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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Nov 02. 2021

로마 제국의 멸망

기독교의 전파와 중세의 시작

토마스 콜레 - 로마제국의 멸망



11. 기독교의 전파와 중세의 시작  



아틸라의 말발굽 아래에서는 풀이 자라지 않습니다.

- 로마 속담 -




발생 원인

예수의 탄생

기독교의 전파

로마 제국의 국력 약화

게르만족, 훈족의 로마 제국 침입


결과

밀라노 칙령 선포

로마 제국의 동서 분할

서로마 제국의 멸망

중세 가톨릭 봉건 사회의 시작


  역사에 있어 영원한 건 없다. 늘 지중해를 지배할 것 같았던 로마제국도 3세기에 이르러 서서히 무너진다.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세운 사산조 페르시아와 북방의 게르만 민족이 동시에 성장하며 제국을 위협했다. 로마는 이를 막기 위해 필연적으로 막대한 국방비를 지출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기존 지배층인 원로원이 쇠퇴했으며, 자연스럽게 군인 세력이 성장하게 된다.

  기원전 1세기에도 갈리아를 정복하고 돌아온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독재권에 올랐듯이 게르만족을 무찌른 군인들이 로마로 돌아와 황제를 차지하며 군인 황제 시대가 개막한다. 로마는 49년 사이에 무려 18명의 황제가 즉위하는 혼란기를 맞이한다. 제대로 된 정치 체계가 유지되지 못한 화중에 과거 영광 속에서 살던 원로원들은 점점 부패해 갔고, 야만족이라고 무시했던 게르만 인들은 점차 문명이 발달해 로마와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온다. 이제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마저 위협받게 된다.

 


로마 제국의 기독교 국교화  



  제국 초기에는 기독교 세력이 작아 굳이 탄압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리스-로마 고대 신앙을 제국의 국교로 삼았기에 인정을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네로 황제를 비롯한 일부 시기에 제국은 기독교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했다.

  그러나 3세기부턴 상황이 달라진다. 늘 사회가 불안하면 사람들은 신앙심이 커진다. 3세기 혼란스러운 로마 사회 속 기독교인들은 눈에 띄게 드러난다. 제국 입장에서도 이들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다. 다신교를 기반으로 한 로마 고대 신앙과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는 애초에 그 뜻이 너무 달랐다. 군인 황제 시점을 시작으로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종교라는 게 찍어 누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의 탄압은 오히려 신앙심을 더 키운다. 그 숫자가 제국 전역에 더욱더 크게 퍼지게 된다. 결국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민심을 잡기 위해 기독교를 공인하는 칙령인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다. 밀라노 칙령을 통해 이제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칙령 이전에 제국이 부당하게 몰수한 교회의 자산은 모두 반환되었고, 제국 내에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당시 로마 제국은 4두정치로 인해 분열된 상태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분열된 로마를 통일하고 단독 황제로 오르게 되는데 밀라노 칙령의 힘이 매우 컸다. 기독교 인들의 지지를 통해 그는 로마 제국에 통일에 성공한다. 이후 제국의 여러 문제점들은 개선하고,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기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다시 로마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뒤이어 서기 380년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한다. 이는 공인을 넘어서 수백 년간 이어져 오던 로마 제국의 국교를 탈 바꾸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 발표를 테살로니카 칙령이라고 하는데, 이를 기점으로 이제 기독교는 역사의 변방에서 중심이 되었으며, 피지배층에서 기득권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약 15여 년 뒤에 테오도시우스가 죽고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할된다.

 


훈족


게르만족과 훈족의 침입  



  무엇보다도 로마 제국을 힘들게 한 것은 게르만족이다. 게르만족은 기원전부터 스칸디나비아 인근에 거주하던 이들을 점차 따뜻하고 비옥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기원전부터 2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제국 입장에서 그저 야만인에 불과하던 이들은 3세기부터 로마 제국의 국력을 역전하기 시작한다. 게르만인들의 문명은 나날이 발전해가는데 비해 로마 제국은 자만심에 빠져 점점 무너져갔다. 어느 국가든 체제가 장기화되면 지배층과 기득권이 증가하게 된다. 특히나 이런 현상은 지배층 세습 문화라면 더욱 심해진다. 동방의 페르시아마저 성장해 로마 제국은 가뜩이나 부족한 살림 속에서 더 많은 군사 비용을 지출해야 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쟁이라는 게 이겨도 손실이 크고 지면 모든 걸 잃는다. 과거 지휘관들은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게르만과의 전쟁에서 이겼지만, 제국 말기의 지휘관들은 게르만에게 패전하기 일쑤였다. 거기다가 전쟁에서 이겨서 돌아오기라도 하면 병력을 그대로 로마로 끌고 와 권력을 차지하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전쟁에서 이겨도 안 좋고 져도 안 좋은 상황을 맞이했다.

  제국의 수모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게르만 족보다 훨씬 전투적인 유목 민족인 훈족 역시 로마제국을 침입하기 시작했다. 훈족들은 본래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유목 민족이었으나 점차 서쪽으로 넘어와 발칸반도 근방에 자신들의 거주지를 마련한다. 본래 이 지역에 거주 중이던 게르만족은 훈족을 피하기 위해 로마 제국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훈족은 특유의 전투 방식으로 게르만 인들과 로마 인들에게 패전을 안겨줬다.   



서고트의 왕 알라리크 1세



알라리크와 아틸라    



  훈족과 게르만족은 동서 분할 제국 중에서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하고 비옥한 토지를 가진 서로마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가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긴 후 새로운 제국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어 공략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동로마 수도 비잔티움은 전 세계에서 가장 손꼽히는 천혜의 요새 중 하나다. 양 측면이 바다도 둘러싸여 있는 비잔티움을 정복하기란 쉽지 않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앞당긴 두 명의 인물이 있는데 바로 고트족의 알라리크와 훈족의 아틸라다.


  고트족은 게르만 족의 한 갈래로 발칸 반도의 서쪽 일리리아에 정착한 민족이다. 이들 중 서쪽에 위치한 서고트의 지배자는 알라리크였다. 그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인 호노리우스에게 혼인 동맹을 맺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호노리우스는 이를 거절하고 알라리크에게 모욕적인 편지까지 전달한다. 이에 열 받은 알라리크는 무려 3번에 걸쳐 로마를 침입하다. 호노리우스는 알라리크가 로마를 침입해올 때마다 공물을 바치고 평화 협정을 체결해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 하지만, 호노리우스는 상황 모면에만 힘쓸 뿐 막상 알라리크의 군대가 돌아가면 동맹 체결에 지지부진한 태도로 일관했다. 결국 이것이 알라리크의 분노를 사게 되어 마지막 로마 원장 때에는 로마 성을 무너뜨리고 로마 시내가 이민족의 침입을 받는 굴욕을 당하게 된다. 이는 로마 제국 역사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제국 멸망의 근처에 갔단 한니발 조차 로마 시내에 진입하진 못했다. 겨우 3일 만에 800년의 로마 역사가 불타 없어지는 굴욕을 당한다. 그러나 이 원정 도중 알라리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서로마 제국은 다행히 명맥은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


  훈족의 왕 아틸라 역시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크게 앞당겼다. 아틸라의 별명은 로마제국의 재앙이다. 그는 훈족 특유의 전쟁 기술을 발휘하여 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아틸라는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비잔티움으로 향한다. 아틸라는 비잔티움의 포위에는 성공하나 역시 악명 높은 성벽을 넘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아틸라는 방향을 돌려 서로마 제국으로 향한다.

  당시 훈족을 막을 세력은 아무도 없었다. 동로마는 물론 수많은 게르만 민족을 정벌하며 아틸라는 유럽 대륙 전역을 집어삼킬 기세로 커갔다. 적의 적은 친구가 되는 건 어렵지 않다. 아틸라라는 공동의 적이 생기자 게르만과 서로마 진영이 연합하는 데 성공한다. 결국 이전에 그렇게 피 튀게 싸웠던 서고트와 서로마가 연합을 하고 이외에 갈리아 진영의 소수 왕국들이 연합하여 간신히 아틸라를 막아낸다. 수많은 전쟁에서 이긴 아틸라는 이 한 번의 전투로 모든 걸 잃는다. 풍전등화의 서로마 역시 이 전투의 승리로 다시 그 수명을 십수 년 연장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미 쇠약해진 제국을 살릴 방법은 없었다. 서기 476년 게르만 족 출신의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 오레스테스의 아들이자 서로마 제국의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제거하면서 서로마 제국은 완전히 사라진다. 그리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전 유럽에 걸쳐 수많은 게르만 왕국이 세워지면서 유럽의 중세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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