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연습용으로 썼던 단편 소설입니다.)
한낮의 따뜻한 모든 것들이 어둠으로 들어가는 시간, 스치우는 바람이 찬데도, 크리스마스 이브의 낭만에 젖은 사람들은 개의치 않는 듯 북적인다. 거리 가득 울리는 캐럴과 커다란 트리. 그리고, 그 모든 밝음과 동떨어진 남자가 있다.
M군(남, 34세)은 식탁에 갈색 곱슬머리를 처박고 눈을 끔뻑끔뻑 뜬다. 단출한 식탁 위에 케이크가 있다. 케이크는 정작 얼마 먹지 못하고 방치한 듯했다. 엉성하게 잘린 케이크 단면은 생크림으로 지저분하고, 모양은 일그러졌다. 분명 꼭대기 위에 정갈하게 장식되었을 딸기와, 설탕으로 만들어진 산타는 바닥을 기고 있다.
데구루루. 와인병이 식탁 위를 구르다, 케이크에 닿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춘다. 병에 묻은 생크림과 흘러나온 와인이 식탁보를 더럽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살짝 졸린 듯 나른한 인상의 남자는 시선을 오롯이 텔레비전에 둔다. 1960년대 고전 로맨스 영화 속 재즈가 흘러나온다.
남자는 왜 먹지도 않을 케이크를 사 왔을까.
적막한 집 밖은 얇은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람들의 웃음소리 따위로 가득하다. 분명, 날이 찬데도 따뜻한 온기로 충만하다. 그에 비하면, 남자의 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고, 그는 필히 그 싸늘함에 몸서리가 쳐졌으리라. 남자는 어떻게든 그 세계 속에 자신도 속하고 싶어, 무작정 옷자락을 여미고 나왔지만, 정작 뭘 해야 할지 몰라 그 거리에 혼란스럽고 실뚱머룩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러다, 다들 크리스마스 케이크 한 상자씩 든 그 모습에, 무작정 동네 제과점에 들어갔다. 달콤한 케이크들이 즐비한 진열장 유리창에 비친, 보풀이 일어난 모직 코트 하나 걸친 행색은 초라했다.
단출한 식탁 위에 케이크가 있다. 남자는 문득 뒤늦게 생각이 났다. 자신은 단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케이크를 산들, 함께 먹을 사람도 없는데.
입을 대다 만, 뭉크러진 동네 빵집의 싸구려 케이크는 어쩐지 그와 닮은 듯해 보였다.
똑똑,
불현듯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라고 중얼거린 남자는 비척비척 일어나 문을 연다. 열린 문에는 그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여자가 서 있다.
“Greetings. 오랜만이네요, M군.”
남자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어... 하는 얼빠진 소리가 난다. 여자는 취기에 헛것을 보나 싶어 눈가를 비비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방긋 웃는다. 이쪽은 C양(여, 30세). M군의 전 여자 친구다.
“일단은 들어와요.”
남자는 문에서 비켜서 여자가 들어갈 공간을 만든다. 여자의 남색 반드러운 머릿결이 스치며, 향기가 났다.
C양의 눈에 어수선한 거실과, 부엌 식탁 위 다 무너진 케이크와 굴러다니는 와인병이 비친다.
이미 다 들킨 치부를 감추려는 듯 허둥지둥하는 남자의 꼴이 우습다. 그 요란한 움직임에, 여자는 말한다.
“그쯤 해둬요. 우리가 서로 격식 차릴 사이인가.”
평온한 어조의 그 말에 그제야 안정을 찾은 듯, 남자는 어색하게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말한다.
“그런데 제가 집에 없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불쑥 찾아왔대요. 집에 있어서 다행이지만...”
“받지 않는 전화를 3번이나 걸면 사랑이게요?”
확인해 보니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있었다. 여자는 이어서 말했다.
“집에 없었어도 상관없었을 거예요. 그냥, 정말... 단지 지나가던 길에 들른 거였으니까. 그래도, 얼굴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C양의 목소리와 채 꺼지지 않은 텔레비전에서 날 선 오드리 헵번의 목소리가 겹친다. 여자는 의아한 목소리로 묻는다.
“무슨 영화죠? 옛날 영화 같은데.”
“《티파니에서 아침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예요.”
“그랬나요?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 것 치곤,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 말 안 했어요. 말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몰라요. 음, 음. 사실, 이 영화는 어느 볕 좋은 날, 창밖엔 감미로운 미풍이 불고, 햇볕에 잘 마른 옷에선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고ㅡ 그런 평화로운 날에요, 당신과 소파에 앉아 보고 싶었어요.”
남자의 말에, 여자는 조금 놀란 듯한 눈치다. 남자는 씁쓸한 어조로 말을 잇는다.
“고전 로맨스 영화도 나름 볼만하지 않은가요, 하는 시답잖은 감상평이나 농담 따위를 하면서요.
엔딩 크래딧이 올라갈 즈음에, 나는 당신에게 사실 이 영화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였노라고,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었더랬죠.
..... 그 좋은 날을 고르고, 또 고르다 결국 오늘이 됐네요.”
여자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가만있었다. M군의 고백 같지 않은 고백이 낯간지러워서일까. 아니면, C양 역시 그가 상상했던 평온한 순간을 같이 그려보고 있던 것일까. 적막한 두 사람의 틈을 비집듯, 영화 속 대사가 울려 퍼진다.
홀리: 난 홀리도 룰라메이도 아니에요. 난 내가 누군지 몰라요. 난 이 고양이처럼 이름도 없고 누구의 소유도 아니에요. 우린 서로 소유하지 않아요.
폴: 뭐가 잘못된 줄 알아? 이름 없는 아가씨. 당신은 비겁해, 용기가 없어. 당당히 고개를 들고 ‘인생은 사실이다.’ 하기 무서운 거야.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속하는 거야. 그게 유일한 행복의 기회니까.
여자는 사랑 고백을 보기 좋게 거절당한 폴이 택시비를 내고 차를 멈추는 것을 바라본다. 여자는 말했다.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분명 저도 좋아했을 거예요. 그보다 여전하네요. 로맨스 영화 좋아하는 건.”
“통속적이고, 오랜 시간 반복된 레퍼토리에 진부해진 구식 멜로영화 같은 거. 난 그런 게 좋더라고요.”
남자는 겸손하게 눈을 내리깔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윽고, 조금은 어색하고 멋쩍기도 했지만, 둘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암묵적 합의로, 과거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특히, 헤어지던 날에 대한 일은 거의 금기에 가까웠다.
겨울에 시작했던 그들의 연애는 계절이 돌고 돌아, 다시 겨울이 찾아왔을 때, 끝났다. 그렇게 둘은 이별했다. 두 사람은 울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남자는 문득 신발이 거슬렸다. 일전에 C양과 맞춘 커플 신발이었다. 분명, 서로 데이트할 때만 신기로 약속했던 신발이 헤져있는 것을 본다. 그것은 그들의 오랜 연애의 물질화였다. 코가 닳은 신발을 괜히 질질 끌던 남자의 눈에 의류 수거함이 보였다. 의류 수거함 옆에는 누군가 만들어 둔 눈사람이 있었다.
M군은 눈사람 앞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었다. 신발을 선물하면, 그 신발을 신고 떠나버린다는 속설이 있다. 그렇다면, 이 눈사람도 봄을 피해 도망쳤으면 싶었다. 녹지 않게, 영원히 겨울 속을 부유하며.
신발을 벗고서야, 양말을 신고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맨발로 눈을 밟는 기분이 낯설었다. 바닥이 너무 차가워 되레 뜨겁게 느껴졌다. 뛰었다. 무대 위에서 역동적인 군무를 추며, 발레리나를 들어 올리던 발레리노였던 시절이 스쳐 지나간다. C양의 올곧은 눈과 반드러운 남색 머릿결이라던가, 여자와 나른한 오후에 함께 춤을 추다 얼굴을 맞대고 웃었던 일이, 어느 겨울날의 고백과 어느 겨울날의 이별도. 과거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렇게 뛰지 않아도, 쫓아냈던 과거는 다시 도래하지 않는데, 남자는 지향 없이 거리를 방황했다.
연인 사이에 신발 선물은 이별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헤어진 일은 모두 신발 탓으로 돌리고 아무렴 편해지고 싶었다.
땀으로 젖은 목덜미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었고, 목에선 피 맛이 났다. 남자는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땀인지 눈물인지로 뒤범벅된 얼굴을 손등으로 묵묵히 문질렀다. 발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동상이었다.
그런데, 녹지 않기 위해, 발 디딜 곳 없이 계속 겨울을 방황하는 눈사람은 과연 행복할까.
집이 추운 듯, 여자는 몸을 움츠린다. C양은 오랜 시간, 그림을 그리는 일로 라운드숄더였다. 말린 어깨와 약간 굽은 등은 마른 체구가 더욱 가냘파 보이게 했다.
화가인 여자는 종종 남자를 그렸다. M군은 여자의 눈이 좋았다. 그 앞에 서면, 은퇴 이후, 마땅히 제 쓸모를 찾지 못한 발레리노 대신, 한 화가의 모델로, 여자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는 존재가 된다.
C양과 눈을 맞추고 있자면, 남자는 더 이상 무대가 그립지 않았다.
M군의 헝클어진 머리를 다정히 정돈해주다가, 푹 파인 보조개와 개구진 미소를 보고 사랑스럽다는 듯이 웃다가 입을 맞추기도 했다. 한창 좋을 때의 두 사람이었다.
섹스 후, 여자는 새우처럼 몸을 구부린다. M군은 그 모습에서 C양의 내부 깊숙한 곳에 우울이 깃들어 있으리라 짐작했지만, 짐작뿐이었다. 여자는 기꺼이 다리를 벌렸으나,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여는 것은 할 수 없었고,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상대의 마음을 연다는 것은, 자신 또한 마음을 열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M군은 자신의 마음을 열고, 누군가와 진정한 관계를 맺기엔 용기가 없었다. 누군가 자신의 내밀한 곳에 침입해 그것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꺼림직했고, 또, 자신이 누군가의 내밀한 곳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무서웠다. 그걸 공연히 들여다봐, 서로 실망하고, 관계가 어그러질까 봐 진심으로 두려웠다.
그렇기에, 남자는 여자의 표면만을 어루만졌을 뿐이고, 그 내실까진 몰랐다. 끝끝내 그 우울과 이따금 보이는 고독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보기 위해 완벽한 날을 고르다가, 결국 보지 못한 일과 비슷하다.
헤어진 이후, 관심이 갔던 사람은 있었다. 잠시였지만. 그런데, 그 사람은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다. 꼬시기도, 단념하기도, 애매하던 차에, M군은 깨달았다.
단순한 호감이 아니라, C양과의 관계에 관한 상처를 새로운 사람으로 치유하고 싶었다는 것을. 새로운 여자에게 가엾은 남자 취급받으며, 안정적으로 사랑받고 싶다는 그 알량한 욕망을.
남자는 충격받았다. 그리고, 점잖은 척 마음을 삭이고, 그냥 자신의 할 일을 열심히 했다. 실없이 실망하며, 습관처럼 과거를 곱씹는 일 말이다. 그랬더니 마음이 멀어지더랬다.
“M군!”
사색에 잠겨있던 남자는 깜짝 놀라 여자를 바라본다.
“M군, 많이 취했어요? 아까부터 사람이 좀 멍한 것 같아요.”
여자에게 닿아있는 남자의 시선은 여전히 애정이 서려 있고 묘하게 슬픈 듯 보이기까지 했다.
“하하, 기억나요. C양? 당신이 전에 소파에 커피를 쏟았을 때 말이에요.”
여자는 갑작스러운 남자의 말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댄다.
“그때 미안하다면서 새로 사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내가 걱정마요, 지워지겠죠, 했었죠. 근데 그거, 소파가 베이지색이라 그런지 잘 안 지워지더라고요. ”
오른손 넷째 손가락에 남은 반지 자국처럼 더께 앉아 털어내기 힘든 미련, 후회, 그리움으로 점철된 낯짝이 부끄러워 남자는 고개를 숙인다.
“나, 아직도 가끔은 그 소파에 앉아있어요. 왜, 그냥... 그러고있는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사랑은, 한때는 입속을 가득 채우는 달콤한 순간이 지나고 나면,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가 되고 말, 그가 사 온 동네 빵집의 싸구려 케이크와 같다. 때가 있다는 말이다.
‘사랑해요.’
때를 놓친 그 말이 목에서 윙윙댄다. 당장 드러내 버리면 차라리 편해질지 모르겠으나, 토해낼 수도 없게 일렁여, 참담하다. 고장 난 테이프처럼 계속 몇 년 전의 기억만을 되풀이하며 후회하는 부질없는 인생. 마음을 열지 못했기에, 상대의 마음도 들여보지 못했던 것이 사무치지만, 막상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그때는 할 수 있을런지 자신할 수 없는 한심한 남자.
한참 동안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없다가, 겨우 한 마디 내뱉는다.
“아, 진짜 바보 같아.”
남자는 무안한 듯 웃다가 훌쩍인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달래며 고조곤히 말한다.
“울지 마요, M군. 크리스마스잖아요. 울지 말아요...”
*
...색색, 작은 숨소리가 들린다. M군이 식탁에서 잠이 든 모양이다. 남자의 휴대폰 속 부재중 전화는 없다. 그렇다, 두 사람의 재회는 없던 일이다. 모두 꾸며진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것이 남자의 어름어름한 꿈속은 아니옵고, 그저 가엾은 M군에게, 작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일어나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일 뿐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고, 찾아오지도 않았으니 이런 가정 따위는 무의미하다.
기적은 없었다. 햇빛은 매일 건물 사이로 비쳐 들어오지만, C양은 아니었다. 이곳은 지독한 고독뿐.
그러니, 굿바이.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은 없었지만, 둘에게 더 이상 인내하는 사랑은 없을 것이요. 당장 후회가 괴롭겠으나, 우리 모두 누군가의 파편이니 그 또한 언젠가는 C양의 파편을 가진 이를 만날 것이니.
굿바이. 굿바이.
***
한기가 살갗을 타고 올라오자, 밤이 깊었다는 것을 알았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혼곤한 잠에서 깨어나니 묘하게 가슴이 울렁였다. 집 안의 침묵은 끔찍할 정도로 허전하여, 새삼 낯설었다.
불현듯 찾아오는 순간들이 있다. 단순한 취기로 상기되는 것이 아닌, 아무 이유 없이 재생되는 순간들이.
한때, C양이 사랑했을 선한 눈빛, 순박함, 열정의 영롱함으로 반짝이던 청년은 저 멀리, 아득한 곳으로 뛰어가고, 아늑하고 평화로운 어릴 적 순간이 도래한다.
냉랭한 방이 아니라 온기로 가득한 너른 집이 있다. 굴뚝으로 들어와 선물을 놓고 간다는 산타가 굴뚝 없는 우리 집엔 어떻게 들어오냐며, 직접 묻겠다던 천진한 얼굴을 한 과거의 내 모습을 그저 우두망찰 건너다보았다.
섹스도, 사랑도, 애달픔도, 절망도, 아무것도 몰랐기에 순수할 수 있었던 그때. 잃어버린 그 시절의 순수성이 그리워서, 행복한 그 모습이 어쩐지 미워서, 볼을 꼬집고 싶다가도 또 진실도, 사랑도, 괴로움도, 인생도 아무래도 좋았던 그때가 가슴 저미도록 그리웠다. 애틋했다.
나는 그때의 산타를 한 번 더 만나고 싶어, 취기로 졸린 듯 나른해진 눈꺼풀이 두 눈을 가려도 꿋꿋이 창문을 바라보았다. 자정이 지났다. 끝내 산타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산타를 기다리는 일을 그만두었다.
-END-