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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Sep 07. 2021

로마 제국의 탄생

로마 제국을 만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6. 제정 로마



나는 벽돌로 지어진 로마를 발견해 대리석의 로마로 남겨두었다.

-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





발생 원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의 출생

로마 원로원의 독단 및 부패로 인한 정치체제 변화 필요성 증가

제국의 팽창으로 인한 강력한 통치 기구 필요

파르티아, 이집트 등 주변 제정 국가의 성장


결과

제정 로마의 탄생

로마 제국 최고 전성기 '팍스 로마나' 시작

고대 공화주의의 몰락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로마 공화정의 영토는 팽창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불세출의 영웅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하고 돌아오자 지중해 전체와 유럽 절반 가량의 영토가 공화정으로 귀속된다. 영토가 넓어지고 속주가 차례대로 증가하자 공화정 체제로 여러 속주를 관리하기에 한계가 따른다. 공화정 외곽에서 반란이 줄지어 일어났는데, 임기 1년의 집정관이 상황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북부에서 이민족인 게르만이 계속 침입해왔다. 게르만 족은 점차 조직적으로 제국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로마는 이를 막기 위해 강력한 군대와 지휘관이 필요했다. 게다가 게르만을 막기 위해 원로원에서 막강한 군권을 주면 이들이 게르만을 정복한 군대를 원로원에 귀속시키지 않고 본인의 권력 차지를 위해 이용했다. 전쟁에서 이겨도 문제고 져도 문제였다. 이런 혼란이 반복되자 로마 시민들은 국가를 운영하기에 강력한 1인 독재가 필요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런 로마 백성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기원전 40년 갈리아 원정 후 로마 영토 (출처 : 영문 위키백과 - 율리우스 카이사르)


  카이사르는 원로원으로부터 군대를 받아 갈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떠났다. 그는 갈리아 속주에서 연이은 승전보를 로마 시민들에게 전해줬고 그의 인기는 커져만 갔다. 원로원들은 군대와 인기를 가진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와 권력을 장악할까 두려웠다. 기원전 50년 로마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속히 귀환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당시 로마 내부의 권력을 장악한 폼페이우스도 같이 군대를 해산하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원로원 역시 이를 거부하고 ‘원로원 최후통첩’을 통해 카이사르에게 로마로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원로원 최후통첩은 로마 공화정에서 할 수 있는 최상위 명령이자 국가 비상사태 선언과 다름없었다.


  원로원에 강경책에 카이사르는 맞불 대응했다. 그는 루비콘 강 앞에 병사들을 모으고 원로원의 폭정과 새로운 로마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앞으로 벌어진 전투가 로마를 구하고 로마의 위상을 한 단계 높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루비콘 강을 건너며 이 한마디를 말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로마의 지배권을 두고 폼페이우스와 경쟁했다. 당시 로마의 호민관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편에 섰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진영의 2인자로 그의 밑에서 착실하게 입지를 다져나갔다. 갈리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카이사르 군은 강했다. 그들이 이탈리아 반도와 여러 속주를 차지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세가 기울자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 구원 요청했다. 당시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누나 클레오파트라 7세가 공동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폼페이우스를 구해주는 척 유인해 그를 살해했고 목을 카이사르에게 바쳤다.


  카이사르는 남은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처리하고 로마 최고의 권력인 독재관에 오른다. 독재관은 집정관보다 한 단계 위의 직책으로 국가 비상사태에만 임명된다. 하지만 그의 독재관은 조금 달랐는데, 임기가 없는 종신 독재관이었다. 이는 과거 기원전 82년에 술라가 권력을 차지하고 올랐던 임기 제한이 없는 독재관과 동일하다. 황제라는 이름만 안 썼지 제정 로마 탄생에 신호탄과 다름없었다.


독재관에 오른 카이사르


  카이사르가 독재관에 오른 후 전쟁을 틈타 공화정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카이사르는 반란을 막아야 될 시기에 이집트 내전에 개입했다. 그가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의 권력 다툼에 신경을 쓰는 사이 폰투스 왕국에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로마군이 반란을 막으려 나섰지만 폰투스 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결국 카이사르가 로마로 돌아와 직접 나섰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소아시아로 향했다. 카이사르가 직접 군대를 이끈다는 소식을 듣자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고 폰투스를 완전히 박살 내는 데 성공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그는 원로원에게 한마디 말을 남기며 승리를 알렸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Veni, Vidi, Vici)



   폼페이우스 잔당과 지역 반란을 정벌한 카이사르는 본격적으로 로마 개혁을 시작했다. 그는 기존에 사용하는 로마 달력이 오차가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1년을 365.25일로 하는 율리우스력을 만든다. 율리우스력은 16세기 그레고리력이 나오기까지 유럽의 표준 달력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정원 600명의 원로원을 900명으로 늘려 힘을 약화시켰다. 자신을 힘들게 했던 원로원 최종 권고 역시 폐지시킨다. 그 외에도 국가가 곡물을 매입하는 것을 법제화하고 백성들에게 이를 돌려주었다. 카이사르는 로마 전체를 바꾸는 데 몰두했다.


  그가 황제나 다름없는 권력을 누리자 반발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들은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을 계획하자 이에 반발했다. 카이사르가 파르티아를 정복하고 오면 로마 황제에 오르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로마의 공화주의를 주장하는 세력과 카이사르 반대파가 서려 뭉쳐 그를 암살하기로 계획한다. 이들의 목표는 로마를 다시 공화정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계획을 수행할 사람은 바로 그의 양아들이나 다름없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였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 출발을 사흘 남긴 시점이라 전쟁 준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는 아침 일찍 원로원에 나가 전쟁 준비에 대한 설명을 하기로 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도착하자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이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몰래 카이사르에게 접근했다. 한 명이 카이사르의 목을 찔렀지만 깊게 찌르지 못하고 스쳤다. 카이사르는 곧바로 칼을 꺼내 들고 저항했다.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이내 브루투스와 추종자들이 카이사르를 마구 찔러대기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이를 막지 못했고 원로원 한가운데서 자신이 믿은 부하 브루투스에게 싸늘하게 죽었다.


카이사르의 죽음 (장 레옹 제롬)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는 로마 시민들이 자신의 뜻에 따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로마 시민들을 모아 카이사르 암살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 사태를 빠르게 수습한다. 그의 노력으로 오히려 시민들은 안토니우스 편에 서기 시작했다. 결국 브루투스를 비롯한 암살 찬성 파는 로마 바깥으로 쫓겨나게 된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발표하는데, 놀랍게도 그의 유언장에 지목된 후계자는 그가 아닌 양자 옥타비아누스였다. 카이사르가 후계자로 지목한 옥타비아누스는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어린 풋내기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카이사르 군대에 들어가 여러 원정에 참여한 것이 전부였다. 단지 카이사르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그의 양자로 들어갈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권력을 물려받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카이사르의 세력에서 가장 많은 군대를 보유하고 있던 레피두스가 참여한 2차 삼두정치가 시작된다. 그중 가장 세력이 컸던 레피두스를 몰아내기 위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손을 잡았다. 둘은 폼페이우스의 잔당이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정복한다는 빌미로 레피두스 군대를 모두 포섭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뒤 그가 섹스투스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씌워 레피두스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제 로마의 권력을 놓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둘만 남았다. 카이사르 밑에서 호민관을 지내며 탄탄하게 권력을 쌓아 올린 안토니우스는 풋내기 옥타비아누스를 우습게 봤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손을 잡아 로마 권력을 장악하기로 한다. 그는 자신이야 말로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라며 옥타비아누스를 압박했다.


악티움 해전 (로렌조 카스트로)


  기원전 31년 둘은 악티움에서 맞붙는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은 호기롭게 나섰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의 친구이자 부하인 아그리파는 연합 함대를 완벽하게 깨부순다. 클레오파트라가 갑작스럽게 전쟁 중에 도주하면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대패한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더 이상의 생애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 자살한다. 옥타비아누스의 완벽한 승리였다. 술라 밑에서 경력을 쌓아 로마 최고의 권력을 장악한 폼페이우스가 풋내기 카이사르에게 패배했듯이, 카이사르 밑에서 경력을 쌓아 권력을 얻은 안토니우스는 풋내기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하고 만다.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프린켑스의 지위를 원로원으로부터 받는다. 프린켑스란 로마 제1의 시민이라는 뜻이다. 그가 실질적인 로마의 황제가 된 것을 의미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가진 모든 권력을 내려놓을 것이라고 원로원에게 전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원로원은 그의 결정에 못 이기는 척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는 존엄한 자라는 뜻으로 로마 최고의 직위에 오른 것을 의미했다. 이후 그는 옥타비아누스보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더 많이 불리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상당히 영리했다. 카이사르처럼 대놓고 종신 독재관을 지칭하면 분명 주의에 반발을 살 것이 분명했다. 로마엔 여전히 많은 공화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직접적으로 자신을 우상화하지 않고, 먼 지역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로마로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일명 프린키파투스라는 원수정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마치 공화정을 유지하는 척하며 실제론 황제의 직위에 오른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시기의 로마 영토 확장 (출처 : 영문 위키 백과 -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의 전략은 대성공이었다. 그는 로마 초대 황제로서 제국의 토대를 만드는 데 힘썼다. 화폐 제도를 개혁하고 중앙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켰다. 특히나 속주에 있는 사람들에게 로마 시민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심어줘 제국의 영역을 넓혔다.

  결국 로마제국이 탄생하면서 유럽은 왕정의 역사 시작된다. 이는 향후 근대 초기까지 주류가 되는 통치 제제인 왕정의 부활이었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강력한 지도자 한 명이 나라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보여줬다. 로마는 공화정으로 유지되기에는 그 크기가 너무 컸다. 이렇게 탄생한 로마 제국은 팍스 로마나라는 전성기를 거쳐 유럽 고대를 상징하는 정치 체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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