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치히 전투와 나폴레옹의 복귀
1813년의 휴전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전쟁에 돌입한다. 나폴레옹과 사이가 좋지 않던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스웨덴의 방어를 담당하게 했다. 나폴레옹의 원수였음에도 그는 스웨덴 국민의 여론에 못 이겨 프랑스에 선전포고 한다.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군대를 이끌고 베를린을 침공해 드레스덴 수비를 맡던 니콜라 우디노를 무찌른다. 그렇게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는 이제 서로 칼을 겨누는 사이가 되었다. 이후 카트바흐와 토플리츠에서 연이어 패전을 겪으며 나폴레옹은 고립되어갔다. 결국 나폴레옹은 본인이 직접 나서서야 드레스덴으로 이동해 연합군 4만 명을 격파해내는 성과를 이룬다.
10월에 이르자 나폴레옹의 군대는 완전히 고립된다. 베르나도트의 스웨덴 군대,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 군대, 레온티 베니헤센이 이끄는 러시아 군대, 슈바르첸베르크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군대. 4개국의 주요 병력들이 속속들이 모이고 있었다. 마치 해하 전투를 앞둔 초나라 마냥 모든 병력의 포위를 받게 된 것이다. 나폴레옹은 작센 지방의 최대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이들을 막아서며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연합군 : 36만 (추정)
프랑스군 : 19만 (추정)
10월 10일 가장 먼저 라이프치히에 도착한 오스트리아군의 슈바르첸베르크는 라이프치히 남쪽에서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조아킴 뮈라가 앞장서 그를 막아서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도착한 스웨덴의 베르나도트의 군대는 미셸 네가 막아섰다. 프랑스와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가 이미 최후의 격전지였음을 직감하고 있었기에 온 힘을 다해 막아서고 있었다. 나폴레옹과 뮈라는 남쪽의 오스트리아 주력 부대를 막는데 힘썼다. 그리고 북쪽의 스웨덴과 프로이센 군대는 미셸 네와 니콜라 우디노에게 수비를 맡겼다.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선제공격으로 1813년 10월 16일 라이프치히의 전투가 시작된다. 양국은 시간을 맞춰 프랑스 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북부 지방 수비를 맡은 오퀴스트 마르몽은 매복 전략과 빠른 대응을 통해 프로이센의 군대를 막아선다. 결의에 찬 프랑스 군대의 수비는 거셌다. 상황을 지켜보던 나폴레옹은 수비 작전이 예상외로 잘 들어맞자 조아큄 뮈라에게 기병대를 편성해 프랑스-이탈리아 연합군으로 구성된 기병대를 투입하여 적진을 무너뜨리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조아킴 뮈라는 밀집 방진을 선택해 연합군을 공략했다. 하지만 오히려 연합군의 기병대가 순식간에 뮈라의 기병대로 돌진해 방진을 무너뜨린다. 잘 먹혀들어가던 프랑스의 수비 전략은 한순간에 무너졌고, 나폴레옹 군의 허점이 발견되었다. 이윽고 러시아의 근위병과 오스트리아의 척탄병이 투입하여 남부에 형성되어있던 프랑스의 방어진을 하나씩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북부 전선에서 역시 오퀴스트 마르몽의 군대가 블뤼허의 경기병에게 패배하면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10월 16일 전투에 첫 시작을 뼈아프게 시작한 나폴레옹이었다.
10월 17일, 러시아의 작켄 장군이 동쪽의 수비를 담당하던 바르샤바 공군의 군대를 괴멸시키면서 전쟁이 재개된다. 이윽고 베르나토드의 스웨덴과 베니헤센의 러시아 주력군이 드디어 라이프치히에 도착한다. 이제 4개국의 주력부대가 모두 도착하여 나폴레옹의 목을 조였다.
1813년 10월 18일 포위망을 완성한 연합군은 총공격을 개시한다.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평화 협정을 제안한다. 10년 만의 대승의 기회를 잡은 연합군이 이를 받아줄 리 없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동안 소극적인 태도로 전쟁에 임한 스웨덴의 베르나도트 역시 승기를 잡았다 생각하고 총공세를 펼친다. 4개국이 모든 병력이 압박하기 시작하자 바하우를 비롯한 작센 지방 주변의 대다수의 도시를 잃고 밀리게 된다.
러시아 군을 이끈 드 톨리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라이프치히로 진군하려 했지만 차르의 등쌀에 못 이겨 라이프치히의 남동쪽에 위치한 프로프스타이드를 공격한다. 러시아 군은 동쪽에서 계속 압박하기 시작하면 베르나도트의 스웨덴 군이 지원을 해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가 누구인가? 정오가 지날 때 까지도 스웨덴의 지원은 오지 않았다.
프로이센의 군대가 마르몽의 사단을 누르기 시작하자 그제야 베르나도트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군대는 라이프치히 시내에 틀어박혀 최대한 방어선을 무너뜨리지 않고 있었다. 전쟁은 장기화될 것처럼 보였다.
작센 왕국의 5천여 명의 병사가 돌연 프로이센 군대에게 항복하게 된다. 작센 왕국은 그동안 나폴레옹의 라인 동맹 일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고향에서 일어나는 이 전쟁에 대해 점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작센 왕국이 항복하자 뒤이어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군대 역시 항복하기 시작한다. 전세는 급격하게 기울었다.
작센과 뷔르템베르크의 이탈로 나폴레옹은 전투의 패배를 직감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18일 저녁 프랑스 군대에게 엘스터 강을 건너 본국으로 귀환할 것을 지시했다. 니콜라 우디노 원수에게 퇴각이 들키지 않도록 후방을 맡기고 떠났다. 우디노의 부대는 라이프치이 시가전에서 연합군을 상대로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기에 연합군은 퇴각을 다음날 7시가 돼서야 눈치채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엘스터 강을 건너면서 몽포르 대령에게 엘스터 강 다리의 폭파 임무를 맡기고 떠난다. 몽포르 대령은 19일 정오가 지나서 다리를 폭파해야 하나 만약 프랑스 군이 엘스터 강을 다 넘어오지 않은 상황이면 이들이 모두 퇴각한 이후 다리를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막중한 임무를 지시받은 몽포르 대령은 부사관 한 명에게 이를 맡기고 떠난다. 몽포르 대령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선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일개 부사관 한 명이 프랑스 군의 퇴각 시점과 연합군의 추격 시점을 정확히 알리가 없었다. 나폴레옹의 맹장 니콜라 우디노가 몰려드는 연합군을 상대로 꽤나 잘 버티고 있었기에 우디노의 병력이 엘스터 강에 오는 시간은 점점 늦어져갔다.
결국, 오후 1시가 되어서 임무를 맡은 부사관은 다리의 폭파를 지시한다. 불행하게도 수많은 프랑스 군대가 아직 다리 위에 있는 상황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폭파로 인해 프랑스 군의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 중에는 나폴레옹을 따라 수많은 전과를 올린 원수 중의 한 명은 요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도 포함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출생임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의 장군이 되어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러시아와 오랜 기간 싸웠다. 그는 청년 시절 러시아의 군대에 의해 독립 폴란드 왕국의 멸망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훗날 나폴레옹이 폴란드에 입성해 러시아를 몰아내고 바르샤바 공국을 만들자 그의 열성적인 지지자가 된다. 나폴레옹이 비록 러시아 원정이 실패하였으나 여전히 충성심은 가득하여 그를 따라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조아큄 뮈라, 장 란과 더불어 나폴레옹의 원수 중 용맹함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포니아토프스키는 그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다. 현재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의 구국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직까지도 많은 폴란드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바르샤바의 대통령 궁 앞에는 그의 동상이 전시되어 있다.
무너지던 다리 위에 있던 또 다른 원수인 자크 마크도날은 간신히 살아서 헤엄쳐 엘스터 강을 건넌다. 그리고 여전히 엘스터 강 밖에서 싸우던 우디노는 돌아갈 방법이 사라졌다. 결국 우디노가 연합군에 항복하며 나폴레옹에게 있었던 3일간의 지옥 라이프치히 전투가 끝이 난다. 나폴레옹은 프랑크푸르트에 들어가 연합군과의 강화 조약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이프치히 전투로 프랑스는 무려 4만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이를 비롯해 우디노의 부대를 비롯 3만 명 이상의 병사들은 연합군의 포로로 잡히게 된다. 단치히와 드레스덴에서 버티고 있던 남은 병력 역시 항복한다. 연합군도 피해가 막심했다. 5만 명 이상의 병사가 죽거나 다쳤으며 양측 사상사를 합산하면 무려 11만 명이라고 추산된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나폴레옹은 연합군과의 휴전 협정을 제의한다. 프랑스와의 전쟁의 승리가 눈앞에 온 연합국들은 이제 조금이라도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익을 챙기기 위한 눈치싸움을 시작한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를 몰아낸 아서 웰즐리 역시 영국에 이익을 위해 프랑스 본토를 침공하기로 한다. 웰즐리의 부대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넘어오기 시작한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더 이상의 전쟁을 원치 않았다. 피해도 컸을뿐더러 자국의 활약이 가장 높은 시기였다. 게다가 영국과 러시아가 서유럽의 문제에 대해 개입하기 원하질 않았다. 문제는 나폴레옹이 너무 완강한 태도로 임해 평화 협정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폴레옹과의 협상이 틀어지자 연합군은 12월 2일 암스테르담 점령을 시작으로 스위스, 스트라스부르를 차례로 정복하며 나폴레옹을 압박했다. 블뤼허의 군대는 마른 강까지 도달했고, 슈바르첸베르크는 디종을 점령해 프랑스 영토를 압박했다. 이 와중에도 나폴레옹은 정신을 차리지 않고 프랑스 국민을 징병시키며 국민들을 전장에 몰아넣었다. 연합군은 1792년 프랑스 국경으로 돌아가자는 제안을 했지만 이번에도 거절한다.
결국 블뤼헤의 10만 대군이 프랑스 파리를 향해 진격한다. 1814년 2월 10일부터 14일까지 닷새 동안 프랑스 국토에서 대규모 전역이 일어난다. 풍전등화의 프랑스와 나폴레옹은 총 4번의 전투에서 놀라운 기동력을 발휘해 갓 징병된 병사 4만을 이끌고 연합군의 대군을 막아내는 기염을 토한다. 정말 전쟁에 있어서는 타고난 사람이 분명하다.
그러나 4일의 놀라운 수비로 대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월 마지막 주에 이르러 블뤼헤의 군대가 파리에 입성하기 시작한다. 파리 민심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나폴레옹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니콜라 우디노와 미셸 네, 마크 자크도날 등이 분전하는 게 마지막 저항이었다. 결국 프랑스는 쇼몽 조약을 통해 양 세력을 휴전을 하기로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 차린 나폴레옹은 또다시 거부한다. 이 행위로 프랑스 국민들은 이제 나폴레옹에게 완전히 등을 돌린다. 이미 누적 징병 국민수는 백만을 넘어가고 있었고, 무리한 전쟁 수행으로 국가 경제가 완전 작살이 난 상태였다. 결국 1814년 3월 30일 연합군은 프랑스 파리에 입성을 하게 되고 길고 길었던 나폴레옹 전쟁도 막을 내린다.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 파리에서 승리 퍼레이드를 벌이며 나폴레옹에게 굴욕을 선사한다. 10년이 걸린 피의 복수였다.
결국 프랑스 파리의 남동쪽에 위치한 퐁텐블로에서 나폴레옹과 동맹국은 강화 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나폴레옹의 부인 마리 루이즈는 아들이자 나폴레옹의 유일한 적자를 데리고 자신의 나라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간다. 마리 루이즈의 부친인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의 적자를 데리고 있으면 훗날 정치적으로 유리할 것이라 판단해 딸과 외손자를 몰래 데리고 온다.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의 아들을 귀여워하고 아끼며 키웠다. 반면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평화를 좋아했기에 그를 위험인물로 간주해 아니꼬워했다.
프랑스의 내무 장관 탈레랑은 연합군과 미리 내통하여 별다른 저항 없이 그들이 파리에 입성하도록 맞이했다. 나폴레옹은 그를 매국노라고 비판했지만, 당시 프랑스 상황을 생각한다면 누가 매국노인지는 쉽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퐁텐블로에 머물던 나폴레옹은 동맹국과의 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군대를 모아 반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외무장관 아르망 드 콜랭쿠르를 비롯해 나폴레옹의 최측근 원수인 미셸 네, 자크 마크도날, 프랑수아 르페브르 등은 프랑스 파리가 모스크바처럼 불타게 둘 수 없다며 나폴레옹을 만류했다. 나폴레옹도 그제야 납득하기 시작했다. 대신 자신의 아들을 차기 황제로 즉위시켜달라는 조건을 협상단에게 전달해달라고 요구했다. 콜랭쿠르가 이를 받아들여 협상은 간신히 재개되었고 나폴레옹 역시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했다.
약속대로 외무 장관 콜랭쿠르는 협상단에게 나폴레옹 2세 즉위를 제안한다. 나폴레옹의 마지막 발악을 보기 싫었던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그의 조건에 찬성한다. 하지만 내무장관 탈레랑을 비롯한 다른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해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체념했고 1814년 4월 6일 프랑스 황제를 퇴위하겠다고 선언한다. 약 10여 년간의 프랑스 제1제국 황제의 즉위도 끝나게 된다.
그리고 4월 16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에 위치한 작은 섬 엘바 섬으로 유배된다.
이탈리아 반도와 나폴레옹의 고향 코르시카 사이에 위치한 작은 섬인 엘바. 그곳으로 떠난 나폴레옹은 자신에 근위대에게 내년 바이올렛이 만발하는 봄이 오면 돌아오겠다고 말한 뒤 떠났다. 연합국에 의해 프랑스는 다시 부르봉 왕가가 돌아온다. 연합국의 목표는 프랑스를 혁명 이전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왕당파의 지도자이자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가 프랑스 국왕으로 새로 즉위한다.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모여 협상단들과 모여 전후 처리 과정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이제 정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약 1년 뒤 프랑스에 바이올렛이 만발하는 봄이 찾아온다. 1815년 2월 26일 전 유럽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온다. 엘바 섬으로 유배를 떠난 나폴레옹이 탈출에 성공해 프랑스 남부의 도시 칸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빈에 머물고 있던 연합국의 협상단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루이 18세는 곧바로 나폴레옹을 토벌하기 위해 칸으로 병력을 보낸다. 나폴레옹은 자신을 잡으로 온 토벌대에 앞에서 외친다.
병사들이여 그대들의 황제가 여기 있다. 어서 쏴라!
이 말을 들은 병사들은 그 자리에 나폴레옹에게 항복하여 그를 따르기 시작한다. 칸에서 그르노블로 향하던 나폴레옹이 가는 길에 제5보병연대가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주민들은 나폴레옹에게 분명 병사들이 폐하를 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제5보병연대가 나폴레옹을 막아선다. 그러가 나폴레옹은 곧바로 소리친다.
나폴레옹 : 제5보병연대여! 짐이 누군지 알아보겠는가!
병사 : 네 폐하.
나폴레옹 : 짐이 바로 자네들의 꼬마 부사관이다. 자네들 중 나를 쏘겠다고 하면 그리 하라. 짐의 가슴이 여기 있다. (꼬마 부사관은 평소 나폴레옹의 별명이다.)
그러자 병사들은 전부 무기와 백색 휘장 버리고 나폴레옹의 손을 잡으려 뛰쳐나갔다. 그리고 홀로 남은 그들의 지휘관을 향해 다가갔다. 백색 휘장은 부르봉 왕가를 상징한다.
나폴레옹 : 무슈 레자르! 짐은 자네를 잘 아네. 자네를 대령으로 만든 게 누구인가?
무슈 레자르 : 폐하입니다.
나폴레옹 : 그전에 자네를 중령으로 만든 게 누구인가?
무슈 레자르 : 폐하입니다.
나폴레옹 : 그런데도 나와 싸우기를 원하다니!
무슈 레자르 : 저는 단지 그러라는 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나폴레옹 : 그럼 결정 났군. 우리는 오늘 그르노블로 향하지만 열흘 뒤에는 파리에서 잠을 청할 것이다.
나폴레옹은 레자르에게 칼을 돌려주었고, 제5 연대는 나폴레옹과 규합하여 파리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이 진격하는 곳곳의 토벌대들은 나폴레옹을 진압하기는커녕 그에게 합류하기 시작하며 세력을 불려 나갔다. 그리고 1815년 3월 20일 나폴레옹의 군대가 파리에 입성한다. 그리고 3월 22일 자신이 머물던 프랑스 파리의 튈르리 궁전에 다시 원래의 주인이었던 나폴레옹이 돌아온다. 그는 다시 프랑스인의 황제가 돌아왔음을 전 유럽에 선포한다.
나폴레옹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