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물소리가 들린다. 뒤이어 휘파람 소리가 난다.
‘그래, 지금 기분이 좋구나’
컴퓨터를 켜는 소리가 들린다. 뒤이어 중저음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어휴, 그래. 지금 신이 났구나.’
하루 종일 재잘거리며 이야기하고 웃어주던 아이 덕분에 하루가 즐거웠던 엄마는 어디로 가고
이제는 방문에 귀를 살짝 대고 아이의 기분이 어떤지를 알아내고자 하는 엄마.
종잡기 어려운 기분으로 하루를 사는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엄마, 그게 요즘 내 모습이다.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면 글쎄 우리 선생님이 말이야~ “
“엄마, 지난번에 유튜브에서 어떤 영상을 봤는데~”
“요즘 지구과학이 너무 재미있어. 한번 설명을 해볼 테니까 들어봐~ “
라고 다른 집들은 대화를 나눌까?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아니, 물어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나도 그랬으니까.
“너와 말하는 것은 늘 조심스러웠어.”라고 우리 엄마가 말씀하셨으니까.
아마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 아이보다 더했을 것 같다.
말도 별로 없었고, 감정을 크게 표현하는 일도 없었다. 본디 유쾌한 성격이 아니었다고 스스로를 기억한다.
그래 나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내 아이는? 내 아이라서 이제 유전자의 힘이 발현되는 것인가?
이제 정말 엄마한테 하루 종일 놀아달라고 하던 그 아이는 없는 거야?
아니, 엄마 옆에 붙어서 재잘재잘 시끄럽게 하던 그 아이는?
그것도 아니면, 하교할 때 저 멀리서만 보여도 손을 세차게 흔들며 웃어주던 그 아이는?
그래서 그랬나 보다.
아이가 세 살 때까지 평생의 효도는 다 보여준 것이라는 경전 같은 구전.
아이의 가장 큰 효도는 부모를 보고 크게 웃는 것. 어쩌면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조건이나 이유 없이 부모라는 이유로 사랑을 받았다.
아이를 행복하게 해 주기도 전에 아이의 웃음이 먼저 나를 행복하게 했다.
힘들어도 아이 덕분에 웃을 수 있었고, 엉뚱하게 화를 내도 나는 금방 용서받았다.
그때 아이덕에 실컷 행복했으니 사춘기의 아이를 대하면서는 받은 만큼 돌려주라는 것이 신의 뜻인 듯하다.
아이의 기분을 살피고 마음이 어떠한 지를 헤아리는 일이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중요 일과 중 하나다.
문제는 그 일이 참 쉽지 않다는 점이다. 더 정확히는 부정적인 기운이 스멀스멀 느껴지는 아이의 기분을 웃는 낯으로 돌려주기 어렵다. 오히려 아이의 기분에 전염되어 집안 전체가 우울의 구렁텅이로 빠질 때가 허다하다.
어떤 날은 웃으면서 꼭 껴안고 잘 자라고 말할 수 있는 성공적인 날도 있지만, 어떤 날은 화장실에서 내내 나오지 않는 아이에게 소리치는 날도 있다. 내 몸이 피곤할라치면 핸드폰 그만하고 일찍 자라는 짧은 말 한마디로 엄마 일과를 마치는 날도 있다.
내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아이의 기분이 절대로 풀어지지 않는 날도 많다. 친구관계의 어려움. 학교 가기 싫은 데 억지로 일어나야 하는 짜증. 잘하고 싶은데 안돼서 속상한 날. 사고 싶은 건 많은데 다 떨어져 가고 있는 용돈의 압박까지 안 그래도 사춘기 호르몬의 여파로 쉽게 짜증과 흥분 사이를 오가는 아이의 심기를 건드리는 요인이 너무 많다.
사춘기 호르몬이 내 아이의 행복을 빼앗고 있다니 할 수만 있다면 그 호르몬을 싹 다 그러모아 통째로 교환하고 싶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다 어른이 되어가는 삶의 과정인 것을.
그 질풍노도의 시기를 먼저 겪은 선배로써,
그리고 아이로부터 이미 충분히 받은 사랑의 빚진 자로서
나는 오늘도 아이의 행복한 웃음을 끌어낼 요량으로 행동을 개시한다.
“아들~ 이것 봐. 엄마가 수요장에 가서 너 좋아하는 탕수육 사 왔어. 엄청 오랜만이지?”
“딸~ 카드에 돈 2만 원 넣어뒀다.”
지난 10월에 쓴 엄마 일기 중 한편입니다
다시 보니, 그 때의 내 마음이 어떠했는지가 보이네요.
요즘은 방학을 맞이해서 그런지 저도 아이도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때처럼 소모적인 감정으로 힘들어하는 시간보다는
제법 웃으면서 지내는 시간이 많습니다.
역시,
너나 나나 잘먹고 잘자는 일이 행복의 기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