나 혹은 숨을 가쁘게 쉰다면 예외 없이 기리시탄으로 지목당해 고문 및 처형당했다. 종교적 상징물을 훼손하는 것을 금지하는 가톨릭이었기에 많은 신자들이 에부미를 통과하지 못했다. 이 영화에서도 에부미 장면이 수차례 등장한다.
3) 단가 제도
모든 백성들이 의무적으로 불교 사찰에 불자로 등록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출생 신고나 전입 신고를 동사무소에서 진행하는데, 이를 당시에 불교 사찰에서 진행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가톨릭은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것이 원칙이고 불교는 화장하는 것이 원칙이다. 만약 주위에서 매장을 하는 집안을 신고한다면 상을 내리기도 했다.
외외에도 기리시탄을 거꾸로 매달아 관자놀이를 서서히 눌러 천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고문을 했다. 심지어 신체의 일부를 불구를 만든 십자가에 매달고 마을을 돌며 공포감을 조성했다.
하지만 기리시탄들의 신앙심은 대단했다. 간신히 살아 남은 일부 기리시탄들은 마닐라나 마카오로 망명을 떠났고, 해외로 갈 여력이 안된 일반 농민들은 에도 막부의 손이 닿지 않는 큐슈 지방 극서부 지역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들은 에도 막부의 서슬 퍼런 가톨릭 탄압 속에서도 무려 250년 동안 신앙심을 잃지 않고 살아남았다.
250년 에도 막부가 끝나고 1860년대에 이르러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 일본 정부도 개항을 하게 된다. 서양 세력은 메이지 정부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으면 교역은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 시기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일본으로 넘어오게 된다. 기리시탄의 신앙심이 하느님께 닿았을까? 이들은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결국 발견되어 세상 밖으로 드디어 나오게 된다. 이들을 잠복 기독교인이라는 의미의 '가쿠레기리시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프랑스 선교사 베르나르타데 프티장은 나가사키에 천주당을 세운다. 처음에 성가를 부르며 선교를 시도했지만 오랜 기간 동안 탄압받은 일본인들은 아무도 선교에 따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일본 내에서 가톨릭은 잊혀 있었다. 하지만 조용히 살아가던 소수의 가쿠레기리시탄들은 그들을 알아봤다. 같은 신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천주당에 가 프티장에게 성모 마리아에 대한 질문을 했다. 프티장은 마리아에 대해 설명하고 자신이 가톨릭 선교사라는 사실을 말하자 그제야 기리시탄들은 감추어 왔던 신앙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프티장 신부는 깜짝 놀랐고, 일본 내에 있는 주교에게 이를 보고 했다. 머나먼 일본 땅에 가톨릭 신자가 있다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그들은 이를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가쿠레기리시탄들은 자신들의 믿음과 예언이 틀리지 않았다며 기뻐했다.
“7대(250여 년)가 지나면 혹선을 타고 교황이 보낸 신부가 올 것이다. 그가 오면 어디에서라도 큰 소리로 성가를 부를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다.”
- 대예언자 바스찬 (일본 순교자) -
영화 사일런스는 시마바라의 난 이후 선배 선교사를 찾고 에도 막부의 가톨릭 탄압의 실상을 알아보기 위해 일본 대륙으로 몰래 잠입한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들은 결국 에도 막부에 의해 발각되게 되는데 막부로부터 신앙을 지키고 순교를 할 것인지 배교를 할 것인지 강요받는다.
인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생존에 대한 욕구와 개인이 가진 신앙심 사이에서 고민을 그린 영화 사일런스에 대한 역사적 배경 설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