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1공화국의 출범
루이 16세의 운명을 주시하고 있던 건 파리 시민뿐만이 아니었다. 프랑스 주변국의 국왕들도 프랑스의 혁명 진행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각국의 지도자들은 프랑스의 혁명이 자국에까지 번질까 두려워했다. 실제로 신성로마제국 일부 지역에서 서서히 농민 봉기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주변국 국왕들은 프랑스혁명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루이 16세의 실권 복귀를 주장한다. 게다가 하루빨리 프랑스의 혁명 정부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프랑스 동맹을 체결한다.
대프랑스 동맹의 중심은 프랑스의 행보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었다. 혁명 정부를 무너뜨려야 된다는 생각에 양국은 사이가 좋지 않음에도 손을 잡는다. 그리고 영국과 스페인, 네덜란드마저 대프랑스 동맹에 합류하게 된다. 프랑스는 말 그대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거의 모든 나라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1792년 7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동맹군이 프랑스혁명 정부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이 시작된다. 프랑스혁명 정부는 위기감을 느끼고 7년 전쟁 참전 경력이 있던 자코뱅당 출신의 샤를프랑수아 뒤 페리에 뒤무리에를 내세워 대응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군대는 강력했다. 뒤무리에의 군대는 연전연패를 거듭한다. 프랑스 군이 지는 것은 당연했다. 혁명 정부는 혁명 기간 동안 수많은 제1,2 계급 사람들은 숙청했는데, 경력이 있는 군대 지휘관들이 대부분 2계급 소속이었다. 따라서, 군대에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얼마 없었다. 혁명 정부에서는 국가가 위험하다며 시민들에게 자발적으로 군대에 참여하라고 했지만, 훈련이 부족한 신병들은 전쟁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계속되는 패전, 점점 늘어지는 혁명 정부의 제헌 속도, 명확한 지도자의 부재와 이런 혼란을 틈탄 과격주의자들의 정부 점거 시도로 인해 프랑스는 혼란 속에 빠졌다. 이제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동맹군이 파리 근방까지 들어와 혁명 정부를 옥죄어왔다. 불안감에 빠진 파리 시민들은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파리 시민들은 대프랑스 동맹의 목적이 루이 16세의 복귀였기에 국왕을 아예 제거해야 한다는 일차원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1792년 8월 10일 결국 공포감에 사로 잡힌 시민들이 루이 16세를 체포할 목적으로 튈르리 궁을 습격한다.
화들짝 놀란 루이 16세는 곧바로 의회로 도망친다. 당시 루이 16세가 있던 튈르리 궁은 스위스 용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의회로 돌아간 왕은 안전을 확보했으니 용병들의 임무가 끝났다 생각하여 그들을 자국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대치 중이었던 시민들은 그들을 공격했고 스위스 용병 600여 명이 목숨을 잃는다. 시민들은 국왕이 의회로 도망쳤다는 소식에 의회에 당장 국왕을 내놓으라 요구한다. 의회는 국민들의 요구에 하는 수 없이 국왕을 넘기게 된다.
습격 당시 마르세유 의용병들이 불렀던 노래인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는 오늘날 프랑스의 국가로 채택된다.
8월 10일 사건은 프랑스혁명에 있어 큰 분수령을 가져왔다. 잘못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모인 군중들이 점차 건강함을 잃고 과격해졌다. 이전까지 얻어본 적이 없는 자유를 얻게 되고, 타국의 군대에 의해 치안이 위협받게 되자 프랑스 파리는 마치 짐승들의 도시로 변모했다. 뒤이어 일어나는 9월 대학살은 이러한 파리의 혼란을 잘 보여준다. 1792년 9월 2일부터 엿새 동안 반혁명 용의자로 지목받은 1200여 명의 사람들이 단두대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당시 혁명 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던 자코뱅당 출신의 조르주 당통과 장 폴 마라,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등은 이를 방관하고 있었다. 과격주의자들은 자코뱅이 혁명 정부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던 9월 파리 근교의 발미에서 뒤무리에의 군대가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동맹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다. 파리 시민들과 자코뱅들은 혁명에 큰 힘을 얻는다. 이제 그들이 꿈꿔온 한 가지 임무를 완성할 단계에 왔다.
자코뱅(Jacobins). 급진주의와 과격주의의 대표 명사가 된 이들은 초기에는 그런 성향의 집단이 아니었다. 프랑스혁명 초기에는 서로 모여 국가에 설립 방향성에 의논하는 긍정적인 정치 단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들은 과격해졌고, 점차 세력이 커지며 혁명의 주도 세력으로 떠오른다. 이들은 앞서 8월 10일 사건과 9월 대학살을 계획한 장본인들이다.
세 사람이 이끄는 혁명 정부는 1792년 9월 20일 국민 공회를 수립한다. 이는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공화정 탄생을 의미한다. 프랑스 제1공화국의 출범이었다.
다양한 세력이 모인 집단이던 자코뱅도 점차 지도부가 과격해짐에 따라 여러 세력들이 자코뱅 탈퇴를 선언한다. 가장 먼저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던 푀양파가 탈퇴했고, 뒤이어 온건 공화파인 지롱드파가 탈퇴를 선언했다. 공화정이 수립되자 푀양퐈는 자연스럽게 실각하게 되고 국민 공회 초기에는 자코뱅과 지롱드 두 개의 파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 이중 자코뱅의 주축 세력이자 급진 혁명주의자들 몽테뉴파로 부르게 된다.
몽테뉴파는 국민 공회의 좌측에 앉고 지롱드파는 국민공회 우측에 앉았는데, 이때의 일화가 유래가 되어 좌파와 우파라는 용어가 탄생하게 되었다. 몽테뉴파와 지롱드파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사안은 바로 루이 16세의 처분 문제였다.
지롱드 측에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한 사람들도 일부 포함이 되었기에 루이 16세의 처형은 너무 가혹하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몽테뉴의 입장은 확고했다. 소수의 왕당파들은 지속적으로 루이 16세의 복권을 주장해 왔기에 국왕을 완전히 없애 이들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의 몽테뉴들은 "국왕이 무죄라면 혁명이 유죄가 된다."라는 논리를 통해 루이 16세 처형을 지지했다. 반대 입장에서는 국왕의 처분에 대한 투표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하다고 말했다. 확실한 건 이전엔 전혀 없던 국왕 처분에 대한 투표였기에 많은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결국 루이 16세 처분에 대한 투표가 국민 공회에서 실시한다. 투표에 참가한 721명 중 국왕 처형에 찬성하는 표는 과반수에 딱 한표 많은 361표였다. 단 한 표의 우의로 과반 의견이 된 루이 16세 처형 안건이 통과되었고, 이제 루이 16세는 단두대 위로 올라갔다.
몽테뉴파의 대표 로베스피에르는 국민 앞에서 그의 죄목에 대해 낱낱이 밝혔다. 가장 큰 죄목을 바로 오스트리아와의 내통이었다. 바렌에서 잡힌 시점부터 어쩌면 그의 운명이 결정되었을지도 모른다. 루이 16세는 자신의 죄목이 부당함을 끝까지 항변했다. 루이 16세는 자신의 행동들이 모두 국민을 위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국민을 지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던 따뜻한 지도자임은 맞지만 자신의 행동으로 국가가 수차례 위기가 올 뻔했다는 점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과격파 출신의 지도자 장 폴 마라마저 그가 죄목을 제외한다면 그는 인격적으로 매우 훌륭한 사람이라고 평가를 내렸는데, 이런 점으로 보아 루이 16세는 심성만은 착한 지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단두대 앞에 선 루이 16세는 자식들에게 절대 복수를 꿈꾸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는 사형당하기 직전에도 아주 의연한 태도로 스스로 코트를 벗고 목을 내주었다고 한다. 국고 낭비와 내란 선동 음모의 죄목을 받은 루이 16세는 38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가 죽기 전 남긴 마지막 유언은 그의 성품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짐의 피가 프랑스 백성의 축복을 가져오기를
루이 16세의 처형은 프랑스는 물론 주변국들에까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국왕이 처형당한 경우는 역사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했지만, 시민들이 직접 투표를 통해 국왕의 처분을 결정하고 재판을 통해 처형시켜 공화정을 세운 건 역사상 처음이었다.
앞서 영국에서 올리버 크롬웰의 국왕 처형도 입헌군주제를 표방했고, 미국의 경우는 애초에 국왕이 없는 상태에서 시민들이 스스로 모여 공화정을 만든 케이스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은 오랜 기간 왕정 하의 국가에서 시민들이 힘을 모아 헌법을 만들어 국왕을 죽이고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돌아섰기에 주변 국왕들의 위기감은 당연했다.
루이 16세의 처형으로 국민 공회 내에서도 급진 과격파를 이루는 몽테뉴가 힘을 얻기 시작했고 지롱드는 서서히 힘을 잃게 시작한다. 몽테뉴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혁명 정부가 갖춰야 할 미덕을 공포라고 말할 정도로 앞으로의 혼란을 예견하는 듯한 말을 선보이며 혁명 정부는 점차 미쳐갔다.
지롱드는 이에 대항해 국민공회 내에 '12인 위원회'를 조직해 혁명에 반대하는 정치적 세력을 막는 목적의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실제 목적은 몽테뉴를 견제였다. 몽테뉴는 이에 대항해 '공안 위원회'를 조직하여 지롱드를 압박했다.
그러던 와중 프랑스혁명 전쟁에 참전한 지휘관 뒤무리에가 갑작스럽게 쿠데타를 시도한다. 열심히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동맹군과 싸웠지만 제대로 된 지원은 오지도 않고 식량이 다 떨어져 가자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가고 뒤무리에와 평소에 친하게 지낸 지롱드 사람들이 압박을 받는다.
화가 난 시민들은 국민공회를 접수했고, 12인 위원회의 폐지와 지롱드 의원들의 처형을 요구했다. 물론 시민들 뒤에는 자코뱅의 선동이 있었다. 결국 3일간 지속된 봉기로 지롱드 의원 29명이 체포되었고, 이 중 21명이 단두대에 처형당하며 지롱드파가 국민 공회에서 실각하게 된다.
지롱드 당원 중 한 명이었던 샤를로트 코르테는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혁명 정부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몽테뉴의 가장 과격한 인물이었던 바로 장 폴 마라가 반드시 사라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장 폴 마라를 만나기 위해 그의 집 앞으로 가 자신이 현재 자유라는 이름 하에 억압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반혁명 정부 인사 리스트를 가지고 있다고 소리쳤다. 마라는 그녀를 집에 들여보냈고, 그 순간 욕조에서 쉬고 있던 마라에게 달려가 숨겨놓은 식칼을 꺼내 단숨에 그를 죽인다.
7월 13일 자코뱅의 3대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장 폴 마라가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는다.
코르테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마라는 당시 시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화난 시민들이 코르데를 죽여야 한다고 국민공회에 찾아와 소리쳤다. 코르데는 죽기 직전 "10만 명의 목숨을 잃기 전에 단 한 명의 목숨을 죽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곧이어 그녀 역시 단두에 아래 목숨을 잃는다.
장 폴 마라 암살을 계기로 프랑스혁명 내 온건주의자들이었던 지롱드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시민들은 때론 과격해져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여기서 지도자의 존재 이유가 나오는 데, 국민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이를 수정해줄 수 있는 사람이 좋은 지도자이다. 지롱드는 혁명 기간에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반대로 자코뱅은 광기의 대중을 이용해 권력을 잡아 이익을 가져간다. 대중을 이끄는 지도자라면 포퓰리즘에 휩싸이지 않고 좀 더 원시안적인 관점으로 대중이 행복해 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시민들 역시 이런 능력을 가진 지도자를 뽑을 수 있어야 결국에 좋은 국가가 되는 것이다.
장 폴 마라는 죽었지만 혁명은 계속되었다. 몽테뉴는 지롱드의 반대로 통과하지 못했던 헌법을 1793년 8월 19일 제정하게 된다. 이 헌법은 앞서 91년에 선언한 헌법에 공리주의 및 남성 시민의 투표권 보장을 선언하였다. 또한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고 국가가 유상으로 판매하는 항목이 포함되었고, 프랑스 식민지 내의 노예제 폐지가 포함되었다.
몽테뉴가 다수파로 떠오르자 이들 내부에서도 점점 파벌이 분화되기 시작했다. 몽테뉴 내에서도 온건파였던 조르주 당통과 급진파 로베스피에르 그리고 독특한 사상을 가진 자크 르네 에베르의 3개의 파벌로 나뉘었다. 이 중 자크 르네 에베르는 공포 정치를 신봉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과격 분자들과 시민들은 모아 혁명에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를 찾아가 구타하거나 단두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아직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마저 단두대에 올려 처형시켰다. 정도가 너무 심해지자 조르주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를 그를 하루빨리 국민공회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794년 3월 에베르가 파리 시민들과 함께 봉기를 일으키려는 혐의가 포착되자 로베스피에르는 그에게 내란 음모 죄목을 씌워 그를 단두대에 올려 처형시킨다. 온건파 조르주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당통은 지금 혁명 정부는 광기에 휩싸여있다며 하루빨리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멈추고 공안 위원회 폐지를 주장했다. 당통 역시 로베스피에르에게 반혁명 인사로 찍혀 단두대에 목숨을 잃게 된다.
로베스피에르의 피의 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는 1793년 말부터 1794년 1년간 무려 12000여 명의 사람을 단두대에 올렸다. 단순 계산만 하더라고 단두대에서 하루에 3~40여 명을 죽인 셈이다. 로베스피에르는 과거에 루이 16세 혹은 왕당파와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거나 혁명에 반대하는 언급을 한 사람 그리고 1,2 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죽였다. 그는 공안위원회를 통해 반혁명 인사들을 마구잡이라 체포했다.
시간이 점차 흐르고 프랑스혁명 전쟁도 상황은 좋지 못했지만 장기화됨에 따라 시민들도 서서히 이성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가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인 탓에 그들의 친구, 가족, 지지자들은 하루빨리 로베스피에르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1794년 7월 26일 로베스피에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국민공회에서 반혁명 인사들에 대한 비난과 그들의 숙청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는 연설을 무려 2시간이나 했다고 한다. 일부 의원들이 오늘은 혹시 자신들이 로베스피에르의 지목을 당해 참수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단상에 올라가 소리치기 시작한다. 가장 큰 소리를 내었던 것은 장랑베르 탈리앵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탈리앵이 반혁명 파라며 소리쳤지만, 로베스피에르의 두려움 속에 살고 싶지 않았던 의원들은 오히려 로베스피에르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소요사태에 놀란 로베스피에르는 곧바로 공안위원회로 도망갔다. 그러자 국민공회에 남아있던 과거 지롱드 출신의 의원, 에베르와 당통 지지자,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신물이 난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로베스피에르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날 곧바로 로베스피에르의 체포 안건이 통과된다. 로베스피에르는 체포 당시에 악당들이 이겼고, 혁명이 드디어 끝났다며 하도 발악을 하는 바람에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고, 권총을 턱에 맞아 완전히 박살난 채로 단두애 앞에 끌려오게 되었다. 그는 다음날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단두대 아래에 처형된다. 그와 같이 동생 오퀴스탱과 공안위원회 주요 인사들 22명도 같이 단두대에 처형당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처형 당하고 로베스피에르의 국민 공회가 종료된 이 사건을 테르미도르 반동이라고 부른다. 테르미도르란 프랑스력으로 7월에 해당하는 달을 의미한다. 과거 지롱드 출신을 비롯해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실각된 세력들과 더불어 혁명 초기의 주도 세력이던 부르주아들이 권력을 잡았다. 그들은 부르주아 출신들 답게 상업활동의 자유를 인정하고 시민들의 권리를 위해 힘썼다. 하지만 이는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가져와 시민들의 삶은 어려워져 갔다. 더불어 공포정치 때 숨죽이고 있었던 왕당파들이 서서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왕당파들은 영국과 손을 잡고 군대를 동원했고, 파리 내에서 시가전까지 벌어지게 된다. 종결된 혁명, 치안의 불안, 왕당파의 귀환, 외세의 침입으로 프랑스 시민들의 불안과 불만은 크게 쌓여갔다. 7년 전 제3계급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시작된 테니스 코트의 서약도 이제는 그 끝이 다다른 듯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영웅은 항상 위기 속에서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