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맞이하는 나폴레옹, 트라팔가와 프로이센 전투
아우슈터리츠에서의 놀라운 성과와 달리 해상에서의 상황은 프랑스에게 안 좋게 돌아갔다. 앞서 언급했듯이, 피에르 빌뇌브는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도버해협 부근의 재해권 확보를 위해 힘쓰고 있었다. 불로뉴 지방에 모인 프랑스의 함대가 빌뇌브에게 주어졌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정복하고 돌아오면 빌뇌브가 획득함 제해권을 토대로 영국 본토를 공략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본토 상륙 시 프랑스의 병력을 이동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나폴레옹이 계산한 시간은 단 24시간이었다.
말이 쉽지 이 24시간 확보가 해군력이 열세였던 프랑스 입장에선 상당히 어려운 요구였다. 게다가 해군 경험이 풍부하지 않던 프랑스에는 이렇다 할 해군 지휘관이 전무했다. 피에르 빌뇌브가 그나마 호레이쇼 넬슨과 대적해본 적이 있던 지휘관이었고, 그 경험마저도 이집트 원정 당시 넬슨의 해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었다.
호레이쇼 넬슨은 프랑스 함대 봉쇄를 위해 툴룽과 브레스트에 병력을 배치시켰다. 이에 대항해 빌뇌브 장군은 툴룽의 방어선을 뚫고 스페인 왕국과 연합하여 서인도 제도를 공략하는 데 성공한다. 서인도 제도는 카리브해에 위치한 영국령 식민지였다.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는 서인도 제도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둔 이후 돌아온다. 다만 귀환 도중 하필 영국의 제독 로버트 칼더 제독과 마주치게 된다. 칼더의 함대에 공격을 당한 연합 함대는 재빨리 스페인의 카디스 항구에 정박한다. 패전 이후 빌뇌브의 함대는 카디스가 아닌 영국 해협으로 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스페인과의 연합 필요성을 생각한 빌뇌브는 카디스로 향했다. 이를 전해 들은 나폴레옹은 영국 해협 제해권을 손에 넣을 기회를 놓쳤다며 격분했다. 게다가 빌뇌브가 카디스 항구에서 함대 구축에만 신경 쓰고 영국 군을 공략하지 않고 있자 화가 단단히 난 나폴레옹은 그를 실각시키고 프랑수아 로실리를 새로운 지휘관으로 삼으려 한다. 이 소식을 들을 빌뇌브는 하는 수 없이 넬슨과의 전면전에 돌입한다. 그렇게 빌뇌브의 함대와 넬슨의 함대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연합군과 영국의 해군은 카디스와 지브롤터 해협 사이에서 마주쳤다. 연합군의 전열함은 총 33척이었고, 영국의 전열함은 총 27척으로 영국이 더욱 열세였다. 영국 해군 총 지휘관 호레이쇼 넬슨은 영국 병사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사기를 놓이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잉글랜드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 할 것을 바란다!
(England expect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 호레이쇼 넬슨 (Horatio Nelson) -
연합군의 함대는 트라팔가르 곶 앞에서 선박을 횡으로 배치했다. 당시 해군 운용 기준으로 봤을 때 이는 굉장히 기본적인 방법이다. 19세기 전함의 주 무기는 대포였다. 오늘날이야 미사일로 척 함선을 쏘기 때문에 뱃머리가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더라고 적함이 사정거리 안에만 들어오면 언제나 포격이 가능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대포는 전함 측면에 배치되었기에 적함을 정면이 아닌 측면에서 맞이해야 한다. 적이 사정거리 안까지 들어오기 전까지는 주도적으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게다가 함선을 움직이면서 조준하면 대포가 제대로 날아갈 리 없다. 따라서 이순신의 학익진처럼 횡으로 넓게 포진하여 뱃머리를 측면으로 돌리는 것이 기본 해군 운용 교리였다.
반대로 교전 발생했을 때 뱃머리를 정면으로 하여 적의 측면을 파고드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뱃머리에서 적함을 공격할 방법은 전무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넬슨 제독은 정확히 이 방식으로 포진했다. 자살행위로 평가받는 전술을 그대로 운용했다.
영국군의 무모해 보이는 전략에 있어 넬슨이 그렇게 한대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넬슨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험보다 자신들의 경험이 앞선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넬슨 제독의 전략은 간단했다.
1. 제1전대가 뱃머리를 연합 함대 쪽으로 돌려 빠르게 적 함대 진영으로 다가간다. 속력을 살려 돌진한다면 사격 기술이 미숙한 연합군은 함대를 제대로 사격하지 못할 것이다.
2. 빠른 돌파로 선두에서 연합군 함대의 진열을 흩트려 함대 간 간격을 벌리고, 역으로 선두의 측면이 적함의 사정거리에 놓여 일방적인 공격이 가능하다. (이때, 연합군은 뱃머리가 영국 함대 선두를 향한다.)
3. 연합군 함대가 퇴각하면 뒤따라 오는 제2전대가 측면으로 돌아 연합군의 함대를 추격한다.
1805년 10월 21일 정오가 지난 시점. 잉글랜드의 함대가 연합군을 공격한다. 넬슨의 전략에 따라 잉글랜드 함대는 뱃머리를 앞세워 연합군의 함대를 정면으로 돌파한다. 연합 함대가 영국군 함대를 상대로 포격을 실시했지만 해군 경력이 많지 않던 프랑스 군은 영국 함대를 전혀 맞추지 못했다. 연합군은 크게 당황했고 넬슨의 큰 그림대로 중앙을 내주게 된다.
하지만 늘 전쟁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프랑스의 르두터블 함선은 자신들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영국의 빅토리 기함에 가깝게 붙인 다음 병사들을 배 위에 상륙시킨다. 영국 해군은 전함 위에서의 백병전이 구식 전술이라 생각해 이에 대한 훈련을 잘하지 않았는데, 프랑스의 막무가내식 상륙으로 백병전을 허용당했다. 넬슨 제독은 평소 금장이 달린 군복을 입기를 좋아했다. 부하들은 전투에서 만큼은 제독이 평범한 군복을 입어 적에게 위치를 노출당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넬슨 제독을 말을 듣지 않았고, 이 점이 엄청난 패착으로 다가온다.
루드 터블의 병사들은 빅토리 호에 있는 영국 병사들을 쓰러뜨렸고, 화려한 군복을 입은 넬슨 제독 마저 저격하는 데 성공한다. 기함 한 척으로 올린 엄청난 성과였다.
그러나 함대 하나의 성공이 전쟁 전체의 판도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 사이 영국 함대 테메레르가 빅토리를 구하기 위해 도착했고, 루드터블의 함대에 일제 사격을 가해 함선을 완전히 수장시켜버린다. 연합군은 다시 당황하기 시작했고, 영국 함대 2 전대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2 전대를 지휘하고 있던 영국의 커스버트 콜링우드는 넬슨이 없는 영국군 함대를 지휘하며 프랑스 군을 추격했다. 넬슨이 없어 와해될 수 있던 영국 함대를 콜링우드가 잘 이끌어 넬슨 제독의 전략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대영제국의 완벽한 승리였다. 영국 함대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보여주지 않은 넬슨의 전략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넬슨의 전략은 이른바 '넬슨 터치(Nelson Touch)'라고 불리며 해군 전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넬슨 제독은 나폴레옹의 본토 상륙 작전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빌뇌브는 나폴레옹이 지시한 24시간 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실각한다. 분노한 나폴레옹이 그를 문책한 재판을 열려고 하자 그는 영국에 항복했다. 사실 프랑스 해군력으로 24시간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영국 해군 전력을 과소평가했다. 빌뇌브가 상대적 약세의 프랑스 해군을 데리고 서인도 제도를 공략에 성공했으니 그는 오히려 유능한 지휘관이었을지도 모른다.
넬슨 제독은 트라팔가 곶에서 빌뇌브의 함대를 수장시키는 데 성공한다. 영국 런던 코번트 가든에 위치한 트라팔가 광장은 이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기념 장소다.
나폴레옹은 비록 해상에서의 굴욕을 겪었지만, 육로에서의 성과는 상당했기에 걱정할 단계는 아니었다. 당장 프랑스 본토가 침공당할 가능성은 적었다. 영국은 수상 윌리엄 피트도 얼마 전 사망했다. 그리자 나폴레옹은 중부 유럽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과거 신성로마제국 동맹에 소속되어 있던 여러 국가들을 묶어 라인 동맹을 만든다. 독일-오스트리아 유역에 위치한 소규모 국가들을 모두 프랑스 영토로 편입시키기 어려웠기에 이른바 괴뢰 정부처럼 만들어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내정 간섭을 실시했다. 라인 동맹의 맹주는 당연히 프랑스였다.
프랑스가 라인 동맹을 통해 독일 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하려 하자 독일 지역의 맹주 프로이센은 위기감을 느낀다. 프로이센은 원래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였지만, 프랑스가 독일을 점령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가만히 있지 않았다. 프로이센은 루이 페르디난트 왕세자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1806년 10월 9일 드디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선전포고 하루 전인 1806년 10월 8일 나폴레옹은 준비된 병력을 이끌고 독일 지역으로 출발했다. 바이에른 지방에서 출발한 프랑스 군은 작센을 거쳐 프로이센의 수도인 베를린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루이 페르디난트 왕자는 당장 나폴레옹과의 정면 대결을 주장했다. 반면 참모장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는 병력을 모아 수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견 대립 후 왕자의 의견에 따라 프로이센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남하한다.
선전포고 하루 뒤인 1806년 10월 10일, 잘펠트 부근에서 장 란의 5군단과 루이 페르디난트 왕자의 군대가 잘펠트에서 만나며 양국의 전투가 시작된다. 프랑스 군대는 전쟁 초짜였던 프로이센 왕자의 군대를 손쉽게 이겼다. 프랑스 군의 부사관 쥔데는 군대에게 항복을 요구했지만, 페르디난트는 이를 무시하고 쥔데를 공격했다. 쥔데와 격돌한 페르디난트 왕자는 쥔데에 칼을 맞고 쓰러졌다. 프로이센 왕국의 왕자가 겨우 프랑스 부사관의 칼에 맞고 쓰러진 것이다. 프로이센 군은 왕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본국으로 퇴각하게 된다. 그사이 루이 니콜라 다부의 3군단은 10월 12일 나움부르크를 정복한다.
이후 나폴레옹은 예나 부근에 프로이센의 주력 부대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3 군단장 다부에게 나움부르크에서 아포로다 지역으로 향하라고 말했고, 1 군단장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에게 다부를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본인은 주력 부대를 이끌고 예나로 향했다. 1806년 10월 14일 예나에서 프로이센 군 6만과 프랑스 군 4만이 맞붙는다. 6 군단장 미셸 네와 5 군단장 장 란은 짙은 안개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을 공격했고, 좁은 시야에 당황한 프로이센 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안개가 걷히자 프로이센 군은 악착같이 저항했지만, 전쟁 베테랑 나폴레옹이 전략 앞에 본인들의 방진이 무너지며 결국 패전하고 만다. 나폴레옹은 예나에서 프로이센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그는 전쟁의 승리를 확신했고, 이제 베를린만 무너뜨린다면 프로이센의 저항도 끝날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실제 프로이센의 주력부대는 예나가 아닌 아우어슈테트에 위치하고 있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프로이센의 6만 부대는 3 군단장 다부에게 빼앗긴 나움부르크를 수복하기 위해 진군 중이었다. 그리고 양군은 하센하우젠이라는 마을에서 맞닥뜨린다. 갑작스러운 공세에 놀란 다부는 하센하우젠에서 패배하고 밀려나기 시작한다. 아우어슈테트에 이르러 다부는 프로이센을 막아서기 시작한다. 다부는 무려 두배가 넘는 프로이센 군을 상대로 군대를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만약 1 군단장 베르나도트가 아우어슈테트에 도착한다면 프랑스 군은 충분히 프로이센의 군대를 몰아낼 수 있어 보였다. 그리고 베르나도트가 드디어 아우어슈테트 부근에 도착한다.
하지만, 1 군단장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는 근처에서 전투 중인 다부의 군대를 버려두고 예나로 향한다.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잘못 해석해 다부를 돕지 말고 예나 방면으로 합류하라고 이해했다. 예나는 진작 프랑스의 승리로 전투가 끝난 상황이었다. 베르나도트와 나폴레옹의 지독한 악연의 시작이었다.
이 사실을 전혀 알리 없던 다부는 아우어슈테트에서 홀로 프로이센의 대군을 막느라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여기서 기적이 일어난다. 프랑스의 한 병사 쏜 머스캣 총알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눈알에 명중했다. 브라운슈바이크는 그대로 기절했다. 갑작스러운 지휘관의 부재를 겪은 프로이센 군은 크게 당황한다. 다부는 그사이 군대를 수습하고 프로이센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프랑스 군은 또다시 기적적인 승리를 통해 기사회생한다.
나폴레옹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부에게 찬사를 보낸 한편 엄청난 실책을 저지른 베르나도트를 문책했다. 반면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이 준 명령의 애매모호했다고 주장했다. 어찌 되었든 아우어슈테트에서 대승을 거둔 프랑스 군은 주력 부대가 사라진 프로이센을 압박했다. 병사가 없던 프로이센은 본인들의 수도인 베를린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해 동프로이센의 수도인 쾨니히스베르크(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로 도망친다. 그리고 10월 27일 드디어 나폴레옹의 군대는 베를린에 입성하며 프로이센과의 전쟁도 끝나게 된다.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이 함락당하자 러시아 역시 위기감을 느낀다. 러시아는 즉시 10만의 대군을 프로이센에 파견한다. 프로이센이 도망친 곳은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의 영토였다. 폴란드인들은 당시 영토를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 3국에게 분할당한 상태였다. 폴란드인들은 자국의 영토도 빼앗기고 프로이센에서 전쟁을 위해 강제 징병과 세금 징수를 실시해 불만이 큰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이 군대를 이끌고 프로이센을 물리치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입성하자 그를 환영했다. 폴란드 인들은 프랑스 군에 동참해 같이 프로이센을 공격해 손쉽게 바르샤바를 정복한다. 그는 폴란드 영토에 바르샤바 공국이라는 괴뢰 세워 프로이센을 압박한다. 반대로 폴란드인들은 나폴레옹을 민족의 해방자로 추앙했다. 그들은 나폴레옹이 자신들의 독립국을 만들어 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러시아는 레온티 베니 헤센을 앞세워 프로이센과 협력하여 나폴레옹을 저지하기 위해 출격했다. 그는 쾨니히스베르크로 진격하는 1 군단장 베르나도트의 군대를 기습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프랑스 군이 폴란드의 추운 겨울에 당황하여 기습 공격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를 프로이센 측에 전달하려던 전령 장교가 프랑스 군에 붙잡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러시아는 퇴각하기 시작하고, 프랑스 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쾨니히스부르크 남동쪽 부근 아일라우라는 작은 마을에서 양국의 군대가 만났다.
1807년 2월 7일, 양국은 첫 교전을 실시했는데 양측 모두 큰 성과 없이 약간의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날 4만여 명의 나폴레옹 군과 6만 3천여 명의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이 만났다. 확실히 겨울은 러시의 편이었다. 프랑스 군대가 눈보라에 당황에 대포를 제대로 조준하지 못하는 사이 러시아 군대는 포병을 앞세워 프랑스 군을 압박했다. 러시아 군은 3개의 연대를 동원해 프랑스 군의 중심부를 공격해 그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러시아는 프랑스 군의 집 중부를 공략하고 있었고 큰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다급해진 나폴레옹은 조아큄 뮈라에게 기병대를 동원해 러시아 군의 중심부를 돌파하라고 명령한다. 양측의 군대는 서로 적의 중심부를 공격하는 상황이었다. 마치 스타크래프트의 엘리전 양상의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이때, 프랑스를 구한 건 프로이센 군대를 막고 있던 미셸 네였다. 미셸 네의 도움으로 나폴레옹은 러시아 군을 막아냈다. 전투는 하루 종일 이뤄졌고, 먼저 베니헤센이 퇴각 명령을 내리면서 아일라우에서의 전투도 프랑스의 끝나게 된다.
비록 나폴레옹은 아일라우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피해가 막심했다. 눈보라로 인해 그가 자랑하던 포병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역으로 생각하면 쉽지 않은 환경에서도 승리했다는 점에서 이 전투를 계기로 그가 기상 악화에 대한 군대 운용의 악영향이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프랑스와 러시아는 잠시 휴전상태로 돌입했다. 서로 공격해서 득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프로이센은 자신들의 영토를 수복해달라고 러시아에게 계속 요구했다. 결국 러시아는 동맹국의 간청으로 6월 전쟁을 재개한다.
1807년 6월 5일 베니헤센의 군대가 미셸 네를 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미셸 네는 무려 4배나 많은 러시아 군대를 효율적으로 막아내며 니콜라 장드뒤어 슐트와 루이 니콜라 다부의 군대에 구원을 요청한다. 결국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러시아군은 하일스베르크 지역에 들어가 항전하기로 한다. 프랑스는 러시아 군을 추격했고 가장 먼저 하일스베르크에 도착한 것은 역시 기동성의 사나이 조아큄 뮈라였다.
하일스베르크에는 무려 9만 명의 러시아군이 버티고 있어 부관들은 다른 군단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조아큄 뮈라는 앞뒤 재는 성격이 아니었다. 곧바로 전투에 돌입했고, 뮈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돌아간다. 뒤이어 6월 10일 장란이 도착해 러시아 군을 공격했지만, 러시아 군은 끄떡없었다.
하일스베르크에서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나폴레옹은 곧바로 하일스베르크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들은 베니헤센은 좀 더 좋은 조건에서 적을 막기 위해 다리를 불태우고 프리틀란트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고전하는 프랑스 군을 앞에 두고 퇴각하는 이 행동은 악수였다. 재빠른 프랑스 군대는 러시아의 퇴각을 곧바로 추격했다. 선두에 나선 장 란이 6월 14일 러시아 군대와 전투를 펼쳤고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군대를 무려 9시간이 넘게 막아냈다.
멀리서 추격의 속도를 높여가던 나폴레옹은 소식을 듣고 승리를 직감했다. 오후 5시가 되자 나폴레옹이 주력 부대가 프리틀란트에 도착했다. 부상당한 베르나도트를 대신해 새로 1 군단장 원수에 오른 클로드 빅토르와 미셸 네가 이끄는 군대가 러시아 군대를 무찔렀다. 러시아의 9만 대군은 프랑스의 군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프리틀란트 시내는 불타기 시작했다. 베니헤센은 근위대까지 동원해 프랑스 군대를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베니헤센은 판단 착오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나폴레옹은 드디어 수개월 동안 바라던 러시아군 섬멸의 목표를 이뤄냈다. 러시아의 군대는 도망치기 바빴다. 그 사이 나폴레옹은 러시아 함선을 비롯한 막대한 전리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결국 이 전투의 패배로 프로이센 왕실은 러시아로 망명을 떠나고 프랑스는 마침내 쾨니히스베르크에 입성한다. 멍청한 판단으로 전쟁에서 진 베니헤센은 차르 알렉산드르 1세의 분노를 사 강제로 퇴역당한다. 그는 훗날 나폴레옹이 다시 러시아 원정을 떠날 때 복귀할 수 있었다.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와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1세는 쾨니히스부르크 부근 탄지트에서 강화 조약을 맺으며 양국 간의 전쟁 역시 끝이 난다.
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격파한 나폴레옹은 이제 유럽 전역으로 자신의 세력을 넓히는 데 성공한다. 프랑스 혁명기에 파리를 적국에게 공격 땅 할까 전전긍긍하던 나라는 이제 명실상부한 유럽 최강의 국가이자 과거 로마 제국에 필적할만한 영토를 손에 넣은 대제국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즉위하자마자 나폴레옹과 굴욕적인 조건으로 두 차례나 강화 조약을 맺는다. 열정적인 차르는 언젠간 반드시 나폴레옹에게 복수할 것이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