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ironde Nov 16. 2021

세금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

프랑스 재정을 개선하기 위한 부르봉 왕가의 노력 그리고 앙시앙 레짐

루이 14세


루이 14세가 사랑한 것



  왕권신수설 : 국왕의 권력은 신으로 나온다는 이론으로, 17세기 절대주의 왕권의 사상적 기반



  17세기, 프랑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장한 나라였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는 이때 전성기를 누린다. 이 중 태양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루이 14세는 절대군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루이 14세는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랜드마크 베르사유 궁전이 그의 명령으로부터 지어졌다. 심지어 그는 궁전을 국민들에게 열어 왕의 사생활까지도 백성들에게 공개했다. 일반 귀족과 백성들의 출입이 가능했고, 사람들은 국왕의 일요일 만찬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궁정 음악가 장 바티스트 륄리와 유독 가깝게 지내면서 그의 음악에 춤을 추는 것이 루이 14세였다. 그는 태양의 신 아폴론의 옷을 입고 춤을 추곤 했는데, 이 일로 인해 태양왕이라 불리게 되었다. 많은 예술가들을 지원하여 이 시기에 프랑스의 많은 예술, 문학 작품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백성들과 가깝게 지내며 예술에도 조예가 깊은 왕을 어찌 프랑스 인들이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예술과 종교 그리고 여자를 사랑한 루이 14세. 그가 하나 더 사랑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전쟁이다.

 

  루이 14세는 주변국의 왕가 분쟁에 사사건건 개입한다. 모든 시대의 최강대국들을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타국의 정치에 간섭을 한다. 프랑스는 영국-네덜란드 전쟁에 개입한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당시 세계 최고의 해군력을 앞다투어 자랑하고 있었는데 프랑스는 명분도 없이 개입해 수많은 프랑스 국민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대가로 프랑스는 영국의 국왕 찰스 2세와 밀약을 맺고 네덜란드 식민지를 가져온다.

  그리고 신성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 간의 전쟁을 틈타 독일-오스트리아 지방 영토도 손에 넣는다. 하지만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가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과 손을 잡는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했다. 신성로마제국은 수도 빈을 포위하려는 오스만의 군대를 막아내는 데 성공하자, 이슬람과 손잡은 루이 14세의 혼을 내주기 위한 반 프랑스 동맹을 체결해 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이 전 유럽이 참전한 9년 전쟁이다. 놀랍게도 프랑스는 주변국들의 집중 견제 속에서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평화 협정을 통해 큰 손실 없이 전쟁을 마무리 짓는다.


  루이 14세는 이 외에도 스페인 왕권 분쟁에도 개입하며 재위 기간 내에 꾸준히 전쟁을 일으켰다. 프랑스는 이 전쟁에 개입해 미시시피강 유역의 미국 식민지도 얻어 냈는데, 이 지역을 루이의 땅이라는 이름의 '루이지애나'라고 지었고, 현재 미국의 주 루이지애나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이 주의 최대 도시는 새로운 오를레앙이라는 이름의 '뉴올리언스'다.



장 바티스트 콜베르


콜베르와 낭트 칙령 폐지



세금을 걷는 기술은 거위가 비명을 덜 지르게 하면서 최대한 많은 깃털을 뽑는 것과 같다

- 장 바티스트 콜베르 -




  전쟁은 이겨도 손해가 크고 지면 모든 것을 잃는다. 승리에 대한 대가는 국민들을 목숨과 천문학적인 예산이다. 전쟁을 좋아한 루이 14세는 국민들의 지지와 돈이 동시에 필요했다. 그런 그에게 도움을 크게 준 사람은 재무 장관 장 바티스트 콜베르다. 중상주의 학자로도 유명한 콜베르는 국가 재정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무역 수지 개선이라고 주장했다.

  

  현재는 달러가 세계 기축통화의 위치를 가지고 있었는데, 17세기의 기축통화는 바로 금과 은이었다. 콜베르는 금과 은의 보유량이 곧 국가 경제력이라고 생각해, 특히 당시 사람들이 척박한 땅이라 거들떠보지 않았던 캐나다 식민지에 관심이 많았다. 식민지를 통해 들어오는 물품에 대해 관세를 매기고, 자국의 수출을 증진시켜 무역수지를 개선하여 금, 은 보유량을 늘린다는 것이 그의 핵심 경제 전략이었다. 실제로 이를 적용시켜 재정을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반대급부로 보호무역을 통한 관세를 늘리자 주변 국가의 반발이 심했다.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은 프랑스와 같이 무역 수입을 중요하게 생각한 네덜란드였다. 앞서 언급한 영국-네덜란드 전쟁에 프랑스가 적극 개입한 이유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콜베르는 이외에도 프랑스의 조세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한다. 콜베르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조세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았다. 그는 중구난방식의 조세 구조를 일정한 원칙을 세운다. 그가 먼저 손을 본 세금은 바로 '타이유세'였다. 타이유세란 국왕과 영주 아래에 있는 토지와 백성들에게 부과되던 세금이었는데, 명확한 조세 기준이 없어 국민들은 국왕과 영주가 정한 그들만의 방식에 따라 마음대로 부과되었다. 콜베르는 타이유세를 국가가 정한 세법에 따라 부과되게 하여 그 양을 서서히 줄여갔다. 그 대신 지방 특산물에 대한 세금을 부과시켜 다른 곳에서 재정을 늘렸다.

  콜베르는 국가의 세법에 맞도록 투명하게 조세 제도를 개편함과 동시에 보호무역과 상공업에 대한 세금 부과로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의 재정을 늘렸다. 이는 백성들과 국가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제1계급(성직자)과 제2계급(귀족)에 대한 면세 특권은 유지되었다.


  루이 14세는 콜베르 사후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내쫓는 실책을 저지른다. 바로 낭트 칙령 폐지였다. 낭트 칙령은 1598년 앙리 4세가 프랑스 내에서 종교적 자유를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칙령을 통해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에 많은 청교도, 개신교 신자들이 유입될 수 있었다.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을 위그노라고 불렀다. 위그노들은 대부분 상공업에 종사하여 콜베르의 중상주의 기조에 맞게 무역 수지를 개선하기 위한 프랑스 물건들을 만들어 팔았고, 이를 통해 축적한 부로 세금도 꼬박꼬박 내고 있었다.

  하지만, 무리한 전쟁으로 명분이 필요한 루이 14세는 교황의 지원을 얻기 위해 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위그노들을 탄압한다. 국왕의 병사인 용기병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위그노들을 내쫓았고, 프랑스에 있던 수십만의 위그노 들은 모두 아메리카 식민지와 주변 국들로 도망갔다. 프랑스 상업이 일시 중단될 정도로 대대적인 탄압이었다.


 콜베르의 죽음과 낭트 칙령 폐지, 무리한 전쟁 확장 거기에 겹친 베르사유 궁전 축조까지. 루이 14세 재위 말기에 이르자 프랑스는 국고 대부분을 소모해 세계 최강국 지위가 무색할 정도로 경제력이 약화되었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증손자이자 후계자인 루이 15세에게 무리한 전쟁 확장을 후회하며 국민들의 무거운 짐을 덜어 주는 국왕이 되라고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루이 14세가 죽자 많은 프랑스 국민들은 환호했다. 그는 기나긴 72년간의 재위 동안 영광의 시절과 치욕의 순간을 모두 겪고 왕좌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이제 그의 후손들은 재정이 박살난 세계 최강국이라는 아이러니한 타이틀을 가진 나라의 국왕이 되었다.  



루이 15세


쌓여가는 프랑스의 부채



너는 이웃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 내가 걸었던 길을 따르지 마라. 국민들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정치를 해라. 아쉽게도 짐은 실행하지 못했다.

- 루이 14세가 루이 15세에게 남긴 유언 -




  죽기 전에 정신을 차린 루이 14세의 유언을 무시하고 루이 15세는 또 전쟁에 참가한다. 바로 7년 전쟁이다.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오스트리아와 사이가 좋지 못하다. 국경을 맞대고 있을뿐더러 중부 유럽의 패권을 놓고 싸우는 강대국이었다. 하지만 18세기 양국 간의 사이가 개선되는 사건이 일어나는 데, 바로 프로이센 왕국의 성장이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분쟁을 통해 갑작스럽게 성장한 프로이센은 신성로마제국 연합의 가장자리에서 오스트리아를 위협한다. 그리고 전쟁을 통해 당시 오스트리아의 세수의 22%를 차지하는 슐레지엔 지역을 프로이센에 빼앗긴다.

  복수를 꿈꾸던 오스트리아가 손을 내민 나라는 철천지 원수인 프랑스였다. 오스트리아의 통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루이 15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루이 15세는 증조할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잊은 채 그녀의 손을 잡는다. 프로이센의 동맹국이 영국이었고, 프랑스가 원한 건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주권이었다. 캐나다 식민지를 소유한 프랑스미국 식민지를 소유한 영국이 맞붙어 이를 하나로 통합하면 프랑스의 국가 부채를 개선할 것이라는 발상이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분쟁은 북아메리카에까지 퍼져 프렌치-인디언 전쟁으로 확대된다.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패권을 두고 영국은 이로쿼이족, 체로키족 등 원주민들과 손을 잡았고 프랑스는 오타와족, 쇼니족 사람들과 손을 잡았다.


  문제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북아메리카 원주민과 동맹을 맺으면서 까지 무리하게 벌인 전쟁에서 패전한다.


  프랑스는 전쟁의 패배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캐나다 식민지를 영국에게 내주게 되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떠맡는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서 간신히 쥐어짜 전쟁에 참전했는데 여기에 배상금까지 지불해야 하니 국가의 채무가 점점 쌓여갔다. 프랑스는 채무를 충당하기 위해 성직자와 귀족들에게 돈을 빌렸고, 이 과정을 통해 채무가 더 증가했다. 그의 재임 기간 말년에는 정부 수입의 43%가 이자로 빠져나갈 정도로 부채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제야 세수를 늘리기 위해 수입의 일부분을 지불하는 '5퍼센트 법'을 신설하려고 했지만 이 마저도 고등법원이 반대에 막혀 실패한다.

  그리고 세수 확보를 위해 루이 15세는 이른바 징수 업자들을 대거 고용한다. 그들은 국가 세수 확보를 위해 직접 발로 뛰며 농민들의 세금을 거둬들였는데, 이 과정에서 악성 징세 업자들이 나타나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다. 농민들 대부분이 글을 읽지 못한다는 점을 활용해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여 자신들의 뱃속을 채운다.


  천연두로 인해 루이 15세가 64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그의 손자인 루이 16세가 즉위한다.



얀 로베르 자크 튀르고


튀르고의 중농주의 정책



파산 없음, 차입 없음, 증세 없음

- 튀르고 재정 장관의 3원칙 -



  루이 16세와 그의 왕비 루이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지독한 부채를 개선하기 위해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를 재무 장관으로 지명한다. 튀르고 남작은 프랑스가 농업 생산력이 국가의 주 산업이라 생각했기에 중상주의 전략을 철폐하고 중농주의 정책을 시행한다. 그는 자신의 경제 정책 기조로 파산, 차입, 세금 인상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튀르고는 심각한 부채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않고 있던 국가 재정 적자를 흑자로 전환시키려고 했다. 그는 국가의 모든 예산과 지출은 모두 그의 결재를 거치게 했다. 이를 통해 귀족들이 사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공적 금액은 모두 튀르고에게 보고 되었다. 심지어 국왕 루이 16세의 사치품 구매 목록까지도 그에게 보고되었다.

  중농주의 사상에 입각해 농민들이 농업에 집중하도록 강제 부역 제도를 폐지시켰다. 이에 더불어 길드를 폐지해 상업 물건을 독점하여 물가를 상승시키는 행동을 못하게 했다. 농업 운영에 있어 형이상학적인 이론을 모두 철폐시키고 과학적인 절차에 입각하여 토지의 순 생산량을 통한 조세를 하게끔 개혁했다. 그는 루이 16세의 미국 독립 전쟁 참전에 반대해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는 데 힘썼다. 산업 활동에 대한 제약을 폐지하고 농민들이 자유롭게 산업 시상에 뛰어들어 자신의 곡물을 팔 수 있게끔 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적자는 크게 개선되었고 네덜란드 은행가로부터 4% 정도의 대출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국가 신용도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튀르고의 개혁은 자연스럽게 기득권층에 반발을 사게 되었다. 농민 강제 부역 폐지는 귀족들에게, 길드의 폐지는 부르주아 계층에게 큰 반발을 사게 된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권층은 삼부회를 열자고 제안했지만, 특권층에게 유리하게 될 것이 뻔해 보이기에 튀르고는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1774년 프랑스의 대대적은 흉작이 와 빵의 가격이 급등하게 되었는데, 특권층을 이것을 튀르고의 문제로 돌려 그를 내쫓아야 된다고 루이 16세에게 간언 했다. 결국 전쟁에 참가하고 싶었던 루이 16세와 사사건건 왕실의 사치에 대해 비판하던 튀르고를 실각시킨다.  

  튀르고가 실각하자 루이 16세는 곧바로 미국 독립전쟁에 개입한다. 영국과는 나라가 망해도 싸워야 한다는 괴상한 논리를 펼치며 전쟁에 돌입했는데, 이번에는 영국에게 승리한다. 프랑스는 이 전쟁을 이기기 위해 상당히 많은 병력과 금액을 투입했다. 전쟁에 소모된 비용은 무려 20억 리브르로 산출되고 있다.


  전쟁에서 이겼지만 남는 것은 기존보다 더 커진 부채였다. 루이 16세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 성을 알게 되었다.




자크 네케르의 개혁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 구 체제



  튀르고의 후임으로 재정장관에 오른 것은 자크 네케르다. 네케르는 미국 독립전쟁에 대한 비용을 다시 한번 세금을 통해 해결하면 농민들의 부담이 늘어나기에 세수에 대한 확보가 아닌 채권 발행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헸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그가 어릴 적 금융업에 종사하여 백만장자가 된 네케르다운 발상이었다. 그리고 네케르는 프랑스 재정 구조 개선을 위해서는 본질적인 사회 구조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바로 수백 년간 이어져 온 프랑스 전체의 사회 구조를 뜻하는 앙시앙 레짐 철폐다.


  프랑스는 3개의 계급으로 이루어졌다. 최상위 1계급은 성직자/수도자였다. 이들은 교황의 신하로서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거둘 권리가 있었고 수도원 등을 통해 대규모 농지를 소유했다. 여기에서 나오는 수확물과 조세권은 당연히 성직자의 권리였다. 그리고 2계급은 귀족이었다. 전체 인구의 2%를 차지하고 있던 이들은 면세 특권과 토지 소유권을 통해 경제 규모의 절반 가량을 손에 넣었으며 프랑스 전체 토지의 25%를 소유하고 있었다.

  마지막 제3계급은 평민이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소작농과 빈농으로 구성되어 있어 상위 계급에게 부와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었다. 상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 역시 3계급 소속이었다. 부르주아는 프랑스 자유 시민으로 기존 농민들과는 달리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던 최상위 평민층이었다. 이들은 국가를 위해 막대한 세금을 지불하고 있었지만, 모든 특권은 귀족 계층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과거에 루이 14세는 이 점을 인지하고 더 많은 돈을 내는 부르주아에게 귀족의 권리를 제공했는데, 이는 오히려 면세 특권 계층의 숫자만 늘리고 향후 세수를 떨어뜨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자크 네케르는 결국 앙시앙 레짐을 유지하면서 프랑스 재정 구조를 개선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1781년 국가의 재정 보고서를 평민들에게도 모두 공개하는 초 강수를 둔다. 이는 프랑스 역사상 처음 있는 행위였다. 프랑스의 심각한 재정 상태가 전 국민들에게 공개된 것이다. 특히나 문서에 밝은 부르주아들은 귀족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고, 귀족 세수 확보의 필요성을 느낀다.

  앙시앙 레짐의 불합리성과 프랑스 재정의 민낯을 공개한 네케르는 이번에도 특권층의 반발을 사 실각하게 된다. 튀르고와 네케르의 개혁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 중에 하나는 루이 16세의 우유부단함이었다. 성품이 워낙 유약하고 싫은 소리 못하는 걸로 유명했던 그는 튀르고와 네케르의 농업-상공업 개혁안을 보고 프랑스 재정 개선에 필요한 정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귀족계층의 반발의 두려움 때문에 정책을 차일피일 미뤘다. 그사이에 귀족들은 두 장관을 내쫓을 만한 카드들을 들고 왔고 결국 둘의 정책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제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한 루이 16세와 네케르의 후임으로 뽑힌 재정 장관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은 칼을 뽑는다. 1787년 2월 명사회를 열어 성직자와 귀족들에게도 임시로 과세하겠다는 정책을 세운다. 이번에도 성직자와 귀족은 거세게 반발했다. 가톨릭 교회는 드 칼론을 파문시키고 다시 네케르가 재정 장관으로 오는 촌극이 일어난다. 네케르는 드 칼론의 개혁안을 그대로 시행하려고 했다.


  결국 자크 네케르는 앙시앙 레짐의 핵심 문제였던 성직자-귀족 과세를 문제를 통과시키기 위해 모든 계급의 대표가 직접 회의를 하는 삼부회를 개최할 것을 건의한다. 그리고 이 삼부회가 세계를 뒤흔든 역사적 일대 사건의 시발점이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