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숫자다.

당신이 가진 수는?

by 괜찮은 D

“352번? 혹시 352번 이세요?”

“아니요.”


속옷 차림으로 손님을 찾고 있던 세신사 아주머니는 황토방 문을 조심히 닫았다.

나는 276번이다.

이곳에서 내 이름, 나이, 사는 곳, 하는 일 등이 하나도 중요치 않다.

나는 단지 276번 칸에 옷가지와 소지품을 두고선 목욕바구니를 들고 목욕하러 들어온 손님일 뿐이다.

나는 두어 시간 동안 276번 일 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숫자이다.


이 땅에 태어나 주어진 주민등록번호서부터 내가 가진 전화번호, 내가 맡은 반, 내가 몰고 있는 차량 번호,

살고 있는 집의 주소 등 내가 소속해 있는 물리적 공간은 모두 숫자의 조합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햇수와 날짜, 시간 등의 4차원적인 시공간도 모두 숫자의 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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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평균 7시간 잠을 자고, 커피는 2잔을 마시며, 밥은 3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독서는 30분, 메모하는 시간 5분, 아들 약 챙겨주는 횟수는 2번, 자기 전에 남편과는 1번 통화,

7일 중 1번은 딸을 데리러 가고, 매일 24명의 아이들과 하루 5시간 이상을 시끄럽고 복잡하게 보낸다.

이렇게 하루를 사는 동안 내가 갖는 수가 이렇게 많을 진데, 오늘까지 15828일을 산 나에게 얼마나 많은 숫자가 쌓였을까?


세신사 아주머니가 352번을 외치는 순간 나는 내가 숫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른 까닭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숫자가 달라서라고 결론을 내어 버렸다.


‘수는 끝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떤 수도 다를 수 있어. 끝이 없으니까.

사람의 인생도 똑같은 게 하나도 없잖아?

그래서 그렇네. 각 사람이 갖고 있는 수가 엄청 많거든.

그리고 같은 수가 하나도 없는 거야.

만약 어떤 사람을 이루고 있는 수가 같다면 같은 사람일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지.

누구나 매일 매 순간 갖게 되는 숫자가 다르니까 절대 같은 수를 지닐 수는 없어.’


숫자가 다르면 왜 다른 사람이 될까?

그건 그 사람이 어떠한 숫자를 지니는가에 따라 펼쳐지는 이야기가 달라서이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로 21년을 살아왔다. 만약 같은 21년을 교사가 아닌 작가로 살았다면 어땠을까?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의식의 크기’, ‘삶을 대하는 태도’, ‘상상력의 범위’를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과 하루를 씨름하는 대신, 글과 책을 붙잡고 분투하며 또 다른 모습으로 자라났을 것이다.


또 내 아이들은 어떤가. 아들 딸 1명씩이 아니라, 딸이 2명 있다거나, 아들만 2명 있다거나 하다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질 테다. 딸이 태어나며 세상이 위험한 곳으로 보였고, 아들이 태어나며 세상은 호기심 가득한 곳으로 보였다. 또, 순서가 바뀌어도 마찬가지다. 딸 1 아들 1이 아니라 아들 1 딸 1이면 나는 지금 같은 엄마가 되어 있었을까?


커피 3잔은 어떤가. 오늘 하루 만에도 커피를 3잔이나 마셨기에 지금 이렇게 말똥하게 글을 쓰고 있고 오히려 밤에 잠은 올까 걱정되지만, 알코올 3잔이라면 기분 좋게 취해서 벌써 꿈나라에 갔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내가 가진 숫자들이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숫자가 달라지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러니 숫자가 곧 나 자신이라고 말해도, 그리 큰 비약은 아닐 것이다.
삶은 수많은 숫자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이왕이면 더 좋은 숫자로 내 삶을 채우고 싶다.

예를 들면 오늘 크게 웃은 횟수, 하늘이나 나무를 올려다본 시간,
깊이 이해하며 넘긴 책장의 수, 천천히 나를 느끼며 들이쉰 숨과 내쉰 숨의 숫자.


그런 숫자들로 내 하루가 채워진다면,

나는 어쩌면 조금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숫자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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