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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Dec 07. 2021

나폴레옹 전쟁 (1) - 프랑스의 새로운 희망

프랑스를 구하고 유럽의 판도를 바꾼 사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코르시카(Corsica) :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지중해의 작은 섬



  이탈리아 가문 부오나파르테(Buonaparte)는 코르시카 섬에서 가장 유력한 귀족 가문이었다. 코르시카는 18세기경 제노바 공화국 영토였다. 부오나파르테 가문을 비롯한 코르시카 인들은 제노바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펼친다. 하지만 이는 실패했고, 제노바는 코르시카를 1767년 프랑스에 매각한다. 부오나파르테 가문 역시 프랑스로 소속되었다. 그리고 2년 후 코르시카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총독의 절친인 샤를 보나파트르의 아들이 태어난다.

  대부분의 프랑스 하급 귀족이 그랬듯이 샤를의 아들은 어린 나이에 프랑스 사관학교에 입학한다. 이 소년은 사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군사 분야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1학년을 다닐 때 3학년들과 같이 수업을 들을 정도였다. 


  소년이 가장 좋아하던 취미는 책 읽기였다. 사관학교에서 받는 월급 모두 책에 쏟을 만큼 엄청난 책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특히 가장 좋아했던 책은 '플루타르크 영웅전'이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영웅들을 읽으며 늘 자신도 그런 영웅이 되겠다고 마음속 깊이 생각했다. 그는 훗날 전장에 나가서도 그는 늘 책을 놓지 않았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청년은 포병 장교로 임관하게 된다. 해군에 가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영국 해군에 지원해볼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에 남았다. 루소의 사상에도 관심이 많던 청년은 프랑스혁명이 시작되자 로베스피에르의 자코뱅에 가입한다. 1793년 혁명 정부에 대항하여 왕당파의 반란이 전국에서 일어났는데, 툴룽 역시 그중 하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툴롱 진압을 위해 포병을 투입을 명령했고, 포병 하급 지휘관이었던 이 청년도 참가한다.


  그렇게 유럽의 판도를 바꾼 역사상 유일한 인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여정이 시작된다.


툴롱 포위전 (출처 : 위키백과 - 툴롱 포위전)



툴롱(Toulon) : 프랑스의 남부의 항구 소도시



  프랑스혁명을 막으려는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자 이들은 왕당파는 손을 잡고 프랑스 외곽에 있는 도시를 공격했다. 영국과 스페인은 프랑스 남부 도시인 리옹과 마르세유를 공격했다. 영국 해군 제독 새뮤얼 후드는 왕당파와 함께 남부 항구 도시인 툴롱을 공격한다.

  나폴레옹은 툴롱으로 향하는 주요 언덕 곳곳에 포대를 설치했다. 그는 정확한 사거리 계산을 통해 영국군이 지나갈만한 길목마다 정확히 포대를 설치했다. 영국군은 프랑스의 포대를 보고 섣불리 진군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포대를 직접 공격하기로 한다. 영국군은 몇 개의 포대를 무력화시켰으나 무리하게 공격하게 되었다. 결국 이 과정에서 영국 지휘관이 나폴레옹에게 사로잡힌다. 영국군이 진압당하자 전의를 잃은 툴롱의 왕당파들은 나폴레옹의 군대에게 대패하며 툴롱을 내준다.


  혁명정부의 완벽한 승리였다. 나폴레옹의 승리 요인은 선제적인 타격이었다. 왕당파가 같은 프랑스인들을 공격하는 것에 주저하고 있을 때, 극성 혁명 지지자이자 자코뱅당 일원이었던 나폴레옹은 왕당파를 공격하는 데 거침없었다.

  승전보는 자코뱅당의 대표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의 동생 오퀴스탱 드 로베스피에르의 귀에 들어갔다. 오퀴스탱은 형에게 나폴레옹을 적극 추천했고, 그는 단 1년 내에 하급 지휘관에서 장군까지 고속 승진한다. 여기에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로 나폴레옹의 위에 있는 직속상관들이 계속 목이 잘려나간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자코뱅과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게 되면서 나폴레옹의 처지가 크게 달라진다.


  평소 오퀴스탱 드 로베스피에르와 친하게 지내던 나폴레옹은 자코뱅 혐의로 감옥에 간다. 주변인들이 전부 단두대에 처형되고 있어 그의 부하들은 탈옥을 권유했지만 나폴레옹은 좀 더 기다려보자고 했다. 천운을 타고난 건지 나폴레옹은 기적적으로 석방되고 다시 군에 입대한다. 하지만 곧이어 발생한 방데 지역의 왕당파 반란을 진압하라는 혁명정부의 명령을 거절해 직위를 해제당하고 야인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이 남자의 천운이 여기서 멈출 리 없었다. 영국에 있던 루이 16세의 동생 샤를 필리프가 왕당파와 영국 해군을 이끌고 파리로 진군한다는 첩보가 혁명정부에 도착했다. 혁명정부의 총재이자 테르미도르 반동의 주동자 폴 바라스는 평소 눈여겨보던 나폴레옹을 진압군 지휘관으로 임명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전공인 대포를 병사들에게 주문했고, 기병장교 조아킴 뮈라는 엄청난 속도로 대포를 전달했다. 이윽고 시가전이 시작되었지만 사실상 학살이었다. 왕당파는 나폴레옹의 대포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왕당파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나폴레옹은 이를 계기로 포도탄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총재 폴 바라스의 신임을 얻으며 나폴레옹은 프랑스 군에 화려하게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


장 란 (출처 : 영문 위키백과 - 장 란)



롬바르디아(Lombardia) : 북부 이탈리아의 지명, 주요 도시는 밀라노



  대프랑스 동맹의 예상과 달리 프랑스는 강했다.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인해 어느 정도 혁명 정부가 안정을 찾자 프랑스 군은 이제 그동안 당해왔던 패배를 되갚아주기 위해 본격적으로 군대를 동원한다. 네덜란드를 비롯해 많은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고, 대프랑스 동맹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와 전면전에 돌입한다. 

  국내군 총사령관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북부 지역으로 향한다. 나폴레옹이 이 지역을 정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탈리아 북부 지방을 롬바르디아라고 부르는 데, 알프스 산맥을 끼고 있고 강이 많아 수비하기 용이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능력과 오스트리아 지휘관의 실책이 겹치며 이 지역에서 금세 정복한다.


  가장 유명할 일화는 아르콜 다리 전투다. 오스트리아 군은 다리를 넘어 건너오려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아르콜 다리 앞에서 막아섰다. 폭이 매우 좁아 프랑스 군이 만약 이 다리를 건너게 된다면 오스트리아 저격수들에 의해 병사들이 죽게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프랑스 군이 쩔쩔매고 있는 사이 지휘관 나폴레옹은 본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돌격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의 돌격에 호응하여 많은 병사들이 다리를 넘어 질주했다. 그의 친구 장 란 역시 나폴레옹과 함께 다리를 건넜다. 프랑스 군은 다리를 건너는 데 오스트리아 군대는 곧바로 퇴각했다. 이 일화는 훗날 나폴레옹 영화의 주요 장면으로 삽입될 정도로 유명해진다.


  1796년 5월 나폴레옹의 군대를 롬바르디아의 중심 도시인 밀라노를 점령하게 된다. 이윽고 샤르데나와 만토바까지 차례대로 함락시키며 프랑스는 이탈리아 북부 지역의 지배권을 획득한다.


  여기서 멈출 나폴레옹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원정군을 이끌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까지 진격한다.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의 진군을 전혀 막을 수 없었다. 여기에 북부 전선에서 대기 중이었던 병력까지 전부 빈으로 향하는 상황에 놓이자 수도가 포위되는 것만은 막고 싶었는지, 결국 나폴레옹과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양국은 캄포 포르미오에서 동맹을 맺었고, 프랑스는 공화국의 지위를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결국 오스트리아가 항복으로 1차 프랑스혁명 전쟁도 막을 내린다.



조아킴 뮈라 (출처 : 영문 위키백과 - 조아킴 뮈라)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 지중해-나일강에 인접한 이집트 제2의 도시



  오스트리아를 혼쭐 내준 나폴레옹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대프랑스 동맹에게 치안을 위협받던 프랑스 인들은 몇 년 만에 해방감을 맛봤다. 동쪽의 오스트리아를 손을 봐준 나폴레옹은 이제 서쪽에 있는 영국으로 눈을 돌린다. 하지만 본토를 직접 공략하는 건 너무 큰 리스크가 컸다. 그 이유는 바로 이집트에 주둔 중이던 영국 해군 때문이다. 영국을 공격하는 사이 이집트에서 오는 영국의 해군의 지원이 있다면 양면 전쟁에 돌입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결국 나폴레옹은 영국의 힘을 꺾으려는 목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향한다. 


  당시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였다. 오스만 제국은 프랑스는 동맹관계였는데 이집트의 맘루크는 영국과 손을 잡고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을 할 기회만 엿보고 있는 상태였다. 프랑스는 오스만 술탄에 명에 따라 영국과 맘루크를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집트에 대규모 원정을 떠난다.

  프랑스 군이 상륙한 도시는 이집트와 지중해가 인접하고 있는 알렉산드리아였다. 1798년 7월 3일 나폴레옹의 군대는 손쉽게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다. 이후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를 정복하기 위해 향했지만 사막에서의 전투가 처음이었던 터라 진군은 쉽지 않았다. 심지어 본토에서 받아온 보급도 무더위로 인해 계속 음식이 상하기 시작한다. 기자 지방에서 프랑스 군은 업치락뒤치락하며 진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다시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3주 동안의 공방전 끝에 드디어 카이로로 진격하는 데 성공했고, 7월 25일 드디어 카이로를 정복하며 이집트 원정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아부키르 전투


  여기서 나폴레옹에게 첫 번째 굴욕을 안겨주는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의 이름은 '호레이쇼 넬슨'이다. 그는 프랑스가 이집트 원정을 떠날 때부터 나폴레옹의 함대를 저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본토에서 활약하고 있는 와중에도 넬슨은 나폴레옹의 함대를 찾기 위해 이집트 북부 해안가 전역을 탐색하고 있었다. 결국 넬슨 제독은 이집트 함대가 상륙하고 있던 곳이 아부키르 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교전에 돌입한다. 양국의 함대는 치열하게 맞붙었는데 프랑스 함대에 원인 불명에 화재가 갑작스럽게 발생했고, 넬슨은 이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넬슨 제독은 해상에서는 무적에 가까웠다. 프랑스 군이 화재로 흔들린 틈을 타 그들을 완전히 전멸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집트 본토에 있던 나폴레옹은 퇴로가 넬슨 제독에게 끊긴 데다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프랑스의 이집트 원정에 격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는 가만히 잘 있던 식민지를 동맹국이 공격한 꼴이니 어이가 없었다. 오스만 제국 역시 곧바로 대프랑스 동맹에 참가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 했다. 프랑스는 유일하게 남아있던 동맹국을 잃은 셈이었다. 나폴레옹은 오스만 제국을 공격할 생각으로 시리아 원정을 떠난다. 나폴레옹은 팔레스타인과 다마스쿠스를 정복하고 시리아로 향했지만 영국-오스만 연합군에게 다시 한번 패배를 하며 시리아 원정에 실패하고 이집트로 돌아간다.

  이를 두고 볼 오스만 제국이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의 세이드 무스타파는 함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향했다. 양국이 맞붙은 지역은 앞서 넬슨 제독과 싸웠던 아부키르 만이었다. 무스타파를 막기 위해 나선 사람은 조아킴 뮈라다. 뮈라의 전략은 간단했다. 먼길을 오느라 지친 오스만 함대가 아부키르에 상륙하자마자 공략하는 것이다. 조아킴 뮈라는 오스만 함대가 오자 곧바로 방어선을 돌파하고 무스타파와 대결했다. 무스타파는 결국 뮈라에게 잡혔지만 그의 얼굴에 권총을 맞추며 저항했다. 뮈라는 오스만의 대군을 상대로 승리했고, 그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남긴 말은 정말 압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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