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을 앞둔 나의 마음에게
지금으로부터 25년도 더 된 고등학생 시절 교대에 가기로 마음먹고 할머니께 선생님이 되겠다고 말씀드렸다.
“아이고, 선생 똥은 개도 안먹는겨~”
그때는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감도 안 왔다.
그저 공부는 그럭저럭 꽤 잘했고, IMF시절이었으니 취업걱정은 할 필요 없겠다 싶었고 무엇보다 외할아버지는 교사가 되겠다고 하는 나를 늘 기특해하셨었다.
선생님이 되겠다고 했을 때 할머니는 똥얘기를 하셨지만 외할아버지만큼은 “그래, 네가 참 장하구나!” 하셨다. 어렸을 적부터 동네 꼬마들을 죄다 불러 모아놓고 선생님 놀이를 기가 막히게 했다는 것을 아마 알고 있으셨을 테지. 아무튼 두 분의 반응은 달랐으나 손녀딸이 교대에 척 붙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은 같았을 것이다.
우리 학교는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해 있어서 화려한 밤거리가 있는 대학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1학년 때부터 들어야 하는 학점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에 반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교과목은 제한적이었다. 일주일에 2~3일은 체육복을 입고 조모임과 과제를 하러 뛰어다닌 듯했다.
선택과 자유의 상징으로 여겨진 대학인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를 훨씬 더 많이 배우고 있다는 점에서 교대생활은 제2의 고등학교를 다니는 것과 같았다.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교사가 될 나는 뭐든 열심히 하고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교사가 돼야 한다 여겼으니까 말이다.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고 임용고시도 한 번에 척 붙어 집 가까운 곳으로 발령받은 나는 나름 만반의 준비가 다 되었다고 믿었다. 어리석게도 말이다.
처음 6학년을 맡아 가르쳤는데 그 아이들과 고작 열한 살 차이였다.
우리 집에서 같이 사는 사촌동생이랑 겨우 2살 적은 아이들. 아직도 엄마가 밥 차려줘야 밥 먹고,
빨래해 줘야 옷 입고 책상 안 치운다고 잔소리 듣고, 강아지 산책을 서로 시키라고 동생이랑 싸우는 내가 과연 어른처럼 보일까? 교과서만 열심히 보고 다른 독서는 하지도 않았으며 뉴스도 잘 안 챙겨보는, 게다가 남들 다 한다는 세계여행도 한번 못해본 경험을 가진 내가 들려줄 얘기나 있을까?
그렇지만 나는 똑똑하고 열정이 빛나는 멋진 ‘어른’의 모습으로 교단에 올랐다.
호숫가의 우아한 백조처럼 속은 허덕일지언정 보이는 모습은 유연하고 매끄럽고 싶었다.
게다가 난 젊지 않은가?
누구보다 일찍 출근을 하고 마지막까지 남아 수업준비를 했다. 수학평가지도 잔뜩 복사해 두고, 우리 반 전체가 독서장제 금장 받을 계획도 다 세워두었고, 일기 검사도 미리미리 다 하고, 내일 있을 과학실험 실패를 대비하여 예비실험도 했다. 게다가 다음 달 운동회를 위해 부채춤 동작도 머릿속에 꽉 채워두었다.
그럼에도 무언가 빠진듯했다. 그게 뭘까? 나는 정말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데 뭐가 이리 허전한 거지?
퇴근하면 저녁 먹을 틈도 없이 침대와 한 몸이 되는 나날을 보냈다. 그럼에도 꾼 돈을 못 갚은 사람처럼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듯한 마음이 들었다.
마음속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은 있었지만 젊음의 열정으로 마음을 꾹꾹 누르며 몇 년을 보냈다.
그러다 할머니를 만나면 할머니에게 다 일러주고 싶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할머니의 눈에는 제아무리 머리가 희게 물들어가는 손녀딸이라도 궁둥이 팡팡 두드려주며 내 강아지~라며 받아주는 마음 말이다.
겨우 일 년에 몇 번 볼까 말까 했어도 언제든 할머니의 품에는 어색함이 없었다.
낯부끄러워 다른 이들 앞에서 감히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도 할머니한테는 할 수 있었다.
“할머니, 글쎄 그 녀석이 얼마나 시끄럽게 떠드는지 선생인 나보다 더 많이 말한다니까.
게다가 친구들이랑은 또 왜 이리 싸우는지.
내가 그 녀석 싸움을 말리는 것보다 오징어를 말리는 게 더 낫겠더라니까.”
“거보랑께. 선생 똥은 개도 안먹는다니께.”
할머니는 여전히 똥타령을 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지금은 찰떡같이 이해한다.
할머니는 교사의 길이 얼마나 지치고 힘든지를 예견하신 게다.
교사가 된다는 것은 가출한 아이를 찾겠다고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사진 한 장 딸랑 들고 동네 찜질방을 죄다 돌아다니는 일이라는 것을, 집이 가난해서 겨울에도 맨발로 다니는 아이의 겨울옷을 장만해 주는 일이라는 것을, 전교 1등 하면서도 엄마한테 칭찬 한번 못 듣는 아이에게 무심한 엄마대신 열심히 칭찬을 해주어야 하며, 학교짱이면서 대드는 것은 다반사고 임신한 담임이 보는 앞에서도 책상 위에 벌렁 드러누워있는 아이 앞에서도 강한 척을 해야 한다는 것을 다 알고 계신 게 분명하다.
그렇게 고되고 험난하고 삶이 팍팍하니 똥도 퍽퍽하니 쓸 곳이 한 개도 없지 않겠는가.
오죽하면 똥개도 싫어하랴.
할머니가 살아계셨더라면 함께 똥타령하며 고된 교사의 삶을 위로라도 받을 텐데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든다.
특히 내가 하는 일들이 다 의미 없다고 여겨지는 날들이 계속되면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22년과 23년이 특히 그랬다. 선생 노릇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라 할머니가 백 명쯤 필요했다.
열심히 해도 그 마음을 몰라주는 학생과 학부모에 대한 미움이 쌓이고 쌓여있을 때쯤 서이초 사건이 터졌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젊은 후배교사들에 대한 비통한 마음과 우리 편은 없다는 배신감은 심각한 후유증을 교사에게 안겼고 나 역시 슬픔의 그림자가 비껴가지 못했다.
굉장히 우울했고, 깊은 나락에 떨어져 있는 듯한 침체의 그늘에 마음이 갇혔다.
나만 열심히 하면 괜찮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게 되었고, 주변 동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얼마나 추울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상실감은 교사로서의 내 삶에 치명타를 날렸다.
관리자와 교육부를 향한 불신. 학부모에 대한 방어.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는 학생들까지.
교육자로서 갖고 있던 마음 한쪽이 깨어졌기에 앞으로는 반쪽짜리 마음을 지닌 교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마음이 슬프고 슬퍼서 회복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