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오스트리아 전쟁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자 주변국들은 또다시 동맹을 체결한다. 이번에도 가장 먼저 프랑스와의 강화 협정을 파기한 두 나라는 철천지 원수 영국과 오스트리아다. 양국은 손을 잡고 프랑스를 압박한다. 지중해에는 호레이쇼 넬슨이 버티고 있어 해군 병력 운용은 쉽지 않았다. 해군력에서는 영국이 월등히 앞섰다. 반면 육군의 힘은 프랑스가 우세했기에, 나폴레옹은 영국 본토에 상륙만 한다면 충분히 공략 가능하다고 판단한다.
나폴레옹은 피에르 빌뇌브 장군에게 지시해 스페인의 해상 군대와 손을 잡고 도버해협의 제해권을 장악하도록 명령한다. 프랑스 군은 단 24시간이면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에 상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공략하는 사이 빌뇌브 장군이 어떻게든 이 24시간을 프랑스 군에 가져다주어야 했다.
그사이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몰두한다. 먼저 선제공격을 한건 오스트리아였다. 오스트리아의 새로운 지휘관이자 베테랑 장군 카를 마크 본 라이베리히는 나폴레옹이 황제 대관식으로 정신없을 시기에 신성로마제국 연맹 중 친프랑스 성향을 보인 바이에른을 침공한다. 무려 7만의 오스트리아 군대가 바이에른으로 진격한다.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 서부에 울름 지역까지 별다른 저항 없이 차지한다.
러시아 역시 바이에른으로 향했다. 러시아-오스트리아 동맹군은 바이에른의 수도 뮌헨을 점령한다. 양국은 주력 부대를 투입하여 뮌헨 근방에서 프랑스의 군대를 맞이할 생각이었다. 뒤이어 나폴레옹의 군대 역시 바이에른으로 출격한다.
마크 라이베리히는 울름 지역의 슈바르츠발트 부근에 정착한다. 마크는 나폴레옹의 군대가 반드시 이 지역을 지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아킴 뮈라의 기병대가 슈바르츠발트로 들어섰다는 첩보가 들려온다. 마크 장군은 뮈라의 군대를 막기 위해 울름 지방의 수비를 강화한다. 울름 지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크 장군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나폴레옹의 완벽한 기만책이었다. 나폴레옹은 뮈라가 마크의 정신을 흔들어 놓는 사이 울름의 북쪽 지방인 도나우뵈르트로 향했다. 그제야 마크와 오스트리아군은 나폴레옹이 도나우뵈르트로 향했다는 첩보를 받는다. 이 말이 맞다면 나폴레옹의 목적인 울름 지방을 대회전 하여 후방에서 마크의 군대를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만약 나폴레옹이 그대로 뮌헨에 입성하기라도 한다면 심지어 본국과 러시아 동맹군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다.
문제는 나폴레옹의 위치에 대한 첩보가 너무 많이 전해졌다. 마크 입장에서는 어떤 첩보가 진실인지 판가름하기 어려워했다.
그사이 루이 니콜라 다부가 이끄는 프랑스 군은 쾌속 질주를 했다. 도나우뵈르트를 넘어 잉골슈타트-뮌헨으로 이어지는 대회전을 감행했다. 이 지역을 지키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키엔마이어 장군은 러시아 군과 합류하려는 목적으로 동쪽으로 퇴각했다.
마크도 멍청한 장군은 절대 아니었다. 프랑스가 뮌헨을 점령하기 전에 이들이 쉽게 도하할 수 없도록 다뉴브 강 부근을 공격한다. 하지만 마크의 대응은 너무 늦었다. 그 사이 뮈라를 중심으로 제5 군단장 장 란, 제6 군단장 미셸 네는 드디어 올름 지역 포위망을 완성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루이 니콜라 다부가 빠르게 뮌헨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마크는 올름이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프랑스 포위망의 가장 약한 부근을 돌파할 계획을 세운다. 이들이 귄츠부르크 부근의 다리를 건너 넘어올 것이라고 생각해 그것에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프랑스 군대에게 공략당하게 된다. 니콜라 장드뒤어 술트가 이끄는 4군단 마저 울름에 도착한다. 오스트리아 군의 지휘체계는 완전히 무너졌고 사방으로 포위되었다. 이제 남은 건 프랑스 군에 항복할 건지 결사 항전할 것인지 선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부분의 오스트리아의 부대는 하는 수 없이 항복했다. 그간 나폴레옹의 명성을 알고 있었기에 오스트리아군은 지레 겁을 먹고 항복한 것이다. 마크의 주력 부대 역시 1805년 10월 20일 나폴레옹에게 항복한다. 프랑스 제1제국의 첫 승리는 너무 손쉬울 정도로 허무하게 끝났다. 마크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주력 부대 4만은 전부 프랑스의 포로로 전락했다. 올름 전역은 적은 손실로 적에게 최대한 많은 피해를 안겨주라는 너무 기초적인 전투의 격언을 그대로 실현한 전투다.
울름-뮌헨 축선을 확보하자 빈으로 향하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된다. 오스트리아의 군대는 나폴레옹의 공격을 막을 힘이 전혀 없었다. 저항이 없다시피 할 정도로 편안하게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 입성한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에서 오스트리아가 허무하게 진 이유는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기동전에서 속도의 중요함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전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인데, 빠른 선제 공격이아먈로 승률을 크게 높일 수 있는 전략 중 하나다. 조아킴 뮈라가 시선을 분산시키고 포위를 완성시키는 완벽한 양동작전이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취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군대는 이전의 경험을 빗대어 포위를 당하게 되면 크게 당황해 손쉽게 항복을 얻어낼 수 있다고 판단했고, 울름 전역에서 그대로 적용시켰다.
마지막으로는 그간 나폴레옹이 쌓아 올린 명성 덕분이었다. 약 10여 년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통해 그는 프랑스 국민의 영웅인 동시에 오스트리아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결국 빈 함락으로 오스트리아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에게 항복한다. 900년 전 카롤루스 대제로부터 이어지고 있던 국가 연맹체 신성로마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카롤루스 황제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던 나폴레옹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신성 로마제국의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역사는 늘 재밌게 흘러간다는 걸 알 수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도자 프란츠 2세는 항복했지만 아직 제3차 대프랑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를 믿고 군대를 파견한 러시아가 남아있었다. 오스트리아가 허무하게 항복하자 먼길을 달려와 전쟁에 참여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적잖이 당황했다. 불안하게 즉위한 어린 차르는 프랑스혁명으로 촉발된 혁명이 러시아까지 번지고 있는 상황에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제 홀로 남겨져 전장의 베테랑 나폴레옹을 상대해야 했다.
프랑스도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는데, 영국 해군을 저지하라고 내세운 빌뇌브 장군이 넬슨 제독에게 연전연패를 당하고 있었다. 당장 나폴레옹의 군대가 지중해 방면으로 군을 돌릴 여력은 없었다. 만약 그랬다간 오히려 러시아 군에게 뒤를 잡혀 오스트리아에서 얻은 승리를 다 놓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또한, 나폴레옹은 울름 전역 승리의 핵심은 기동성이라 판단해 가져온 식량이 상당히 적었다. 여기에 빈까지 점령하게 되자 본국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져 보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유일한 선택지는 육로에서 확실한 승리를 하고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이 점을 알고 있었던 오스트리아 잔존 병력들은 성에 들어가 농성전을 펼치자고 주장한다. 프랑스의 진격을 지연시켜 스스로 퇴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20대의 젊은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전쟁 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의 의견도 무시한 채 나폴레옹과의 전면전을 지시한다. 후술 하겠지만 차르와 총사령관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러시아는 먼길을 온 원정군이었기에 빠르게 승부를 보고 싶어 했다. 오스트리아 황제가 이미 나폴레옹에게 잡혔기에 주도권은 러시아 쪽에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동맹군은 차르에 명령에 따라 체코 동부 모라바에 위치한 아우스터리츠 근방에서 나폴레옹 군을 상대하기로 결정한다.
시간이 11월로 향해 가자 프랑스 군사들이 추위에 떨기 시작했다. 식량은 점차 바닥이 나고 있었다. 프랑스 군은 수도 빈은 점령했을 뿐 여전히 오스트리아의 많은 지역은 점령하지 못했다. 결국 나폴레옹의 주요 참모인 장 란, 조아큄 뮈라, 니콜라 장드뒤어 술트는 더 이상의 전쟁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나폴레옹에게 퇴각을 건의하기로 한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이미 먼길을 왔고, 이대로 퇴각하면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편에 붙어 포위당할 위험이 있다며 이를 거절한다.
이 말을 들은 4군단 장 술트는 갑자기 황제 폐하의 의견이 지당하다며 자신의 의견을 번복하고 황제의 의견에 찬사를 보낸다. 이를 옆에서 본 장 란이 상당히 어이없어했다고 전해진다.
1805년 12월 2일 드디어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러시아군이 대치했다. 프랑스 군대의 배치도를 본 연합군은 프랑스의 우익 배치가 상대적으로 약한 것을 활용해 우익을 무너뜨리고 중앙군과 합류해 프랑스 군대를 포위하기로 계획한다. 하지만 이는 프랑스의 전략이었다. 실제로 우익의 대치하고 있던 곳은 수비하기에 매우 용이했다.
그리고 오전 8시가 되자 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나폴레옹의 예상대로 우익을 공격했고, 이를 본 나폴레옹은 매우 기뻐했다. 3 군단장 루이 니콜라 다부는 아우슈터리츠를 지키기 위해 무려 48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고, 오자마자 연합군이 포위를 막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그는 이 임무를 완벽하게 해내며 프랑스의 주력 부대가 위험에 빠지지 않게 했다. 심지어 연합군은 프랑스군을 포위할 시간마저 제대로 못 지키는 기초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연합군이 손발이 맞지 않자 자연스레 중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이를 보고 곧바로 술트를 부른다.
나폴레옹 : 저 고지를 점령하는데 몇 분이나 걸리겠는가?
술트 : 20분이면 충분합니다.
나폴레옹 : 좋다. 그러면 15분 주겠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전쟁을 끝내겠다.
8시 45분, 술트는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곧바로 고지대로 향한다. 그리고 그는 나폴레옹의 명령대로 정말 15분 내에 임무를 완수한다. 이 한 번의 공격으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의 진영은 완전히 와해된다. 나폴레옹의 예언대로 이 공격 하나로 연합군은 지휘체계를 완전히 잃었다. 양군은 마치 손과 발이 떨어진 채로 싸우게 된 것이다. 연합군 입장에서 다행히 안개가 갑자기 심해져 간신히 퇴각에 성공했다.
여전히 수적 우위를 지니고 있던 러시아군은 충분히 프랑스군과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 초짜였던 차르의 군대는 전쟁에서 기초나 다름없는 기병과 보병 운용에서 마저 손발이 안 맞으면서 대패를 거듭한다. 모든 건 나폴레옹의 손아귀 안이었다. 결국 러시아군은 나폴레옹의 전력과 프랑스의 기세에 눌려 완전히 쓸려나갔고 전쟁은 나폴레옹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아우스터리츠에서의 승리는 나폴레옹이 거둔 승리 중 가장 먼저 손꼽히는 전투다. 그의 전쟁에서의 통솔력과 지휘력이 빛을 본 전투였다.
아우스터리츠에서 대패를 당한 러시아군은 이틀 뒤 대 프랑스 동맹에서 바로 발을 뺀다. 결국 세 번째 대프랑스 동맹마저 또다시 나폴레옹과 프랑스의 승리로 끝이 난다. 이번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는 말로만 들었던 나폴레옹의 위엄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당분간 차르는 나폴레옹의 기세에 눌려 서방으로 진출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이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영국의 수상 윌리엄 피트는 당분간 나폴레옹의 시대가 지속될 것이니 지도자는 필요 없을 것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떠났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신성로마제국이 순식간에 해체되었으며, 중부 유럽 대부분의 지역이 나폴레옹 손아귀에 들어간다.
다만, 프랑스의 문제는 육로가 아닌 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