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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Nov 09. 2021

이슬람의 탄생

선지자 마호메드와 우마이야 왕조

대천사 지브릴의 계시를 받는 마호메트


12. 이슬람의 탄생



“인내는 만족의 열쇠다. 참고 견디면 만족스러운 대가를 얻는다”

- 선지자 마호메트 -




발생 원인

마호메트의 탄생과 이슬람의 전파

사산조 페르시아의 몰락

서로마 제국 상실로 인한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 지배권 약화


결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

이슬람 제국 출범

우마이야 왕조 출범

이슬람 지도자 칼리파의 등장


  고대 유럽의 지배자 로마 제국이 무너졌다. 동시에 중동의 지배자 사산조 페르시아 역시 몰락의 수순을 밟아 가고 있었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로마 제국이 겪고 있던 문제를 1~2백여 년 고스란히 겪고 있었다. 변화의 물결이 페르시아를 뒤덮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의 안정과 주변국의 성장


  게르만과 훈족에 의해 무너진 서로마와 달리 동로마는 서서히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통합 로마의 마지막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손자이자 동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어린 나이에 동로마 황제에 오른다. 소년 왕은 대담하게 페르시아의 황제에게 자신의 후견인이 돼줄 것을 요청했고, 황제가 이를 수락하면서 양대 제국 간의 동맹이 체결된다. 그는 수도 비잔티움의 거대한 성벽을 세우는 데 이 성벽은 자신의 이름을 따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된다. 4세기 지어진 성벽은 15세기 오스만 제국이 무너뜨릴 때까지 단 한 명도 넘어서지 못했다.

  이후 6세기에 황제에 오르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동로마 제국 최대의 중흥기를 이끈다. 그는 로마법 대전을 편찬하게 된다. 정복 전쟁을 통해 이탈리아 반도를 회복했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북아프리카 및 아르메니아의 지배권을 두고 대립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군대는 페르시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


  페르시아의 적은 동로마 제국만이 아니었다. 현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성장한 이란 계열 유목 민족인 에프탈이 성장해 페르시아를 위협했다. 사산 왕조는 5~6세기 내내 에프탈과의 전쟁으로 국가의 재정 대부분을 소모했다. 사산 제국의 샤한샤 호스로 1세는 투르크와 연합하여 이들을 막아냈다. 이는 오히려 투르크의 성장을 도왔고 에프탈보다 더 위협적인 적을 만드는 꼴이 되었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진짜 위협적인 존재는 외부가 아닌 제국 내부에 있었다.  



이슬람의 등장  


  페르시아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는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조로아스터교는 이교도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이 었는데 이는 이슬람 지역 내에 있는 불교, 힌두교, 기독교 신자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이외에도 중동 지역에 다수 존재했던 유대교, 마니교와 마즈다크교도 탄압했다. 시대가 바뀌어가고 있음에도 탄압 정책으로 일관하니 사람들 사이에 국가에 대한 반발심이 커지게 된다.

 

  선지자 마호메트는 메카에서 나름 잘 나가던 상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40세가 되던 서기 610년 대천사 지브릴에게 계시를 받게 된다. 그는 상인 활동은 접고 포교 활동을 시작한다. 아내 카디자와 친구 아부 바르크를 시작으로 포교를 시작한 마호메트는 중동 지역 전역을 돌며 믿음을 전파했다. 마호메트의 전파는 중동 사람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마호메트는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현재 전 세계에서 기독교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신자를 보유한 이슬람의 탄생이었다.

  페르시아는 이슬람을 강하게 탄압했다. 마호메트와 추종자들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메카를 탈출해 메디나로 향했다. 메디나를 방어할 여력이 되지 않은 페르시아는 이들을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를 헤지나라고 부른다. 메디나에 자리 잡은 이슬람은 세력을 키워 자신들의 뿌리인 메카를 공격한다. 이슬람의 성전이라 불리는 지하드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메카를 지배하고 있던 쿠라이시 부족과 이슬람 신자 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알라가 부름에 답했을까? 무슬림과 쿠라이시가 대치 중이던 전투에서 우연히 모래바람이 불어 무슬림 군대가 쿠라이시를 상대로 승리한다. 결국 쿠라이시는 무슬림을 막을 수 없었다. 630년 무슬림의 1만 군대가 메카에 입성하면서 무슬림들은 성지 탈환에 성공한다. 이들은 메카에 있는 모든 우상숭배를 파괴하고 이슬람 대규모 성전을 건설한다.

  메카를 정복한 마호메트는 632년 다시 메디나로 돌아온다. 이미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있던 그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사람들을 불러 보아 예언을 듣게 했다. 그의 교리를 이어받은 두 사람은 마호메트의 친구 아부 바크르와 마호메트의 양자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였다. 불행하게도 둘을 타협에 실패하고 이슬람이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누어지는 계기가 된다.



우마이야 왕조의 최대 강역 (출처 : 영문 위키백과 - 우마이야)



13. 이슬람의 분열과 우마이야 왕조



아슈라 : 4대 칼리파 알리의 아들 후세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시작한 종교 축제



발생 원인

무함마드의 사망과 칼리파 선출

칼리파 선출 방식에 대한 대립

이슬람 신흥 왕조 출범


결과

우마이야 왕조의 출범

수니파, 시아파 분열

이슬람 제국의 팽창


  632년 무함마드가 죽고 이슬람 신자들을 무함마드를 대신해 신의 대리인을 선출했다. 이를 칼리파라고 불렀다. 초대 칼리파로 선정된 사람은 마호메트의 친구이자 제자 아부 바크르였다. 하지만 모두가 초대 칼리파 아부 바크르를 따르지는 않았다. 바크르는 곳곳에서 일어나는 이슬람 반란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했고, 말년에는 아라비아 반도 전체를 차지한다.

  아부 바크르에 가장 반대하는 사람은 마호메트의 양자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였다. 알리 탈리브는 무함마드 생전부터 그의 후계자로 주목받고 있었으나 아부 바르크의 빠른 행동으로 칼리파 자리를 그에게 내줬다. 둘은 이슬람 분열을 막기 위해 손을 잡고 있었으나 언제나 불안한 상태였다.


  이후 바크르와 그의 후계자마저 죽고, 3대 칼리프 우마르 역시 불의의 암살을 당하자 알리는 드디어 칼리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그를 반대하는 세력 또한 많았다. 우마르에 대한 암살 의혹까지 받으며 수많은 반란이 일어난다.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무아위야가 이끄는 쿠라이쉬 부족이었다. 무아위야는 알리에 정면으로 반대했고 전쟁에 돌입한다. 열세에도 불구하고 무아위야는 군대를 이끌고 알리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알리 역시 암살당하자 무아위야의 손에 칼리파의 자리가 돌아간다.

  무아위야가 칼리파에 오르자 그를 찬성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으로 나뉜다. 그중 4대 칼리파 알리를 지지하는 시아파는 알리를 시아파 정통 이맘으로 추대했다.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후손만을 칼리파로 지지하는 반면에,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선출에 의해 누구든 칼리파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다수였던 수니파가 이슬람 세력을 장악했고, 무아위야는 칼리파를 선출이 아닌 세습으로 바꾸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왕조가 바로 우마이야 왕조다.


  우마이야 왕조의 초대 칼리파 무아위야는 이슬람 세력의 결속을 도모했다. 이를 위해서 강력한 중앙 집권 형태의 정치를 시작했다. 칼리파 제도 역시 선출제에서 세습제로 바뀌어 칼리파의 권력을 키우는 데 힘썼다. 게다가 이슬람의 결속을 위해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도 시작했다.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의 힘을 다졌다. 그가 죽고 아들인 야지드에게 칼리파를 물려주자 많은 무슬림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른바 2차 피트나로 불리는 이 반란은 알리의 아들인 후세인 이븐 알리야지드의 싸움으로 번졌다. 이번에도 후세인 알리가 갑작스럽게 카브발라에서 죽게 되며 내전은 종결된다.

  우마이야 왕조는 6대 칼리파 왈리드 1세에 의해 전성기를 맞게 된다. 705년 즉위한 왈리드는 우마이야 군대를 이끌고 아나톨리아 지방은과 북아프리카 전역을 비롯해 이베리아 반도까지 제국의 영토를 확장시킨다.


  하지만,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는데 왈리드가 죽고 칼리파에 오른 동생 술라이만은 지방에서 일어나는 반란이 두려워 선대의 총독과 장군들을 모두 숙청한 뒤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 넣었다. 이들은 대부분 왈리드와 함께 넓은 영토를 정복한 신하들이었다. 이 와중에 무리하게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향한다. 당시 혼란기를 겪고 있던 동로마는 순식간에 성 앞까지의 진입을 허용한다. 성은 곧 우마이야 왕조에게 함락될 것처럼 보였지만 역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높았다. 이 포위가 무려 13개월 동안 지속되면서도 동로마 제국은 버티는 데 성공했고, 황제 레온 3세는 지속적으로 군대를 동원에 우마이야 병사들을 괴롭혔다.

  결국 추위를 버티지 못하고 보급에 문제가 생겨 왈리드는 콘스탄티노플을 포기하고 퇴각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퇴각하는 시점에 산토리니의 화산이 폭발해 엄청난 피해를 입고 겨우 다섯 척만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온다.


  우마이야 왕조는 전성기가 아주 짧았지만 이슬람 세력에 끼친 영향은 상당히 컸다. 오늘날 이슬람 다수파인 수니파의 근원이 되는 국가임과 더불어 이슬람 문화가 안정적으로 중동 지역에 뿌리내릴 발판을 마련한 국가다. 우마이야 왕조는 철저하게 이슬람 위주의 정치를 했으며 가톨릭이나 조로아스터교 등 타 종교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이었다. 타 종교인들에게 많은 불이익을 안겨주어 많은 국민들이 이슬람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일명 지즈야 제도가 이 시기에 처음 시행되었다.

  그리고 당시 통화체계는 각자 부족이나 왕국에 따라 서로 달랐는데 이를 디나르 금화와 디르함 은화로 통일시켰다. 그리고 국가 체계나 관제들을 로마 제국과 유사하게 만들어 기존 아랍 국가들과는 다른 정치를 했다. 이밖에도 조세제도와 우편제도를 도입해 좀 더 발전된 제국을 만드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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