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조책방에서 북스톤 출판사의 신간을 함께 읽다.
아이가 생애 첫 독립여행을 떠나는 날, 새벽 5시.
이런저런 생각으로 밤새 뒤척이다 기어코 몸을 일으켰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한 탓에 머리가 띵하고 울렸지만,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지잉’ 하고 반응했다.
추운 날씨, 처음 가보는 기차역, 낯선 도시, 혼자 먹는 식사, 겨울 바다….
아이가 가게 될 장소마다 내 마음이 먼저 설레발치며 돌아다녔고, 걱정은 심술쟁이 영감처럼 마음에 척척 달라붙었다.
마음을 돌리고 싶을 때는 책을 들어야지.
아이에게 간단한 아침을 차려주고 이불속에 몸을 집어넣은 채 애써 책을 펼쳤다.
‘탐조책방’에서 열리는 독서모임을 위해 즉흥적으로 신청해 받은 책이었다.
‘유러피언 로빈(European robin)’이라 불리는 작은 꼬까울새가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삶의 무게를 덜어내는 방법’이라는 부제 아래 적힌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10cm가 조금 넘는 새들에게 이 세계는 얼마나 거대할까.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짧고 간결했다. 새들은 깃털을 얻기 위해 매년 가장 연약한 털갈이 시기를 견뎌내고,
해마다 같은 곳에 둥지를 틀며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간다.
새끼가 독립할 시기가 되면 단호하게 내보내며, 오직 집념과 결기로 자기의 영역을 굳건하게 지켜낸다.
이 책은 과학자의 시선으로 새의 생태를 분석하려 애쓰지 않았고, 문화인류학자처럼 인간 사회와 비교하지 않아서 오히려 좋았다.
그저 새를 보기 좋아하는 한 사람이, 새를 보며 느낀 점을 두런두런 이야기해 주는 느낌이 따스하고 다정했다.
특히 딸아이가 첫 여행을 홀로 떠나는 오늘,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 문장이 있었다.
뻐꾸기를 비롯한 철새들이 왜 먼 거리를 여행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질문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여름휴가를 준비하며 가이드북과 지도, 인터넷을 뒤적여 정보를 얻는다. 여행기에서는 라디오, GPS, 표지판을 끊임없이 확인한다. 올바른 길로 나아가려면 온갖 무기가 필요하다.
반면 철새가 가진 건 날아가겠다는 의지뿐이다. 그리고 날개 아래 펼쳐진 바다와 산, 하늘의 별과 태양만 있으면 된다. 철새들은 도중에 죽지 않는 한 결국 목적지에 도착한다.
- [새들이 전하는 짧은 철학(필리프J)중 본문 38쪽]
문장을 읽는 찰나 안도감이 들었다. 딸이 여행을 잘 끝마치고 돌아오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나의 관심은 비로소 나에게로 돌아왔다.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너무 곰곰이 헤아려보는 습성이 있다.
때로는 그냥 날아가겠다는 의지만 있어도 되는 것을.
쇼츠를 보거나 인스턴트 요리로 허기를 때우는 등 허투루 시간을 보낸 적도 많으면서, 정작 무언가를 시작할 때는 의미 없는 일이 되기 싫어 결과가 명확히 보이는 일만 찾곤 했다.
결과가 보이지 않거나 도착점이 멀리 있는 일은 주저했다.
내가 가진 기능이나 자원 따위를 계산하다가 손해라는 판단이 들면 시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생물학적 나이가 이렇게 차오르는 동안, 그저 좋거나 재미있어서 해보았던 일이 별로 없다.
이제는 ‘왜’를 따지지 말고 ‘어떻게 해볼까?’를 고민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꿔보면 내 삶에 어떤 일이 펼쳐질까?
철새가 ‘왜’를 따지기 시작하면 그 머나먼 길이 얼마나 걱정거리로 가득할까.
‘왜 내가 가야 하지?’, ‘왜 내가 해야 하지?’, ‘왜 인간은 자기들만 알지?’,
‘왜 그때 있었던 강이 이제는 없어졌지?’ 새들이 이렇게 묻기 시작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모르긴 몰라도 어떤 철새도 날아오르지 못하거나, 더 효율적으로 도착할 경로를 계산하느라 몇 달 동안 회의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명확한가. 단순한 명제는 마음을 굳세게 한다.
딸아이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고, 올해 내가 해야 할 새로운 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마저 쭈그러드는 느낌이 들었다. 참 감사한 일이다.
딸아이가 동해 바다를 보며 차를 마실 시각, 나 역시 책방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멋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공간에 던져진 언어들을 길어 올리며 부지런히 메모했다.
결국 한 아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모인 나의 언어가 더 깊어져야 함을, 우리는 서로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동거인임을 인정해야 했다. 시간을 주지 않는 무시각적인 소비 시스템 속에서도 시간이 지나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에 대해 알면 결정이 빨라지고, 내가 고민하는 그 틈바구니 속에 여행은 존재한다.
새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우리 역시 이렇게 각자의 삶을 살아내고 있구나.
자기만의 삶을 산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다.
어쩔 수가 없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의 우주이니까.
신이 그렇게 우리를 창조했으니.
그래도 혹시 만약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겠는 날이 오면 새를 보러 가야겠다.
그래도 의문이 든다면....
또 새를 보러 가야지.
<<새들이 전하는 짧은 철학>> 필리프J. 뒤부아, 엘리즈 루소 지음, 박효은 옮김, 북스톤
#탐조책방 #북스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