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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Jan 25. 2022

나폴레옹 전쟁 (8) - 라스트 워털루

나폴레옹의 백일 천하, 워털루 전투



워털루 전쟁



브뤼셀 (Bruxelles) : 인구 110만의 벨기에 수도



  1815년 3월 20일 나폴레옹이 돌아왔다. 루이 18세는 나폴레옹이 오기 하루 전 파리를 도망쳐 네덜란드로 도주한다. 나폴레옹을 잡아오겠다고 호언장담한 미셸 네는 오히려 그의 군대에 합류한다.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의 또 다른 니콜라 장드뒤어 술트 역시 토벌을 명령 받았으나 그대로 나폴레옹에게 투항한다.

  나폴레옹 군의 에이스였던 앙드레 마세나는 합류를 거부한다. 아무래도 이미 전세가 기운 전쟁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마세나는 루이 18세에게도 좋지 못한 인상을 주어 이후 조용히 살아간다. 부르봉 왕가로부터 밉보인 루이 니콜라 다부, 장 바티스트 주르당, 에마뉘엘 그루시 등은 나폴레옹에게 합류한다.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나폴리 왕국으로 돌아간 조아킴 뮈라는 나폴레옹에게 합류할 것이라는 뜻을 내비치지만 오히려 나폴레옹 측에서 거부당한다. 

  반대로 라이프치히에서 분전하며 마지막까지 싸운 니콜라 우디노는 루이 18세를 계속 지지한다. 나폴레옹 배신당한 전적이 있던 그에게는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나폴레옹의 양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도 합류하지 못했다 그는 바이에른 공주와 결혼을 맺고 있었다. 평소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이 드 높아 합류하고 싶었지만, 장인어른의 간곡한 부탁으로 바이에른에서 조용히 지냈다.


  나폴레옹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활약한 루이 니콜라 다부를 전쟁 장관에 임명한다. 재빠르게 병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오랜 전쟁으로 피폐했던 프랑스에게 일 년은 회복하기에 짧은 시간이었다. 병력은 쉽게 모이지 않고 있었다. 다행히 다른 유럽 국가에서 복권 소식을 듣고 동맹군을 모아가고 있었다.

  나폴레옹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다부는 군대를 계속 훈련시키며 나폴레옹을 지원한다. 다부에게 파리를 맡기고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다부는 돌아온 나폴레옹 군대의 지휘관 중 가장 믿을만한 원수였다. 그에게 중책을 맡긴 것이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 도모 차원으로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대거 채택한다. 부르봉의 왕정복고에 반대한 자유주의자들과 손을 잡아야 권력의 안정성과 정당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자유주의자들의 의견이 반영된 헌법을 만들어 시행한다. 그가 집권기에 보여줬던 정치 성향과는 전혀 달랐다.



루이 니콜라 다부



  빈에서 협상 중이던 영국과 프로이센은 다시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빈에서 연합국들의 대화는 지지부진했다. 많은 나라들이 모여 자신의 이익만 주장하고 있었다. 빈 협상단은 협의점을 찾지 못하고 계속 미뤄졌다. 빈 회의의 이장을 맡은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는 조금이라도 자국에 불리할만한 내용이 나오면 곧바로 파티를 열어 회의를 미뤘다.

  그리고 합의점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루이 18세는 나폴레옹에게 계속 암살자를 보냈다. 형에 대한 복수와 더불어 나폴레옹이 계속 살아 있는 한 자신의 지위가 불안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엘바 섬으로 향할 나폴레옹 생계 비용을 중간에서 가로채갔다. 나폴레옹은 부르봉 왕가에 대해 적개심이 커지고 있었다. 심지어 빈 회의에서도 루이 18세는 사사건건 러시아를 배척하고 영국만 옹호하여 차르 알렉산드르 1세와의 사이도 좋지 못했다. 반대로 차르는 패전국 왕인 주제에 까분다며 싫어했다. 스웨덴으로 도망간 베르나도트는 자신이 프랑스의 왕이 되는 게 옳다며 떼를 썼다. 라이프치히 전쟁에서도 소극적으로 임한 베르나도트의 적반하장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빈 회의장은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보다 못한 영국은 빈 회의를 진행시키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고자 나폴레옹에게 탈출을 종용한다. 나폴레옹 역시 이대로 따분한 유배 생활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결국, 영국의 도움을 받아 엘바 섬을 탈출해 프랑스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영국과 프로이센의 선전포고를 받은 나폴레옹은 곧바로 성명서를 발표한다. 약 12만 명의 병력을 모으는 데 성공한 나폴레옹은 아서 웰즐리의 영국군이 있는 벨기에(당시 네덜란드 령)의 브뤼셀로 향한다. 대부분의 병사가 신병이었다. 하지만 예전부터 같이 복무하던 근위대도 포함되어 있어 마냥 나쁜 전력만은 아니었다. 프로이센의 블뤼허 역시 소식을 듣고 나폴레옹의 브뤼셀 진군을 막으려 리니에서 합류한다.

  나폴레옹의 전략인 이번에도 역시 각개격파였다. 프로이센의 군대를 먼저 공략한 이후 아서 웰즐리의 본대를 상대하려 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리니에 합류한 블뤼허의 10만 군대를 상대했다. 나폴레옹은 8만 가량의 본대를 동원해 리니로 향했고, 미셸 네에게 남은 2만 5천의 병력을 주어 웰즐리의 기습 공격에 대비하도록 했다.




  나폴레옹은 리니에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의 본대를 섬멸한다. 무려 2만 5천의 프로이센 군대에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하며 자신의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받은 피해는 오직 8천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이 돌아왔다.




프로이센의 원수, 게브하르트 블뤼허



워털루 (Waterloo) : 벨기에 왈롱 지역에 위치한 소도시



  나폴레옹은 첫 전투에서 블뤼허에게 완벽한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그의 전쟁 감각이 완전히 돌아오지는 못한 듯하다. 그는 재빨리 남은 프로이센 병력에 대해 추격을 지시하지 못하고 시간을 놓쳐 퇴각을 허용하고 만다. 미셸 네의 전쟁 감각도 돌아오지 못했는지, 웰즐리의 군대에 기습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시간을 또 놓치고 만다.




  기회가 왔을 때 끝내지 못하면 반대로 위기가 맞이하는 건 전쟁의 기본이다. 결국 영국 군대는 워털루 고지로 향한다. 워털루는 프로이센의 병력을 기다리기에 용이했다. 나폴레옹이 본대 역시 워털루에 도달한다. 연합군과 프랑스의 군대가 워털루에서 일전을 준비했다.

 



  웰즐리는 프로이센이 패배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프로이센의 군대가 합류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한다. 나폴레옹의 운용 병력은 10만이었는데, 영국 군이 보유하고 있는 숫자보다 훨씬 많았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전체 병력의 3분의 1일 엠마뉘엘 그루시에게 주어 프로이센 병력을 추격하라고 지시한다. 나폴레옹은 나머지 7만의 병력을 집중시켜 웰즐리의 군대를 상대한다.

  나폴레옹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된다. 웰즐리가 포진하고 있던 워털루 고지를 프로이센 군이 합류하기 전에 점령하는 것이 가장 좋은 시나리오다. 점령 이후 프로이센을 각개 격파하려는 심산이었다. 이는 나폴레옹이 이전부터 꾸준히가 밀어온 주 전술이다. 하지만 이베리아 반도에서 탄탄히 실력을 쌓은 40대의 아서 웰즐리는 노련미까지 더해졌다. 그는 기병과 소총 부대를 숨기고 의도적으로 포병만 배치시켜 나폴레옹의 기병 운용을 유도했다.

  나폴레옹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웰즐리의 포진에 대해 의심하며 가장 방어 포진이 약해 보이는 우익을 공략한다. 하지만 이는 웰즐리의 미끼였다. 주력 부대가 우익 방어에 나서면 좌익과 중앙에 집중하는 양동작전을 계획했다. 웰즐리 역시 이에 속아들지 않으며 신중하게 움직였다. 또한 웰즐리는 좌익과 우익에 각각 프랑스 군의 이동 경로에 있는 주요 농장이 있다는 것을 파악한다. 그는 곧바로 그곳에 방어 병력을 파견한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고 영국군은 방어에 성공한다.


  오후 1시가 넘어가자 드디어 기다리던 프로이센 군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다. 반면 프로이센 본대 추격 임무를 맡은 에마뉘엘 그루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프로이센의 군대만 보였다. 나폴레옹은 소식을 듣고 프로이센의 합류를 저지하려 했다. 동시에 미셸 네에게 대규모 기병 동력을 동원해 영국군에게 공격을 지시한다. 이 돌격이 효과적으로 먹혔다. 당황한 아서 웰즐리는 곧바로 수비 진형을 수정하며 미셸 네의 돌격을 막기 위해 분전했다.


미셸 네의 기병 돌격


  미셸 네는 기병 공격이 먹혀들어 가자 다시 한번 돌격을 준비한다. 하지만 같은 수에 두 번 당할 웰즐리가 아니었다. 웰즐리는 총검을 앞세워 네을 기병대를 막아섰다. 영국군은 네의 기병대를 지속적으로 저격하고 네의 기병대가 쓰러져갔다.

  이윽고 프로이센 군이 도착 하차 나폴레옹은 자신의 정예 병력인 근위대를 기용한다. 나폴레옹의 근위대는 프로이센 군을 공격하여 합류를 제한시킨다. 오후 6시에 이르러 프랑스는 주요 거점인 농장을 점령한다. 이제 남은 건 워털루 고지에 있는 웰즐리 부대뿐이었다. 프로이센 병력도 오고 있었지만, 그에게 추격을 지시한 그루시의 부대도 남아있었다. 웰즐리는 이미 많은 카드를 소진하고 프로이센 병력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에겐 근위대와 그루시라는 두 개의 카드가 남아있었다.

  계속 실책을 저지르던 미셸 네 역시 다시 집중해 드디어 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밤이 찾아오자 웰즐리의 군대가 밀리기 시작한다. 승기를 잡았다 판단한 나폴레옹은 이제 근위대를 동원하여 웰즐리의 군대를 밀어낸다. 이윽고 나폴레옹의 군대는 드디어 워털루 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주로 이베리아에서 활동한 웰즐리는 나폴레옹의 군사적 역량은 몸소 접하게 된다. 웰즐리는 보병 대대를 산개시켜 산등성이를 내려오도록 지시한다. 나폴레옹은 웰즐리의 부대에게 추격을 지시한다. 이제 웰즐리는 목숨만 부지하면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이때, 멀리서 블뤼헤의 프로이센 본대가 워털루 고지에 도착하기 시작한다. 와브르에서 에마뉘에 그루시의 부대와 대결을 펼치고 있어야 할 본대가 워털루에 도착했다. 예상대로라면 멀리서 그루시와 전투를 벌이고 있어햐 한다. 제아무리 나폴레옹의 근위대라 하더라도 하루 종일 전쟁에 시달린 상태에서 간신히 영국군을 몰아낼 터라 이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본대를 보며 소리쳤다.




그루시는 어디에 있는가!



 

  프로이센의 지휘관 블뤼허는 이미 워털루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리니에서의 패배 직후 군대를 수습해 워털루로 향하고 있었다. 기존의 계획대로라면 블뤼허의 군대를 그루시가 추격하여 그들과 상대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블뤼허는 와브르 주변에 소규모 군대를 조직해 미끼를 만들어 놨고 이를 블뤼허의 본 대로 오인한 그루시는 와브르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시간을 낭비했다. 그루시의 3만 병력이 오지 않자 프랑스 군이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내부에서는 그루시가 배신하여 연합군에 붙었다고 생각한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결국 그루시의 오판은 블뤼허의 워털루 합류를 허용하게 만든다. 웰즐리와 나폴레옹은 서로 딱 하나의 히든카드가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웰즐리의 히든카드는 워털루에 도착했고 나폴레옹의 히든카드는 워털루에 오지 않았다. 더 이상 싸울 힘이 없던 나폴레옹은 다시 워털루 고지를 주고 근위대 대다수를 읽고 돌아오게 된다. 워털루에서의 패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프랑스 군대는 정말 사소한 차이로 패전한다.


  1815년 6월 18일 나폴레옹은 워털루에서의 마지막 전투에서 허무하게 패배한다.


프로이센 군대의 워털루 합류



세인트 헬레나 (St. Helena) : 앙골라 서쪽 해안으로부터 2,800km 떨어진 작은 섬



  이윽고 간신히 살아서 파리에 돌아왔지만 나폴레옹에겐 아무런 힘이 없었다. 영국-프로이센의 추격을 저지한 건 그루시의 잔존 병력이었다. 그루시의 병력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폴레옹은 파리에 돌아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루시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에 왔지만 전쟁에서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른 그루시를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815년 6월 22일 나폴레옹은 다시 퇴위를 결정한다.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양위시켜달라고 프랑스 의회에 요구하지만 들어줄 리 없었다. 여전히 일부 프랑스 국민들은 "나폴레옹 만세"를 외쳤지만 그 역시 오랜 전쟁으로 정신이 피폐해졌고, 기존에 있던 병세도 더욱 악화되어 전쟁을 수행할 힘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미국으로 망명을 시도했지만, 이 역시 영국 해군의 저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는 영국에 명예롭게 항복하기 위해 영국 전함을 타고 플리머스 항구에 정박하지만 영국은 상륙을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영국이 제시한 나폴레옹의 행선지는 세인트 헬레나 섬이었다. 100일간의 나폴레옹의 귀환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다.


  세인트 헬레나 섬은 남대서양 한가운데 위치한 오지 중에 오지였다. 가장 가까운 대륙은 아프리카 앙골라였다. 한번 들어가면 인생에 있어 다시 나올 수나 있을지 의문인 지역이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유배지가 세인트 헬레나라는 소식을 듣고 그냥 자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 소식을 들은 영국 측은 놀라 나폴레옹에게 간곡히 요청하며 자결만큼을 제발 피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나폴레옹이 자결하게 된다면 간신히 진정시킨 프랑스의 민심에 불을 지피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폴레옹이 이를 받아들여 그의 세인트 헬레나 행이 결정되었다.


  나폴레옹의 원수들에 대한 처우도 결정이 된다. 나폴레옹의 복권에 있어 열성적 지지자였으며 워털루 전쟁에서 실책과 활약을 반복한 미셸 네는 처형이 결정되었다. 그 역시 나폴레옹을 두 번째 따랐을 때 이미 도박이었다고 판단해 처형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워털루 전쟁에서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른 에마뉘엘 그루시는 미국에 망명을 떠난다. 이후 시간이 지나 부르봉 왕가에 의해 복원되어 프랑스로 돌아오지만, 부르봉 왕가의 조롱과 보나파르트 파의 분노를 동시에 받으며 쓸쓸한 나날을 보낸다. 자크 마크도날은 운 좋게 다시 부르봉 왕가 밑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루이 니콜라 다부는 간신히 죽음은 피하고 파면당한다. 니콜라 장드뒤어 술트 역시 파면당하지만 이후 부르봉 왕가가 복직시키고 훗날 총리에 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한다.

  나폴레옹을 배신한 장군들의 운명 역시 크게 갈렸다. 대표적인 배신자 조아킴 뮈라는 나폴레옹 복권 당시 그에게 합류하려 했다는 정황이 밝혀져 코르시카 섬으로 도망간다. 하지만 끝까지 그를 추격한 오스트리아 군에 의해 처형당하고 만다. 또 다른 대표 배신자인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의 국왕 자리에 오른다. 이후 노르웨이까지 합병에 성공하여 국왕으로 천수를 누리다 사망한다. 배신자까지는 아니지만 그의 복권에 합류하지 않은 니콜라 우디노는 부르봉 왕가의 충실한 장군이 되어 승승장구 하나, 7월 혁명으로 부르봉 왕가 마저 무너지자 말년을 쓸쓸하게 보내다 사망한다. 이외에도 자신의 신념에 의해 나폴레옹 복권에 합류하지 않은 외젠 드 보아르네와 앙드레 마세나는 나폴레옹 퇴위 이후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않고 자신의 영지에서 조용히 지내가 세상을 떠난다.


  1815년 10월 15일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에 도착한다. 한때 유럽을 호령한 황제 나폴레옹은 외딴섬에서 영국 총독의 핍박과 잦은 이사를 겪으며 6년간 지내게 된다. 다행히 섬에서 지내며 전장을 떠나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지만 결국 위암이 도져 1821년 5월 5일 숨을 거두고 만다. 나폴레옹은 아프리카의 외딴섬에 갇혀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쓸쓸히 죽어갔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빈 회의 이후 유럽의 지도 (1815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가 끝나자 빈 회의는 급속도로 진행된다. 빈 체제의 핵심은 보수주의와 절대 왕정의 귀환이었다. 유럽의 모든 것을 프랑스혁명 전으로 돌리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빈 체제로 인해 자유주의는 급격하게 위축되었으며 프랑스의 혁명의 가치도 심각하게 훼손당하게 된다.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주변국들은 프랑스의 옛 영토를 지우면 충분히 과거로 돌아갈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 판단은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행동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테니스 코트에서 선언한 협약은 이미 전 유럽에 자유주의에 대한 사상을 퍼트렸다. 비록 나폴레옹의 군대는 패배했지만, 프랑스혁명의 사상은 그대로 유럽 전역에 자리 잡았다. 빈 체제에서 지키려고 했던 보수주의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진격은 이미 많은 유럽인들의 사상을 바꿔놓았다. 나폴레옹은 동유럽과 러시아로 진격하면서 발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동유럽 국가들의 민족주의를 고취시킨다. 이들은 나폴레옹에 의해 독립을 잠시나마 경험하게 된다. 심지어 민족주의 사상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발칸반도에까지 펴져 이후 19세기에 일어나는 동유럽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에 억눌려 있던 중소 민족들의 독립운동이 대거 시작된다. 1840년대에 발발하는 크림 전쟁은 러시아와 오스만과 둘러싸인 발칸반도의 세력 재편에 큰 영향을 준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오스트리아 역시 주변 여러 민족들의 독립운동을 비롯해 자유주의 혁명에 직면한다. 재상 메테르니히는 이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실각하게 된다. 프로이센의 경우 반대로 독일 지역에 대한 민족주의를 고취시켜 성장한다. 이것이 점점 쌓여 약 50여 년 뒤에 프로이센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등장하여 독일이라는 국가를 탄생시키게 된다. 이탈리아 역시 중소 왕국들이 통일을 맞이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프랑스 내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미 프랑스혁명으로 시작된 자유주의에 대한 이념은 시민들의 자유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결국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부르봉 왕가가 다시 한번 시민들에 의해 쫓겨난다. 이후 프랑스는 수차례의 혁명을 거쳐 현재의 프랑스 공화국으로 탄생하게 된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19세기 유럽을 상징하는 키워드가 된다. 결국 이 사상으로 재편된 유럽은 서로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 자연스럽게 여러 나라의 새로운 결합을 가져온다. 대표적으로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삼국 협상과 독일-이탈리아-오스만의 삼국동맹이다.


   체제가 무너지고 재편된 유럽 헤게모니의 대결과 민족주의의 고취로 20세기 세계 1 대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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