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ironde Jan 04. 2022

나폴레옹 전쟁 (5) - 보이지 않는 위험

이베리아 반도의 게릴라 전과 오스트리아의 반격 성공

프랑스 군대를 상대로 게릴라 전을 수행하는 포르투갈 군대


이베리아 반도 (Iberica Peninsula) : 유럽 남서부에 위치한 거대한 반도



  시계를 잠시 돌려 나폴레옹이 베를린에 입성한 1806년 11월 21일로 돌아가 보자. 프로이센이 무너지자 이제 유럽 대륙 내에서 프랑스를 견제한 국가는 없었다. 강대국이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이 차례대로 나폴레옹에게 당했다. 유이하게 남은 강대국 스페인, 네덜란드는 프랑스와 협력관계였다. 이제 남은 나라는 대륙 밖에 있는 영국 뿐이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압박하기 위해 대륙 봉쇄령을 발표한다. 유럽 대륙에 있는 모든 국가는 영국과의 교역이 제한한다는 내용이었다. 해군력으로 영국을 넘어설 수 없다고 판단한 프랑스는 경제적인 전략을 택한 것이다. 경제적 제재를 통해 상대 나라를 견제하는 건 21세기에만 일어나는 일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내륙에 있는 모든 나라가 프랑스의 조치에 쉽게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공업 생산량을 키워나갔다. 막대한 생산량을 통해 주변 국에게 수많은 공산품을 수출을 하고 있었다. 영국의 물건은 대륙에 있는 많은 나라들의 원산지였다. 반대로 영국 역시 타국이나 식민지로부터 자원과 농산품을 수입하고 있었다.


  대륙 봉쇄령에 가장 크게 반대한 나라는 포르투갈이었다. 본토 자원이 적은 포르투갈은 식민지 혹은 영국과의 해상 교역이 필수적인 나라였다. 포르투갈은 국가 주요 산업이 통제받게 되자 살기 위해 나폴레옹에게 반기를 든다.  


  1807년 10월 나폴레옹은 앙도슈 쥐노로 하여금 2만 4천의 병력을 동원해 이베리아 반도로 진격하게 했다. 포르투갈이 나폴레옹의 대군을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쥐노는 1807년 10월 31일 리스본에 손쉽게 입성한다. 포르투갈의 국왕 마리아 1세는 영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브라질 식민지로 도망갔다. 포르투갈 본토를 점령하자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아서 웰즐리


  프랑스가 이베리아를 장악하자 반도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나폴레옹은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전쟁에 대해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전선은 여전히 동부 전선이었다. 그렇기에 주력 부대는 오스트리아-러시아와의 전쟁에 투입되었다. 이베리아 반도 원정 군은 대부분 신병 위주로 구성했다. 전쟁 경험이 적은 신병들이 이베리아 지형에서의 작전 수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동시에 협력관계인 스페인과 나폴레옹의 관계도 틀어지기 시작한다.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4세는 평소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시민들은 국왕을 폐위시키고 후임으로 왕세자 페르난도 7세가 즉위한다. 이를 지켜본 나폴레옹은 스페인 내정간섭을 위해 페르난도 7세를 프랑스로 구금시키고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의 국왕으로 즉위시킨다. 이 조치는 스페인 국민들의 큰 반발을 사게 된다. 결국 수많은 마드리드 시민들은 왕국에 보여 프랑스에 항의를 하기 시작하는데, 마드리드에 있는 프랑스군 사령관 조아킴 뮈라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병력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진압한다. 마드리드에서의 항쟁을 진압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모든 스페인 국민이 납득한 건 아니었다. 스페인 역시 프랑스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제 포르투갈과 스페인 전역에서 일어나는 대프랑스 항쟁에 직면하게 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동시에 프랑스에 반기를 들자 호시탐탐 반도 진입 기회를 노리던 영국은 인도 총독 출신 지휘관 아서 웰즐리를 이베리아 반도에 파견한다.


  1808년 8월 21일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군은 앙도슈 쥐노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전역이 시작된다. 이 패전으로 앙도슈 쥐노는 육군 원수에서 축출된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직접 12만의 군대를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로 침공한다. 유능한 영국군 지휘관 아서 웰즐리는 증원된 프랑스군을 막아내기 위해 본국에 병력을 요청했지만, 영국은 그가 너무 젊다는 이유로 그를 지휘관에서 축출시키고 존 무어를 새로운 지휘관으로 임명한다.

  영국군 지휘관 존 무어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전혀 막아내지 못한다. 나폴레옹의 군대에게 연전연패를 당하며 마드리드를 내주게 되었고, 조제프에 대항해 만들어진 스페인 임시정부는 세비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된다. 존 무어 또한 전쟁 수행 도중 전사를 하게 된다. 영국은 존 무어의 후임으로 다시 아서 웰즐리를 보낸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승기를 잡았다 판단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러시아와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프랑스 군에서 가장 능력이 좋은 앙드레 마세나를 이베리아 반도 지휘관으로 임명한다.


  영국의 신성 유망주 아서 웰즐리와 나폴레옹 군의 4번 타자 앙드레 마세나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앙드레 마세나



리스본 (Lisbon) : 포르투갈의 수도


  

  50대의 백전노장 앙드레 마세나는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기 전인 프랑스혁명 전쟁 시기부터 군공을 쌓아온 베테랑이었다. 반면 30대의 아서 웰즐리는 비록 전쟁 수행 경험은 많지 않았지만, 이미 인도와 이베리아 반도에서 지휘 능력만큼은 인정받고 있던 영국군 최고의 유망주 지휘관이었다. 나폴레옹이 마세나를 이베리아에 배치시킨 건 그만큼 반도에서의 전쟁 수행 난이도가 어렵고, 동시에 그를 상당히 신뢰하고 있었다는 걸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베리아 반도는 프랑스군의 무덤으로 유명했는데, 그 이유는 앞서 설명했던 포르투갈 군인들의 게릴라전 수행 때문이었다. 바다와 산지로 둘러싸인 독특한 지형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동전에서 자신 있는 프랑스는 이곳에서 유난히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는 포르투갈 소총수들이 프랑스 군대를 저격했다. 바다에서는 웰즐리에게, 육지에서는 게릴라 부대에게 지속적으로 당하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앙드레 마세나 본인의 건강도 좋지 못해 제대로 원정군을 활용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안 좋은 여건 속에서도 앙드레 마세나는 리스본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스페인-포르투갈 국경지대의 요새인 알메이다 점령을 시작으로 리스본을 향해 나아갔다. 나폴레옹은 당초 약속했던 병력보다 훨씬 적은 6만 5천의 병력을 마세나에게 지원해줬다. 당시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많은 병력을 배치할 수 없었다.


  포르투갈 왕국은 15세를 넘긴 모든 남성들을 징병하고 무기를 쥐어줬다. 프랑스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여력이 없었기에 게릴라전으로 일관한가. 마세나 역시 이런 점을 잘 알았기에 진격로에 있는 모든 마을을 제거시키며 ㅈㄴ격한다. 점령한 도시의 씨를 말려놔야 후방에서 게릴라군에 의해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진격하다 보니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을 벌어놓은 웰즐리는 리스본 방어를 위한 시간을 벌게 되었고 그사이 웰즐리는 리스본 방어를 위한 거대한 축선을 만든다. 이 것이 바로 '토레스-베르다스 선'이다.


토레스-베드라스 선 (출처: https://fltv.weebly.com/maps-of-lines-of-torres-vedras.html)


  리스본의 독특한 지형은 수비하기에 상당히 용이했다. 리스본 근방의 여러 도시를 이은 토레스-베드라스 선을 기준으로 방벽을 쌓아 올려 프랑스 군대를 상대로 농성전을 벌일 심산이었다. 토레스-베드라스에 도착한 마세나는 거대한 방벽이 갑작스럽게 올라가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불과 3년 전 리스본을 침공할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황한 마세나는 토레스-베드라스 선에 올라가 있는 방벽을 보고 부관에게 소리쳤다.




어찌 저런 방벽이 건설되고 있는 동안에 나에게 하나의 보고도 오지 않은 것이냐!



  당황했지만 마세나는 다시 정신을 차려 토레스-베드라스 선을 공격했다. 수개월간에 공격한 끝에 마세나는 방벽을 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물리적, 시기적 타격이 컸다. 마세나는 군대를 절반 이상 잃었다. 이미 오랜 전쟁으로 식량은 전부 바닥이 나있던 상태였다. 결국 마세나는 리스본 진격을 포기하고 돌아가기로 한다.

  1811년에 이르러 마세나는 퇴각했다. 웰즐리는 이를 놓치지 않고 마세나의 군대를 공격했다. 하지만, 마세나는 놀라운 성과를 발휘하며 웰즐리의 군대를 막아내는 데 성공한다. 리스본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며 알메이다로 돌아가는 데 성공한다. 나폴레옹은 마세나에게 패전의 질책을 따로 묻지 않았다. 마세나는 그의 오랜 친구임과 동시에 가장 믿는 사령관이었다. 나폴레옹 이미 리스본 원정의 성공 가능성이 어렵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토레스-베드라스 선까지 무너뜨린 거 자체가 놀라운 성과였다.

  

  반대로, 아서 웰즐리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 앙드레 마세나의 대군을 막아냈다. 결국 웰즐리는 끝까지 프랑스 군을 괴롭혔고, 오랜 시간의 노력 끝에 웰즐리는 알메이다 요새를 다시 수복하면서 나폴레옹의 이베리아 점령을 실패로 돌아간다.  



카를 루트비히



다뉴브 강(Danube River) : 총길이 2,860km의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강



  나폴레옹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게릴라 군에 의해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가만히 있을 오스트리아가 아니다. 프란츠 2세는 복수를 위해 5차 대프랑스 동맹을 다시 모집한다. 그러나 이미 나폴레옹의 군대에게 신물이 나있던 많은 나라들이 참여에 난색을 표한다. 프로이센과 러시아 모두 나폴레옹의 군대를 무적이라 생각해 대프랑스 동맹 가입을 거절했다. 결국 5차 대프랑스 동맹에는 이베리아에서 싸우고 있던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고 대륙 봉쇄령으로 고립된 영국 만이 참여했다. 이는 유럽 내륙에서 오스트리아를 도울 동맹국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전의 대프랑스 동맹이 프랑스와 주변국들의 싸움이었다면 5차 대프랑스 동맹은 오스트리아와 주변 괴뢰국-라인 동맹 국가들 사이의 싸움이었다.


  프란츠 2세의 동생 카를 루트비히 대공이 오스트리아의 총사령관에 올랐다. 카를 대공은 프랑스군을 상대하기 위해 바이에른, 이탈리아, 바르샤바로 나누어 진격한다. 1809년 4월 9일 나폴레옹의 18만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향해 출격한다. 나폴레옹은 카를 대공이 병력을 분산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빈을 함락한 이후에 각개 격파하는 전략을 세웠다. 카를 대공은 에크뮐에서 나폴레옹을 막으려 했으나 전투에서 패배하고 퇴각한다. 프랑스 군은 오스트리아를 가로질러 흐르는 다뉴브 강을 따라 강변에 위치한 요새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리며 손쉽게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무혈입성한다.

  카를 대공은 나폴레옹이 빈을 점령하는 동안에 다뉴브 강을 건너 퇴각했다. 다뉴브 강을 건너 공격해 들어올 것이라 생각하고 그들의 도하를 방해하기로 한다. 나폴레옹은 다뉴브 강에 있는 로바우 섬을 점령하고 이곳을 기반으로 다뉴브 강을 건너려 했다. 나폴레옹은 도하를 위해 가교 설치를 시도했는데, 카를 대공은 다리를 세울 때마다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 박살내고 도망가기를 반복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앙드레 마세나에게 아스페른으로 군대를 몰고 가 다뉴브 강의 도하 지점을 늘리려는 계획을 세운다. (시간 상 리스본에서의 마세나보다 아스페른 전투의 마세나가 이전이다.) 1809년 5월 21일 마세나는 명령에 따라 아스페른을 점령한다. 오스트리아 군대는 곧바로 아스페른으로 향한다. 하루 종일 전투를 한 끝에 마세나는 오스트리아 군을 가까스로 막아내는 데 성공한다. 나폴레옹 군의 4번 타자 다운 활약이었다. 밤이 되어서야 전투는 잠잠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날 오스트리아의 주력 부대를 이끌고 있던 로젠베르크가 프랑스 측의 예상 경로였던 아스페른이 아닌 에슬링으로 돌아가 기습 공격을 시도한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에슬링 방어 담당자 장 란은 다급하게 구원을 요청했다. 나폴레옹이 이를 듣고 에슬링으로 향했지만, 이는 카를 대공의 함정이었다. 카를 대공은 모든 예비 병력을 긁어 모아 나폴레옹의 주력 부대를 막아섰다. 주력부대가 빠져나간 아스페른과 카를 대공의 반격을 받은 에슬링 모두 공격을 받는 실정 놓인 것이다. 이전부터 수적 열세를 각개격파로 극복하며 재미를 봤던 나폴레옹이었지만, 카를 대공은 역으로 수적 우위를 활용해 양동작전을 펼친 것이다. 오스트리아 군대를 너무 손쉽게 봤던 나폴레옹의 실책이었다. 에슬링의 방어를 맡던 장 란은 무려 2만 명의 군대를 잃고 큰 부상을 입었다. 간신히 살아서 본국에 돌아갔지만 한 달 뒤 숨을 거둔다.   


  나폴레옹의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패배는 10여 년 동안 단 한차례도 프랑스를 상대로 이기지 못한 오스트리아가 드디어 첫 승리를 거두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오스트리아를 쉽게 생각한 나폴레옹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고, 그간 프랑스에게 당했던 나라들에겐 큰 희망을 안겨준 것이다.


  다급해진 나폴레옹은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와 오퀴스트 마르몽에게 군대를 이끌고 로바우 섬에 집결하라고 지시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패주 하는 나폴레옹의 군대



유럽 (Europe) : 50여 개국이 속해있는 지구 6 대륙 중 하나



  1809년 7월 5일 로바우 섬에 계속 대기하던 나폴레옹의 군대는 오스트리아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참모장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를 중심으로 프랑스 군은 다시 다뉴브 강 도하를 시작한다. 오스트리아 지휘부는 아스페른-에슬링에서 좀 더 뒤에 위치한 바그람에서 수비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군대를 움직였다. 프랑스 군은 드디어 도하에 성공했고 오스트리아 주력 군대를 섬멸시키기 위해 카를 대공이 있는 바그람으로 향했다.

  

  이미 승리를 맛본 오스트리아의 반격은 거셌다. 카를 대공의 지휘 아래 오스트리아 군은 프랑스 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베르티에와 다부의 주력 부대는 맹렬히 공격했지만 용맹한 오스트리아 경기병을 넘지 못했다. 프랑스 측의 성과가 지지부진했다. 사실 나폴레옹은 바그람 공략이 쉽지 않을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결과를 뒤집어 버릴 수 있는 히든카드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작센에 위치한 장바티스트의 군대다. 사흘 전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바그람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양 군의 전세가 치열하니 베르나도트의 군대가 오면 충분히 이 상황을 타계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베르나도트의 작센 군단은 야간 기습을 시도했고 당황한 오스트리아 군대에게 큰 피해를 준다. 그리고 바그람 시내를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히든카드가 아닌 함정카드였다.


  후방에서 온 작센 군단을 오스트리아의 원군으로 오해한 프랑스 여단이 공격하면서 아군끼리 서로 포격하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작센 군단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하여 거의 다 점령한 바그람을 버리고 도망쳤다. 아군 간의 어이없는 포격으로 다 잡을 승리를 놓쳐버린 것이다. 베르나도트 군이 바그람을 점령할 거라 생각한 나폴레옹은 결과를 듣고 허무해했다. 실정을 알리 없는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를 질책했다. 이번에도 둘의 지긋지긋한 악연이 재현되었다. 화가 난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게 아더클락의 수비를 맡기고 다부와 함께 직접 주력 부대를 이끌고 바그람으로 향했다.



바그람 전투에서의 나폴레옹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전투 베테랑 카를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주력 부대는 결사항전의 자세로 전쟁에 임했다. 결국 카를 대공의 군대는 수비에 성공하고 반격을 위해  아더클락으로 향한다. 이에 나폴레옹은 카를 대공을 저지하고 동시에 아더클락 수비를 지원하기 위해 앙드레 마세나를 파견했다. 아더클락에 있을 베르나도트와 합류하면 방어도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는 아더클락에 있지 않았다.


  베르나도트는 어디로 간 것일까? 나폴레옹은 장바티스트에게 작센에서 바그람까지 사흘 안에 오라는 말도 안 되는 속도의 진군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베르나도트는 이를 성공시켰다. 그리고 같은 아군 여단의 오인으로 피해를 입어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를 질책했다.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비난이 부당하다고 생각해 태업을 한 것이다. 그는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요충지 었던 아더클락을 버리고 떠나는 실수를 저질렀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나폴레옹은 다시 베르나도트에게 아더클락 탈환을 지시했지만 이미 주요 거점을 카를 대공에게 빼앗긴 프랑스 군은 패전하고 물러난다.


  이번에도 나폴레옹을 구원한 건 프랑스 군의 에이스 앙드레 마세나였다. 그는 어깨에 총상을 맞는 와중에도 수적 열세를 극복하며 아더클락 탈환에 성공하는 기적을 연출한다.


  결국 모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게 된 카를 대공은 황제 프란츠 2세가 퇴각에 성공한 것을 보고 바그람 수비가 의미 없다고 판단해 퇴각한다. 나폴레옹은 카를 대공의 퇴각을 알아차렸지만 추격을 하기엔 손실이 너무 컸다. 자칫 했다가 오스트리아에게 반격의 기회를 줄지도 몰랐다. 바그람에서 퇴각 카를 대공은 나폴레옹에게 휴전 요청을 한다. 더 이상 병력을 동원하기 어려운 나폴레옹 역시 휴전에 동의하며 5차 대프랑스 동맹도 끝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진 쉰브룬 조약으로 프랑스는 역대 최고의 영토를 손에 넣는다. 사실상 유럽 대륙 전체를 장악하는 놀라운 업적을 기록한다.


  러시아, 오스만 제국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영국을 제외한 모든 유럽이 나폴레옹의 손아귀 안에 들어간다. 가히 나폴레옹의 최전성기라 할만한 시기였다.


1812년의 프랑스 제국 세력권


  결과적으로만 보면 오스트리아는 또다시 영토를 손실했다. 언뜻 보기에 성과가 없어 보였지만 사실 5차 전쟁의 파급력은 컸다. 근 10여 년간 무적이라고 생각한 나폴레옹의 명성에 흠집을 낸 것이다. 아스페린-에슬링 전투에서의 참패는 그동안 나폴레옹에 힘에 눌려서 반격할 생각도 못한 주변국들에게 자극제를 부여한다. 거기에 이듬해 이베리아 반도에서까지의 패전이 겹치자 나폴레옹을 이길 기회를 잡고 있던 나라들은 힘을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대륙 봉쇄령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 중 하나이자 두 번이나 큰 치욕을 겪은 러시아 제국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의 복수가 시작된다.

작가의 이전글 나폴레옹 전쟁 (4) - 깨어난 잉글랜드 포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