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고의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1878년 11월 2일, 조선 평안도 강서군.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한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의 할아버지인 한때 안태열은 중앙에서 관직을 할 정도로 잘 나가는 집안이었다. 하지만 금세 가세가 기울어 시골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안태열은 어려서부터 똘똘한 모습을 보이는 이 아이를 일찍이 서당에 보냈다. 외모도 잘생겼고 목소리도 똘망똘망해 어른들의 이쁨을 한 몸에 받았다. 평소에 서적을 큰소리로 읽기를 좋아해 마을 사람들은 종종 그의 목소리를 들으러 왔다. 1892년 평안도 대동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그 동네의 유명한 성리학자 김현진에게 아이를 맡긴다. 이 아이는 김현진 밑에서 수학과 유학을 배운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한반도는 전장이 되었다. 평안도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평양이 청나라와 일본에 의해 무너졌다. 나라가 힘이 없어 외세에 의해 도시가 불바다가 되는 걸 목격하자 이 청년은 충격에 빠졌다. 국력에 중요성을 깨닫고 그는 무작정 집을 나와 한양으로 향했다. 한양에 간 청년은 이듬해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 학당에 입학해 신문물을 접한다. 그는 학당에서 만난 친구들의 권유로 기독교에 입문한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배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누구든 배울 의지가 있으면 학당에 와 맘껏 교육을 받으라고 말했다.
이 청년의 이름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이자 대표적인 계몽주의자인 안창호다.
1987년 안창호는 서재필, 이승만이 중심이 되어 세운 독립협회에 들어간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안창호는 민족주의 활동을 시작한다. 그가 몸담은 독립협회는 1989년 대한제국이 세워지고 입헌군주제를 반대하는 황국협회의 방해로 독립협회가 해산하게 된다. 이에 실망한 안창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점진학교를 세워 교육 활동에 이바지한다.
그렇게 교육에 힘쓰던 와중 1902년 안창호는 교육자의 꿈을 잠시 미뤄두고 갑작스럽게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일본 도쿄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했는데, 하와이 섬에서 솟아나는 일몰을 보고 호를 ‘도산’이라고 정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우스보이로 취직해 낮에는 농장에 오렌지를 따면서 돈을 벌었고 밤에는 공부를 이어갔다. 처자식이 있었기에 생계유지를 위한 돈을 벌어야 했고, 동시에 나라를 구하기 위한 공부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정말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샌프란시스코는 당시 조선 교민들이 많은 지역 중 하나였다. 그는 교민 대표가 되어 미국으로 넘어온 조선인들이 편안하게 정착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자연스럽게 교민 사회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일도 도맡아 하게 되었다. 또 기독교 학교인 신학 강습소도 설립해 교인들에게 신학과 영어를 가르쳤다. 안창호의 노력 덕분에 미국 내 한인들의 삶이 더욱 안정화될 수 있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거주한 3년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1905년 그는 다시 한반도로 돌아온다. 그 사이 한반도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대부분의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긴다. 안창호는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 국민들의 교육 수준을 높여야 된다고 생각한다. 미국 유학 시절 경험을 활용해 애국 계몽 운동을 실시한다. 1907년 양기탁, 이승훈과 함께 신민회를 만들었고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한다.
29살 안창호는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직접 대면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이 조선에 악의는 전혀 없고 조선을 다른 서양 국가들과 동등한 힘을 가질 수 있게 근대화시키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자신들에게 협조할 것이 대한제국의 힘을 키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안창호는 이토 앞에서 단호하게 조선인의 근대화는 자주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한다. 이는 당신들이 실시했던 메이지 유신 정신과도 일치한다며 대한제국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전했다.
안창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 일제는 경술국치를 통해 대한제국을 합병시킨다. 그리고 이듬해 105인 사건을 통해 신민회 마저 해산시킨다. 일제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고 더 이상 한반도에서 계몽 활동을 이어가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에 굴복할 안창호가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든 독립 활동을 이어가고 싶었고 다시 자신이 기반을 닦아놓은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망명을 떠난다. 미국에 돌아온 안창호는 흥사단과 청년학우회를 조직해 시민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1919년 한반도 내에서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3.1 운동이 일어난다.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탄생한다. 미국 교민 대표 격인 안창호 역시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추대되어 초대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다. 이후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대통령 대리 직을 제안받았지만 이를 한사코 거부했다.
나는 잠시라도 대통령 대리의 명목을 띄고는 몸이 떨려서 시무할 수가 없소
그는 임시정부에서의 요직 보단 실제로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조국에 도움이 되는 가를 먼저 생각했다. 임시정부가 초기에 사회주의자 이동휘와 미국식 자유주의자 이승만이 노선을 두고 싸우게 되자 조직이 와해되지 않도록 둘의 싸움을 중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아무리 임시정부의 주요 요직을 맡고 있어도 임시정부는 제대로 된 국가가 아니다. 당연히 원하는 만큼의 활동비는 지급되지 않았다. 안창호는 여전히 생계를 위해 미국에서 일하고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를 오가면서 활동을 이어갔다. 지금 기준으로도 태평양을 오가며 일과 생업을 병행하기 힘든데, 여객기도 없던 당시에 배를 타고 미국과 중국을 오가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돈이 부족할 때면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 오렌지를 따고, 버는 돈을 족족 학교를 설립하는 데 사용했다. 그가 조국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던 1932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일제 주요 인사들에게 대해 폭탄을 던진다. 훙커우 공원 의거로 많은 운동가들을 몸을 숨기기 바빴다. 윤봉길과 함께 거사를 계획한 김구는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에게 피신하라고 전했다. 다만 안창호에는 이 소식을 전달하지 않았다. 만약 그에게 소식을 전달했다는 것이 일제에 알려지면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게 까지 피해를 끼칠까 염려했다. 흥사단은 개방적인 조직이어서 같이 엮이면 곤란했다. 그의 계몽활동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한 배려였다.
안창호는 훙커우 거사 당일 독립운동가 동지인 이유필의 딸의 생일에 참석했다. 안창호는 그날 선물을 주기로 미리 약속했었다. 그는 소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유필의 집으로 향했고, 안타깝게 이 날 일본군에 의해 체포당하게 된다. 그는 일본 제국 경찰에게 끌려가면서도 의연했다. 결국 안창호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4년형을 구형받아 대전 형무소로 압송된다.
그는 출소한 이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학교를 설립한다. 하지만 오랜 옥중 생활로 이미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일본 경찰들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체포되었고 이번엔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되었다. 친구인 윤치호의 도움으로 일찍 풀려났지만, 오랜 투옥과 고문으로 그의 몸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머지않아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지만 이미 죽음을 앞둔 상태였다.
안창호는 59세가 된 1938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난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병원에서 메이지 천황을 큰소리로 규탄해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기도 했다.
목인아, 목인아, 네가 우리 민족에게 큰 죄를 지었구나!
여기서 목인은 메이지 천황을 한자어로 읽은 말이다. 그는 친구 윤치호를 비롯해 이광수, 김성수 등을 불러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동포들이 겪은 고통에 마음이 아플 뿐이오. 일본은 자기가 일으킨 전쟁으로 망할 것이오. 그러니 아무리 힘들더라도 참고 힘을 모으시오.
안창호가 언급한 전쟁은 중일전쟁을 의미한다. 실제로 안창호의 유언처럼 일본은 몇 해 뒤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벌인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패배하며 한반도는 독립을 맞이한다.
안창호는 조국 계몽운동을 상징하는 위인이다. 가난한 농부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해 일평생을 바쳤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처자식을 살리기 위해 미국으로 가 하우스보이, 농장 일을 하면서 독립 자금을 모으고 생계유지비용을 모았다. 우리가 지금 편하게 돈을 벌고 꿈을 위해 달릴 수 있게 만든 데에는 안창호의 노력이 컸다. 그는 자기 인생을 버려가며 조국 독립을 위해 힘썼다. 우린 이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그의 노력으로 현대를 사는 우리는 더 이상 조국의 자주성 확립을 위해 싸우지 않아도 된다.
안창호의 삶은 항상 나를 자극시킨다. 그의 생애를 쭉 훑어보면 지금 내가 감히 인생을 열심히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아무리 내가 열심히 산다 한들 안창호 선생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몸소 느낀다. 그를 통해 느낀 점은 정말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삶과 꿈을 위해 달려가야 한다 한다. 그것이 독립운동가들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사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열심히 사는 것이야 말로 조국을 지키는데 인생을 바친 위인들의 행동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각자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애국이자 애족입니다.
- 도산 안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