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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장애아의 부모로
산다는 것

목소리가 커야한다

내가 14년간 장애아동을 키우면서 배운건 첫째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는 것 불편하고 힘든것을 무조건 감수하지말고 소리를 내어서 시정해달라고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 하자는것이다. 처음에는 대답없는 에코만 들릴지라도 결국에는 하늘은 내 소리를 듣는다.



어제오늘 있었던 일 


아침부터 교육청 병무청 담당자와 통화를 했다. 한동안 그들과 통화할 일일 없어서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또 일어났다. 어젯밤부터 또 심기가 불편했고 동이 트자마자 다시 담당자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그리고 늘 한참을 열 분을 내면서 이야기 후 돌아오는 반응들. "참 힘드셨겠어요. 어머님 마음 이해합니다. 사태를 알아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들의 이 형식적인 대답에 이제는 적응도 되었을 텐데 아직도 기대하고 기다리는 난 여전히 아이 엄마 맞나 보다. 그리고 또 나는 그들의 기약 없는 답을 계속 기다린다. 




목소리를 키우자 


장애아이를 키우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어찌어찌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결하고 14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느낀 것들 중 하나가 목소리가 커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약자들은 목소리가 작고 자기의 의견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늘 목소리 크고 강한 자에게 눌리고 상처 받는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선 우선 크게 정확하게 내 의견을 말해야지 상대방이 조금이나마 들어준다는 것을 아이를 키우면서 배워 왔다. 혼자 열 내고 혼자 울고 혼자 속상해하면 뭐하나 나만 화나고 슬프고 힘들다. 특히 그런 결과가 내가 장애 아이를 키우는 주변 상황에 의한 것이라면 더욱 크게 말하고 말해야 한다. 살면서 남에겐 피해를 준 적 없고  내가 잘못한 것 없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처음 아이의 장애진단을 받았을 때 내가 겪은 감정이었다. 밤마다 울고 자책하고 또 웃다가 울다가 그렇게 밤을 보냈었다. 지난번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첫 방송 출연하고 전문가들을 만나 나에 대해 공개하고 실질적인 팁을 얻고 좋아졌다 생각했었지만 불쑥불쑥 힘든 상황에 봉착하면 그냥 다 놓고 싶다 그런 자포자기 마음이 든 적도 있었다. 그래도 아이 앞에서는 최소한 안 그려려고 했는데 또 현실은 나를 그냥 두지 않는다. 



남다른 초등 졸업 


6년을 집 앞 초등학교를 두고 차를 타고 15-20분 거리의 초등학교로 등하교했다. 그렇게 졸업한 학교여서 아이의 초등 졸업은 더 뜻깊었고 4번의 대수술, 3개월의 입원, 중환자실 입원 퇴원을 거쳐 혼자 앉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지만 늘 밝은 아이를 보면서 그래도 난 성공한 인생이야. 아이를 잘 키웠잖아. 남들이 말하는 성공은 모르겠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아프지만 정신적으로 건강한 아이를 이리 잘 키웠으니 잘했어. 스스로를 칭찬하고 위로한다. 그런 기간 동안 정신적으로 성장한 건 사실이지만 나도 가끔은 우울하다. 그리고 외롭다. 늘 혼자 고민하고 혼자 해결하고 혼자 또 웃고 칭찬하고 오늘도 또 혼자 이러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있겠지.  





겨우 입학한 중학교 


아이가 초등 입학 시에는 장애인 법을 몰라서 그냥 학교에서 특수학급이 없어서 입학이 안된다고 하면 그냥 안되는지 알았다.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장애인 법을 알게 되니 지체장애자는 근거리 학교에 배치되어야 하고 그러지 못할 경우 정당한 절차로 요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몰라서 6년을 힘들게 타 지역으로 초등을 다니고 중등은 집 앞 학교에 꼭 배치받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준비했다.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에 근거하여 가장 근거리인 판교 중학교에 아이 입학을 문의를 하였다. 당연히 첫 반응은 특수학급이 없어서 불가하다. 는 것이었다. 법 이야기를 하니 그와 별개로 시설이 없어서 힘들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중학교 상위 관청인 교육청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상황을 이야기하니 특수지원센터 관할이라면서 거기 담당 장학사랑 이야기를 하련다. 장학사에게 연락을 했고 또다시 이야기했다. 앵무새처럼 같은 이야기만 3번째 반복이다. 들어줄 수 있다면 몇 번 의 반복도 할 수 있다. 그리고는 성남시의원 또는 경기도의원과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또 물어물어 그 당시 의원님과 통화가 되고 ( 그래도 연락을 취하려는 의지가 있으니 되더라) 그 부분을 말씀드리고 특수반 설치에 대한 희망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이후 결국 아이는 2020년 3월 판교중학교 입학이 결정되어 기다리던 통보를 받게 되었다.  



중학생이 되다 


COVID-19 심해져서 아이는 정식 입학식은 못했지만 중학생이 되었다. 증명사진도 찍었고 교복도 맞추고 입학식은 못했어도 실감이 났다. "엄마, 초등학교 언제가"에서 벌써 중학생이 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 엄마는 육아에서 퇴직하여 보다 본인의 개인적인 발전을 위해 살게 되는 기회를 얻는 다고 하던데 나의 상황은 반대로 더욱 커지고 무거워진 아이로 인해 육아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졌다. 단순히 중학생이 되어 좋다 라기보다는 앞으로 더욱 아이를 성인으로 까지 키워야 하는 책임감이 커졌다. 또한 눈에 보일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는 아이의 건강에 조금씩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날이 다가옴을 느끼고 있었다. 




중학생 그 후 1년 


아이는 입학 후 일 년이 지나 2021년 2학년이 되었다. 1학년 때도 많은 선생님들의 따뜻한 보살핌 덕분으로 무사히 잘 보내고 2학년에도 좋아하는 음악 선생님이 담임을 맡으셨다. 아이는 학교를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하고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라서 중 2병 없이 잘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갑자기 2월 작년에 맡아주신 특수 선생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당신 아이가 초등에 입학해서 1년간 휴직을 하신다고 했다. 이해는 되었지만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선생님께서 좋은 선생님을 뽑아 두셨다고 하여 불안한 마음을 잡고 새로운 선생님을 보니 마음이 좀 놓였다. 


그러나  또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다 


입학부터 아이 속옷이 매번 젖어왔다. 퇴근 후 집에 오면 화장실에 아이 속옷이 계속 걸려있어 물어보니 도와주는 공익 복무요원( 공익이라 부르겠음) 이 소변 후 제대로 처리를 안 해줘서 그랬다고 했다. 기본적인 케어인데 안되고 있어서 학교에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또 형식적인 대답 더욱 신경 쓰겠다는...... 하지만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공익은 더 아이에게 제대로 못하냐고  소리 지르고 더욱 자기 일에 태만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공익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일 년 계약직 특수교사였다. 본인도 본인의 일이 아니라고 방관했다. 말로만 시정하겠다고 했다.  결국은 소변 시 아이 허리를 앞으로 확 해서 아이가 허리가 아프다고 그제부터 고통을 호소했다. 또 물어보니 공익이 쉬할 때 "똑바로 못해 "하면서 허리를 좀 다쳤다고 했다. 학교에 또 이야기를 했고 특수교사는 문자를 보내왔다.  



이렇게 내게 문자를 보내고 9시경에 80이 다 된 친정엄마에게 연락을 하여 따지듯이 아이랑 대질하라면서 화를 낸 채 전화를 했고 친정엄마 아빠는 내게 알리지 않고 학교로 가셔서 교장선생님과 면담까지 하고 왔다고 했다. 퇴근 후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는 분개했다. 내게 했던 태도와 우리 아이 부모님께 한 태도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다시 목소리를 크게 내었다.  교육청 병무청에서 전화를 하고 담당자 통화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키워서 내가 겪은 불평등과 불편함을 호소하고 시정을 요청했으며 담당자들이 직접 학교에 가서 사건 확인후 연락을 주기로 했다.  나는 지금 그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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