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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괜찮은 죽음 Sep 08. 2024

엄마를 사랑하니?

함께 겪는 성장통

아들의 무기력은 오래된 감기 같은 것이었다. 

작년, 아들은 침대에 멍하니 누워 지내는 때가 많았다. 

다행히 학교는 다녀왔지만 그 외의 시간은 침대에 누워있거나, 컴퓨터게임을 하거나, 화장실에 콕 박혀 오랜 시간을 보냈다. 

무언가를 하려는 의욕이 없었다. 주 1회 한번 미술과 농구를 간신히 다녔었다. 

병원을 가자거나 상담을 하자는 권유는 완강히 거부했기에 불안함을 안고 살았다. 

     

올해는 나아진 듯했다.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는듯했고, 게임을 더 오래 했지만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했는데,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것이 좋은 싸인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또, 계절이 바뀌는 시간이 오듯 아들의 감정 기후는 빠르게 식었다. 

무표정의 얼굴. 한숨. 게임하면서 간간이 들리는 욕설. 

무얼 하든 하나도 재미가 없고,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아이. 죽음에 대해서 생각이 많아진다는 아이.      


뭐가 문제일까? 

보통의 남자아이들이 다 겪는 성장통일까? 그런 것이라면 다행인데, 

혹시 내가 무언가를 잘못해서 벌어진 것은 아닐까? 

나의 불안함과 예민함이 아들에게 더 농축되어 전해진 것은 아닐까?

해야 할 것을 제때 가르치지 않아서 벌어진 것은 아닐까? 


아이의 마음상태는 아이의 몸상태로 나왔다. 

심하게 축축 처지고,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평소에 있던 복통보다 더 큰 아픔을 느끼는 듯했다. 

그런 아이를 보는 것은 무서웠다. 

아이가 잘못될까 봐. 한마디 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일요일. 

12시가 넘어서야 겨우 일어난 아이는 대충 한 끼를 먹고 컴퓨터게임에 빠져들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컴퓨터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내 마음은 빨간불이 켜진다. 

기어코 아들에게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고 날 선 말투로 그만하라고 명령한다. 

아들에게 소리 지르며 컴퓨터를 발로 차서 부수는 상상을 한다. 

어쩌면 상상 속의 나의 행동이 이미 눈빛으로 아들의 마음에 꽂혔을지도 모른다. 


신랑을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한 시간 동안 마음을 정리하고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랑 얘기 좀 하자.”      


저녁을 차리는데 아들이 이야기를 꺼내주었다.      


“게임 오래 해서 미안해.”

아들의 미안해라는 말이 시작버튼이라도 되듯 주저리주저리 말들이 쏟아진다.      


“엄마는 그런 생각이 들어. 엄마가 너희들에게 필요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 

그냥 밥 해주고 빨래해 주며 돈 벌어오는 사람인가 싶어. 

네가 우울하다고 해서 잔소리하는 것도 엄마는 조심스러워. 

그런데 너는 컴퓨터 하는 그 시간 동안 친구랑 신나게 통화하며 게임하더라. 

엄마는 뭐 하는 사람인가 싶어. 너희는 엄마가 이야기하면 잔소리로 듣지. 알아서 한다고.      


엄마는 네가 마냥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 억지로 하는 일이 싫어서 알아서 하라고 했던 일들이 너희에게는 자유만 있고 엄마 아빠한테는 책임만 남은 듯 해. 지금 우리 집에는 규칙이 없어.”     


“내가 왜 우울했는지 알 것 같아.”

“뭔데?”

“나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나는 나를 돕고, 엄마아빠를 돕고, 친구들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게 안돼. 난 내가 하나도 마음에 안 들어.”


“너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고 싶은 거잖아? 그런데 그게 잘 안 돼서 우울한 거잖아. 

그런데 엄마는 네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 

네가 가정폭력에 시달리거나 우리나라가 전쟁 중에 있거나, 심지어 고아도 아니잖아.  

두 시간을 게임을 해도 괜찮아. 단 30분이라도 네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거나, 운동을 하거나, 

너한테 진짜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지.”


... 


“네가 어른이었다면 엄마는 나가서 돈 벌어오라고 시켰을 거야. 하지만 너는 겨우 열네 살이잖아. 

그럼 네 나이에 맞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그래야 너 스스로에게도 떳떳하지.

게임은 마약 같아. 그건 결코 건강한 즐거움은 아니야.”      


듣고 있던 아들은 감정이 올라왔는지 울음을 터트렸다. 


맞다. 아들은 인정욕구가 많은 아이였다. 

충분히 인정받지 못해서 그러지 않았나 싶었다. 

잘하고 싶은데 뜻대로 안 되거나, 무얼 할지 몰라서 방황하고 있는 어린아이가 보였다.      


“엄마. 날 사랑해 줘서 고마워.” 

“그건 너무 당연한 거야. 엄마가 널 낳았잖아. 엄마 목숨보다 네가 소중해. 

그런데 네가 엄마를 사랑해 준다면 그거야말로 고마운 일이야. 

엄마를 사랑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운동을 한다고 나가는 아이는 제법 예전처럼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그 마음이 좀 가벼워졌으면 하고 기도한다.      


성장통. 

그것이 어떤 감정을 수반하든, 마음의 아픔은 찾아온다. 

1령 2령. 애벌레가 허물을 벗어야만 결국 성충이 되듯 

마음의 껍질이 벗겨질 때의 고통은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 

아들은 14살의 성장통을 겪고 있고 

나는 고2와 중2의 엄마 성장통을 겪고 있다. 

참...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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