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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Nov 23. 2021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

프랑스혁명의 진행

테니스 코트의 서약


1789년 6월 20일 - 테니스 코트의 서약



  삼부회란 프랑스 3계급인 성직자, 귀족, 평민의 대표가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표결하는 신분제 의회였다. 평상시에는 열리지 않다가 국가적 위기 상황에만 소집된다. 자크 네케르와 루이 16세는 성직자와 귀족에 대한 과세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목적으로 삼부회 소집을 명령한다. 무려 175년 동안 소집되지 않았던 삼부회가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개최되었다.

  삼부회의 주요 쟁점은 바로 조세제도 개혁이었다. 하지만 분노에 찬 부르주아와 평민들은 문제를 조세제도에 그치지 않았다. 그동안 앙시앙 레짐으로 쌓인 사회적인 분노를 모두 토해냈다. 루이 16세는 조세 문제로 한정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루이 16세가 어떻게든 상황을 진정시켜 조세 개혁에 대한 표결을 하려고 하는데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의석수에 따른 표결권 문제였다.


  초기에 3개의 계급이 모두 동일한 의석수를 가졌다. 이 구조라면 제3계급인 평민에게 불리하다. 1,2 계급이 서로 과세에 반대한다면 법안은 절대 통과하지 못한다. 따라서 제3계급은 자신들에게 2배의 의석수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여 제3계급은 다른 계급의 두배의 의석을 보장받았다.

  문제는 표결 방식이었다. 만약 의석당 투표 권이 1개씩 주어진다면 특권 층은 이길 수 없다. 평민이 다수가 되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200 : 200으로 동일하겠지만, 이미 귀족과 성직자 층에서 평민 층의 손을 들어줄 사람이 있었다. 평민 계급은 당연히 의석 당 표결권 부여를 주장했다.

  반대로 특권 층은 계급 당 표결권 부여를 주장했다. 이 경우에는 반대로 평민 층이 특권 층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특권 층은 2개의 표가 나오고 평민 층은 1개의 표가 나오기 때문에 의결에 들어가면 무조건 2:1로 평민이 진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평민 계급 층은 1789년 6월 10일 독자적인 행동을 할 것을 선언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회의를 독자적으로 국민회의라고 선언한다. 루이 16세가 국민의회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테니스 코드에 모였다. 특권층 중에서도 제3계급의 권리 신장을 주장한 이들도 참여했다. 대표적으로 성직자 출신의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라파예트 백작이 있었다. 아들은 테니스 코트에 모인 평민들을 이끌어 프랑스 헌법 개정에 대해 요구했다.

  루이 16세가 무력을 동원해 이를 진압하려 했다. 하지만 국민회의는 헌법 제정 전까지는 절대 여기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대세는 국민의회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1789년 6월 20일, 테니스 코트에 모인 국민 의회에서 우린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프랑스 헌법 개정을 위한 서약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이 바로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1789년 7월 14일 -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테니스 코트의 서약 이후 여론은 점차 국민의회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점차 많은 특권 계층이 합류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7월 9일 이름을 '국민회의'에서 '제헌회의'로 바꾸고 새로운 프랑스 헌법 제정을 시작한다.

  루이 16세는 제헌회의에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처벌을 강력하게 하지도 그렇다고 인정을 하지도 않았다. 결국 제헌회의를 견제하기 위해 재무 장관 자크 네케르를 파면시킨다. 또한 국경 지대에 근무 중인 병사들을 파리로 이동시킨다. 이 두 행동으로 루이 16세는 민심을 크게 잃는다. 자크 네케르는 삼부회를 건의한 장본인으로 국민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고, 파리에 군대가 들어서자 파리 시민들은 안전에 대한 위협을 느낀다. 그러자 파리 시민들은 먼저 국가에 불만을 들어낸다.


  1789년 7월 14일, 결국 파리 시민들이 자신들의 안전 확보를 위해서 정치범을 수용하고 있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다.


  바스티유 감옥의 수비 사령관 드 로네이는 시민들을 달래려 시도했다. 그러나 화가 난 파리 군중들 무기를 인도하라는 드 로네이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협상이 결렬되고 총격전이 오갔으며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병사들이 시민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파리 시민들을 더 많이 모이기 시작했다. 수비대 측은 너무 많아진 시민들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해 대포를 발포하려 했지만 다행히 수비대 측 군인 중 평민을 지지하는 세력이 이를 간신히 발포는 막았다.


  드 로네이는 결국 시민들 손에 잡혔고, 시민 재판에 넘기려 했으나 성난 군중들에 의해 암살당한다. 이 과정에서 시민 100여 명이 죽었지만 시민들은 감옥을 장악하고 수많은 무기를 얻게 된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놀란 루이 16세는 또 본인의 기조를 바꿔 자크 네케르를 복직시키고 부르주아 계급의 민병대를 승인한다.


  파리 시민들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었다. 이제 프랑스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1789년 8월 26일 -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 알려지자 프랑스 전역에서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잠자던 시민들의 분노가 깨어난 것이다. 8월에 본격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자 루이 16세는 결국 두 손을 든다. 이제 권력은 국민의회 쪽으로 넘어갔다. 국민의회는 권력을 얻자 곧바로 봉건제를 폐지를 선언했다. 이외에도 프랑스 평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불만 사항인 교회의 십일조, 매관매직, 지역 및 계급에 따른 차별 폐지도 포함했다.


  이는 오랜 기간 왕정 국가 체제하에 있던 나라에서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자신들의 권력을 직접적으로 선언한 역사적으로 상당히 이례적인 행동이었다.


  루이 16세는 국가 대부분의 권한을 국민의회에게 맡기고 그들의 헌법에 따르기로 결정한다. 프랑스 전역의 소요사태를 막을 방법은 이뿐이었다. 국민의회의 중심인물인 조제프 시에예스와 라파예트 백작은 프랑스 시민이 가질 수 있는 권리에 대해 선언한다. 둘은 제3계급 신분이 아니었지만 시민 중심의 헌법에 대한 필요성으로 국민의회에 참여했다. 시에예스는 우편배달부였던 아버지의 권유로 어릴 적 성직자가 되어 제1계급이 되었다. 라파예트 백작은 군인 출신으로 인디언-프렌치 전쟁에 참가한 전쟁 영웅이다. 그는 국민들의 사랑은 받은 전쟁 영웅이었다.


  국민의회는 계몽주의와 자연법사상을 기반으로 새로운 법안을 만든다. 이것이 이른바 프랑스 인권 선언으로 불리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다.


  이 권리 선언은 현대 민주주의에 있어 굉장한 의의와 가치를 지닌다. 해당 선언 1조에는 '인간은 권리에 있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한다. 사회적 차별은 공동 이익을 근거로 해서만 있을 수 있다.'라고 적혀있는 이는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선언이었다. 이외에도 무죄추정의 원칙, 권력 분리의 원칙, 언론과 사상의 자유 등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기초가 될만한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우리가 현재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자유에 대한 선언이다. 억압과 차별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자유라는 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장 자크 루소와 볼테르와 같이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사람들은 시민들을 깨운다. 이들이 만든 새로운 사상이 시민들에게 영감을 주고 이게 쌓이면 세상이 바뀐다.




  프랑스 인권 선언은 현대 민주주의에 기초 사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훗날 자유주의 국가들이 헌법을 제정할 때 참고하게 될 정도로 큰 의의를 가진 선언이었다.



베르사유 행진


1789년 10월 5일 - 베르사유 행진



  프랑스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떤 사람인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 루이 16세는 무능했고 폭정으로 인해 단두대에 처형된 사람이라고 대부분 알고 있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무능한 건 맞지만 동시에 시민들을 사랑하긴 했다. 여린 감성의 소유자였던 루이 16세는 전해지는 그의 일기를 보면 백성들이 아픔을 생각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문제는 백성만큼 귀족들의 안위 역시 걱정해 둘 사이에서 결정해야 하는 순간마다 항상 선택을 미루다 자신의 목숨을 지킬 골든 타임을 놓친다.

  특히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끔찍이 사랑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로 유명한데, 이 역시 실제 역사엔 기록된 바가 없는 낭설이다. 루이 16세는 마리 말고는 다른 여자와 관계를 잘 맺지 않았다. 하지만 파리 시민들은 루이 16세의 순애보를 이해하지 못했고, 국왕이 오스트리아에서 온 요부에게 팔려 베르사유 궁전에만 처박혀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 생각했다.


  1789년, 파리는 대 혼란 속에 빠진다. 아무리 국민의회가 열심히 일 한다고 하더라도 권력 과도기에는 늘 필연적으로 혼란이 발생한다. 동시에 전국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나고 군인들이 프랑스 시내 곳곳을 순찰하자 자연스럽게 공포감이 조성된다. 국가 운영에 차질을 빚게 되고 식량 공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파리 시민들은 공포감과 배고픔에 사로잡혀 루이 16세가 다시 파리로 돌아와 정사를 돌봐 시민들을 지켜줘야 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이미지가 좋지 않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녀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포감에 빠진 사람들은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파리의 7000여 명의 부녀자들은 모여 베르사유로 향했다. 부녀자들이 앞장섰고 남편들은 뒤를 따랐다. 시민들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각자 가지고 있는 무기와 군인들에게서 훔친 대포를 들고 베르사유로 향했다. 베르사유 궁전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으니 시민들은 쉽게 왕궁 앞으로 다가갔다. 시민들은 왕궁 앞에 눌러앉아 루이 16세의 귀환과 알현을 요구했다. 그때 왕은 사냥을 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렇게 국가의 운명이 달려있는 순간에 사냥을 하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국왕의 그릇이 될만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라파예트 백작은 성난 시민들을 달래기 위해 루이 16세에게 직접 왕궁 발코니 앞에 나와 시민들 달래는 게 좋을 거라고 조언했다. 왕은 그의 말을 듣고 직접 파리 귀환과 식량 배급을 약속했다. 시민들은 환호했고 국왕은 안심했다. 사건은 이대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파리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다음 날 느슨해진 경비를 틈타 성난 군중 몇 명이 왕궁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궁에 들어간 부녀자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살해를 시도한다. 이를 막는 과정에서 스위스 경비대 몇 명이 죽었다. 깜짝 놀란 마리 앙투아네트는 맨발 차림으로 루이 16세의 침실에 도망갔다. 라파예트 백작은 곧바로 경비대에 합류해 시위대를 막아섰다. 시위대의 머스캣이 왕비를 직접 조준할 만큼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는데, 다행히 라파예트의 노력으로 간신히 시위대를 진정시켰다.  

  시민들은 국왕이 파리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물러서지 않겠다고 말했다. 달리 방법이 없던 루이 16세는 파리 시민들의 요구에 따라 시위대에 둘러싸여 튈르리 궁전으로 귀환한다. 말이 좋아서 둘러 쌓인 것이지 사실상 연행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튈르리 궁전으로 돌아갔고, 시민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 둘러싸여 불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추격대에게 잡혀 파리로 귀환하는 루이 16세 - 작자 미상 (출처 : 위키백과 - 바렌 사건)


1791년 6월 21일 - 바렌 사건



  파리에 돌아온 국왕은 실권은 빼앗겼지만 튈르리 궁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국민의회는 입헌군주제 형태의 헌법을 제정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국왕으로서의 지위는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상황이 어떻게 급변할지 몰랐기에 국민의회에 왕당파 인원들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중에서 국왕이 의지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미라보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티 미라보였다.

  국민의회의 새로운 대표로 뽑힌 미라보 백작은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왕당파는 아니었지만, 국왕과 혁명 세력 사이의 소통 창구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던 1791년 4월 2일 평소 방탕한 생활을 즐기던 미라보가 급사하게 된다. 루이 16세는 그가 죽자 위기감에 휩싸인다. 혁명 세력이 언제든지 자신을 죽이러 올지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만약 국민의회에서 공화국을 선포하게 된다면 루이 16세의 존재 이유는 사라진다. 동시에 프랑스 주변국들은 프랑스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혁명의 불길이 자기 나라에 까지 퍼질까 두려워했다. 살짝이라도 틈을 보인다면 언제든 군대를 동원해 공격할 기세였다.

  결국 루이 16세는 신변 안전을 위해 파리를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파리 시내에서 그가 안전하게 지낼 곳은 전혀 없었다고 생각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출신지인 오스트리아로 도주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이라 판단한 루이 16세의 대탈주가 시작된 것이다. 목적지는 오스트리아 령의 벨기에 국경이었다.


  여기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멍청함이 빛난다. 시민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서 지내고 있는 국왕이 오스트리아까지 도주에 성공할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하지만 청순녀 마리는 자신이 탈 마차를 자신이 좋아하는 초록색으로 도색해달라고 부탁한다. 초록색은 눈에 띄기 쉬운 밝은 색이다. 또한 왕자와 공주들이 오스트리아에서 입을 예쁜 옷들과 호화로운 장식품들 미리 오스트리아 거처에 보내 놓는다. 마리는 자신의 고국에 돌아가 가족들과 보낼 시간에 설렌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순수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마리의 이런 행적들은 시민들에게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6월이 되자 도주를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러시아 위장 여권을 만들고 최대한 신분을 노출하지 않게 얼굴을 가리고 갔다. 식량은 최소한으로 들고 갔고 생리 현상은 요강으로 해결하기로 한다. 왕으로서 체면이 말도 아니었지만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6월 20일 드디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도주가 시작되었다.


  새벽 한 시에 출발한 국왕 행렬은 파리를 빠져나와 교외로 달려갔다. 21일 아침에 되자 주요 인사들이 튈르리 궁전에 문안인사를 갔지만 왕이 사라졌다는 걸 보고 경악한다. 곧바로 이 일은 국민의회에 알려지고 재빨리 국왕 행렬을 찾아내라고 지시한다. 파발을 띄워 국왕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고, 새벽에 궁궐을 빠져나간 행렬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사이 루이 16세는 먼길을 달려 바렌 근방 생트느무에 도착한다. 파리로부터 멀어졌다고 느껴 긴장이 풀렸는지 마차 밖에 나와 산책을 하기도 하고 시민들과 담소를 나눈다. 그러다 국왕의 얼굴을 알고 있던 몇몇 시민들이 제보해 국왕이 생트느무에 있다는 사실이 국민의회에 전해진다. 그 사이 국왕은 바렌으로 가고 있었다. 22일에 바렌에 도착한 국왕은 예기치 못한 문제에 빠지게 되었는데 마부들이 단체로 파업을 했다. 결국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마차에서 잠을 잘 수 없어 마부를 돈으로 매수한 뒤 근처 여인숙으로 향했다.

  왕은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여인숙에 들어갔다. 하지만 해당 지역의 판사가 하필이면 그를 알아보고 곧바로 왕에게 큰절을 한다. 바렌에 있던 국민방위군은 왕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여인숙을 포위한다. 왕은 자신을 제발 보내달라고 애원했지만 방위군은 무릎 꿇고 왕 앞에 큰절을 할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라파예트의 추격대가 바렌에 도착했고, 루이 16세는 도주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 16세의 도주는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국왕이 외국으로 도주를 시도했다는 사실이 파리 시민들에게 퍼지자 대중들은 분노한다. 국왕이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실추했고 심지어 적국인 오스트리아로 행선지를 옮기려는 건 충격 그 자체였다. 이를 계기로 왕당파의 힘은 완전히 잃고 공화파가 단숨에 주류파로 등극한다. 입헌군주제로 나라를 세우려던 국민의회의 지도부 역시 국왕의 행동을 보자 공화정으로 마음을 굳힌다. 국왕의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이 초래한 결과였다.


  루이 16세의 도주 시도였던 바렌 배신으로 시민들은 국왕의 존재 이유에 대한 의문을 품었으며 혁명의 과격화와 프랑스 제1공화국 수립에 큰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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