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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Dec 14. 2021

나폴레옹 전쟁 (2) - 나폴레옹의 의회 습격

프랑스 제1제국의 탄생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파리(Paris) : 프랑스의 수도



  영국-오스만에게 둘러싸인 나폴레옹은 결국 이집트를 빠져나와 프랑스의 수도 파리로 돌아간다. 카이로에 남겨진 장 바티스트 클레베르는 나폴레옹이 편지 한 장 만 놓고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에 격분했다. 그는 소수의 프랑스 군을 활용하여 무려 1년 간 오스만 제국의 군대를 막아낸다. 그러나 영국-오스만의 지속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호레이쇼 넬슨과 평화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클레베르는 이듬해 이슬람 광신도들에게 암살당한다.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힘을 쏟고 있는 시간 오스트리아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두 번째 대프랑스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공포감에 빠진 프랑스 국민들은 이 사태를 해결할 사람은 오직 나폴레옹뿐이라 믿었다. 1799년 9월 나폴레옹은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파리로 귀환한다.

  테르미도르파가 권력을 잡고 있던 프랑스혁명 총재 정부는 점차 그 본연의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혁명이 장기화되며 국민은 물론 정치가들 모두 지쳐갔다. 대프랑스 동맹과 연이은 전쟁 역시 국민들을 힘들게 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혁명 초기의 지도자이자 인권 선언의 주동자인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는 혁명정부를 하나로 휘어잡을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적임자는 당연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1799년 11월 9일, 프랑스력으로 브뤼메르라 불리는 달에 둘은 쿠데타를 감행한다. 나폴레옹의 동생 뤼시앵 보나파르트는 파리 시내 곳곳에서 자코뱅들의 폭동이 일어났다는 거짓 보고를 해 시민과 의회를 위기감에 몰아넣는다. 그러자 의회는 곧바로 나폴레옹에게 군대 지휘권을 준다. 나폴레옹은 공포에 빠진 혁명 정부 원로원 500명 앞에서 소수의 척탄병과 함께 의회를 장악한다. 그는 원로원 앞에 서서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자신에게 정치와 군권을 달라 요구한다. 의원들은 그제야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항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척탄병을 앞세워 그들을 진압하려 하는데...


  의원들은 거세게 항의했고, 나폴레옹의 멱살을 잡아 그를 의회 밖으로 내쫓아버린다. 나폴레옹은 의원들의 거센 반발에 크게 당황해했다. 그는 충격을 받아 기절한 채 의회 밖에 쓰러져 있었다.


  이 사태를 수습한 것은 동생 뤼시앵 보나파르트이었다. 그는 형이 쓰러진 틈을 타 척탄병을 동원해 의원들을 장악하고 총을 형한테 겨누며 "만약 훗날 형이 혁명 정신을 배반하게 된다면, 내가 직접 혁명의 이름으로 형을 처단할 것이다"라고 소리친다. 의원들은 그제야 진정하기 시작하고, 곧바로 조아킴 뮈라가 병력을 동원해 의원들을 해산시킨다. 형제의 완벽한 합작품이었다. 그렇게 나폴레옹은 프랑스 제1공화국의 제1 통령 자리에 오른다.

 



  브뤼메르 쿠데타를 성공시킨 시에예스는 나폴레옹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뒤에서 그를 조종하려 했다 하지만 이는 완벽한 오판이었다. 시에예스는 나폴레옹에게 명예직을 제안하며 그가 일선에서 물러나기를 기대했지만, 나폴레옹이 이를 거절하고 장악한 권력을 통해 종신통령에 오른다. 그는 이제 프랑스 인들의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나폴레옹의 쿠데타 (출처 : 영문 위키백과 - Coup of 18 Brumaire)



피에몬테 (Piemonte) : 이탈리아 북서부에 위치한 주, 중심 도시는 토리노



  프랑스 제1 통령에 오른 나폴레옹. 그가 국민적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되었다는 말은 역으로 프랑스가 대위기라는 것을 의미했다. 국민들은 평시에 영웅을 바라지 않는다. 1800년 프랑스는 두 가지 대 과제인 혁명의 완수와 대프랑스 동맹 격파를 해결할 지도자가 필요했다.


 제2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한 나라는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영국, 러시아, 오스만 제국 등이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정신이 팔린 사이 오스트리아는 몇 년 전 프랑스가 정복한 롬바르디아 지역을 다시 수복했다. 롬바르디아 중 제노아를 제외한 전 지역을 다시 오스트리아에게 내주는 신세가 된다. 호레이쇼 넬슨 제독 역시 지중해를 장악해 프랑스를 압박했다. 과거 나폴레옹의 롬바르디아 정복 당시 그는 지중해를 건너 상륙했다. 육로로 가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탈리아와 프랑스 국경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알프스 산맥 때문이었다. 이제 상황이 달라졌기에 프랑스는 해로를 통해 이탈리아로 접근하기 어려워졌다. 나폴레옹의 선택지는 넬슨 제독의 삼엄한 경비를 정면으로 뚫고 지중해를 건너거나 아니면 평균 해발 고도 2,500m의 알프스 산맥을 넘는 것이었다.


  1800년 5월 나폴레옹은 넬슨 제독에 의해 막힌 지중해를 피해 알프스 산맥을 넘기로 한다. 제네바에 집결한 프랑스 군은 나폴레옹의 지시하에 베르나르도 고개를 넘어 이탈리아로 향한다. 프랑스 군은 좁은 협곡을 넘기 위해 1열로 6천 명의 병사들이 행군했다. 평소 한니발의 전기를 즐겨 보던 나폴레옹다운 발상이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 -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알프스를 넘은 나폴레옹의 전략은 밀라노를 정복하고 제노아에 있던 앙드레 마세나의 군대와 합류해 오스트리아를 포위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여기서 절반의 성공과 실패를 거두는데, 알프스를 넘어 순식간에 밀라노를 점령하는 데에는 성공하나 제노아에서 버티고 있던 프랑스의 앙드레 마세나는 결국 오스트리아에 항복한다.


  오스트리아군을 지휘하는 미하일 폰 멜라스 장군은 밀라노를 구원하기 위해 출동한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이 항상 후방을 잡히게 되면 당황한다는 점을 이용하기 위해 호시탐탐 그들의 수도인 빈을 노렸는데, 이를 위해서 지중해에 위치한 제노아를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노아가 오스트리아 손에 있으면 밀라노가 지속적으로 포위를 받는 형국에 놓인다.

  나폴레옹은 만약 멜라스의 원군이 제노아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제노아는 공략하기 어려운 도시임과 동시에 양면 전쟁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멜라스의 군대가 제노아로 향하고 있다는 첩보를 받게 되자 곧바로 밀라노에서 제노아로 군대를 파견한다.


  하지만, 이는 멜라스의 함정이었다. 토리노에서 출발한 멜라스 군과 제노아에서 출발한 또 다른 오스트리아 군대가 나폴레옹의 군대를 포위했다. 포위당한 지점은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 지방의 도시 마렝고였다.



마렝고의 위치와 프랑스 및 오스트리아 군의 진격로


  나폴레옹의 군대는 멜라스의 원군 및 제노아, 토리노 측 병력에 의해 포위당한다. 멜라스의 전략에 완전히 휘말린 나폴레옹의 군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나폴레옹은 이 상황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포탄이 자신의 옆에 떨어지고 있는 와중에서도 부하들 앞에서 태연하게 영웅은 전장에서 죽는 것이라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때, 제노아를 공격하기로 계획되어있던 드제의 프랑스 군이 갑작스럽게 마렝고에 도착한다. 나폴레옹은 드제를 보고 "귀관은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전투는 우리의 패배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이길 시간이 왔습니다.



  드제는 나폴레옹에게 이 말 한마디를 남기고 오스트리아 군을 공격했다. 갑작스러운 드제의 등장과 거센 반격에 당황한 오스트리아는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밀리기 시작한다. 드제는 이를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오스트리아를 공격한다. 드제의 활약에 힘입어 서서히 전세는 프랑스 쪽으로 기운다. 오스트리아 군을 모두 몰아낼 무렵 그는 갑작스럽게 날아온 총탄을 맞고 그대로 쓰러진다.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하느라 정신없던 프랑스 군은 드제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계속 공격한다.

  전투가 끝난 뒤 나폴레옹은 드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시체를 찾아 수습하여 도팽 광장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양국은 북부 이탈리아 지역에서 전쟁을 거듭한다. 그러다 1801년 2월 9일 류네빌에서 강화 협정을 맺으며 제2차 대프랑스 전쟁을 끝낸다. 영국만은 강화에 참여하지 않아 프랑스와 계속 전쟁했지만 이듬해 강화 협정을 맺으며 전쟁은 종결된다. 또다시 나폴레옹은 대프랑스 동맹의 군대를 막아내는 데 성공한다. 전쟁을 끝낸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파리로 돌아온다.



마렝고 전투


프랑스(France) : 서유럽에 위치한 유럽 GDP 3위의 강대국, 수도는 파리



  파리에 돌아온 나폴레옹은 이제 내부에 신경 쓴다. 그는 혁명 정신에 입각하여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새로운 헌법을 제정에 힘쓴다. 10년이 넘도록 미뤄진 국가 수립에 마침표를 드디어 찍었다. 이렇게 탄생한 헌법이 바로 나폴레옹 헌법이고, 오늘날 프랑스 공화국의 헌법의 근본적은 뿌리가 된다. 나폴레옹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의 생애 중 가장 논란거리가 될 만한 일을 마침내 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프랑스 황제 즉위다.




  1804년 7월 7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국민을 상대로 자신의 황제 즉위에 대한 국민 투표를 연다. 찬성 3,572,329표 반대 2,569표라는 압도적인 지지하에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른다. 나폴레옹 1세의 탄생이자 보나파르트 왕조의 시작이었다.




  프랑스혁명 정신을 본받을 것이라고 선언한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 1세가 혁명 정신을 배반한 것인지 아니면 혁명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는 여전히 세계사에 있어 뜨거운 논쟁거리다. 


프랑스 제1제국의 문양


  그가 황제에 올랐음에도, 혁명 정신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몇 가지 근거는 존재한다.


  그는 프랑스의 황제(Empereur de France)가 아닌 프랑스인의 황제(Empereur de Francais)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는 분명히 국민 투표를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탄생한 황제였다는 점에서 기존의 부르봉 왕가와 차이를 두었다. 힘으로 왕정복고를 시킨 게 아니라는 점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또한 부르봉 왕가가 했던 랭스 대성당이 아닌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진행했다. 이는 자신의 황제의 권력은 부르봉 왕가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과거 카롤루스 대제의 권한을 받은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발도 당연히 존재했다. 혁명 정부에 참가했던 일부 의원들은 그간 일구어온 혁명 정신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충격에 빠졌다. 국민의 평등을 위해 일어난 혁명의 결과가 결국 기존과 똑같은 황제의 탄생이었다. 동시대에 살고 있던 베토벤은 원래 열렬한 나폴레옹의 지지자였는데, 그가 황제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완전히 돌아서 그의 대표적인 안티가 된다. 주변국들은 나폴레옹의 즉위를 부르봉 왕가의 신성한 왕권을 빼앗은 찬탈이라고 생각해 프랑스에 대한 압박을 이어나갔다. 더불어 유럽의 주변 약소국들은 나폴레옹의 즉위를 보며 우리 민족도 강대국의 그늘에 점령되지 말고 자주적인 국가를 만들어 새로운 국왕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유럽 전역에서 민족주의가 고취된다.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압박 속에 살던 동유럽 약소 왕국들의 자주성을 고취시켰다.


  이는 110년 뒤에 일어난 세계 1차 대전까지 1세기 이상 지속되는 유럽 역사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나폴레옹 1세의 즉위가 미친 영향이 그 정도로 지대했다.


  파리 시내 곳곳에 나폴레옹의 동상과 초상화를 만들어졌다. 그는 더불어 교량을 개선하고 새로운 랜드마크를 건설해 파리를 세계 최고의 도시로 탈바꿈시킨다. 이외에도 대미관계 개선을 위해 루이지애나 점령지를 미국에 매각한다. 당시 미국의 영토를 두배나 늘리게 해 준 엄청난 크기의 영토였다. 나폴레옹의 노력으로 프랑스 제1제국은 이제 18세기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다시 한번 진격을 시작한다. 제국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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