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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Aug 17. 2021

영화 '남한산성' 역사 배경 설명

조선의 대청 외교 정책과 삼전도의 굴욕


  요새 넷플릭스 로마 제국 시리즈에 빠져 있느라 세계사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했다. 그래서 오늘은 한국사 주제를 가져와봤다. 사실 한국사야말로 우리 인생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 세계화 시대라 하더라도 결국 국내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 당장 내 주변의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 대부분이 한국인이며, 많은 사람들이 국내 산업 관련 직무에 종사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 할 이야기는 외교다.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두 나라는 당연히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과 일본 일 것이다. 그래서 양국과의 외교 문제는 한반도 역사 내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중국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급부상하면서 외교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그리고 17세기 조선 역시 지금처럼 중국의 힘이 급부상하고 있었다.


  오늘 설명할 영화 남한산성은 바로 17세기 급부상한 중국과 조선 사이의 외교 정책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코앞에 다가온 청나라 군대를 상대로 남한산성으로 대피한 인조와 신하들이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고민하는데에서 출발한다. 풍전등화 조선은 청나라의 군대에 맞서 싸울지, 그들과 화친을 맺어 훗날을 도모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주화파를 대표하는 이조판서 최명길은 배우 이병헌이 맡았다. 반대로 척화파를 대표하는 예조판서 김상헌은 배우 김윤석이 맡았다.

  최명길과 이병헌의 전쟁을 두고 한 논쟁. 김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알아보자.  



삼전도의 굴욕  


삼궤구고두례 : 호령에 따라 양 손을 땅에 댄 다음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세 번 조아린다. 이를 3번 연속 반복한다.


  1637년 2월 24일, 지금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부근에서 청나라 대칸이자 2대 황제 숭덕제와 조선의 왕 인조가 만났다. 그러나 일반적인 왕의 만남과는 달랐다. 숭덕제는 높은 단상에 올라가 있었고, 인조는 눈이 쌓인 땅바닥 아래에서 숭덕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인조는 이른바 삼궤구고두례라는 청나라의 예법에 따라 숭덕제에게 3번 무릎을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렸다. 야사에 따르면 인조가 땅에 머리를 조아리는 소리가 작아 숭덕제가 자신에게 들릴 때까지 더 크게 조아리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의 왕 인조는 그들이 오랑캐라고 생각했던 청나라 대칸 앞에서 이마에 피를 흘리며 예를 올린다. 이 사건이 바로 조선사 최대의 치욕이라 불리는 삼전도의 굴욕이다.

  삼전도의 굴욕은 조선과 청과의 관계가 군신관계 성립을 사건이다. 건국 이래로 항상 명나라를 섬긴 조선은 이제 청이라는 새로운 주인 섬기게 된 것이다.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인조의 아들들은 모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다. 그리고 청에 조공을 바쳐야 하며 새로 즉위하는 왕은 청 황제의 재가가 반드시 필요했다. 청은 이후 명, 러시아와 전쟁을 치를 때마다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고, 조선은 이에 응할 수밖에 없는 위치가 되었다.


  인조는 어쩌다 청 황제에 무릎을 꿇게 되었고, 조선은 왜 굴욕적인 외교적 관계를 맺게 된 것일까?   



누르하치와 후금의 등장  



  삼전도의 굴욕이 일어나기 2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조선의 북측 국경인 압록강을 건너면 당시 여진족이 살고 있던 만주가 나온다. 이 지역은 명나라의 영토에 속하긴 했지만, 중앙 정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여진족 세력들이 각자 힘을 과시하며 나눠져 있었다. 그리고 분열된 여진족을 누르하치가 통일시킨다. 젊은 나이에 부족의 지도자가 된 그는 주변 여진족을 모두 정복해 세력을 빠르게 통합했다. 이를 견제해야 할 명과 조선은 각각의 사정이 있어 여진족에게 신경 쓸 입장이 아니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전후 복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런 점을 알고 있던 누르하치는 조선에게 지속적으로 파병을 보내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심지어 조선을 조상의 나라라고 칭하면서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당시 명나라는 만력제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너무 무능했다. 만력제는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암군 중 한 명이다. 정치엔 별 관심이 없었고 여색과 술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 와중에 막대한 병력을 왜와 전쟁 중인 조선에게 지원을 했다. 조선 입장에선 고마웠지만, 재정도 좋지 못한 명나라에서 황제가 임의로 대규모 군대까지 동원하고 있으니 신하들과 백성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1616년, 누르하치는 어느 정도 세력이 규합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숨겨둔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만주 지역을 완전히 통합하고 금나라의 정통성을 이어받는다는 의미로 '후금'을 국호로 하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명나라의 지배를 간접적으로 받는 여진족이 독자적인 국호를 사용하는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더 이상 명의 명령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겠다는 의미였다. 명은 즉각 백성들과 주변국들에게 후금과의 교역을 금지를 알렸다. 경제적 타격을 입은 후금은 결국 먼저 명나라를 공격한다. 이것이 명-청전쟁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르후 전투다.  


광해군 어진



광해군의 중립외교  



  명나라는 전쟁이 시작되자 조선에게 군대 지원을 요청한다. 이미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군대를 지원한 바가 있어 조선은 이를 거절하기 힘들었다. 아니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아버지로 섬기고 있는 강대국에서의 지원 요청인데다가 불과 십여 년 전에 병력을 전달한 적이 있으나 거절할 명분도 전혀 없다.

  조선의 왕 광해군은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조선 역시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기 어려웠다. 대부분의 신하들도 이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위기에 빠진 명나라를 구하고 지난날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며 즉각적인 파병을 주장했다. 하지만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다. 명분은 분명 파병에 있었지만 명분만 믿고 지원하기에는 조선의 상황이 좋지 못했다. 결국 그는 굳이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중립적인 자세를 통해 이 상황을 해결해나가고자 했다.


  과연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옳은 선택이었을까?


  자 한 가지 상황을 가정해보자. 당신이 사업을 시작했다가 정말 망했다. 당장의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이곳저곳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그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돈 많은 형이 흔쾌히 돈을 빌려주겠다고 말했다. 그 돈을 받은 당신은 가까스로 생계를 이어갔다. 시간이 지나 이번엔 돈을 빌려준 형의 상황이 안 좋아졌다. 급하게 돈이 필요했던 이 형은 당신에게 돈을 빌려달라 부탁했다. 과거에 돈을 받은 경험이 있던 당신은 그 형을 모른 척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빌려주는 선택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려울 때 돈을 빌려준 사람에 대한 좋은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신하들도 다 같은 생각이었다. 형편이 안 좋아도 일단은 어떻게든 빌려주고 싶은 게 사람의 도리다.


  하지만 광해군에게는 신하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 한 가지 정보가 더 있었다. 그것은 후금 군대의 강력함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신의주로 도망간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한반도를 통치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시기의 세자 광해군은 왕이나 다름없었다. 광해군은 정치가 불가능한 아버지와 무능한 형 임해군을 대신해 조선의 백성들을 다독이고 의병을 지원하며 백성들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이 시기에 왜군은 한반도를 넘어 중국 대륙까지 진출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는 세계 정복을 위해서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다. 그는 실제로 왜군을 이끌고 유럽까지 진출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한반도도 넘지 못하고 끝났지만.


  그래서 왜군은 당시 여진족이 살고 있던 만주를 공격한다. 수천 명의 왜군은 압록강을 넘어 여진족을 공격했는데, 조총을 들고 싸운 왜군을 상대로 여진족의 기마 궁사들은 단 몇백 명으로 손쉽게 제거한다. 광해군은 세자 시절 여진족의 전투 방식을 알고 있었고, 이들이 맘만 먹고 한반도를 침공한다면 조선의 군대는 제대로 상대하지도 못하고 무너질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광해군은 명나라에 대규모 병력 지원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명이나 후금이나 둘 다 조선보다 훨씬 강력한 국가였다. 두 나라는 애초에 조선과 체급이 맞지 않은 나라였다.

  그렇다면 고래 싸움에서 새우가 선택할 방법은 정해진다. 두 고래와 모두 대화를 해야 한다. 이 고래들은 맘만 먹으면 새우를 잡아먹을 수 있기 때문에 양측 사이에서 적절하게 줄다리기하면서 대화할 구멍을 만들어놓아야 한다. 대놓고 한쪽 편을 들어주는 것만큼 위험한 행동이 없다. 명나라에 비위를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후금과 지속적인 대화를 해야 한다. 광해군은 명에 파병을 안 할 수는 없다. 다만 선뜻 대군을 보내는 것은 위험하다. 후금의 미움을 살뿐더러 조선은 그럴 형편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광해군의 외교를 정확히 표현하면 중립 외교가 아니라 이중 외교다. 중립이란 자발적으로 나서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조선은 자발적인 선택을 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광해군은 명과 청 양쪽에 모두 다리를 놓기 위해 한 가지 전략을 사용한다. 그는 강홍립에게 별도의 밀서를 전달해 명나라 편에 가담해 싸우나, 전쟁에서 질 것 같으면 후금에 투항하라고 일러두었다. 이렇게 되면 명나라의 요구에 수락하면서도 강홍립으로 하여금 훗날 후금과의 대화할 창구를 열어둔 셈이 된다. 그리고 광해군은 후금과의 외교 문서에서 그들의 우두머리인 누르하치에게 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명을 섬기는 조선에서 오랑캐로 여기는 우두머리에게 칸의 호칭을 붙이는 것은 신하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가 명암이 확실하고 보는 관점에 따라 늘 엇갈리지만 대체적으로 외교 부분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가 바로 위에 서술한 점 때문이다.  


영화 '남한산성'에서의 인조



인조의 친명배금 정책  



  하지만 이 상황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한다. 바로 광해군이 폐위된 것이다. 광해군은 이중 외교 이전에도 왕으로서 부적합한 몇 가지 정통성의 결함을 안고 있었다.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 정실부인이 아닌 후궁 공빈 김 씨 아래에서 태어난 서자였다. 적장자 계승 원칙을 표방한 조선 예법 상 그는 왕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자 시절 보여준 뛰어난 정치력과 형 임해군의 실각, 그리고 너무나도 어렸던 적자 영창대군의 상황이 겹치며 왕이 된 것이다. 거기에 북인까지 광해군을 지지하며 조정의 주인에 오른다.

  문제는 왕이 된 이후 동생 영창대군과 어머니이자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며 정통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는다. 이른바 폐모살제라 불리는 광해군의 행동은 성리학을 자신들의 이념으로 삼은 사대부에게 비난을 샀다. 여기에 칸 칭호 사용으로 사대주의 마저 부정하자 광해군에 반대하는 사대부들은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명분이 생긴 서인들은 광해군의 조카 능양군을 앞세워 반정을 일으킨다. 이 것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인조는 백성들의 기대와 달리 왕으로서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자 시절부터 정치력을 탄탄히 쌓아온 광해군과 너무 비교되었다. 광해군은 좋은 왕은 아니었지만 무능한 왕은 아니었다. 반면에 인조는 좋은 왕도 아니고 유능한 왕도 아니었다.

  그는 광해군의 정책을 모두 뒤엎기 시작했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철폐하고 후금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반정을 통해 왕이 된 인조는 조선의 정식 왕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명의 재가가 필요했다. 인조는 대놓고 후금을 무시했고, 북방 수비 병력을 모아 명나라에 지원했다. 결국 이 행동이 후금을 자극했다.

  결국 누르하치는 조선을 후방에 두고선 명과 전쟁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1627년 사르후 전투가 끝나자 곧바로 조선을 침공한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인조는 섣부른 친명배금정책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인조는 곧바로 강화도로 도망갔고, 후금은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강요했다. 조선은 후금의 요구를 들어줬고, 그제야 본국으로 돌아갔다.

  인조는 명에 충성하고 후금을 배척했지만 명으로부터 초기에 인정받지 못했다. 오히려 정치 잘하고 있던 광해군을 왜 내쫓았냐며 조선에 따졌다. 이 점을 보면 광해군의 이중 외교는 잘 작동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조선과 청 관계의 악화  


  정묘호란을 통해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약조에 따라 조선은 명과 전쟁하는 후금을 공격할 수 없다. 인조가 후금의 심기를 건드리기는 했지만, 조선을 완전히 정복시킬 생각은 아직 없었다. 그사이 후금의 지도자 누르하지가 죽고 그의 아들 홍타이지가 새로운 왕에 오른다.

  그리고 홍타이지에게 조선에게 악감정이 생기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인열왕후 장례식 조문 사신 문제  


  인조의 첫째 부인 인열왕후가 산욕열에 걸려 1635년(인조 12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녀는 장남 소현세자와 훗날 효종에 오르는 봉림대군의 어머니였다. 소식을 들은 홍타이지는 인열왕후의 장례 조문 사신단을 조선에 보낸다. 무려 77명의 대규모 사절단을 보냈다. 후금이 이런 대규모 사신을 보낸 데에는 후금의 세력 확장을 과시함과 동시에 조선에 군신의 관계를 맺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후금 사신단에게 푸대접을 한다. 이들은 장례식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렸다. 후금 사신단 입장에서는 충분히 화가 나는 상황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사신들이 본국으로 떠나려고 하자 백성들이 직접 나서서 어디 오랑캐들이 사신을 보내냐며 돌팔매질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후금 조문 행렬은 조선에 와서 크게 창피를 당하고 돌아간다.  



칭제건원  


  후금이 드디어 칭제건원을 한다. 1636년 4월 11일 후금의 우두머리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에 올르고 국호를 청이라고 정했다. 이는 자신들이 이제 명나라와 동등한 관계임을 온 천하에 알린 것이다. 이들은 새로운 존호와 연호를 사용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인해 무너지는 청나라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우두머리 홍타이지는 이제 숭덕제라는 칭호를 가진 황제가 되었다.

  숭덕제는 자신의 즉위식을 축하하기 위해 각국의 사신을 초청한다. 자연스럽게 조선에서도 사신 행렬을 보냈다. 이번엔 조선이 청에 보낸 사신들이 문제를 일으킨다. 숭덕제는 조선 사신단에게 여진족의 예법에 따라 삼궤구고두례를 요청했으나 거부했다. 더불어 자신들은 명의 황제만을 인정한다며 성찬에서 대놓고 황제를 무시하는 행위를 보인다. 청나라 부하들은 당장 조선의 사신단을 처형시키라고 주장하지만 숭덕제가 간신히 만류시켰고, 이들에게 친서를 쥐어주고 조선으로 돌려보낸다. 숭덕제가 조선에 보낸 친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사신단이 청에 와서 추태를 보였으니, 당장 사과하고 신하의 도리를 하지 않는다면 조선을 침공하겠다.


  친명배금정책을 국가 외교 정책의 기조로 정했다 하더라도 사신단의 행동은 너무 무례했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청은 조선 왕비를 조문하기 위해 사신을 보낸 것인데 그렇게 매몰차게 대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칭제건원에 불만이 있다 하더라도 굳이 황제 즉위식에서 대놓고 무시하는 행동은 미친 짓이었다. 그리고 숭덕제의 친서를 받은 인조는 답하지 않았다. 결국 화가 날대로 난 청은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김훈의 소설 원작의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척화파 VS 주화파  



  바로 이 시점이 영화 '남한산성'의 시작 배경이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척화를 주장했다. 서인 강경파인 김상헌은 명나라를 섬기는 것이야 말로 조선의 도리며, 오랑캐들과는 절대 화친을 맺어서 안된다고 말했다. 평소에도 강직하기로 유명한 그는 끝까지 오랑캐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이조판서 최명길은 주화를 주장했다. 최명길은 청나라와의 전쟁이 무모한 행위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정묘호란 당시에도 조선을 위해 큰 역할을 했다. 정묘호란 당시 청나라는 단 10만에 평양성에 도착한다. 청나라의 속도에 놀란 인조는 황급히 강화도로 도망가는데, 최명길이 직접 나서서 화친 문서를 전달했다.  



척화파와 김상헌  


  유교 국가에 있어 사대주의는 가장 중요한 정책 기조다. 유교에서 군신관계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진리다. 그리고 이 사대주의란 국가 간에 맺어지는 군신관계다. 오늘날이야 사대주의라는 말이 굴욕적인 외교의 대명사처럼 쓰이지만, 당시엔 아니었다. 이 말을 달리 생각해보면 명나라를 배반하고 청나라를 새로 섬기는 것은 조선 건국이념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와 같다. 척화파의 주장은 사상적 기반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헌법에 따라 국론을 결정한 지극히 당연한 행위였다.

  김상헌은 이 척화의 논리를 일생 내내 유지했다. 심지어 삼전도의 굴욕으로 인조가 청나라 황제 앞에 무릎을 꿇는데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나터나지 않았다. 이 행동으로 김상헌은 반대파들에게는 인조의 명령도 거부하는 배반자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는 삼전도 굴욕 이후 실각하게 되는데, 효종 대가 돼서야 조정에 복귀하지만 노년이 되어서도 청나라에 대한 비판 기조를 그대로 유지한다. 오히려 효종대에 도달해서는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자는 북학 세력이 커졌음에도 자신의 기조를 변화시키기 않았다.  



주화파와 최명길  


  주화파는 청의 세력이 너무 강대하니 우선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훗날을 도모하자는 내용이다. 이미 조선은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이라는 두 차례 전쟁으로 백성들이 지친 상태였다. 명나라는 이제 서서히 무너지는 게 눈에 보였고, 청은 그 기세를 올리고 있으니 그들에게 밉보여 조선을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청과의 전쟁은 승산이 없다.

  최명길은 주화를 주장해 척화파들에게 매국노라는 오판을 받았지만, 그는 조선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청나라는 순식간에 서울까지 진입한다. 정묘호란보다 빨랐다. 인조는 청의 군대가 오면 강화도로 도망 칠 생각이었지만, 이미 이 점을 알고 있던 청나라 군대는 한양의 뱃길을 모두 막았다. 청나라 군대가 서울에 오자 부랴부랴 남한산성으로 도피한다. 인조가 남한산성이라도 갈 수 있었던 이유가 최명길이 직접 나와서 청나라 장군과 만나 시간을 끌어서 가능했다. 남한산성에 돌아온 최명길은 인조를 설득해 청나라에 대한 항복 문서를 작성한다. 그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조선과 인조는 더 굴욕적인 조건에 항복 조약을 체결했을지 모른다.

  그는 단순한 친청파가 아니었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는 명을 공격하기 위한 병력을 조선에 요구한다. 그러자 최명길은 청의 수락을 거절하자고 말한다. 그 이유는 청을 섬기지만 명에 대한 의리 역시 남아있고, 오랜 전쟁으로 보내줄 병력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이 주장을 직접 숭덕제 앞에 가 전달했다. 청의 요구 거절을 청나라 황제 앞에서 말하는 건 쉽지 않다. 숭덕제의 미움을 사 죽을 것이 두려웠던 신하들은 아무도 나서지 못했지만, 최명길은 직접 나섰다.


  영화 '남한산성'은 이 척화파와 주화파를 상징하는 두 인물인 김상헌과 최명길의 논쟁을 보여준다. 두 사람이 각자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 그리고 이에 따라 흔들리는 인조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17세기 초 조선의 대청 외교 정책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외교문제와도 많이 닮아있다. 명분과 실리 둘 사이에 어떤 외교를 택하는 게 맞는지는 오랜 기간 이어져온 논쟁거리 중 하나다. 섣불리 국가의 이득만을 주장했다간 주변 국가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되기도 한다. 반대로 이념의 논리만 내세우다가 국가적인 이득을 놓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외교에 있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기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영화 '남한산성'을 보는 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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