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ironde Jan 11. 2022

나폴레옹 전쟁 (6) - 러시아의 복수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그리고 6차 프랑스 동맹

러시아 원정에서 패주 하는 나폴레옹



러시아 (Russia) : 동유럽과 북아시아에 걸쳐 있는 유럽 GDP 4위의 연방제 국가



  4차 대프랑스 동맹 직후 맺어진 탈지트 조약에 의해 프랑스와 러시아는 동맹관계였다. 하지만 양국은 이미 수차례의 전쟁으로 사이가 안 좋았기에 임시 동맹관계였다. 여기에 프랑스가 대륙 봉쇄령을 실시하자 잠시 봉합되었던 양국의 관계가 다시 벌어지게 된다.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에게 바르샤바 공국의 영토 할양과 대륙 봉쇄력 해제를 요구했다. 쿠라킨 공작을 나폴레옹에게 보내 이를 요구했지만, 나폴레옹은 공작 면전 앞에서 러시아를 직접적으로 비난하며 양국의 사이는 벌어질 대로 벌어진다. 

  프랑스의 국무장관 샤를 모리스 탈레랑은 러시아 원정을 끝까지 말렸지만, 결심을 한 나폴레옹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812년 4월 결심을 한 나폴레옹은 무려 6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원정 전진기지 바르샤바로 향한다. 나폴레옹은 폴란드인에게 원정을 성공한다면 독립 국가 설립을 약속하자, 모든 바르샤바의 성인 남성들이 원정에 참여한다. 프랑스 연합군은 러시아가 간신히 모은 약 37만의 수비 병력을 상대하게 된다.


  1812년 6월 24일 폴란드-러시아 국경에 위치한 네만 강을 건너며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시작된다.


  나폴레옹의 목표는 단 하나, 속전속결이었다. 러시아 군이 나타나는 지점이 있으면 재빠르게 공세를 펼쳐 섬멸하려고 했다. 그들의 주력 부대만 찾아서 괴멸시키면 자연스럽게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군은 계속 주력부대의 결전을 피했다. 러시아의 총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는 계속 동쪽으로 군대를 퇴각시키며 결전을 계속 미뤘다. 나폴레옹은 무리하게 전진을 시켜서라도 러시아 군대를 공격하려고 지속적으로 시도했다.

  드디어 양군은 스몰렌스크에서 맞붙는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군의 지휘를 맡은 드 톨리는 또다시 전면전을 피하며 피해를 최소화시키며 퇴각한다. 원수 표트르 바그라티온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공세를 주장했지만 쿠투조프를 계속 거절했다. 모스크바를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고 명령했지만, 백전노장 미하일 쿠투조프는 차르의 명령을 따를 생각이 크게 없었다. 실제로 둘을 차르와 총사령관 관계였지만 사이가 좋지 못했다.


  결국은 쿠투조프도 방법이 없었다. 나폴레옹은 무서운 속도로 모스크바를 향해 질주했다. 결국 양국은 맞붙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모스크바의 서부 130km 정도에 위치한 보르디노에서 나폴레옹의 대군과 쿠투조프의 러시아군이 만난다.



러시아군 총 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



모스크바 (Moscow) : 러시아의 수도이자 유럽 인구 최대의 도시



  1812년 9월 7일 보로디노에서 양군의 전투가 시작된다. 루이 니콜라 다부가 이끄는 프랑스의 선봉대가 포문을 열었다. 다부의 포병대는 보로디노 시내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러시아는 프랑스의 포병에 맞불을 놓는 작전으로 똑같이 포병대를 동원한다. 양측의 포격전은 무려 2시간이 넘게 진행되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양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 양동작전을 지시해 상황을 타계하려 했다. 미셸 네 역시 러시아 군이 쏘는 포탄 속으로 들어가는 대담한 작전을 감행하며 러시아 군대의 진영을 무너뜨리려 노력했다.

  러시아의 드 톨리가 군대를 이끌고 반격하기 시작한다. 드 톨리의 러시아 군의 진격으로 프랑스가 다시 밀리기 시작한다. 나폴레옹의 참모진들을 승리를 굳히기 위해 황제의 근위대를 투입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하지만 전장의 상황을 정확히 전달받지 못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근위대 투입을 거절한다. 승리의 기회를 놓친 프랑스였지만, 러시아 군 역시 별 방법이 없었다. 하루 종일 이어진 포격전은 쿠투조프의 퇴각 명령으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애초에 러시아는 전쟁에서 밀려서 퇴각한 것은 아니었다. 양군이 무의미한 학살을 하고 있었기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보르디노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전략적인 성과는 없었다. 나폴레옹 군이 얻은 건 겨우 폐허가 된 도시를 손에 넣어봤자 이득이 될게 아무것도 없었다. 보르디노의 학살에 신물이 난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향한 진군 명령을 하루 동안 내리지 못한다. 러시아군과 프랑스군 모두 약 5만 명의 병력 손실을 기록했다. 단일 전투로 무려 10만여 명이 사라진 것이다. 일주일이 지난 9월 15일 모스크바에 입성한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성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눈앞에 보인 모스크바는 차르는 커녕 아무런 사람과 물자가 없는 텅 빈 도시였다. 게다가 입성 직후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하며 시내 전역이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남아있던 러시아인들이 의도적으로 방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 러시아 인들을 모두 죽이라 지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지시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의 불길을 더욱더 커져만 갔다. 무려 도시 전체의 4분의 3이 화재로 인해 사라졌다. 러시아 제국의 옛 수도 모스크바는 그렇게 폐허로 돌변했다. 나폴레옹의 약탈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배고픔에 굶주린 프랑스 병사들을 도시를 약탈하기 시작하며 시내는 무법지대로 변해갔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있으면 차르가 협상 테이블로 나오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차르는 나폴레옹의 요구에 묵묵부답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러시아의 군대보다 무서운 추위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텅 빈 도시에서 식량은 점차 떨어지고 아무것도 없는 유령 도시에 버티는 것이 점차 힘들어져갔다. 병사들의 사기도 최악으로 떨어졌다.


불타는 모스크바에 입성하는 나폴레옹


  1812년 10월 19일 나폴레옹은 후퇴를 지시한다. 러시아 국경을 넘은 프랑스 군대는 60만 중 약 45만으로 추산되는 데, 그중에서 모스크바에서 출발한 병력은 9만 명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추위에 떨고 있는 프랑스 군은 엄청난 양의 짐을 가지고 가느라 제대로 속도나 나지 않았다. 러시아 쿠투조프는 여기서 굉장히 소심한 태도로 일관한다. 그는 프랑스 병사 만병의 목숨보다 러시아 병사 한 명의 목숨이 더욱 소중하다고 강조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쿠투조프에 이런 행동에 상당한 불만이 많았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제대로 갚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반면 나폴레옹은 이미 추위와 전쟁하고 있었다. 이는 러시아 군에게 입은 피해보다 더욱 참혹했다. 식량이 없어 주변에 조금이라도 먹을 만한 것이 있으면 주워 먹었고, 걸칠만한 것이 있으면 바로 입었다. 병사들의 시체는 쌓여 갔고, 병사들은 동료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옷을 빼앗아 입고 시체를 내던져버리고 갔다.



  러시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자 본국을 비롯한 점령지 곳곳에서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난다.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12월 5일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조아킴 뮈라에게 뒷일을 맡기고 본국으로 빠르게 도망쳤다. 남은 병력을 이끌고 퇴각하던 뮈라 마저 나폴리 공국으로 도망가고 나폴레옹의 양아들 보아르네가 간신히 수습해 바르샤바 공국의 영지로 돌아간다. 살아 돌아온 프랑스 군은 60만 중 겨우 9만에 불과했다.



  러시아는 끝까지 프랑스 군을 추격했다. 퇴각에 성공하자 그제야 양국은 무기한 정전 협상을 맺는다. 그렇게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실패로 돌아간다. 나폴레옹을 믿고 원정에 나선 폴란드인들은 역으로 러시아의 공격을 받는 처지가 된다. 결국 러시아는 바르샤바 공국을 멸망시키며 폴란드 인들은 다시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나폴레옹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오스트리아에서의 패전, 이베리아 반도 패전, 그리고 러시아 원정 실패. 세 번의 패배를 맞본 나폴레옹을 가만 둘 주변국들이 아니었다. 이제 프로이센-러시아-영국은 다시 뭉쳤다. 프랑스와 혼인 동맹을 맺은 오스트리아는 상황을 지켜봤다. 6차 대프랑스 동맹의 체결이 시작되었다.


바우첸에서 절반의 성공을 거두는 나폴레옹



바우첸 (Bautzen) : 독일 작센 주 동부에 위치한 인구 4만 명의 소도시



  1813년 3월 17일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포고 한다. 프로이센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서 너무 큰 손실을 봤기에 무리하게 징병을 해서 그 수를 채우려 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는 주변 점령국들의 반발에 직면한다. 나폴레옹은 미셸 네를 원수로 임명하고 양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 같이 독일 방면의 영토 수비를 맡긴다. 하지만 보아르네는 기대와 달리 쿠투조프의 계책에 지속적으로 밀리며 후방으로 밀려난다. 보아르네는 베를린 마저 빼앗기고 수비 전략을 재수정하게 된다.

  대프랑스 동맹군은 미셸 네가 이끄는 프랑스 군이 주력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네의 부대를 괴멸시키려 했다. 5월 2일 프로이센의 사령관 블뤼허와 러시아의 사령관 표트르 비트켄슈타인이 이끄는 연합군이 미셸 네의 군단을 뤼첸에서 기습 공격한다. 하지만 미셸 네는 대응을 잘했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나폴레옹의 근위대와 포병대가 연합군을 공격해 위기를 벗어난다. 당황한 동맹군은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퇴각한다. 하지만 프랑스 군 갑작스럽게 밤이 찾아와 추격을 포기한다. 프랑스에게는 전쟁을 뒤집을 역전의 절대적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다행히 원수 중 한 명인 니콜라 우디노에게 베를린 근방을 수복하라고 명령해 드레스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은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블뤼허와 비트켄슈타인의 연합군은 나폴레옹의 군대를 피해 퇴각했는데, 소식을 들은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격노하며 퇴각 중지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바우첸 마을에 멈춰 프랑스 주력 부대를 상대하라 지시한다. 전쟁에 경험이 없던 차르의 명령은 상당히 위험했다. 전장에선 지휘관에 말을 들어야 했음에도, 바우첸에서 잘못 상대했다가 연합군의 주력 부대가 그대로 전멸당할 위기에 노출될 수도 있다.

  나폴레옹은 바우첸에 연합군이 머문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포격대를 활용해 연합군을 공격한다. 미셸 네를 비롯한 나폴레옹의 지휘관들은 각각 좌, 우익의 여러 군단을 담당해 연합군을 사방에서 포위하라 지시했다. 바우첸에서 발이 묶인 연합군은 프랑스의 빠른 기동성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뤼첸에서 아쉽게 놓친 역전의 기회를 다시 잡아 다시 한번 연합군의 목숨을 끝장낼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원수 미셸 네는 나폴레옹이 지시한 포인트를 잘못 이해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연합군은 재빨리 미셸 네가 놓친 포인트로 퇴각해 포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의 꿈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미셸 네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은 나폴레옹의 반격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수많은 패전과 피로가 쌓인 프랑스 병력으로 아직까지도 놀라운 성과를 보이며 저항하는 모습이 그저 놀라웠다. 병력도 우세했음에도 아직까지 프랑스 군이 버틸 힘이 남아 었다는 사실은 연합군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과거 영토를 회복하는데 만족한다.

  반대로 프랑스는 승리에 대한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 뤼첸과 바우첸 전투에서 이겼으나 전략적 성과는 없었다. 오스트리아-러시아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연합군의 주력부대는 고스란히 퇴각에 성공해 손실이 크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는 프랑스 군에서 미셸 네의 판단 미스로 불운이 겹치며 패배한다. 이는 마치 나폴레옹의 능력 여하와 별개로 프랑스가 패전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완전히 틀린 의견이라 할 순 없지만 지휘관이 이 상황까지 자초하는데 분명한 책임이 있다. 1810년대에 이르러 나폴레옹은 정치적으로 수많은 실책을 저지른다. 이런 실책은 나폴레옹의 수많은 원수들은 물론 병사들에게 까지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무리한 원정과 연이은 패전, 수없이 진행되는 징병으로 인해 병사들의 수준은 급격히 떨어졌고 보급마저 제대로 되지 않는 프랑스 군은 총체적 난국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반드시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다.

  마치 축구 경기로 비유를 하자면,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서 수비수만 교체해서 잘 되기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전체적인 팀 경기력이 개선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수비수에게 강력한 수비를 요구하게 된다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기적으로 몇 번의 수비는 성공할지 몰라도, 공격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다면 수비 부담음 점점 가중되고 수비수간의 소통 오류 혹은 치명적인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다. 당시 프랑스군의 상황 역시 내부 상황이나 전체적인 군대의 운용이 전혀 개선되지 않고, 신규 병사 및 지휘관의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나폴레옹의 전술로만 버티려고 하다가 결국 실책이 나오게 된 것이다.


  결국 나폴레옹은 전쟁 수행 준비가 덜 되어있다고 판단했다. 프로이센-러시아 군대 역시 평범한 공격으로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연합군은 프랑스와 혼인 동맹을 맺은 오스트리아가 대프랑스 동맹에 합류해야 전쟁에서 승리를 잡는다고 판단했다.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로 돌입한다.



  

  

작가의 이전글 나폴레옹 전쟁 (5) - 보이지 않는 위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