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실패를 한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
20세기 초 대영제국을 비롯한 많은 제국주의 열강 세력들은 새로운 식민지를 찾는데 혈안이 되었다.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 지구 전체가 이미 그들의 식민지로 전락한 상태였다. 초과열된 제국주의도 이제 끝 점차 끝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차지할 새로운 땅은 아예 없기 때문이다. 이때 열강의 눈에 들어온 곳이 바로 남극대륙이다.
남극대륙은 사람이 거주할 환경이 못된다. 자원 보유량마저 여타 대륙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대륙 내부는 물론 주변 해협 마저 악천후로 둘러싸여 있어 시장 가치가 매우 떨어진다. 하지만 남은 땅이 없으니 얼어붙은 땅이라도 어떻게든 차지하려고 했다. 제국주의 선두주자 영국은 수많은 탐험가를 남극에 보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국 탐험가들은 남극의 추위에 휩쓸려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남극 대륙에서 기적을 만든 탐험가가 있다. 대영제국 소속의 이 탐험가는 대원들과 함께 죽음의 대륙 남극에 가 남극점 도달엔 실패했다. 그러나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해 대원들과 함께 영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배가 난파되는 와중에도 기적적으로 대원들을 독려 해 모두 살아서 본국에 귀환시켰다. 가장 탐험가 다웠던 탐험가. 리더라는 직책에 가장 어울리는 남자. 영국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어니스트 섀클턴에 대해 알아보자.
어니스트 섀클턴은 1874년 2월 15일, 대영제국 소속의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영국 시든햄으로 이주한 그는 1901년 남극을 탐험하는 영국의 상선 디스커버리호에 탑승한다. 이 함선의 목표는 바로 영국의 남극 탐험이었다. 미개척지였던 남극에서의 지리적, 과학적 조사를 목적이라고 말했지만, 진짜 이유는 향 후 대영제국이 남극을 합병할 수 있도록 사전 조사를 하러 출발했다.
디스커버리 원정의 대표는 영국 군인 로버트 팰컨 스콧이었다. 어니스트 섀클턴 역시 그를 따라 원정에 참여했다. 이외에도 에드워드 윌슨, 프랭크 와일드 등을 데리고 남극으로 간다. 영국 왕립학회의 지원을 받아 호기롭게 출발했지만, 아쉽게도 남극점 도달엔 실패했다. 원정에 데리고 간 개 22마리를 모두 잃었고 새클턴은 남극에서 동상과 괴혈병에 걸려 간신히 살아서 영국에 돌아온다. 다만 남극의 조사를 많이 해 향후 과학 발전에 토대를 마련한 성과는 있었다. 남극의 지리 조사에도 성공해 에드워드 7세 반도를 이 시기에 발견했다.
1907년 섀클턴은 다시 님로드 호를 타고 남극으로 향한다. 이번에는 탐험대의 대장으로 출발했다. 그는 약 2년 동안 남극을 탐험했지만, 이번에도 남극점 도전에는 실패한다. 그럼에도 1909년 1월 9일 인류 최초로 남위 88도 23분에 도착했다. 섀클턴은 님로드 원정을 통해 과학적인 성과를 만들었는데 남극에서 석탄을 발견한 것이다. 석탄은 식물이 땅 속에 묻혀서 생기게 된다. 남극은 식물이 자랄 수 없는 극지 기후인데 석탄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대륙 이동설의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님로드 호와 섀클턴의 항해는 2년 뒤 아문센의 탐험대가 남극점에 도착하는데 큰 지리적 도움을 준다.
님로드 호의 탐험대는 남위 88도 23분에 도착한 시점에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남극점에 도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식량 부족과 추위로 인해 많은 대원들이 쓰러져갔다. 결국 그는 대원을 살리기 위해 남극점 탐험을 강행하지 않고 귀환한다. 당시 섀클턴은 대원들을 살리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죽은 사자보다는 산 당나귀가 낫다.
아문센이 남극점을 정복한 이후 1914년 3월 섀클턴은 다시 남극으로 향한다. 이번에 탄 배는 노르웨이의 상선 인듀어런스였다. 그는 이 인듀어런스 호에 같이 타고 남극으로 출발할 대원을 모집하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냈다. 섀클턴이 낸 광고는 아주 솔직 담백했다. 그의 돌직구 멘트가 많은 사람들을 자극했고, 무려 5000명이 인듀어런스 탐험에 지원했으며, 197: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For hazardous journey, small wages, bitter cold, long months of complete darkness, constant danger, safe return doubtful, honor and recognition in case of success."
Ernest Shackleton, 4 Burlington st.
(위험한 여정, 적은 임금, 혹한, 몇 달간의 완전한 어둠, 끊임없는 위험, 안전 귀환 보장 안됨, 성공 시 명예와 영광 - 어니스트 섀클턴, 벌링턴 4번지)
섀클턴은 광고를 보고 지원한 사람들을 고르고 골라 27명의 대원을 선발했다. 대원의 친구 한 명이 몰래 배에 들어와 총 28명의 대원이 배에 올라탔다. 그는 처음에 밀항자가 있다는 사실을 듣고 엄청 화냈다. 당장 배를 돌려 그를 추방시키려 했지만 간신히 참고 그냥 출발했다. 이미 먼 길을 온 상태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섀클턴은 밀항자에게 만약 식량이 다 떨어진다면 먼저 잡아먹어버릴 것이라고 소리치며 남극을 향해 출발했다.
남극 경험이 많던 섀클턴은 탐험 초반 순조롭게 인듀어런스 호와 대원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1915년 10월 27일 갑작스럽게 부빙 사이에 껴서 배를 난파당한다. 배 주위를 둘러 쌓인 부빙들이 겨울 동안 얼어버렸고, 점점 배 전체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결국 이날 섀클턴은 탐험대원들에게 배를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대원들은 배에서 내려 생필품과 작은 보트를 끌고 다니며 육지를 찾기 위한 행군을 시작한다. 다행히 안전한 부빙에 올라 오션 캠프를 설치했지만, 물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12월 23일에는 오션캠프를 어쩔 수 없이 떠났고 탐험을 위해 데려온 개를 모두 잡아먹으며 간신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러 이듬해 4월이 되자 드디어 부빙들이 점점 갈라지기 시작했고, 4월 15일에는 엘리펀트 섬에 상륙했다. 영국을 출발한 지 무려 497일 만에 땅을 밟은 것이다. 모든 남극에 있는 육지가 그렇겠지만 엘리펀트 섬 역시 식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섬에 있는 거라곤 바다표범과 펭귄뿐이었다. 심지어 섬 전체가 새 똥으로 뒤덮여 있어 잠을 자기 위해 똥 무더기 위에서 자리를 펴고 자야 했다. 대원들은 새 똥에서나 나는 지독한 냄새를 참으며 잠을 청했다.
겨울이 다시 다가오고 이대로 남극에서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새클턴은 결국 결단을 내린다.
“사우스 조지아 섬에 가서 구조대를 불러오겠다.”
“우리는 이제껏 최고의 모험을 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모험은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위대하겠죠. 우리는 이기면 살 것이고 패배하면 죽을 것입니다. 마치 동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엘리펀트 섬에서 사우스 조지아 섬까지의 거리는 무려 1300Km다. 중간에 섬은 단 하나도 없고, 작은 조각배 하나로 서울-부산의 3배나 되는 저 먼 거리를 도달해야 한다. 심지어 여기는 기후의 변덕과 추위, 거센 해류가 심한 남극해다. 4월의 남극은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아 더욱 추웠다. 섀클턴은 자신과 같이 사우스 조지아로 갈 대원 5명을 선발했고, 총 6명의 대원의 대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탄 배의 이름은 제임스 커드(James Caird)호다. 보는 것과 같이 정말 작은 조각배였다. 이 작은 배에 6명의 정예 대원이 탄 것이다. 이 사진은 탐험 대원 중 한 명인 레너드 허쉬가 찍은 사진이다.
섀클턴과 대원 6명은 제임스 커드호를 타고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출발했다. 그들이 통과해야 하는 드레이크 해협은 지구 상에서 가장 해류가 거세고 악천후로 유명한 곳이다. 그들을 출발한 이후 본 날씨라고는 폭풍우뿐이었다. 하루는 맑은 하늘이 떠 있어 섀클턴이 대원들에게 큰 소리로 알렸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었다. 섀클턴이 본 것은 사실 엄청나게 높은 파도였다. 파도를 맑은 하늘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엄청 높고 거센 파도였던 것이다. 파도가 배에 내리치자 식량은 모두 물에 젓었고, 노 4개 중 2개도 부려져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식수통 역시 쪼개져 마실 물도 없었다.
그렇게 폭풍우를 뚫고 무려 1300km를 거쳐 1916년 5월 8일, 제임스 커드호는 사우스 조지아섬에 상륙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기후 변화로 사람이 사는 스트롬니스 만 반대편에 상륙하고 만 것이다. 다시 스트롬니스로 가기 위해서 섬 반대편으로 횡단을 해야 했다. 5월 12일 3명의 대원은 남아서 배를 지키고 섀클턴과 워슬리, 크린 3명의 대원은 3일분의 식량을 가지고 걸어서 섬을 횡단하기로 결정한다.
이 역시 불가능에 가까웠다. 보름이 넘는 항해로 이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다. 밥은 당연히 넉넉하게 먹지 못했다. 위성사진이 있어 구글 어스로 남극의 지리적 특성을 샅샅이 지금과 달리 20세기 초에는 제대로 된 남극 지도 하나 없었다. 이 말은 그들이 가야 할 산의 지도가 전혀 없다. 그저 감에 맡겨 등산로도 없는 산을 별다른 장비도 없이 횡단해야 한다. 한 번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얼음으로 뒤덮인 산을 건너갔다.
섀클턴은 대원들이 잠깐이라도 잠에 들려하면 곧바로 깨웠다. 빙하 고산지대에서 잠들게 된다면 저체온증으로 죽는 건 순식간이다. 이들은 산을 넘어가면서 수십 번의 절벽을 마주하고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결국 지칠 대로 지친 세명의 대원들을 산마루를 미끄러져 내려가기로 결정한다. 이는 미친 짓에 가까웠다. 방향이 맞을지도 모르고 맞다 하더라도 바닥에는 어떤 게 있을지 몰라 그냥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상태론 걸어서 산을 내려갈 순 없으니 도박을 해본 것이다. 세명의 대원들은 서로의 목을 껴안고 온 몸을 묶어 마치 미끄럼틀을 타듯이 산허리를 내려갔다. 내려간 곳이 절벽이었다면 세명 모두 동시에 포옹한 채로 죽는 것이다. 산등성이 아래로 떨어진 이들은 놀랍게도 점차 경사가 낮아지는 지형으로 떨어졌고 안전하게 땅을 디딜 수 있었다. 정말로 기적에 가까웠다. 세 사람은 악수를 나누며 다시 나아갔다.
1916년 5월 20일 드디어 섀클턴과 대원들은 스트롬니스 만에 있는 포경기지에 도착했다. 기지에 있는 대원들은 내륙에서 사람이 내려오는 걸 보고 놀랐다. 사우스 조지아 섬의 반대편은 한 번도 사람이 가보지 못한 빙하 산이었고, 반대편 내륙에서 사람이 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았다. 포경기지의 대원들은 새클턴 일행에게 모두 경의를 표했다. 그들의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소설보다도 더 극적인 현실의 기적이었다.
섀클턴은 포경기지 대원들과 섬 반대편에서 배를 지키고 있던 대원 3명을 찾았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 국왕은 섀클턴에게 축하 전보를 보냈다. 영국 모든 언론에서도 그의 이야기를 주목했다.
이제 섀클턴은 사우스조지아의 기지에서 엘리펀트 섬에 남겨진 대원들을 찾기 위해 구조선을 수배하기 시작했다. 이들도 분명히 부빙에 얼어붙은 배를 지키며 근근이 버티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하루라도 빨리 구하러 가야 했다. 하지만 배를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한겨울의 남극을 출발하는 배를 준다는 것은 그냥 배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당시는 세계 1차 대전이 한청이라 영국 정부 역시 쉽게 배를 빌려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섀클턴은 노력 끝에 칠레 정부로부터 엘코 호라는 배를 빌리는 데 성공하고 다시 엘리펀트 섬으로 출발했다.
1916년 8월 30일, 구조선이 드디어 엘리펀트 섬에 도착한다. 해안가에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조개잡이를 하는 대원들이 눈에 보였다. 배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펀트 섬의 대원들은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그리고 섀클턴이 뱃머리에 서서 모두 무사하냐고 물었다. 그리고 대원들은 대답했다.
전원 무사합니다!
엘리펀트 섬의 대원들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들은 해변에 있는 조개와 해초들을 채집해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들은 2척의 보트를 뒤집어 캠프를 만들고, 주변에 있는 돌과 배에 있던 남은 깡통을 이용해 그럭저럭 생존이 가능한 수준의 베이스캠프를 만들었다. 엘리펀트 섬의 대원을 통솔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은 부대장 프랭크 와일드였다. 그는 항상 섀클턴 대장이 8월 안에는 우리를 구출하러 올 것이라고 대원들을 다독였다. 그리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매번 짐을 싸 언제든지 구조선에 탑승하기 쉽게 준비를 시켰다. 덕분에 실제로 8월 30일에 구조선이 도착했을 때, 대원들은 배가 오기 전부터 미리 짐을 싸 준비 중이었다.
노르웨이의 탐험가이자 앞서 남극점을 발견한 아문센 역시 섀클턴의 귀환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총 항해 기간 634일, 사망자 0명
그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에서 대원들을 모두 살렸다. 그는 탐험 내내 놀라운 리더십을 발휘했다.
“섀클턴 대장은 발길질과 뺨을 때리면서 우리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말했다. 잠을 잘 바에는 마지막까지 기어서라도 움직이라고 소리쳤다. 펭귄 고기를 날로 씹어가며 절망감과 추위에 떨고 있었지만, 남은 홍차를 조금씩 마셨다. 이때, 마신 홍차야 말로 인생에서 가장 맛 좋은 홍차였다.”
섀클턴과 같이 사우스 조지아섬을 횡단한 워슬리의 회고록에 나온 내용이다. 그의 회고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섀클턴은 늘 대원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그는 대원들 사이에서 사소한 의견 충돌이 발생해도 늘 경청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탐험 대장 자격으로 누린 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늘 대원들과 같은 곳에서 잠을 잤고 식량 역시 늘 같은 양을 먹었다. 대원들이 정신을 잃고 추위 속에서 잠들려고 할 때면 억지로 깨워서라도 살렸다. 그의 노력 덕분에 인듀어런스 호에 탑승한 모든 사람들은 살아서 영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대원들을 모아 놓고 항상 버릇처럼 말했다고 전해진다.
“우린 하나다. 살아도 모두 같이 살 것이며 죽어도 모두 같이 죽을 것이다.”
앞에 그의 탐험대 모집 멘트 중에 '불확실한 무사 귀환(Safe-Return Doubtful)'이 있다. 하지만 이 광고를 보고 선발된 모든 탐험 대원들은 무사 귀환에 성공했다. 섀클턴의 이 문구만큼은 거짓이었다. 섀클턴과 같이 위해한 리더가 있는 조직에선 확실한 무사 귀환이 보장된다. 그리고 명예로운 거짓말을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대부분의 탐험가들을 왠지 모르게 인성적인 결함이 존재했었다. 지구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탐험가 콜럼버스 역시 그의 업적과는 별개로 수많은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행적은 오점으로 남아있다. 희망봉을 거쳐 인도에 도달한 바스코 다 가마 역시 학살 행적에 있어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어니스트 섀클턴을 달랐다. 그의 인듀어런스호는 비록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전 세계 어떤 탐험가의 탐험보다 위대했다. 그는 대원들을 가장 아꼈고, 결국 대원들에게 용기와 생전에 대한 열망을 심어줘 각자의 소중한 삶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는 기적을 만들었고 덕분에 그는 여전히 많은 영국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로 남아있다.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리더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